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4월 30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처음부터 그리고 다시 새로운 기준!
본문 : 사도행전 4장 19절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새번역>
2019년도에 전 세계를 강타한 한국 영화가 한 편 있었습니다. 제작비가 무려 135억원이나 들어간다고 했을 때는 제작비를 손해 보지 않을 손익분기점은 넘길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 넘어 버렸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카데미상이라고도 불리고 오스카상이라고도 불리는 영화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외국어 영화상, 각본상을 받으며 4관왕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한국 최초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흥행수익은 무려 2억 6천만 달러로 한국 돈으로 약 3480억 정도입니다. 정말 대박난 이 영화, 바로 ‘기생충’이었습니다. 물론 단순히 금전적인 대박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도 이 사회에 던져 준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보고 나서 꽤 오랜 시간동안 묵상을 하며 영화를 곱씹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저를 힘들게 했던 한 가지 대사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바로 이선균 배우가 말한 “내가 원래 선을 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데”입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너무도 불편했습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너무도 지독한 현실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계급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점점 이기적이고 개인적으로 흘러가는 시대상의 ‘기준’처럼 느껴졌기에, ‘세상’이라는 공동체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독생자 아들까지도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그 사랑을 이 땅의 모든 선을 넘어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거운 부담감이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선을 넘다!’ 이 말이 너무도 큰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믿음이 왜 이렇게 더디게 성장하는 줄 아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대답들이 나왔지만 결국은 하나로 답이 모아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도 방금 이 대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라고 하는 철옹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도 결코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원래 선을 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데!” 라고 말하며 믿음은 가지고 싶지만 변화는 하고 싶지 않은 진짜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 성의 주인은 나여야 하고, 왕의 자리는 내가 있어야 하는데, 성의 주인 자리를 양보하고, 왕의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니 도무지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선을 그어놓고 절대 넘어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어린 시절 책상 가운데에 선을 긋고 절대 넘어오지 말라고 하던 그 마음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도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 당연히 믿음의 성장은 더디거나 정체되거나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 노래 가사가 딱 어울리지 않습니까? 원래는 시인과 촌장이란 팀에서 하덕규 집사님이 먼저 불렀고, 조성모씨가 리메이크해서 더 널리 알려진 ‘가시나무’ 란 곡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그런데 계속해서 묵상을 이어가던 중 한 가지 완전히 다른 생각이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야말로 이 대사를 하신 가장 최초의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선을 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급하게 창세기를 펼쳤고, 검색 프로그램을 이용해 검색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맞았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 대사를 하신 최초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벌써 창세기 1장부터 이 대사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장 4,10,12,18,21,25,31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좋은 세상이 아니라 창조주의 눈으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계셨습니다. 처음부터 분명한 기준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분명한 기준은 ‘하나님’ 본인이셨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을 찾아 떠나는 믿음의 여정은 철저히 ‘하나님’의 기준으로부터 시작해야만 그나마 출발선에라도 설 수 있다는 것을 창세기 1장부터 우리에게 이미 보여 주고 계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로 하나님의 대사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은 너무나 썩어 있었다.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창세기 6장 11절, 공동번역>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은 아담과 하와로 시작된 인간의 범죄와 가인을 필두로 한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성경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의 후회를 기록하기까지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창세기 6장 5~6절, 새번역>
그리고 등장했던 사건이 바로 ‘노아의 방주’였습니다. 하나님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건이었고, 다시금 세상의 기준을 올바르게 세우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징계라고 이야기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잔인한 하나님이라고도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럴거면 차라리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더더욱 그 영화 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내버려 두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악이, 보시기에 좋았던 사람들을, 세상을 악하게 만들어 가는 것을 두고 보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에 있었던 그 기준, ‘하나님’이란 기준으로 돌리신 사건이 바로 ‘노아의 방주’ 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었고, 창조주의 눈물의 사건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 이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그 깊고 넓은 계획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이유를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지혜롭다고 하는 솔로몬조차도 전도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서,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뜻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그 뜻을 찾지 못한다. 혹 지혜 있는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도 정말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전도서 8장 17절, 새번역>
그래서 처음 시작부터 ‘기준’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것이 분명하고 확실한 기준이었습니다. 이 기준을 통해서 모든 역사는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영어로 His Story, ‘History’,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인간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스스로가 보기에 좋은 것만을 남기고, 보기 싫은 것은 쳐다도 보지 않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의 기준으로 볼 때 좋은 것이라면 언제든 곁에 두고, 자신의 기준에 좋지 않은 것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멀리합니다. 우리 역시 ‘내가 보기에’ 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기준이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면, 이 땅의 창조주이시며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기준은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어노인팅 찬양 중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제목을 듣고 아멘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이 찬양의 제목부터 싫어서 듣기도 싫어합니다. 저는 사실 후자였습니다. 물론 가사를 보면서 어떤 내용인지 알고 너무도 좋은 찬양인지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 제목 그 자체로는 겸손처럼 보이지 않았고, 신앙고백처럼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가지 오해를 없애기 위해 이 찬양의 제목을 이렇게 바꾸어서 기억합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저에게 더 와 닿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오늘 함께 불렀던 찬송가 292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라는 곡도 그냥 노래가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준이시기에, 하나님이 보시기 좋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이기에, 과감히 내 기준을 포기하고, 과감히 내 중심의 삶을 내려놓고, 내 생각, 내 경험, 내 의지, 내 능력 다 포기하고 하나님으로 모든 것을 대체해 나가는 것이 믿음이기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기에, 우리는 처음부터 너무도 확실하게 보여 주셨던 기준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신앙으로 돌이키기 위해, 다시 처음 기준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너무도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기에 앞서 결코 ‘노아의 방주’ 같은 사건은 반복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창세기 8장 21절, 새번역>
첫 번째 방법은 ‘기다림’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불쌍히 여기시려고 일어나신다. <이사야 30장 18절A, 새번역>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 새번역>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끊임없는 기다림이었습니다.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셨습니다. 집 떠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문 앞에 서 있던 아버지의 마음이셨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회개의 선포’를 하게 하셨습니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요나 1장 2절, 새번역>
그 무렵에 침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마태복음 3장 1~2절, 새번역>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기다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종 아동 찾기 포스터를 들고 다니며 전국 방방곡곡을 헤집고 다니시며 자녀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말씀하시고, 선포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약속하셨던 방법을 드디어 실현시키셨습니다. 바로 독생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 새번역>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 새번역>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구원의 문을 열어주기 위해 직접 이 땅에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십자가를 지셨고, 완전히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보는 눈 앞에서 승천하셨고, 다시 오시는 것으로 그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끝을 내기 위해, 그 선포와 말씀을 통해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이들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을 통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드디어 깨닫게 된 이들의 놀라운 변화는 ‘눈여겨봄’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를 오늘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기준이었지만 잃어버리고 놓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다시금 새로운 기준으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기준과 방법과 삶으로 가득 차 있었던, 오합지졸처럼 보였던, 제자들이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놀랍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아름다운 문이라 불리는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못 걷게 된 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준 사건으로 잡혀 온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이런 고백이 등장한다니 눈여겨보게 된 변화보다 더 놀랍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사도행전 4장 19절, 새번역>
다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라는 기준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고 돌아 먼 길을 돌아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기준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고,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완전히 새롭게, 하지만 처음 만들어진 형상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존재들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이 한 마디가 너무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처음부터 있었던 기준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기준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이 대사를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나는 원래 선을 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단다.”
기생충이라는 영화에서는 계급을 설명하기 위한 대사였지만, 하나님은 분명한 기준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네.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선을 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에서 악으로 선을 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밖으로 선을 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다가 하나님 나라 밖으로 선을 넘어 가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것을 분명히 ‘죄’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죄’를 향해 선을 넘어가는 것을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 개역개정>
자꾸만 어떤 모양의 악이라도 주으러 가려고 하는 우리에게 결코 그 선을 넘지 말라고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 선이 무엇인지를 세부적이고 꼼꼼하게 분별하기 위하여, 분명히 깨닫기 위하여, ‘말씀’이라는 기준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 되도록 날마다 더욱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놓아버리는 순간, 말씀을 놓쳐버리는 순간 다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 보시기에’라는 기준을 버리고 ‘내가 보기에’라는 기준으로 옮겨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주는 방패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인가? 말씀이 기준인가?’ 결국 신앙생활은 이 명제를 통해 판가름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바로 자신의 기준과 가치와 방법을 버려야만, 온전히 부인해야만 하나님이 기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가 있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3년이란 시간동안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통해 깨닫게 되었고,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이란 기준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눈치 보던 사람들의 시선도, 두렵다고만 생각했던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의 시선도, 이제 그 누구의 시선도, ‘하나님’이라는 기준 앞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부활 전의, 성령 임재 전의 베드로와 요한이라면 벌벌 떨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베드로와 요한은 없습니다. 부활 후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All New’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통쾌한 믿음의 선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가장 그 기준을 잘 알고 있어야 할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을 위한 따끔한 질책이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사도행전 4장 19절, 새번역>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신이라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다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취하라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더 이상 하나님이란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제 그만 하나님을 버리라고! 그저 종교로만 가지고 있으라고!’ 솔직히 이런 말들에 현혹되고 넘어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하나님이란 기준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이것이 진리입니다. 처음부터 그리고 새로운 기준으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결코 이 기준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존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결국 이 기준으로 돌아온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인 삶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든 것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삶을 전해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성경은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야 합니다. <신명기 18장 13절, 새번역>
그래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이 단어를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를 다시금 가슴에 새기시고, 새롭게 시작된 부활 후의 삶에 새로운 기준으로 삼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준이었습니다.
‘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부활 이 후 시선을 ‘눈여겨봄’으로 바꾸었다면, 이제는 삶의 기준을 바꾸실 때가 왔습니다. 처음부터 그리고 새로운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이 분명하고 확실한 기준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결단 찬양 - 주께 돌아가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