선화공주의 언니이자 신라 첫 여성 임금인 선덕여왕은 지혜가 남달랐다고 하죠
<<삼국유사>>2 기이紀異1 <선덕왕이 세 가지 일의 기미를 알아채다善德王知幾三事> 곳에
아주 잘 나타나 있지요
그런데, 예전 sbs의 드라마 서동요를 보면서 문득 느낀 점이 있어서
몇 자 적어볼 요량으로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었지요
먼저, 서동요에서는 선화공주의 언니이자 장차 임금이 될 덕만공주(선덕여왕의 이름)가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고, 천명공주 만이 드러나고 있지요
그런데 이 천명공주의 존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보이지 않고
아직 진위 여부의 논란이 많은 <<화랑세기>>(이종욱 역주해 원문교감 1999, 조합공동체 소나무)에서만 보이고 있지요
게다가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이 진평왕의 장녀로 되어 있는데, <<화랑세기>>에서는 이 천명공주가 장녀로 나오고 있답니다
또한, 천명공주는 그의 아버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음에도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하면서 성골 신분을 포기하고 진골로 남은 생을 산 것으로 나오고 있지요
더욱이 천명공주가 출궁한 까닭에는 뒷날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공龍春公의 형인
용수공龍授公과 혼인을 하였지만, 천명공주의 마음은 용춘공으로 쏠렸다는 데에서 찾는 듯해요
천명공주는 선덕공주가 자라면서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을 지녀
임금의 자리를 이을 만하였고, 이에 진평왕은 용춘공에 마음을 두고선
천명공주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는데,
이에 천명공주는 용춘공의 설득과 효심으로 순종하였다고 하네요
그 뒤 선덕여왕이 임금이 되고 용춘공을 지아비로 삼았는데,
용춘공이 이를 간곡히 거부하고, 그 뒤 천명공주는 용춘공의 처가 되었다고 하네요
(이종욱 역주해 원문교감 1999 <<화랑세기>> 13세 용춘공, 145-7쪽)
둘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삼국사기>>에서 선덕여왕은 남편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지요
<<삼국유사>>1 <왕력王曆>에서는 '음갈문왕飮葛文王'이 남편(王之匹)인 것으로 되어 있고요
그런데 <<화랑세기>>에서는 선덕공주가 임금으로 즉위하고는 용춘공을 지아비로 삼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용춘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고,
이에 관료들이 모여 삼서三?의 제도를 의논하여 흠반공欽飯公과 을제공乙祭公으로 하여금
선덕여왕을 보좌(副)하도록 하였다고 하네요
(이종욱 역주해 원문교감 1999<<화랑세기>> 13세 용춘공, 147쪽)
글자의 비슷함으로 볼 때 <<삼국유사>>의 음갈문왕은
아마도 <<화랑세기>>의 흠반공인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천명공주 이야기와 선덕여왕의 배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막상 제목에 올린 <선덕여왕과 삼색 모란꽃>이야기를 이제야 하게 되었네요
그러니까 선덕여왕이 아직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을 무렵
당唐 태종이 꽃씨 석 되와 함께 보낸 붉고 자줏빛이 나며 흰 삼색 모란꽃 그림을 보자
공주는 바로 '이 꽃에는 정말로 향기가 없네요(此花定無香).' 하였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 꽃씨를 심어 피우게 하였더니 정말로 향기가 나지 않더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삼국유사>>의 지은이는 이 삼색 꽃을 아래 그림에서 보이듯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으로 비유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화랑세기>>와 서동요를 보면서 문득 이 세 빛깔의 모란꽃이
진평왕의 세 공주를 비유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바로 천명, 덕만, 선화공주가 바로 그 모란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 태종의 밝은 헤아림(唐帝以有懸解之明)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요
<<삼국유사>>의 지은이는 제목으로는 선덕여왕의 똑똑함을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당 태종을 한껏 높히려는 의도가 보인다고 생각해요
당 태종이 그렇게 신비로운 임금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당대 진평왕의 세 딸에 비유한 그림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더 진실에 가까울 듯한 느낌이 드네요
하늘로부터 옥대까지 받은 진평왕이지만, 끝내 사내를 얻지 못한 그였기에
덕만공주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요
또한 그 뒤를 이어 진평왕의 같은 어머니 동생(母弟)
국반國飯(또는 국분國芬 <<삼국유사>>에서는 '국기안國其安') 갈문왕의 딸인
승만勝曼이 풍만하고 고우며, 7척 키에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임금이 되어 진덕여왕이 되지요
(<<삼국사기>>5 <신라본기>5 ; <<삼국유사>>1 <왕력>)
그런 뒤 237년이나 지나고
그 사이 바뀐 임금만도 스물 둘이나 되는
9세기 말의 진성여왕을
당 태종이 모란꽃과 그의 밝은 헤아림에 비유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네요
고구리高句麗를 먹어보려는 욕심에 장마철을 무릎쓰고 요동벌을 헤메이다
안시성에서 양만춘에게 화살을 눈에 맞고는
끝내 그 후유증으로 숟가락 놓고 북망산으로 간
당태종에게서 밝은 헤아림을 찾는다는 것이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리겠어요
아래 그림은 <삼국유사>의 삼색 모란꽃 이야기의 원문이어요
첫댓글 향기없는 모란씨 서되에 대해서는 소생이 이미 분석한 바 있거니와, 나의 주장 핵심은 씨(種) 서되를 뿌려도 향기없는 꽃만 피었다 함은 선덕여왕이 사내 3명을 들이고도 후사를 위한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공주 3명을 상징화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 선덕을 주인공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님의 아름다운 지적 고맙습니다. 진평왕을 빗대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선덕여왕의 사내가 셋이라... <화랑세기>에서 말하는 '삼서제'를 뜻하는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