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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양의 부모교육 역사
1) 17세기
17세기 초기에는 아동기가 일생의 한 독특한 시기로서 그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이 이러한 개념에 과민하게 반응하여 아동을 사랑하고 치장하고
같이 놀아주며, 유쾌하게 해주는 존재로 여겼다.
아동의 변덕스러운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일이 너무 만연되어 있어서 철학자나
교육학자들은 아동을 응석받이로 기르는 부모들에게 경고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아동기의 순수함은 보호되고 강화되어야 하고 아동양육과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부모들에게 강조하였다.
부모교육의 기원은 17세기 코메니우스(Comenius)의 ‘학교제도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아동이 성장하면서 다녀야할 학교를 6년 주기로 설명하면서,
0세에서 6세까지의 아동이 가장 첫 번째 가야할 학교의 명칭을 ‘
모친학교(mother's school)’라고 하였다.
이 시기에 교육을 주로 담당하는 사람은 가정의 어머니이며,
교육이 주로 이루어지는 장소는 바로 어머니 무릎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유아기 교육이 학교 교육의 기초가 됨을 강조하였다. 코메니우스(Comenius)는
어머니들을 위한 양육지침서 『유아학교』를 통해 어머니 무릎이 최초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학교이며 학교라는 시설을 통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아동은 또래집단과 어울려 자극을 주고받을 필요가 있으며
놀이는 아동의 생활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2) 18세기
중세 암흑시대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로크(Locke)는
“인간이 경험한 바가 모든 사상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어머니들은 아동마다의 독특한 특성과 능력을 고려하여 교육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1693년 그는 ‘교육에 대한 생각’에서 일련의 편지형식으로 부모를 위한 충고를 썼고
유아 고유의 개성을 기초로 개별 유아에 대한 적절한 교육과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를 재조명하였다.
루소(Rousseau)는 대표적인 저서 『에밀』(Emil,1762)을 통하여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는 존재이므로 아동을 양육할 때에는
그 선함이 유지되고 자연스럽게 전개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러므로 부모의 역할은 아동의 연령이나 능력에 적절한 과제를 제시해 주되
개인차를 고려하여 하고자 하는 동기가 자연스럽게 펼쳐질 수 있도록 지나친
간섭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18세기의 로크와 루소 또한 가정에서의 자녀교육을 강조하였는데
로크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백지와 같은 순수한 상태라고 주장하면서
학교교육보다 부모나 가정교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가정교육을 중시했다.
루소는 교육이란 선한 인간의 본성을 살리기 위해 자연스러운 발달을 돕는 소극적
교육이어야 하므로 어린이에게 있어서 최선의 교육방법은 종일 뛰노는 것이며
부모의 협력으로 인격의 형성과 생활의 기쁨을 맛보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여 부모역할을 역설하였다.
3) 19세기
19세기 페스탈로치(Pestallozzi), 프로벨(Froebel) 같은 교육학자들이
부모가 갖는 교육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어머니의 교육적 역할과 어머니
교육방법에 대한 지침들을 주고 있다.
페스탈로치의 경우 그의 저서 『게르트루드는 자녀를 어떻게 가르치나』에서
어머니가 자녀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고 프뢰벨의 경우
그의 『인간교육학』과 『어머니와 아기의 노래』에서 훌륭한 어머니란 자녀의
잠재력을 일깨워주는 사람임을 강조하였으며, 유희와 작업을 교육방법으로 생각하여
은물이라는 교구와 작업을 부모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구체적
사물을 통한 교육방법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린이들이 놀이를 통하여 자기들의 생각과 느낌을 자발적으로 표현하며
놀이를 자기 나름대로 잘 처리 할 줄 아는 아이들은 효율적이고 의지가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며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줄 알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녀들이 놀이를 하도록 마련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함을 강조하였고
특히 아버지는 후에 자녀의 교육에 가장 많이 직접적으로 관여할 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어린 시기의 어린이들을 교육함에 있어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되도록 일찍부터 집중해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의 영향을 받은 페스탈로치는 가정교육과 어머니 역할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여
부모교육의 어버지로 불리운다.
그는 유아가 어머니의 무릎에 앉는 순간부터 가르쳐야 하며,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를 통해 도덕 교육과 종교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 방법은 교리나 문답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자녀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가정을 벗어나기 전에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프뢰벨은 어머니가 자녀에게 들려줄 수 있는 노래와 그림, 손유희를 담은 책인
『어머니와 아기의 노래』(Mother Play and Nursery Songs with Finger Play, 1843)를 출판하였다.
그는 유아가 가지고 태어나는 신성을 강조하였으며
부모는 이 신성을 잘 계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신성을 계발하는데 있어 유희와 노작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놀잇감인 은물(gaben)을 고안하였다.
이처럼 시대적 관점으로 부모교육을 살펴 볼 때 19세기 이전의 부모교육 이론은 기독교적
또는 도덕적 훈육을 강조하는 경향이었다면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학자들은 객관적, 과학적인 방법을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부모의 자녀양육관도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던 경향에서
인격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양육방식 또한 성인중심에서 아동중심으로
또는 부모관계의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4) 20세기
서양에서 부모의 자녀 양육에 대한 이론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며
다양화․체계화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다.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규준이나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으며
그 시대의 보편적인 문화 및 가치관의 영향을 많이 받아 왔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부모-자녀 관계에 관한 이론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정신분석과 사회심리, 성격이론, 환경적 영향을 강조한 행동주의 이론 등이 발달하자
심리학계 및 교육학계에서는 이러한 이론들을 교육 현장 및 일상생활에 적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다.
프로이드(Freud)의 정신분석 이론, 에릭슨(Erikson)의 사회성 발달 이론, 피아제(Piaget)의 인지
발달 이론, 콜버그(Kohlberg)의 도덕성 발달 이론, 로저스(Rogers)의 인본주의
이론뿐만 아니라 듀이(Dewey)와 몬테소리(Montessori)의 이론들도 아동의
교육은 물론이거니와 부모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1909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백악관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아동발달 및 자녀양육 그리고 가정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1912년에는 제1회 백악관회의 결과에 따라 노동성에 아동국을 설립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부모를 위한 자녀양육에 관한 책자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 『영아양육』(infant care)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이후 1976년까지 여섯 번 개정되어 총 6천만 권이 배포되었다.
2. 우리나라 부모교육 역사
우리나라 부모교육의 역사는 우리 사회의 역사적 변천에 따라 변화하였다.
전통 사회에서는 유교적 관점을 바탕으로 가족 관계에서 모든 도덕이 시작되었고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자 효와 예를 모든 행실의 근본으로 삼아 부모교육을 실시하였다.
즉 부모와 자녀의 개인적인 관계를 떠나 신분과 가계를 위주로 자녀를 교육하였다.
전통사회는 신분제도가 엄격하고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 하여
여성들의 외출을 엄격히 제한하였기 때문에 주로 책을 통한 안방 교육이었다.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그리고 『계녀서』, 『규범』등의
서적들은 태교와 자녀양육에 관한 지침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부모교육이 조직적으로 시작된 것은 1914년 미국 선교사
브라운리(Charlotte Brownlee, 1876 1970)가 이화 유치원을 설립하여 유아 교육을 정착시켜
나가면서, 1915년부터 ‘자모회’를 조직하여 어머니들을 교육시키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브라운리를 이어 내한한 하워드(Clara Haward, 한국명:허길래)는 ‘자모회’를 통한 교육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독려로 전국의 감리교 유치원 자모회는 대부분 월례회를 개최하였으며,
당시 월례회의 내용은 목사, 의사, 간호사, 교육자 등의 강연, 놀잇감 제작, 스크랩북 제작,
유아식 요리실습, 목욕시키기 실습, 아동복 제작 워크숍 등이었다.
또한 그녀는 어머니 교육 뿐 아니라 아버지 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양친이 함께 출석하도록 지도하였다.
1941년부터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유아 교육 전공에 김애마 선생님의 주도하에
‘부모교육’이라는 학과목이 개설되기 시작하여, 유아교육학과가 설치된 대학 및 전문대학에서
부모교육은 현재 거의 전공과목으로 지정될 정도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부모교육을 위한 공식적인 사회적․국가적 지원 체제가 없고,
성인 교육이나 청소년 지도를 위한 사회 또는 평생 교육의 일환으로 부모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부모교육 프로그램으로 비교적 많이 알려진 것으로는 한국 심리 상담소의 P.E. 한국 상담 심리 센터의 A.P.T(Active Parenting Today), 청소년 대화의 광장의 E.P.T,
그리고 한국 사회교육 연구소에서 개발한 부모교육 프로그램 등이 있다.
3. 서양의 자녀 양육형태
1) 살해형(infanticidal mode)
살해형은 어린이를 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성인들이 자기 의사와 편의대로 영아를 살해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영아살해는 사회적 규범에 의해 합리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스파르타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일단 그 지역의 노인에 의해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건강하다고 인정된 아기만 선택하여 양육 및 교육을 하였다고 한다.
16세기 후에도 아이를 귀하게 다루지 않았던 증거는 많다.
기록에 의하면 16세기 프랑스 헨리4세의 남동생이 창문에서 창문으로 던져지다가 떨어져 죽었다.
그 당시 의사들은 아이를 던지는 일 때문에 뼈가 부러진 사례가 많음을 불평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간호원들은 ‘띠’를 사용하는 것을 권고했는데
이는 아이를 던질 때 편리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2) 포기ㆍ유기형(abandonment mode)
포기ㆍ유기형 양육형태는 부모가 유아의 양육을 쉽게 포기하거나 버리는
형태로 의식주의 필요는 채워주지만 심리적 필요나 욕구는 무시하는 형태로 아동의
성장발달에 대한 의식이 없던 시대에 많이 사용된 양육형태이다. 중세의 기록에 의하면
유아에 관한 일은 사회에서 처리하여야 할 여러 가지 일 중 우선순위에서 최하위였다고 한다.
카투신(Kadushin)에 의하면 16세기 전후에 유럽에는 길에 버려진 아이들이 많아서
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이는 그 당시의 심각한 사회문제였다고 한다.
또한 미성숙한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였으므로
어린이를 낳은 부모와 양육하는 성인이 따로 존재하였다고 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모유로 키우지 않음
가정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자녀는 어머니 이외의 사람이 키우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
780년 프랑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해 21,000명의 아기가 출생했으나
700명만 어머니에 의해 키워졌다고 되어 있다.
700명도 어머니와 함께 한 집에서 살았지만 모유 이외의 즙이나 죽 같은 것으로 양육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양반계급의 가정에는 반드시 ‘젖어멈’ 또는 ‘유모’가 있었다.
② 강보에 싸서 기르기
생후 1년 동안의 아기를 방치해 두면 귀를 찢거나 다리를 다치거나 성기(性器)를
만진다고생각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강보에 꼭 싸서 기르는 방법이다.
꼭꼭 묶어 놓을 뿐 아니라 벽의 못에 걸어 두기도 하였다.
이뿐 아니라 갓 태어난 아기의 피부를 튼튼하게 한다는 뜻에서 고금을 뿌렸다가
얼음물에 씻는 부족도 있었다.
3) 갈등형(ambivalent mode)
갈등형은 아기에게 잘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 잘해 주고 싶다는 본능적 욕구는 있지만
어려서부터 버릇을 잘 들이지 않으면 나중에 손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갈등을
느끼기 때문에 자녀양육에 혼선을 빚는 형태이다.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아동의 내면에는 악함, 못된 성품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모질게 다루어야 한다는 상반된 가치체계를 갖고 있으며
아동에게 잘 대하다가도 비합리적으로 엄중하게 될 수 있다.
어린이에게 유순하게 애정적으로 대하려 하지만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또는 사회적 규범이 어린 자녀에게는 엄격해야 함을 강조하기 때문에
갈등을 느끼는 형태도 여기에 속한다.
역사적으로 갈등형의 양육형태가 보편적이었던 시대는 르네상스기 전후라고 한다.
르네상스기에서 발생한 개별화 존중 및 인본주의 사상은 부모-자녀관계에도
점진적으로 변화를 주게 되어 어린이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하는 것인가,
잘 해 주어도 되는 것인가에 의문을 발생시켰던 반면 어린이의 발달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는 지극히 부족하였으며 어떤 방식으로 키워야 할지에 대한
기술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적 양육형태가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상류계층 부모들은 자녀들 다른 집으로 보내어 키우지는 않았으나
어린이들의 마음에는 악(堊)이 존재한다고 믿고 엄하고 무섭게 대하게 되었다.
어른들은 규칙적으로 도깨비 형상이나 흡혈귀로 분장하고 잠자는 어린이들을 놀래 주곤 했다.
“네가 나쁜 행동을 해서 그런 거야. 이젠 나쁜 행동을 하면 못 쓴다.
”라는 뜻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세계 최초로 유치원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했던
프뢰벨이 살던 시대(19세기)에도 주된 어린이 훈육방법은 ‘공포’로 다스리는 것이었으며
여자 아이가 놀이터에서 크게 웃는 것도 죄로 여겨졌다.
4) 엄격한 훈련형(intrusive mode)
서양의 중ㆍ상류계층 가정의 부모가 자녀를 집에서 양육하기 시작하자
예절, 습관형성, 도덕성 훈련 등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책임은 가정에서의 권력과 권위가 엄청나게 크게 부친에게 주어졌다.
19세기경까지만 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친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던
것은 역사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18세기경 서양에서는 부친의 권위는 국가의 법과 동일하여
자식을 징계, 감금, 투옥도 할 수 있었다.
어린이의 악한 성향은 어릴 때에 교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엄격한 훈련형의 기본가정이다.
이러한 아동관은 아동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의 가치관, 행동규준 등을 아동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아무리 연령이 어리다하여도 성인의 기대, 규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은
아동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아동이 문제행동을 보이는 것은
아동 자신의 성품이 본래부터 사악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5) 사회화과정 형성형(socializing mode)
어린이가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성장하려면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양육하는 형태로서, 아동이 문명화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훈련과 안내를 받아야 한다는 양육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양육형태는 18세기의 철학자, 교육자, 소아과의사, 정신분석학자,
심리학자의 이론이 전개되면서 점차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론에 힘입어 아동을 키우기 힘든 원인은 아동 내면의 본성이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적 여건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이 외부적 여건 중의 중요 원인은 부모, 그 중에서도 어머니라는 사고가 자리 잡게 되었다.
드디어 아동은 발달에 맞는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고가 성인의 기본적
양육관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이론 중에서도 정신분석학 및 심리학은 부모의 양육방식을
새로운 방향으로 변형시키는 중요 이론이 되었다.
사회화과정 형성형의 양육방식은 살해형, 포기 ․ 유기형, 갈등형,
엄격한 훈련형과는 달리 어린이의 발달을 이해하고 돕는 형태로써
양육방식의 혁명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부모-자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어린이가 아니라 부모에게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 보면 사회화과정을 형성시키는 주체는 부모이며
자녀들의 의사, 의지, 선택의 여지는 고려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녀들은 부모 특히 어머니의 양육방식에 의해 성격, 습관이 형성되는 것이지
본인 자신들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숙된 또는 이미 사회화된 존재로서의 어른들이 미성숙한 어린이들을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 및 능력 있는 인간으로 성장시켜야 할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한다는 뜻이 내재되어 있다.
어린 자녀의 사회화과정을 시키는 부모, 특히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아동관이다.
사회화과정 형성형이 우세하던 1940~1950년대 부모-자녀의 관계는 아직도 부모가
우월한 위치에 있는 수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며,
부모 특히 어머니들은 자녀양육에 대해 융통성 없이 대처하였다.
이러한 아동양육방식을 사용하던 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어린이들의 행동을 조작하려는 태도를 갖게 되었고
어린 자녀들이 문제행동을 보이게 되면
곧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죄의식을 강하게 느끼게끔 되었던 것이다.
6) 수평적 부모-자녀관계 유지형 또는 조력형
수평적 부모-자녀관계는 어린이의 의사, 권리를 존중하며 선택의 권리를 인정하는 관계이다.
환경적 요인으로서의 부모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최선을 다하나
자녀도 자기 나름대로 의사가 있으며 선택의 선호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상호작용을 하는 부모의 양육형태이다.
이는 성인이 우월한 위치에 서는 사회화과정 형성과는 달리 아동에게 기본적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인간관계는 성인과 동등하게, 수평적으로
놓고 생활해 나가는 태도이다.
사회화과정 형성의 부모는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름대로 파악해서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경향이었던 반면, 조력형의 부모는 어린이의 능력 및 솔선성을
인정하고 상호작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즉 자기의 욕구 및 필요를 자발적으로 표현해내는 어린이를 관찰한 후
그에 부응해서 도움을 주는 것이 특색이다.
부모-자녀관계를 수평적으로 인식하고 자녀를 도우려면
많은 시간, 노력, 부모 자신의 성숙이 필요하다.
자녀와 함께 놀아 주고, 생각하며 필요와 갈등을 토의하면서 전인적
발달을 돕는다는 것은 쉬운 과업이 아니다.
특히 생후 6세 이전에는 아동의 가소성(plasticity)이 높으므로 현명하게
대처하는 부모의 태도가 필요하다.
이와 같이 동등한 수준에서 자녀를 기르려면 무엇보다도 부모 자신의 자아성숙이 필요하다.
그러나 완성된 인품을 가진 부모는 드물며 어린이를 키우면서 보다
나은 인품을 가지려는 동안에 자신도 성숙하는 것이 부모됨의 보람인지도 모른다.
4. 동서양 양육형태 비교
1) 동서양 양육형태의 공통점
① 유모에 의하여 양육하였다.
과거 서양의 부모가 자녀의 양육을 농촌 가정의 유모나 유아 보호기관에 맡겼듯이
동양에서도, 특히 양반계층은 유모나 보모에게 맡겨 길렀다.
동양윤리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밝혔고 동양의
생활규범에 영향을 미친 <소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식이 나면 곧 서모(庶母)와 그 밖의 부녀자 중에서 부덕(婦德)이 있는 자를
가려서 보모(保姆)로 삼아 이를 보육하고 선도하게 했다.” ,
“여자 나이 열 살이 되면 집 문을 나가지 않는다.
보모(保姆)의 가르침을 유순하게 따르며……” 라고 기록되어 있어
양육의 책임은 부모 이외의 타인이 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② 절대적 부권사상의 지배를 받았다.
두 번째의 공통점은 서양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권위, 특히 부친의 권위가 절대적이었으며
체벌을 많이 가했다는 점이다. <
소학>을 보면 “부모께서 노하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종아리
쳐서 피가 흐르더라도 감히 원망하지 않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효도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쓰여 있고
또 “어머님의 매를 맞은 후 예전처럼 힘 있게 때리시지 않은 걸 보니
어머님의 기운이 쇠잔해지심이 아닌가 하여 슬피 울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③ 공포로 훈육하였다.
한국에서도 자녀를 훈육할 때 공포로 다스리는 경향이 있었다. “
돌굉이(도둑고양이) 온다.”던지, “망태할아버지 온다.”라던지, “순사 온다.”,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라는 말들을 많이 사용하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④ 시대의 문화ㆍ종교ㆍ정치적 제도, 사회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았다.
아동발달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과거의 서양 부모들이 잘못 양육한 점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자식을 사랑하였으며 그들 나름대로
그 시대의 기독교적 양육관에 부합하게 최선을 다했다.
동양의 부모들도 유교 및 불교사상의 지배를 받으며 양육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동서양 모두 성인 중심적 양육관이 우세하였다.
⑤ 남아선호사상이 지배적이었다.
동서양 모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교육에 차이를 두어왔다.
루소의 저서 <에밀>에서 여자는 남자를 기쁘게 하는 존재로서
교육해야 한다고 밝힌 점이나 <소학>에서 여자 나이 열 살이 되면 집 문을 나가지 않는다.
보모의 가르침을 유순하게 따르며, 삼과 모시를 잡으며, 실과 누에고치를 다스리며,
비단을 짜고 끈을 짜는 등 여자의 일을 배워서 의복을 제공하며,
제사를 살펴서 술, 초(醋), 대제기, 나무제기(祭器), 김치, 젓 등을
바쳐 예(禮)로써 어른을 거들어 존(尊)을 돕는 일을 가르친다.”
라고 밝힌 점을 보아 남자 아이는 학문, 여자 아이는 가사(家事)
담당으로 분리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 동서양 양육형태의 차이점
① 서양보다 동양이 유아에게 보다 관대하고 인간적인 편이었다.
보편적으로 동양의 부모는 서양의 부모보다 엄격성, 공격성이 적었다.
과거 서양의 양육방법이 유아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했던 것과는 달리
동양에서의 양육방법은 유아기에 자유를 많이 주는 경향이었다.
서양보다 동양이 유아에게 보다 관대하고 인간적인 편이었다.
과거에는 서양의 양육방법이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던 것에 비해
동양에서는 유아기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해주는 편이었다.
서양에서는 유아기에는 비교적 엄격하지만 성장함에 따라 자율적으로 양육하는 데
비해, 동양에서는 유아기에 비해 아동기,
청년기로 성장해 가면서 더욱 엄격해지는 경향이 있다.
아기가 태어나서 생후 1년이 될 때까지 강보에 싸서 묶어 놓아 혼자 있게끔 했던
방법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성인의 등에 업혀 있던 것은 좋은
예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띠나 포대기를 사용하여 아기를 등허리에 둘러 업었고
일본의 경우에도 띠로 묶어 업고 다녔다.
② 서양보다 동양인 태교를 중시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서양에서는 탄생과학(perinatology)이라는 학문이 발생할
정도로 임신 중의 섭생, 태아의 행동 및 발달ㆍ보호 등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태교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태교라 하여 태내교육을 매우 중요시 하였다.
소학>에서 태교를 다루고 있다.
가르치기를 잘 한다는 것은 스승에게 10년을 배우기보다 태중교육 10개월이 더 중요하다.
특히 잉태시의 부친의 청결한 마음가짐은 모친의 10개월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면서 태내발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③ 동양은 도의적 인간육성을 목표로 하였다.
페스탈로치가 ‘도덕적 품성도야’를 중요한 교육 목표로 삼았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양인은 예로부터 유교의 가르침에 힘입어 도덕적 품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왔다.
배움에 앞서 착한 행실을 갖도록 하는 것,
즉 덕이 있는 인간을 육성하여 仁에 도달하는 것이 교육의 근본이념이었다.
서양에서는 민주시민의 자질 함양과 더불어 자립정신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둔데 비해
동양에서는 유교의 영향으로 복종과 순응, 기존질서에의 도전이나 창의적 능
력보다는 아내의 도리, 자식의 도리, 신하의 도리 등과 같은 순응적인 인간교육을 강조했다.
④ 서양은 부부 중심적 양육태도를 유지해 왔던 반면
동양은 가문 중심적 양육태도를 실행하였다.
서양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강자의 중요성, 남아선호성을 갖고 있었으나
동양이 더 심한 편이었다.
아들을 갖기 원하지만 서양의 부모들은 그에 앞서 부부의 생활을 우선하는
태도를 보이는 반면, 동양의 부모들은 가문의 대를 이을
장손의 출산 및 교육이 부부생활에 우선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사철란
노루발
고랭이
실유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