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고개
첫머리에
서울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북부·북서부·동북부에는 산지가 많고, 남쪽은 낮고 평평한 U자형의 개방분지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한강이 강북과 강남의 자연적 경계를 이룬다. 전반적으로는 장기간의 침식을 받아 형성된 구릉지형(丘陵地形)이지만, 한강 주변 특히 한강 이남지역에는 충적지형(沖積地形)도 넓게 분포한다. 1394년 천도 당시 서울의 지형은 북악(342.2m), 남산(232.1m), 낙산(110.9m), 인왕산(338.2m)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며, 이들 주변 산지를 따라 도성이 축조되었다. 산줄기 사이사이의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작은 하천들이 모여 청계천을 이루며 이 청계천은 동쪽으로 흐르다가 한강으로 유입된다.
현재의 서울시역은 이 보다 넓어 시외곽에 북한산(836.5m), 도봉산(739.5m), 수락산(637.7m), 불암산(507m) 등이 있고, 불광천·중랑천·왕숙천 등이 한강으로 흘러들면서 곳곳에 넓은 충적지를 발달시키고 있다. 강북에 비하면 강남에는 산지의 발달이 미약하다. 서남부와 동남부는 충적지나 낮은 구릉지로서 거의 평탄하며, 남쪽에는 비교적 높은 관악산(632m)과 청계산(493m)이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안양천·탄천·양재천 등이 북으로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면서 충적지를 발달시키고 있다.
산줄기들은 북악산에서 남쪽으로, 남산에서 북쪽으로 여러 줄기가 뻗어내려 낮은 능선과 골짜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중앙의 종로·청계천 일대는 주변 산지와 계곡에서 운반되는 토사(土砂)로 평지를 이루었을 것이다. 때문에 종로와 청계천로는 동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사이에 기복이 없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퇴계로와 율곡로는 상당한 오르내림이 있음을 지금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종로와 청계천로 일대에는 산릉을 넘는 고개는 없었으나 동서를 가로지르는 길에는 많은 고개들이 있었다.
이러한 서울지형의 특성상 서울에는 230개 이상의 많은 고개가 있었다. 여기서 230개 이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문헌상으로, 또 구전되어 내려오는 고개들을 필자가 파악한 숫자이며, 실제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왔던 고개의 숫자는 이 보다 많았을 것이다. 현재 서울시내 전체 고개의 윤곽은 매우 복잡하여 살펴보기 어려우나, 조선시대 도성 내 고개의 윤곽을 알아보기 위하여 당시의 도성 내 지형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북악산에서 남쪽으로 뻗어있는 산줄기의 고개를 보면, 삼선교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동소문고개이고, 혜화동·명륜동에서 뻗어내린 작은 산줄기를 넘는 고개가 서울대 부속병원과 창경궁 정문 북쪽 사이의 박석고개(薄石峴)이다. 그리고 그 남쪽 동대문경찰서 부근에서 종로 5가로 넘어가는 고개가 배오개(梨峴)이다. 그 서쪽에는 계동의 고지가 있고, (주)현대 본사건물 앞길에는 조선시대에 관상감(觀象監)이 있어 관상감현이라고도 하고, 그 전신인 서운관(書雲館) 자리라 하여 운현(雲峴)이라 하였다. 그 다음 가회동의 지맥이 한국일보사에 이르는데, 그 앞길은 솔재(松峴)이고 그 북쪽이 송현동이다. 이 작은 산줄기는 북쪽으로 삼청동에 이르는데, 전 경기고등학교 북쪽 고개가 맹현(孟峴)이다.
인왕산 역시 많은 산줄기를 뻗었다. 내자동 부근을 남정문재(南征門峴), 당주동 중부를 야주개(夜珠峴)라 하고, 서울시청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도 언덕이 있었고 광화문 사거리 부근에 황토마루(黃土峴)가 있었다. 인왕산 서사면에는 현저동 북서쪽에 통일로로 통하는 무악재가 있다.
남산 북사면의 지맥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국대학교가 자리잡은 줄기이다. 이 줄기는 충무로에서 을지로까지 뻗는데, 여기에 풀무재(冶峴)가 있었다. 그 서쪽에 또 한 줄기가 을지로로 다가오는데 여기가 인현(仁峴)이고, 을지로를 횡단하는 근방에 구리개(銅峴)가 있었다. 그 서쪽 줄기는 충무로를 지나는데서 진고개(泥峴)가 되고, 명동성당이 있는 북고개(鐘峴)가 된다. 이 밖에도 마포로 나가는 애오개(阿峴), 신촌으로 나가는 대현(大峴), 의정부로 나가는 미아리고개, 청량리에서 양주로 나가는 망우리고개 등이 있다.
이러한 고개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변모되었다. 그나마 고개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악재·남태령·미아리고개·망우리고개 등 몇몇 큰 고개들 뿐이며, 대부분은 1960년대 이후 도로가 확장되고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깎여져서 고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많다.
고개의 흔적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 이름들은 지금도 동네이름으로, 지하철역 이름으로 남아 있어 우리에게 친숙한 느낌을 준다. 고개이름이 동명으로 남아있는 것은 인현동(仁峴洞), 송현동(松峴洞), 아현동(阿峴洞), 만리동(萬里洞), 무악동(毋岳洞), 망우동(忘憂洞) 등이 있으며, 지하철역 이름으로는 3호선에 무악재역이, 4호선의 남태령역·당고개역이 있으며, 5호선의 애오개역, 6호선의 버티고개역, 7호선의 장승배기역이 있다.
예전 인적이 뜸하고 수목이 울창한 험한 고갯길에는 호랑이·여우와 도적떼가 출몰하여 길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80여년 전만 하더라도 무악재에는 호랑이가 나타나 길손들을 괴롭혔으며, 호환(虎患)을 막기 위하여 군인들이 길손들을 모아 호송하였다 한다. 때문에 고개에는 서낭당이 많았다. 험한 고개를 무사히 넘게 해달라는 길손들의 기원이 담겨 서낭당이 생겨났으며, 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주막이 있게 마련이었다. 현재 남아 전하는 서울시내 고개이름 가운데 서낭당이고개, 서낭당고개, 사당이고개, 도당재 등으로 불리어지는 곳이 12곳이다.
이와 같은 고개에는 많은 전설들이 전하여 오고 있다. 호랑이·여우 등 동물에 얽힌 이야기, 풍수지리에 관련된 이야기, 고관·위인들에 얽힌 전설 등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곧 우리 선조들의 애환과 삶의 숨결이 배어있는 것들이다. 이제 각 구(區)별로 고개이름의 유래, 고개의 연혁, 전설, 문화유적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종로구
황토마루黃土峴 (세종로)
지금의 세종로와 신문로, 종로가 엇갈리는 네거리 남쪽 고개를 황토마루라 하고, 한자로 황토현(黃土峴)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고개를 중심으로 세종로와 신문로 1가에 걸쳐 있던 마을을 동령동(東嶺洞)이라 하였다. 마을에 황토마루가 있다 하여 ‘구리색의 누런 빛이 나는 고개가 있는 마을’의 의미로 동령동(銅嶺洞)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동령동(東嶺洞)이 되었다 한다.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과 궁궐, 관아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이곳 세종로는 한성부의 심장부가 되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남쪽으로 나 있는 대로 양편으로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중추원(中樞院), 사헌부(司憲府), 한성부(漢城府) 등의 관아건물들이 자리하여 여기를 육조(六曹)거리라 하였다. 육조거리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동서로 난 간선도로와 만나면서 끝이 나고 그 남쪽이 바로 황토마루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태평로(太平路)가 트여서 남대문까지 대로가 뻗었지만 애초에는 큰 길이 없었다. 즉 1914년 태평로가 폭 27m로 개통되기 전에는 남대문까지의 길은 종로를 돌아서 가는 지금의 남대문로였다. 황토마루 남쪽으로는 지금 프레스센터 자리에 군기시(軍器寺)가 있었고, 지금 정동 일대에는 태조의 비(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과 그 원당(願堂)인 흥천사(興天寺)가 있었으며 그 남쪽으로 태평관(太平館)이 자리하였다.
조선시대 경복궁과 서울의 주산(主山)인 백악(白岳)이 빚어내는 경관은 이 황토마루 위에서 바라볼 때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폭 50여척의 대로 양편으로 관아건물과 그 부속건물들이 들어서고 그 건물들의 담장과 처마, 지붕이 일렬로 늘어선 뒤로 광화문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고, 광화문 문루 어깨 너머로 경복궁의 전각들과 지붕의 선이 겹쳐지고, 다시 그 뒤로 백악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모습은 정녕 조선왕조의 위엄을 상징하였다 할 것이다.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길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세종로(世宗路)는 비각(碑閣)에서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광화문에 이르는 가로명이자 법정동의 명칭이다. 세종로는 길이는 600m에 불과하지만 폭은 10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도로이다. 세종로는 조선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이 넓은 길이었으며, 1912년 일제가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京城城市改修預定計劃)을 세워 세워 29개 노선을 고시하고 2년 후 1914년에 광화문에서 황토마루까지 도로를 개수하였다. 그 후 1936년 조선총독부고시 제722호로 이 도로의 폭을 30간(약 53m)으로 지정하였으니 지금의 절반 정도 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의 명칭을 육조거리, 육조앞이라 칭하였으며, 일제 때에는 1914년 4월 1일부터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 개칭하였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본식 동명을 우리 명칭으로 개칭할 때 동명(洞名)을 세종로라 고치고 도로명 역시 세종로라 하였다. 그것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기리기 위함에서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종로는 조선시대에 육조거리로 불리어온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부였으며, 지금도 세종로 서쪽에는 정부종합청사가, 동쪽에는 문화체육부와 미국대사관이 위치하고 있어 육조거리의 명맥을 600여년 동안 이어 오고 있다. 이 일대에는 지금도 옛 관청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토목·건축을 담당하던 공조(工曹)가 있었으므로 그 뒤쪽 동네를 공후동(工後洞) 혹은 공조뒷골이라 하였으며, 동아일보사와 교보빌딩 뒤쪽은 조선시대에 주석(놋쇠)을 파는 주석전이 있었으므로 주석전골 혹은 두석동(豆錫洞)이라 하였다.
세종로 네거리 동북편에 광무 6년(1902)에 세워진 비각(碑閣)이 서 있는데, 이것이 1969년 7월 18일 사적 제171호로 지정된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高宗卽位四十年稱慶記念碑)’이다. 비문을 읽어보면 그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40년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記念碑)’라 씌어 있다. ‘보령망육순(寶齡望六旬)’이라 함은 임금의 나이가 60세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51세란 말이며, ‘어극40년(御極四十年)’이라 함은 임금이 왕위에 오른지 40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곧 고종이 51세가 되고 왕위에 오른지 40년이 된 것을 기념해서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이 비각의 철제격자문(鐵製格子門)의 문임방(門楣)에 ‘만세문(萬歲門)’이라 새겼는데, 당시 영왕(英王)이던 이은(李垠)의 글씨이다.
비각 바로 앞에는 도로원표(道路元標)가 놓여 있다. 이 표석은 서울의 시가지 원표인데, 1914년에 설치되었다. 원래는 세종로 분리대의 이순신장군동상이 세워진 아래에 놓여 있었는데 이곳에 옮겨졌다.
남정문재-南征門峴 (필운동)
종로구 필운동 277번지와 내자동 147번지 사이에 있었던 고개를 남정문재, 한자로 남정문현(南征門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사직단(社稷壇) 정문턱 언저리인 이곳에 남정문(南征門)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고개 주위에 형성된 마을을 남정동(南征洞)이라 하였다.
붉은재紅峴 (화 동)
종로구 화동 22번지 정독도서관 남쪽에 있던 고개를 붉은재, 한자로 홍현(紅峴)이라 하였다. 그 연유는 고개의 흙이 다른 곳에 비해 빛깔이 붉었기 때문이라 한다.
맹 현孟峴 (삼청동)
종로구 삼청동 정독도서관 뒤 가회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바지 일대(삼청동 35119)를 맹현(孟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이곳에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孟思誠)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후손으로 숙종 때 황해·충청도감사를 지낸 맹만택(孟萬澤)도 이곳에서 살았으므로 이 일대를 맹동산이라 불렀다. 서울의 수많은 고개 가운데 개인을 지칭하여 명칭이 유래된 것은 이 고개가 유일한 것으로서, 그만큼 맹사성이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1360) 온양에서 태어나 세종 20년(1438) 79세로 세상을 떠난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창(新昌)이며,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이다. 고려 수문전 제학(修文殿 提學) 맹희도(孟希道)의 아들로 최영장군의 손자사위이다.
그는 고려 우왕 12년(1386)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로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역성혁명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조선 건국 후에도 계속 승진하여 태종 7년(1407)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이 후 판한성부사, 우부빈객, 대사헌, 판중추부사, 예조·호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가 좌·우의정을 지낼 때 영의정이 곧 명재상 황희(黃喜)였으며, 그의 정책은 대체로 황희와 일치하여 국정을 잘 운영하였으며, 세종으로부터도 깊은 신임을 받았다. 특히 그는 과거제도와 문교정책에 많이 간여하였으며, 무리하거나 급박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공과 사의 구분이 분명했지만 평소에는 조용하고 소탈하면서 유머를 즐길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랫사람에게는 자상하면서 엄하지 않았고 예의와 체면에 얽매이지 않아 평복을 입고 소 타는 것을 즐겨하였다. 집에 사람이 찾아오면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 맞아 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관료들 사이에는 같은 나이끼리 계를 조직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는 경자생(庚子生)이면서 장난으로 3살 아래인 계묘계(癸卯契)에 들어 어울려 지냈다고 하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세종이 그의 나이를 묻는 통에 들통이 나서 웃음꺼리가 되었다 한다. 상하구분과 예의범절이 엄격하던 당시에 이러한 파격적 행동은 그의 소탈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그 때문인지 그의 이러한 면모와 관련된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그가 온양에 근친(覲親: 관리가 휴가를 얻어 부모님을 찾아 뵙는 것)하여 오고 갈 때면 늘 간소한 행차를 하였고 소를 타고 가기도 하였다. 하루는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의 수령들이 그가 온양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길목인 장호원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소를 탄 어느 사람이 태연히 그들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에 수령들이 노하여 하인을 시켜 불러오게 하니, 그가 하인에게 이르기를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라고 하였다. 하인이 돌아와 고했더니 수령들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그만 못에 관인(官印)을 빠뜨리고 말았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그 못을 ‘도장을 빠뜨린 못’이라 하여 인침연(印沈淵)이라 하였다 한다.
또 하나 일화를 소개하면,
어느 날인가 맹사성이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비를 만나 길가 정자로 비를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행차를 성하게 꾸민 한 젊은 사람이 먼저 누상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는 아래층에서 비를 피했다. 젊은 사람은 영남사람으로 의정부의 하급 실무직인 녹사(錄事) 시험에 응시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맹사성을 누상으로 불러 올리고는 이야기도 하고 장기도 두게 되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심심풀이 삼아 말 끝에 ‘공(公)’ ‘당(堂)’자를 넣어 문답을 하기로 하였다. 맹사성이 먼저 물었다. ‘무엇하러 서울 가는공’하니 젊은이는 ‘벼슬 구하러 간당'하는 것이었다. ‘무슨 벼슬인공’ ‘녹사 시험이란당’ ‘내가 시켜주겠는공’ ‘웃기지 말랑’ 하였다.
그 후 그 영남사람이 시험에 합격하여 인사차 의정부에 들렀는데, 맹사성이 단상에 앉아 있다가 ‘어떠한공’ 하고 물으니 그가 비로소 깨닫고 사색이 되어 ‘죽어지이당’이라 하니 주위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이상하게 여겼다. 맹사성은 그를 녹사로 삼았고 나중에 맹사성의 추천으로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공당문답’이라 하였다 한다.
그는 음률에 조예가 깊어 박연(朴堧)이 아악(雅樂)을 정리할 때 매양 그의 자문을 받았으며, 스스로 악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한다. 그가 즐겨 불었다는 옥퉁소는 지금 아산 온양 고택(古宅)에 가보로 전해온다. 평소 피리 불기를 좋아하여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이르러 피리소리가 들리면 그가 있음을 알았다 한다. 그러나 사적으로 청탁하러 온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 안에서 피리만 불면서 스스로 돌아가게 하였고, 공무로 찾아온 사람은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한다.
그는 또한 청백리(淸白吏)로서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안 포단에 앉았는데, 집은 좁고 비가 샜다. 하루는 병조판서가 공무로 그의 집을 찾았는데, 때마침 소낙비가 내려 집안 곳곳에 비가 새어 의관이 모두 젖어버렸다. 이에 병조판서가 크게 깨닫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 집에 짓고 있던 바깥 행랑채를 뜯어버렸다고 한다.
솔 재松 峴 (송현동)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미대사관 직원용 제2관사 사이에 있던 고개를 솔재, 한자로 송현(松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예전 고개 주위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므로 불리어졌으며, 이 곳 송현동 뿐 아니라 수송동과 중학동에 걸쳐 소나무가 무성하였다 한다. 송현이 있으므로 해서 지금의 송현동(松峴洞)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태조실록』 권13 태조 7년 4월 임신조(壬申條)에 “경복궁 좌강(左岡)의 소나무가 번성하므로 인근의 인가를 철거토록 명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일대의 소나무는 국가에서까지 보호할 만큼 울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솔재는 지금은 많이 낮추어지고 넓혀져 포장되었지만 예전에는 높고 험한 고갯길이었음을 17∼18세기에 그려진 서울의 옛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곳 솔재에는 태조 7년(1398)에 있었던 제1차 왕자의 난에 얽힌 일화가 있다. 솔재에는 남은(南誾)이 살았는데, 태조의 여덟번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앞장섰던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 등이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날 이곳 남은의 집에 모여 있다가 정안군(靖安君: 후의 태종) 일당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솔재는 1911년 도시계획에 따라 폭이 12간으로 넓혀지면서 고개가 많이 깎여 낮아졌다. 서울에는 이곳의 송현과 소공동의 송현 두 곳이 있었는데, 이 곳이 북쪽이므로 북송현, 소공동쪽을 남송현이라 하였다.
박석고개薄石峴 (수송동)
종로구 수송동과 조계사 사이의 고개를 박석고개, 한자로 박석현(薄石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이 고갯길이 비가 오면 질퍽해서 통행이 불편하여 박석을 깔았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박석고개의 동쪽 마을을 동골(東谷), 서쪽 마을을 박동이라 하였다.
자하문고개창의문고개 (부암동)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자하문고개 혹은 창의문고개라 하였다. 고개 마루턱에 자하문(紫霞門)이 있으므로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자하문의 정식 이름은 창의문(彰義門)으로서 도성의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에서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있다. 창의문을 속칭 자하문이라 한 것은 창의문이 자핫골(지금의 청운동)에 있으므로 해서 생긴 속칭이다. 청운동 일대는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이라 하였다.
그리고 창의문을 장의문(莊義門 혹은 藏義門)이라고도 하였는데, 그로 해서 청운동·적선동 일대를 장의동(莊義洞), 줄여서 장동(莊洞)이라 칭하였다. 또 성밖 신영동에 있던 장의사(藏義寺)의 이름에 연유하여 일명 장의문(藏義門)이라고도 하였다.
창의문은 도성 4소문의 하나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의 서쪽 날개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태조 5년(1396) 서울성곽과 4대문 4소문이 건설될 때 함께 건립되었다. 그런데 창의문은 건립된지 18년 만에 한때 폐쇄되기도 하였다. 즉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백악산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아니 된다 하여 동령에 있는 숙청문과 서령에 있는 창의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두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원래 이 두 문은 높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길이 매우 험하고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으므로 숙청문에서는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 밖 경원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고, 창의문에서는 서쪽으로 세검정 골짜기로 빠져 나와 홍제원의 경의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또한 경원가도와 경의가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데에는 각기 동소문과 서소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하므로 두 문을 폐쇄하여도 별반 지장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후 세종 28년(1446)에 창의문에 대한 출입통제가 완화되어 왕명을 받아 출입하는 외에는 항상 닫고 열지 않도록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에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보면 항상 닫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도성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창의문은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정면 4간, 측면 2간,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이 목재 문루는 견실하고 정교하며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 또한 아담하다.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연속되어 있다.
다락에는 나무로 만든 큰 닭을 걸어 놓았는데, 그 까닭은 문 밖의 지세(地勢)가 지네와 흡사하기 때문에 그 기세를 제압하기 위하여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양을 만들어 걸어놓았다 한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1623) 이귀(李貴)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金),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李曙軍)과 이천의 이중로군(李重老軍)은 홍제원에서 김유군(金軍)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창의문을 나서면 부암동(付岩洞)이 된다. 1970년까지만 해도 창의문에서 세검정으로 가는 길 가 동쪽 부암동 134번지에 높이 2m 쯤 되는 부침바위(付岩)가 있었다. 부암동 동명은 이 부침바위가 있으므로 해서 유래되었다. 부침바위의 표면은 마치 벌집 모양 송송 뚫어진 것처럼 오목오목하게 패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 수대로 문지르다가 손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착 붙으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서 여인들이 돌을 붙이려 애쓴 흔적이 벌집처럼 보이게 되었고 바위의 이름도 유래되었다.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바위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여인들이 바위에 돌을 붙여놓고 정성스럽게 절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부침바위에 대한 유래는 고려 중엽 몽고의 침입을 받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많은 장정들이 원나라에 끌려갔는데, 그 중에는 신혼초야를 지낸 신랑도 섞여 있었다 한다. 혼인 하룻만에 생이별을 한 신부는 매일 소복을 하고 부침바위에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된 왕이 원나라 조정에 그 뜻을 전하여 마침내 신랑이 돌아와 부부가 상봉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소복을 하고 매일 같이 기도를 하며 빌 때는 바위에 붙인 돌이 떨어졌는데, 부부가 상봉한 후에는 붙인 돌이 그대로 있다 하여 부침바위라 하게 된 것이다. 이후 부터 아들 낳기를 바라거나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려는 부모들이 이 바위에 돌을 붙이고 빌었다 한다.
자하문고개, 자하문 밖 한길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간 부암동 산 161번지 넓은 터전에는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6호인 석파정(石坡亭)이 자리하고 있다. 주위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정교 화려한 정자와 건물이 어울려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으로 꼽히는 석파정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다. 바위에 삼계동(三溪洞)이란 글자를 새겨 놓아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별장을 차지하면서 앞산이 바위산이었으므로 대원군이 아호를 석파(石坡)라 하고 정자이름을 석파정(石坡亭)이라 하였다.
경내에는 안태각(安泰閣), 낙안당(樂安堂), 망원정(望遠亭),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 등 7동의 주요 건물이 남아 있으며, 뜰에는 오래 된 소나무들이 차일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사랑채는 1958년 종로구 홍지동으로 옮겨져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석파정의 원래 소유자는 안동김씨의 세도가 김흥근이었다. 아버지 김명순(金明淳)이 순조의 장인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과 사촌간이며, 일찍이 벼슬에 올라 예조판서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성격이 격하고 방자한 면이 있어 한 때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당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대원군이 집권의 야욕을 보이자 조의석상(朝議席上)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함으로서 대원군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원군이 집권한 후 많은 토지를 빼앗겼다.
특히 그가 소유했던 석파정은 장안에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 있어서 대원군이 팔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팔지 않았다. 이에 대원군이 한가지 꾀를 내어 그에게 하룻동안 석파정을 빌려줄 것을 간청하여 허락받았는데, 대원군은 그의 아들 고종을 대동하고 다녀 갔다. 국법에 임금이 와서 묵고 간 곳에는 신하가 감히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석파정은 대원군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석파정은 세습되어 이희(李喜)·이준(李埈)·이우(李)의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후 천주교 주관의 콜롬비아고아원에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개인 소유이다.
자하문고개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청운동(淸雲洞)으로, 그 동명 유래는 종전의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지금 청운초등학교 뒤쪽 일대의 청풍계는 인조 때의 문신 김상용(金尙容)이 청풍각(淸風閣)·태고정(太古亭) 등을 짓고 거주하던 곳으로, 많은 명사들이 찾아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후에도 청풍계의 건물들은 잘 보존되었으며, 조선후기에 그 집안인 안동김씨가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임금이 때로 태고정 등을 찾음으로서 청풍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인왕산의 동쪽 기슭, 자하문고개 아래에 위치한 백운동은 산이 그렇게 높지 않고 골짜기가 그렇게 깊지 않지만 작고 큰 산자락들이 둘러 앉고 푸른 소나무숲 사이 작은 길에는 덩굴나무들이 엉켜 있었으며, 그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아침 저녁으로는 흰구름이 덮여 있었으니 도성에서 가까운 명승지로서 많은 명사들이 이곳을 찾아 자연을 벗하였다고 한다.
자하문고개를 넘어 신영동 1686번지에는 정자 세검정(洗劒亭)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일대를 세검정동이라 하였으며, 세검정동은 다시 세검동으로 약칭되어 온다. 따라서 세검동은 현재 법정동명도 행정동명도 아니지만 신영동은 물론 자하문고개를 넘어서부터 홍지문안 북한산과 백악 뒤의 여러 골짜기 일대가 대개 세검동으로 불리어 왔다. 이러한 깊고 넓은 계곡, 그 중에서도 수석과 좌우 산림풍경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은 것이 세검정이었다.
예전 세검정 주위는 동령폭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바위 위로 소리내어 흘러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더구나 여름 장마철이 되면 많은 물이 모여서 부근 계곡에 넘쳐 흘러 일대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도성안 사람들이 많이 나가 넘쳐 흐르는 물결을 구경하였는데, 이를 연중행사로 삼았다 한다. 또 정자 앞에는 넓은 바위들이 깔려 있고 그 바위들은 물에 갈려서 깨끗하고 매끄럽기가 비단폭 같았으므로 평상시에는 근처의 학동들이 붓과 먹을 들고 나가 글씨를 연습하여 먹물 흔적이 가실 날이 없었다 한다.
세검정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먼저 인조반정 때의 이야기로서,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이괄을 비롯한 이귀·김자점·김유 등이 자하문 밖 이 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서 칼을 씻었다 하여 정자의 이름을 세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숙종 45년(1719)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고 평창(平倉) 등 시설을 그 부근에 두었으며, 영조 때에는 군문(軍門)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설치하고 종래 북한산성의 업무를 관장하던 경리청(經理廳)도 총융청과 합하니 이 곳은 국방의 요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때는 또 탕춘대의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고치고 왕이 때때로 거둥하여 장병들의 무예를 시험하기도 했으며, 300여간의 연융대 청사를 새로 지었다. 신영동(新營洞)의 동명은 새 군영(軍營)이 들어섰다 하여 붙여졌다. 이렇게 군사시설이 증대되면서 연융대 앞 시냇물이 흐르는 바위 위에 정자를 지으니 장병과 관민들이 수시로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정자 이름을 세검(洗劒)이라 한 것은 장소가 군영 앞이요, 또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공하였던 사실을 기념하면서 ‘칼을 씻어 칼집에 거둔다.’ 곧 평화를 구가한다는 뜻이었다 한다.
세검정은 1941년 부근의 종이공장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주초석(柱礎石)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5월에 복원하였다. 복원된 정자는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정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암반 위에 4각 장초석(長礎石)을 세우 고마루를 꾸몄으며 5평 반 가량의 규모로 기둥머리에는 익공계(翼工系) 양식의 간결한 수법으로 결구(結構)하였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세검동 일대는 산이 높고 물이 맑아 경치는 좋으나 논밭이 없고 다른 생산이 없어서 주민들이 생활고를 못이겨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한성시전(漢城市廛)에서 매매되는 포목의 마전(麻廛)과 각 관청에서 쓰는 메주와 종이 제조의 권리를 이 곳 사람들에게 주어서 생활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제야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면서 이 곳에 알맞는 여러 과목(果木)을 심어서 능금·자두밭으로 개발하여 생활의 자립을 확립하였다 한다. 세검동 일대는 봄에는 온갖 꽃의 아름다운 빛, 여름에는 싱싱한 과실, 가을에는 불타는 듯한 단풍, 다듬은 듯한 반석(盤石), 옥같이 맑은 시냇물이 온 골짜기를 장식하였다. 특히 세검동 일대는 능금과 자두의 명산지를 이루었다.
한편 자하문고개에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 침투를 막기 위해 최후로 이를 검문하다 순직한 당시 종로경찰서장 고 최규식경무관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1년 9월 9일 출생, 1968년 1월 21일 순직. 그는 용감한 정의인으로 종로경찰서에 재직 중 청와대를 습격하여 오는 공산유격대와 싸우다가 장렬하게도 전사하므로 정부는 경무관의 계급과 태극무공훈장을 내렸다. 비록 한 때의 비극 속에서 육신의 생명은 짧았으나 의를 위하는 그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 남으리라.
그리고 당시 최경무관과 함께 순직한 고 정종수경사의 순직비도 세워져 있다.
조석(朝夕)고개 (부암동)
종로구 부암동에서 신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조석(朝夕)고개라 하였다. 부암동 1311번지∼신영동 1506번지로 창의문 밖 버스종점에서 내려 세검정초등학교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지름길 중간에 있는 고개이다. 그 명칭 유래는 어려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성안으로 품팔이를 가는 가난한 서민들이 아침 저녁으로 넘어 다녔던 고개라 하여 조석고개라 하였다 한다.
이 고개는 신영동·구기동·평창동 주민들이 넘어 다녔는데, 고개의 폭이 좁고 험하였으며, 저녁에는 앞 뒤 사람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몹시 어두웠기 때문에 기다시피 넘어 다녔다 한다.
탕춘대고개조세고개(홍지동)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정자에서 평창동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를 탕춘대고개 혹은 조세고개라 하였다.
탕춘대고개의 명칭 유래는 고개의 오른쪽 언덕에 조선시대 연산군의 놀이터로서 탕춘대(蕩春臺)란 정자가 있었고,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을 쌓은 다음 숙종 45년(1719) 북한산성과 도성을 연결하는 새 성을 쌓고 그 명칭을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 하였으므로 연유한다. 그리고 조세고개의 명칭 유래는 고개 부근에 조선시대에 조지서(造紙署)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서를 일명 조세라고도 하였으므로 조세고개라 불리었다.
자하문 밖 세검정 일대를 지금도 탕춘대라 부르는데, 이는 연산군 때에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사찰 장의사(藏義寺)를 이궁(離宮)으로 쓰면서 그 아래 경치 좋은 언덕을 놀이터로 쓰면서 시작되었다. ‘탕춘(蕩春)’이란 봄기운을 만끽한다는 뜻으로 연산군이 질탕하게 놀기를 좋아하여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연산군 11년(1505)에 경치 좋은 이 곳에 탕춘대를 짓고 그 앞 시냇가에는 수각(水閣)을 세우고 유리를 끼워 냇가를 볼 수 있도록 하여 궁녀들과 놀았다 한다. 이 때 자하문과 홍은동 쪽을 막게 하여 도성민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보면,
창의문 밖 삼각·백운 두 산 사이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어서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아 연산군이 이궁(離宮)을 설치하고 수각(水閣)과 탕춘대와 석조를 꾸며 연희궁 놀이터와 함께 수시로 드나들면서 궁녀들과 놀았다.
고 하였다. 실제 탕춘대가 있던 부근의 시냇물이 감돌아 흐르는 신영동 137, 139, 141∼144번지 일대에는 승목소라는 마을이 있었고, 장의사계곡은 봄철의 꽃, 여름의 과일, 가을의 단풍이 어우러져 세검정 일대의 수석과 함께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였다. 이러하므로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 시인과 묵객들이 줄지어 찾았던 곳이며, 1970년대 초까지도 각급 학교의 소풍장소로서 애용되던 곳이었다.
이 때 놀이터의 중심이 된 장의사는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창건되었다. 신라 장수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이 백제와의 황산벌전투에서 전사하자 그 충의와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 절은 많은 고승들이 거쳐 갔고, 고려 현종 이후에는 왕과 왕비가 자주 불공을 드리러 가던 큰 사찰이었다.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서울 근교의 명소로 열손가락 안에 꼽혔다. 이러한 까닭에 세종 8년(1426)에는 이 절에 독서당을 설치하고 집현전 학사 가운데 자질이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서 휴가를 주어 공부에 진력하게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에 와서 이 제도도 없어지고 유서 깊은 절은 한낱 놀이터의 중심이 되고 말았으니, 그 놀이터의 이름이 바로 탕춘대였다.
1623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이 곳은 폐허가 되었는데, 영조 23년(1747) 삼청동에 있던 총융청(摠戎廳)을 이 곳 장의사터로 이전하면서 탕춘대는 연융대(鍊戎臺)라 고쳐 불리었다. 총융청은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겪은 후 군대를 정비할 목적으로 사직동 북쪽에 설치했다가 현종 10년(1669)에 삼청동으로 청사를 옮겼었다. 그러다가 영조 23년(1747) 북한산성을 관리하는 관청인 경리청(經理廳)을 폐지하고 그 관원들을 총융청에 이속시키면서 이 곳 장의사터로 이전한 것이다. 이 때부터 총융청의 감독 아래 북한산성관성장(北漢山城管城將)을 따로 두고 동시에 승병 350명을 지휘하게 하였다. 총융청은 지금의 수도경비사령부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고종 21년(1884)까지 존속하였다.
탕춘대성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청군에게 항복한 수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숙종 28년(1702)부터 북한산성의 축성 논의가 시작되어 찬반 양론 끝에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이 완성된 후 8년 후인 숙종 45년(1719)에 축조되었다. 즉, 국가 유사시에 북한산성에서 수비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탕춘대 일대에 창고를 짓고 군량을 저장해야 하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탕춘대성을 축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10월 6일까지 약 40일간 공사를 진행하여 전체 성 길이의 절반 가량을 쌓았는데, 자하문 서쪽 탕춘대성이 시작되는 곳에는 토성(土城)으로, 그 외는 석성(石城)으로 하였다. 성의 높이는 3.03m이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공사는 이듬해 2월부터 시작하여 약 40일만에 완공되었다.
공사에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문과 도성민이 동원되었으며, 성곽의 길이는 북한산 비봉에서부터 구기터널·홍지문을 거쳐 인왕산 정상까지 약 4㎞가 된다. 축성된 성 안에는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 창고·상평창·하평창 등 주요 군사시설을 설치하였다. 탕춘대성은 한마디로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성으로 축성 당시에는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성(西城)이라 불리었으나 후에 탕춘대성이라 정식 명명되었다.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체성(體城)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한편 모래내 옆을 지나는 세검정길을 내려가다 보면 성곽이 끊어진 곳, 홍지동 산24번지에 홍지문(弘智門)이 있다. 이 문은 숙종 45년(1719) 탕춘대성을 축조하면서 건축한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축조 당시에는 한성의 북쪽 문이라 하여 한북문(漢北門)이라 하고, 또는 북쪽을 호위한다는 뜻으로 한북문(北門)이라 하였는데,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써서 달게한 후로 공식명칭을 홍지문이라 하였다.
홍지문은 화강암으로 축조되어 중앙부에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이 꾸며진 위에 단층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부분 둘레에는 여장(女墻)이 둘러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정면 3간, 측면 2간에 우진각 지붕이며 사방이 틔어 있다.
이 성문에 잇대어 성벽은 모래내를 가로 질러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수문은 물이 빠져 흘러 내리게 한 화강암 월단이 5개 옆으로 늘어서 있는데, 총 길이 26.72m, 폭 6.8m, 높이 5.23m이다. 월단마다 수구(水口)의 규모는 폭 3.76m, 높이 2.78m이다. 홍지문은 원래 문루가 퇴락한데다 1921년 1월에 붕괴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대홍수로 인해 오간대수문마저 떠내려 갔다. 그 후 1977년 7월 서울시에서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복원하였다. 복원 당시 현판 글씨는 고 박정희대통령이 썼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1976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탕춘대고개를 일명 조세고개라고도 하였는데, 조세고개의 명칭 유래가 된 조지서(造紙署)는 조선시대에 종이를 제조하는 사무와 지장(紙匠)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던 관아이다. 조지서는 지금 세검정초등학교 동북쪽 신영동 196번지 일대의 세검정길 일부와 가로변에 위치하였다. 서울특별시기념표석위원회는 1987년 이 조지서터에 기념 표석(標石)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인 지장(紙匠)들은 조지서 주위에 모여 살았다. 종이 제조공장을 이 곳에 세운 것은 주위가 낮은 산으로 둘러 싸여 종이 원료인 닥나무 재배에 유리하였을 뿐 아니라 삶아낸 닥나무 껍질을 헹구어내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맑은 물이 북한산에서 흘러 내려와 홍제천(모래내)을 이루고 주위에 반석(盤石)이 많아서 종이를 제조하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본사료인 사관(史官)이 쓴 사초(史草)를 실록 편찬이 끝난 후에는 이 곳 세검정 일대의 맑은 물에 종이의 먹물을 씻어내렸다. 종이가 귀했던 당시에는 닥을 원료로 해서 만든 한지(韓紙)를 한번 썼다 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종이의 먹물을 맑은 물로 씻어내고 절구통에 넣고 빻은 다음 다시 물에 풀어 환지라는 재생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종이 제조공장이 이 곳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종이 제조공장은 태종 15년(1415) 7월 호조의 건의에 따라 처음 조지소(造紙所)라는 명칭으로 이곳에 설치되었다. 태종이 이곳에 조지소를 설치한 것은 태종 10년(1410)에 지폐인 저화(楮貨)를 통용하게 되자 이를 만들 종이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태종 때의 조지소는 단지 저화지의 생산에 그치고 다른 용도의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았던 듯하다. 이 후 본격적인 종이 제조업무를 맡은 조지소의 설치는 세종 때로서 세종 16년(1434)이 되면 종이 만드는 능력이 『자치통감(資治通鑑)』 5만권을 인쇄할 수 있는 분량에 이르렀다. 세종은 단순한 종이 생산에만 만족하지 않고 기술 개량과 외국의 선진 종이 제조기술을 도입하는데 힘썼다.
조지소는 세조 12년(1466) 조지서(造紙署)로 개편되었는데, 건물이 100여간에 이르렀다. 그 편성을 보면 경관직(京官職)에 제조(提調) 1명, 사지(司紙) 1명, 별제(別提) 1명을 두고 기술직으로 공조(工造) 4명과 공작(工作) 2명이 배속되어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였다. 실무 기술자로서 지장(紙匠) 81명, 염장(匠) 8명, 목장(木匠) 2명 등 모두 91명의 장인(匠人)들이 배치되었고, 이들의 보조원으로 차비노(差備奴) 90명과 거수노(踞隨奴) 4명이 딸려 잡일을 도왔다하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조지서는 이 후 고종 19년(1882)에 폐쇄되기까지 각종 종이 제조와 종이공장 관리를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전국에서 제조되는 종이 가운데 조지서의 제품이 그 종류와 질에서 최상품으로 꼽혔다. 생산품은 왕실이나 국가기관에서 사용하였고, 중국에 조공품으로 보내졌다. 그러므로 조지서의 종이 생산품은 항상 최상의 것이 요구되었으며, 그 질이 떨어지는 경우 매우 엄한 벌을 받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종이 제조과정에서 지장(紙匠)의 처음 잘못에는 매 80대를 때리며,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10대씩 더하여 100대에 이르도록 규정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관영수공업의 쇠퇴와 더불어 제지분야에서도 민간제지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탕춘대 일대에는 관 주도 제지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제지업 역시 크게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순조 때의 기록인 『한경지략(漢京識略)』 궐외각사조(闕外各司條)에는 “세검정 탕춘대 옆에는 민가 수백호가 제지업으로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전업적으로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종이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과거시험의 답안지인 시지(試紙)의 수요가 특히 많았다 한다. 당시 선비들은 당국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시험지를 선호하였다. 세력있는 집안의 자제들은 조지서의 지장(紙匠)에게 특별히 좋은 시지를 주문 생산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은 거의 지전(紙廛)에서 종이를 구입하였으며, 지전은 그 종이를 조지서 지장에게 주문하였다. 지전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원료와 공전의 값을 미리 지장에게 지급하였다. 이들 지전상인들의 주문은 계속적이고도 대량이었으므로 조지서의 지장들에게 있어서 지전상인들은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자본을 대는 물주(物主)로서 실질적으로는 지장을 고용한 고용주와 다를 바 없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참고로 조선시대 종이 제조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닥나무를 가마에 쪄서 껍질을 벗겨 흑피를 만들고, 그것을 물에 불궈서 껍질을 제거하여 원료로서의 백피를 만든 다음, 끓는 잿물에 백피를 표백하고, 표백한 섬유를 방망이로 다듬질한다. 그리고 다듬질한 원료를 녹조에 넣고 풀을 가하여 종이원료를 만든다. 이어서 그것을 대발 위에 옮겨 종이를 뜬다. 종이를 한장씩 떼어내 건조판에 붙여 말려 완성한다. 이러한 복잡한 공정에서 공정마다 맡은 사람이 있어 분업적 협업으로 일을 했다. 한마디로 세검정 일대는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품질이 좋은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업단지였다 할 것이다.
이러한 조지서는 고종 19년(1882)에 혁파되었다. 그러나 이 곳 일대에는 조선시대의 전통을 이어 받은 듯 1970년까지만 해도 창호지나 벽지 제조공장이 있어 종이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1971년 8월 30일 북악터널이 완공되고 이 앞을 흐르던 모래내의 일부 구간을 복개하여 그 위로 1973년 11월 22일 신영상가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종이공장들은 없어지고 말았다.
삼형제고개 (홍파동)
종로구 행촌동에서 사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홍파동 42번지 부근 일대를 삼형제고개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옛날 고개 밑에 주막을 경영하는 삼형제가 살았는데,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 조선시대에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그의 집 문앞에 세우는 붉은 문)이 세워졌으므로 삼형제고개라 하였다. 지금 이 고개는 사직터널과 성산로로 이어진 아스팔트도로로 바뀌어졌지만 사직터널이 개통되기 전에는 이 고개를 넘어다녀야 했다.
야주개夜珠峴 (당주동)
신문로 18번지와 20번지 사이 당주동과 신문로 1가에 걸쳐 있던 고개를 야주개, 한자로 야주현(夜珠峴) 또는 야조현(夜照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근처에 있는 경희궁(慶熙宮)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현판 글씨가 명필(名筆)로 어찌나 빛이 나든지 캄캄한 밤에도 이 고개까지 빛이 나므로 붙여졌다 한다. 이 야주개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을 야주갯골 또는 야주개라 불렀다. 약간의 높이 차가 남아있기는 하나 제법 높았던 야주개는 도로 포장공사로 깎여져 지금은 거의 평지화되어 고개라는 느낌마져 없어져 버렸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서 종로구 신문로 1가 581번지 구세군회관빌딩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이 문은 광해군 8년(1616)에 경희궁을 건립하면서 궁궐 동쪽에 정문으로 세운 것이다. 흥화문(興化門)이란 현판글씨는 이신(李紳)이 썼다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소개하고 있다. 이 글씨가 어찌나 명필이었던지 밤이면 서광(瑞光)을 발하여 당주동고갯길까지 훤하게 비추었으므로 이 고개를 ‘밤에도 빛을 발하는 고개’ 곧 야주개라 하였던 이다. 광복 후에도 노인층에서는 당주동길을 흔히 야주개라 하였다. 이에 따라 경희궁을 ‘야주개대궐(夜珠峴大闕, 夜照峴大闕)’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흥화문은 1915년에 일제가 경희궁을 헐어내고 경성중학교를 세울 때 경희궁의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매각되어 중구 장충동 2가 202번지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신주로 한 춘무신사(春畝神社)의 정문이 되었다. 광복 후 이 자리가 영빈관으로 바뀌면서 흥화문(興化門)이란 글씨 대신 영빈관(迎賓館)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신라호텔이 세워진 후에는 이 호텔의 정문이 되었다. 1988년 서울시에서 경희궁복원사업을 실시하면서 이 문을 서울고등학교 정문자리에 이전하였다.
이곳 야주개는 아동문학가로서 어린이운동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 소파 방정환선생(1899∼1931)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야주개 일대 당주동은 입시학원이 많이 들어섰던 골목길이었으며, 재수생과 입시생들이 드나들던 분식집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강남지역 개발과 1980년대 입시학원의 강남으로의 분산정책, 도심학교의 강남이전 촉진책에 의하여 이곳에 있던 입시학원들이 노량진과 영동 등지로 이전해 감에 따라 분식집들도 하나 둘씩 폐업하였다. 더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 지역의 재개발사업으로 낡은 단층 기와집 대신 고층빌딩이 건축되면서 각종 회사들이 입주하자 이 곳 골목길은 입시생 대신 회사원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세종로에 세종문화회관이 신축된 후에는 이곳에서 개최되는 각종 연주회와 음악회를 찾는 청중들의 오가는 장소로 변모되었다.
새문고개 (신문로 1가)
종로구 신문로 2가 2번지 옛 서울고등학교(경희궁터)에서 서대문로터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새문고개라 하였다. 지금 고려병원과 문화방송국 사이에 돈의문(敦義門서대문)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으로, 돈의문을 새문이라고도 하였으므로 새문고개라 불리어졌다. 돈의문이 새문으로 불리게된 것은 그 위치가 몇번 바뀌어 ‘새로 문을 냈다’ 하여 새문 또는 신문(新門)이라 하였으며, 문 밖을 새문밖, 문 안쪽을 새문안이라 하였고, 현재 세종로네거리∼서대문로터리에 이르는 길이름도 새문안길이라 이름하였다.
이 고개 위에 서 있던 돈의문에 대하여 살펴보자. 돈의문은 도성의 서쪽 대문으로서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제2차 공역이 끝나고 도성 8개의 문이 완공되었을 때 함께 세워졌다. 그런데 태종 13년(1413) 6월의 『태종실록』을 보면,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청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좌우 팔과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손상시켜서는 아니된다.”하여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두 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동시에 같은 이유로 돈의문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 서전문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역시 태종 13년 6월의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이 의정부에 명하여 새로 서문을 세울만한 곳을 찾아보게 했는데,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의 집 앞에 있는 옛길(舊路)을 따라서 문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이숙번이 인덕궁(仁德宮) 앞에 작은 동(洞)이 있는데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만한 곳이라 하여 그가 말하는 곳에 서전문(西箭門)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서전문은 경희궁(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이 있던 서쪽 언덕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세종 4년(1422) 도성을 수축할때에 서전문에 옹성(甕城)을 쌓기 위하여 특별히 평안도 군인 1,000명을 동원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옹성을 쌓지 않고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그 남쪽 마루턱에 새로 문을 세우고 그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돈의문은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新門)이라 불리어지기도 했다. 서전문을 헐고 새로 돈의문을 건립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서전문이 있던 곳은 지대가 높고 험하여 통행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보다 통행에 편리한 곳으로 문을 옮겼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돈의문이 있었던 위치와 서전문이 있었던 위치를 살펴보면 돈의문의 위치가 서전문에 비해 통행에 훨씬 편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돈의문을 새문이라 한 것은 ‘새로 세운문’이라는 뜻과 함께 또 하나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새문이란 말의 연유는 색문(塞門), 즉 막을 색(塞)자를 써서 문을 막았다는 뜻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1·2차 왕자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공헌한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이 서대문 안에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 돈의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과 마소의 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돈의문을 닫아버리고 통행을 금했다 하여 색문(塞門)이라 하였고 부근 마을을 색문동(塞門洞)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새문,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전문을 폐쇄하고 돈의문을 세운 것은 세종 때의 일이니까, 이 때 이숙번이 막은 문은 돈의문이 아니고 서전문인 것이다.
한편 색문동에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이 살았는데, 광해군 때 이 색문동에 왕기(王氣)가 서린다 하여 이를 막기 위해 새로 궁궐을 건축한 것이 경희궁이다. 사적 제271호이다. 신문로 2가 2번지에 위치하는 경희궁은 광해군 9년(1617)에 착공하여 3년 후 광해군 12년(1620)에 완공되었는데,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경희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왕 15년 3월에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추대된 인조는 정원군의 장남이었고, 정원군은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었으니 색문동의 왕기설(王氣說)이 적중된 셈이다. 인조 이후 역대 왕들이 수시로 거처하면서 창덕궁을 동궐(東闕), 경희궁을 서궐(西闕)이라 하였다.
돈의문은 조선시대에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에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었다. 조선시대 한성으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도로는 간선도로와 지선도로로 구분되었는데, 이 중 간선도로망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9개가 있었다. 이 가운데 제1로가 돈의문으로부터 무악재를 넘어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길로, 홍제원을 경유하여 고양·파주·개성·평산·황주·평양·정주·선천을 거쳐가는 총 1,086리의 장거리로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신들이 통행하는 가장 비중이 큰 도로였다.
그 옛날 이 곳 새문고개를 지나 돈의문을 나서게 되면 언덕 아래로 무악재에서 발원한 물이 흐르고, 그 위로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 이름을 경곳다리(京橋)라 하였는데, 그것은 다리가 경기감영(京畿監營) 창고의 앞쪽에 있다 하여 붙여졌다. 다리를 건너면 경기도의 행정을 담당하던 경기감영(현 서대문적십자병원 자리)이 나타나게 된다. 그 앞으로는 녹번고개를 넘어 무악재를 지나는 큰 길이 나오게 된다. 의주로변에 있는 경찰청과 미동초등학교 주변에는 ‘미나리깡’이라고 하는 미나리밭이 물결치고 충정로 동사무소와 인창중고등학교 주변에는 초가집들이 있었던 풍경을 1764년에 제작된 도성대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돈의문은 역사적으로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乙未事變)과 관련이 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인조 2년(1624),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은 반군을 이끌고 2월 10일 돈의문을 통해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괄군은 추격하여온 장만(張晩)·정충신(鄭忠信) 등 관군과 안산(무악)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쫓기자, 가까운 돈의문을 통하여 성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그러나 도성민들이 돈의문을 안에서 굳게 닫아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서 남대문을 통해 입성하였다. 이괄은 광희문으로 빠져나가서 이천으로 가는 길에 부하들에 의해 죽고 말았다.
그리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친일정권을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1895년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 불량배, 낭인들과 돈의문 앞에서 모였다. 새벽 5시경의 파루종이 울리자, 이들은 돈의문을 통과하여 경복궁을 침입,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니 이는 돈의문에 얽힌 민족적인 한이 아닐 수 없다.
돈의문은 도성 서북쪽의 관문으로 410여년간 인정(人定: 통행금지 시작시간)에 닫고 파루(罷漏: 통행금지 해제시간)에 열어 행인을 통제하고 유통하였으나, 1915년 시구역개수계획(市區域改修計劃)이라는 명목으로 도로확장을 할 때 일제에 의해 헐리고 말아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당시 일제는 돈의문의 목재와 기와 및 석재를 경매하였는데, 당시 염덕기란 사람에게 205원에 낙찰되었다 한다. 그가 문루를 헐어낼 때 그 속에서 불상과 많은 보물이 나와서 큰 횡재를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1985년 서울특별시기념표석위원회에서 돈의문터에 대한 표석을 설치하였다.
박석고개薄石峴 (명륜동)
창경궁의 정문 북쪽 곧 월근문(月覲門) 쪽에서 명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박석고개, 한자로 박석현(薄石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유래는 이 고개가 경모궁(景慕宮)의 입수목(入首목)이 되기도 하는데, 창경궁이나 경모궁에 비해 지대가 낮았으므로 낮은 지맥의 보호를 위하여 박석을 깔았기 때문에 박석고개가 된 것이다.
명륜동 2가와 명륜동 4가 사이에 걸쳐 있던 동네를 박석고개가 있다 하여 박석동(薄石洞)이라 하였다. 경모궁은 장헌세자(莊獻世子)와 그의 비 헌경왕후(獻敬王后)의 사당으로 영조 40년 (1764)에 세워졌다. 창덕궁 안에 있으며, 경모전(景慕殿)이라 하였다.
구름재雲峴 (운니동)
종로구 원서동 206번지 지금의 (주)현대 본사건물 대지에 오늘 날의 중앙천문기상대격인 서운관(書雲觀)이 있었으므로 운현궁과 (주)현대 본사건물 사이로 난 고갯길을 구름재 또는 운현(雲峴)이라 하였다.
서운관은 조선 개국 초에 설치되었으며, 세종 때에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서운관이란 명칭이 함께 통용되었다. 『단종실록』에는 서운관이 있는 이 고개를 서운관현(書雲觀峴)이라고 했는데, 운현(雲峴) 곧 구름재라는 명칭은 서운관현(西雲觀峴)이 운관현(雲觀峴)이 되었다가 다시 줄어서 운현(雲峴)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운현은 지금의 운니동(雲泥洞)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즉 종로구 익선동과의 경계가 되는 도로의 북쪽이 니동(泥洞)인데, 이곳은 비만 오면 몹씨 질퍽거렸으므로 진골, 곧 한자로 니동(泥洞) 또는 습동(濕洞)으로도 표기되었다. 영조 때 제작된 「도성지도」에는 이곳을 니동(泥洞)으로 표기하였는데, 진골이라 널리 불리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 중서(中署) 정선방(貞善坊) 돈녕계(敦寧契) 니동(泥洞), 구병조계(舊兵曹契) 니동(泥洞)이었는데, 1914년 4월 1일 ‘운현(雲峴)과 니동(泥洞)’의 머리글자를 따서 운니동(雲泥洞)이라 하였다.
운현의 명칭 유래가 된 서운관은 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측후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아였다. 지금 (주)현대 본사건물 앞에 서운관에 속하였던 관천대(觀天臺)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사적 제296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천대는 높이 3.46m, 너비 2.4m, 폭 2.5m로서 대 위에는 높이와 너비, 폭 각 70㎝인 정입방체의 돌이 놓여 있고 둘레에는 돌난간이 둘리어 있다.
운현이라고 하면 운현궁(雲峴宮)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운현의 남쪽 근방 운니동 80·85·114번지 일대에 일대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살았던 저택이 있는데, 운현의 지명을 따서 운현궁이라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현손(玄孫)으로서 아버지는 남연군 구(南延君 球), 어머니는 여흥민씨(麗興閔氏)였다. 숙종 이래 대대로 여흥민씨의 소유로 되어 왔던 안국동궁(安國洞宮)에서 출생, 구름재로 이사온 후 고종을 낳았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명으로 그의 아들 명복(命福)이 대통을 이어받아 입궐함에 따라 흥선군에게는 대원군의 칭호가 붙게 되었으며,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攝政)하였다. 그는 우선 조촐하던 집을 궁궐 못지 않은 대저택으로 개축하였다. 바깥채에 그의 집무실인 노안당(老安堂)과 아재당(我在堂)을, 안채에 고종이 태어난 노락당(老樂堂)과 별당으로 부인 민씨의 거처인 이로당(二老堂), 누정인 영화루(迎和樓)를 손질하였고, 할아버지 은신군(恩信君)과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사당을 집안에 신축하였다.
1898년 1월 흥선대원군이 이곳에서 별세하자 장손 이준용(李埈鎔)에게 양자로 들어온 의친왕 이강(李岡)의 차남 이우(李)가 운현궁을 지켜나갔다. 궁의 면적은 축소되어 현재 2,148평에 불과하고 건물 몇채만 남아 있다. 정원에는 고종이 어릴 때 올라가서 놀았다는 소나무가 있었다. 왕위에 오른 후 고종은 소나무에 종2품 벼슬아치가 다는 금관자를 달아주었으므로 이 소나무를 2품 대부송(大夫松)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소나무는 일제 때 벼락을 맞아 뿌리째 없어졌다.
사적 제257호로 지정된 운현궁은 대원군의 5대 직계손인 이청(李淸)의 개인 소유로 있었는데, 1991년 12월말 서울시에서 구입하여 1993년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96년 10월에 완공하여 전통문화공간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지금의 운현궁은 양관(洋館)을 포함한 대지는 덕성여자대학교가 소유하고 있으며, 현재는 운니동 98∼50, 71, 72, 80, 85, 114번지와 7, 10번지가 남아 있다.
가대(家垈) 안에는 운현궁의 몸채건물이었던 안채와 사랑채 일부, 북쪽에 별당건물이 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이 살던 양관은 1911∼1912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석재를 혼용한 벽돌 2층으로 프렌치 르네상스식으로 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1955년 학교법인 덕성학원이 소유하면서 덕성여자대학교 강의실 등으로 사용하다가 이 학교가 쌍문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2층은 창고로, 1층은 덕성여자대학교의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운현궁의 잔존 건물들 중 안채와 사랑채 일부를 살펴보면, 이 건물들은 격식이나 규모로 보아 일반 상류주택이라기 보다는 궁실(宮室)의 내전건물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러나 건물의 형태나 세부 구성요소는 상류주택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이 건물은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형태를 취하면서 이를 궁실의 격식으로 끌어올린 건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원군 집정시 운현궁에 전해오는 일화로는 이 곳 뜰에서 벌어졌던 방탄복 실험 이야기가 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부터 7년에 걸쳐 천주교에 대한 대박해를 가하였는데, 이를 응징하고자 프랑스의 동양함대가 1866년 강화에서 도발한 병인양요(丙寅洋擾)는 흥선대원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서양의 무력에 대항할 방책을 팔도에 공모하였다. 온갖 아이디어가 속출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서양총의 총탄이 뚫을 수 없는 방탄복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원리는 간단하였다. 서양총의 총탄이 뚫을 수 없을만한 두께로 무명베를 겹쳐 방탄복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운현궁 동남쪽 뜰에서 이 방탄복 실험이 벌어졌다. 먼저 아홉겹으로 겹친 베를 향해 서양총을 쏘아보니 뚫고 나간지라 한겹을 더해서 쏘아보고 또 한겹 더해 쏘아보길 거듭하니 열두겹 째에야 뚫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전하게 한겹 더 보태 열세겹의 방탄복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입어야 할 병사에 있었다. 그 두꺼운 방탄복에 투구와 배갑을 입고 보니 무겁고 둔하여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그 보다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운현궁에서 탄생한 방탄복은 실전에서 사용되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군측의 기록을 보면, 조선병사들이 입은 군복은 총탄을 막기 위해 1인치 이상 두꺼운데 이 옷에 불이 붙으면 꺼지지도 않고 끌 수도 없어 불에 타죽는 병사가 많았다는 것이다. 화상을 면하고자 포대 아래 바다로 뛰어드는 병사도 많았다고 적고 있다.
건양현建陽峴 (와룡동)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고개를 건양현(建陽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건양다경(建陽多慶)’에서 비롯되었으며, 창경궁과 창덕궁이 모두 조선시대 역대 임금이 머물던 곳으로서 경사스러운 일이 많았다는 뜻을 지녔다 한다.
배오개梨峴 (인의동)
종로구 인의동 112번지 지금의 해운항만청 동쪽에 있던 고개를 배오개, 한자로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인의동·종로 4가·예지동에 걸쳐 있던 마을을 이 배오개가 있으므로 해서 그 이름을 역시 배오개 혹은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이 고개의 명칭 유래는 예전 이 고개 입구에 배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배나무고개, 배고개라 하다가 세월이 가면서 음이 변하여 배오개가 되었으며, 한자로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한다. 또 하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예전 이 고개는 숲이 매우 울창하여 대낮에도 고개를 넘기가 무서워 길손 백명이 모여야 넘는다고 해서 백고개 혹은 백재라 하였는데, 백고개가 음이 변하여 배고개가 되었으며, 다시 배오개로 되었다 한다. 그리고 고개에 숲이 무성하여 짐승과 도깨비가 많다 하여 도깨비고개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배오개는 지금의 배오개길이 지나는 곳으로, 길을 넓히면서 평탄해져 고개의 흔적이 없어졌다. 배오개길은 종로 4가에서 중구청을 거쳐 동국대학교 입구까지의 폭 25m, 길이 950m의 도로로서, 이곳에 배오개가 있으므로 해서 배오개길이라 이름 지어졌다.
인의동 112번지와 48번지 일대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이현궁(梨峴宮)이 있었다. 이현궁의 명칭은 말할 것도 없이 부근에 배오개, 즉 이현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현본궁(梨峴本宮)이라고도 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왕 2년(1610) 세자빈의 간택이 있은 후 새로 수리하고 가례(嘉禮) 전에 옮겨 머물게 하는 별궁으로 삼았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의하면, 인조 원년(1623)에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비(妃)인 연주부부인 구씨(連珠府夫人 具氏)의 거소로 하면서 궁의 명칭을 계운궁(啓運宮)으로 고쳤다 한다.
후에 인조는 병자호란을 겪은 후 집이 없어진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을 이 궁에 거처하게 하였으며,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가례(嘉禮)를 이곳에서 거행하였다. 숙종 때에는 숙빈방(淑嬪房)이 되었고, 숙종 37년(1711)에는 연잉군(延仍君: 후의 영조)의 잠저(潛邸)를 이 궁안에 두기도 하였다. 정조 때에 궁이 폐지되고 그 건물을 중심으로 장용영(壯勇營)이 설치되었다가 장용영의 폐지와 함께 훈국(訓局), 동별궁(東別宮), 선혜청(宣惠廳), 동창(東倉) 등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현재 인의동 112번지는 해운항만청이 들어서 있고, 전매지국이 있던 48번지 일대는 1987년 4월부터 한국담배인삼공사 서울영업본부에서 사용하고 있다.
배오개하면 배오개시장을 떠올릴 만큼 예지동·인의동에서 종로 5, 6가에 이르는 지역에는 배오개시장이 서서 종루 앞 시전상가, 칠패시장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이름나 있었다. 배오개시장은 말할 것도 없이 인근에 배오개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배오개시장은 갖가지 상품이 갖추어진 큰 저자였다. 이곳의 상인들은 동대문을 통하여 여러 지방에서 올라온 곡물·과실·채소·포목 등을 위탁받아 판매하기도 하고, 그것을 중개하는 객주노릇을 겸하거나 지방상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잠깐 배오개시장의 성장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왕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정부가 주도하는 시전(市廛)을 설립하게 되는데, 정종 원년(1399)∼태종 14년(1414)까지 4차례에 걸쳐 행랑(行廊) 1,369간(間)이 세워졌다. 이들 시전은 독점판매권을 갖고 있었으며, 서울시민의 생필품 및 관수품의 조달과 함께 중국에 보내는 진공품 등을 공급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상거래를 엄격히 단속하여 한 시전에서 한가지 물품만을 취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규칙이 엄격하여 등록된 상품만 거래하였으며, 다른 상품을 거래할 때는 난전(亂廛)이라 하여 엄격히 처벌하였다. 대신 시전을 상·중·하의 3등급으로 구분하여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6가지 주요 생필품을 취급하는 시전들이 각각 조합을 만들어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였으며, 이들 육의전은 세금과 국역을 맡는 대가로 독점판매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관청의 허가를 받은 이러한 시전 외에도 주로 도성의 외곽지역에서 행상과 노점상들이 모여 비정규적인 소규모 시장을 꾸려 나갔다. 이러한 민간상인들은 특히 남대문 밖 칠패(七牌)와 동대문 근처 배오개, 마포 등지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꾸준히 펼쳐 16세기에는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였다. 임진왜란후 한성에는 ‘동부채칠패어(東部菜七牌魚)’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것은 동대문 근처 배오개에는 채소와 과일이 많고, 칠패에는 생선이 많다는 뜻이다. 이처럼 시전상인 외에 민간상인들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이 사상도고(私商都賈)로 성장하였다. 사상도고는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도매상인데, 생산과정을 장악하여 독점적인 매점행위를 하는 것으로 배오개와 칠패시장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와 금속화폐의 유통이 일반화되면서는 쌀과 무명 등을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삼던 종전의 상업질서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같이 활발해진 상거래를 밑거름으로 하여 객주(客主)·여각(旅閣) 등으로 불리던 민간상인들이 부를 축적하여 제도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던 시전의 금난전권에 도전하여 격렬한 상권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조 15년(1791)에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통공정책(通共政策)이 시행됨에 따라 배오개와 칠패의 상인들은 활동범위가 넓어졌으며, 일반상가로 공식 인정받아 번성기를 맞게 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의 「한양성시전도가(漢陽城市全圖歌)」 가운데,
이현(梨峴)과 종루(鐘樓) 그리고 칠패(七牌)는 온갖 공장(工匠)과 상인들이 모이는데, 도성에서도 유명한 3대 시장이라 많고 많은 물화를 따라 수레가 줄을 이었네.
라고 하는 글을 보면 이현시장(배오개시장)은 종루 앞,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유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76년 개항이 되고 외국 문물이 밀려들자 기존의 재래시장들이 변혁을 맞게 되었으며, 특히 일본상인들의 진출로 조선상인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1905년에 박승직·김종한·장두현·최익성 등이 자본금 78,000환으로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개항 후 격변기에 가까스로 파산을 면한 배오개시장과 종로상가의 상인들이었다.
광장주식회사는 188개의 점포로 구성되었다. 상인들은 종로 5가 쪽과 청계천 쪽 양편에 행랑을 짓고, 두 건물 사이에 또 한줄의 상가를 세웠다. 사람들은 이를 배오개시장 혹은 광장시장이라고 불렀는데, 이 시장은 당국으로부터 허가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장이었다. 광장시장이 특히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청량리에서 서대문까지 운행되던 전차의 정거장이 광장시장 입구인 지금의 종로 5가 지하철역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에도 광장시장은 서울의 대표적 시장이었으며,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광장시장은 그 명성을 자랑하였다. 1959년에는 김긍환 등이 중심이 되어 광장시장에서 동쪽으로 훈련원로 건너편 부지에 연건평 5,700평의 새 건물을 신축하였다. 새 시장을 기존의 광장시장과 구별하여 동대문시장이라고 하는데, 1960년대는 동대문시장의 전성기였다. 이 시장에서는 포목·의류·생선·정육·야채 등이 주로 거래되었다. 1만여 점포에 하루 평균 20여만명의 고객이 몰렸다 하며 밤에도 장사를 하여 야시장으로도 이름났다. 동대문시장은 전국 어느 곳과도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었고, 물건이 매우 풍부하여 “돈만 주면 고양이뿔도 판다”는 우스개소리도 생겨났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는 그 형세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평화시장·중부시장·경동시장·노량진시장 등이 곳곳에 생겨나 점차 시장이 전문화되어 갔고, 또 대형 백화점들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70년 정시봉 등은 동대문 서남쪽에 있던 전차차고 부지 6,300평에 현대식 6층 건물로 새로이 시장을 세우고 이를 동대문종합시장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넓은 의미로 광장시장·동대문시장·동대문종합시장을 포괄하고 있는 동대문시장은 그 뿌리를 배오개시장에 두고 있다. 오늘날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동대문시장은 포목 등의 거래에서는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으로 꼽힌다.
잣배기고개 (원남동)
종로구 원남동로터리에서 연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잣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잣배기고개라 불리었다. 이 고개 남서쪽에 있는 마을을 한 때 신민동(新民洞)이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명나라의 지사(志士)들이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왔는데, 조정에서 종묘 동북쪽 담 아래 잣배기고개 남서쪽에 살게 했으므로 신민동이라 하였다 한다.
도깨비고개獨脚峴 (연건동)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남쪽과 옛 창경초등학교의 경계지점 부근의 고개를 도깨비고개 또는 독갑이재라 하고, 한자로 독각현(獨脚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이 고개에 숲이 울창해서 도깨비가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도깨비는 우리나라의 전설이나 설화 속에 많이 등장하는데,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전해온다. 비상한 힘과 괴상한 재주를 가져 사람을 호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험상궂은 짓을 많이 한다 하였다.
동소문고개 (혜화동)
종로구 혜화동에서 성북구 돈암동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동소문고개라 하였다. 그것은 이 고개턱에 동소문(東小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에 지금 성북구 성북동 101번지 주변에 동소문이 복원되었지만, 원래는 복원된 자리가 아니고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큰 길 언덕 마루턱에 있었다.
동소문(東小門)은 혜화문(惠化門)의 속칭으로 도성 4소문의 하나이다.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함께 건설되어 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 그런데 성종 14년(1483) 창경궁을 신축하고 그 정문을 역시 홍화문이라 했으므로 2개의 홍화문이 생겨났다. 이에 중종 6년(1511)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 곳 홍화문을 혜화문으로 고친 것이다. 혜화(惠化)란 ‘은혜를 베풀어 교화 한다’는 뜻이며, 동소문은 도성의 4개 소문 가운데 동쪽 소문이므로 그렇게 불리어졌다.
동소문은 원래 다른 소문들인 광희문(光熙門)·소의문(昭義門)·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 위에 목조로 된 문루(門樓)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후로 오랫동안 홍예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영조실록』 권60 영조 20년 8월 경술조에 보면 “혜화문에 전에 문루가 없던 것을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다시 짓게 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52년만인 영조 20년(1744)에야 문루를 복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루를 복원한 후 당시의 명필 조강이(趙江履)가 혜화문(惠化門)이라 쓴 현판을 새로 달았다.
그런데 동소문 문루의 천장에는 다른 문의 문루처럼 용을 그리지 않고 봉황(鳳凰)을 채색하여 그린 것이 특색이다. 그 이유는 혜화문 밖 삼선교에서 돈암동 일대는 울창한 산림지대인지라 온갖 새들이 모여들어 농사에 피해가 컸으므로 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조류의 왕격인 봉황을 그렸다는 것이다.
동소문은 일제 때 방치되어 문루가 크게 퇴락하게 되었고, 일제가 1928년 이를 헐어버려 홍예만 남았는데, 이 마저 1939년 돈암동까지 전차선로를 연장하며 헐어버렸으므로 동소문고개, 혜화문고개, 혜화동, 동소문동 등의 명칭만 남아 있었다. 서울특별시기념표석위원회에서는 1985년 동소문터에 표석을 설치하였으며, 1994년 말 서울시에서 한양정도 600주년을 맞아 동소문고개 옆에 동소문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경도조 (京都條)에 보면,
도성의 동북쪽 문을 혜화문이라 한다. … 대개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혜화문이 정문이고, 그 외의 문은 사잇문(間門)이다.
라고 하여 도성 북대문인 숙청문(肅淸門)을 제치고 동소문인 혜화문을 북대문으로 적고 있다. 그 연유는 조선시대에 숙청문을 닫아둔 채 혜화문을 통해 경원가도(京元街道)로 출입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혜화문의 파수 자체를 남대문·동대문·서대문과 같이 출직호군(出直護軍) 30명으로 지키게 하였다. 원래 소문은 20명이 지키던 제도였다.
이렇듯 소문인 혜화문이 대문 구실을 하도록 북대문인 숙청문을 닫아두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숙청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 즉 북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고 있는 북대문으로서 남대문(숭례문)·동대문(흥인지문)·서대문(돈의문)과 함께 태조 5년(1396) 건립되었다. 그런데 17년 후인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건의하기를, 북악산의 동쪽 능선과 서쪽 능선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은 것인데, 동쪽 능선에 있는 숙청문과 서쪽 능선에 있는 창의문에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하여, 곧 숙청문과 창의문을 폐쇄하고 일대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원래 이 두 문은 높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길이 매우 험하고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으므로, 숙청문에서는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혜화문 밖 경원가도(京元街道)로 나오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고, 창의문에서도 서쪽으로 세검정 골짜기로 빠져 나와 홍제원의 경의가도(京義街道)로 나오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오히려 경원가도와 경의가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데에는 각기 혜화문과 서대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했기 때문에 숙청문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두 문은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며, 특히 숙청문은 전혀 사람이 다니지 아니 하므로 조선시대에 계속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는 북문, 즉 숙청문을 열고 남문, 즉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요,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물 때 양을 억누르고 음을 부추겨야 비가 온다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숙청문(肅淸門)은 어느 때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종실록』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숙청문을 폐쇄하게된 데에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이유 외에도 또 하나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순조 때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숙청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양주 북한산으로 통하는 숙정문 역시 지금 폐문하고 쓰지 않으니, 언제부터 막았는지 알 수가 없다. 속전된 바로는 이 성문을 열어두면 성안에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 불어댄다 하여 이를 폐했다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중하간지풍’이란 부녀자의 음풍(淫風), 곧 풍기문란을 뜻한다. 옛부터 전해오는 서울의 세시풍속을 보면, 정월 보름 이전에 부녀자들이 숙청문까지 세번만 다녀오면 그 해의 액운이 없어진다 하여 숙청문 주변에 장안 부녀자들의 출입이 매우 빈번했다는 것이다. 그저 단 한번 다녀오는 것이 아니고 정월 보름안에 세번이니까 3일을 계속 가거나 아니면 2, 3일에 한번씩 왕래했을 것이니 숙청문으로 가는 길은 장안 부녀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정월 보름 안에 세번 북문까지 갔다 오는 것이 어려워지자 차츰 정월달 안에 세번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1년 내내 아무 때나 세번 다녀오면 액운을 뗄 수 있는 것으로 변하였다.
평생을 울 안에 갇혀 살아야 했던 조선시대 부녀자들에게 이 북문 나들이는 큰 해방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며, 너도 나도 나들이를 나섰을 것임은 능히 짐작되는 일이다. 게다가 그 시대에 부녀자들이 나들이를 나선다면 결코 혼자 나서는 법이 없다. 양가집 규수나 아낙네들은 몸종 한 두명을 데리고 나섰다. 그리하니 북문 일대는 꽃밭이 되게 마련이었고 짓궂은 사내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사내 못난 것 북문에서 호강받는다.’는 옛 서울속담에서도 이 북문의 풍기를 엿볼수 있게 해준다. 여자에게 농 한번 못하던 못난 사내라도 북문에 가면 그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부녀자들에게 환대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문란한 풍기에 엄했던 조선시대의 도덕규범에 본다면 이것은 대단한 사회문제가 되었을 것이며, 북문 폐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 되었다.
어쨌든 숙청문이 폐쇄되면서 동소문의 역할이 커졌으니, 도성에서 의정부·포천·원산 등으로 가거나 반대로 경원가도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 중요시 되었으며, 동소문고개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동소문은 원래 여진족 사신의 도성출입 전용문이었다. 그 숙소인 북평관(北平館)이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 후 청을 건국한 여진족이 종전 명나라 사신이 드나들던 서대문으로 출입하면서 그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이 곳 동소문 부근에는 19세기에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라는 동리 이름이 있었다. 지금의 동소문동·동선동·삼선동·돈암동 일대를 일컫는데, 그 가운데로 성북천이 성북동 골짜기에서 흘러 청계천으로 유입되었다. 개천이 구비구비 흘러가는 곳의 남과 북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였고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조선말기에는 이곳을 군대의 연병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고종 때의 문인 이제구(李齊九)는 어느 늦은 가을날 이 일대를 지나면서 주변 경치를 시로 읊었다.
소청문(小靑門) 밖 나서니 성시(城市) 티끌 볼 수 없고,
나귀 등에선 붉은 석양이 이글거린다.
들판의 국화 시냇가의 단풍이,
서로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이루었구나.
이 시를 보면 조선말기에는 동소문을 일명 소청문(小靑門)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동소문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는 겸재 정선(鄭敾)의 「동소문」(17.5㎝×13.5㎝,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이 있다. 지금 명륜동 큰길로 꺾어지는 창경궁 모퉁이쪽 언덕 위에서 동소문을 바라본 모습인데, 원래는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뒷편과 창경궁의 동편 산줄기가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을 일제 때 새길을 내면서 현재와 같이 산 언덕을 끊어낸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양 언덕의 높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위치에서 바라본 각도이다.
동소문 옆에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무당이 살았다 한다. 예전에는 동소문 안 일대에 앵두나무가 많았다 하여 앵두나무골이라 불렀다. 현재 혜화동로터리에서 서울시장 공관, 혜성교회에 이르는 구릉 상의 언덕이 온통 앵두나무로 뒤덮혀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동소문이 헐리고 돈암동까지 전차선로가 연장되면서 성문 안 옛 정취가 사라져 버렸다.
정(情)고개 (명륜동)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내 성균관 정문에서 성균관을 안고 부엉바위 쪽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사잇길을 정(情)고개라 하고, 정고개 너머 마을이름을 정(情)골이라 불렀다.
이 정고개의 명칭 유래에는 조선시대 한 선비와 종의 딸 사이에 있었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있다. 예전 문과시험을 보기 위해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안윤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어느 날 안윤은 성균관 옆길을 오가는 대감집 종의 딸을 보고 반하여 미행 끝에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르렀고, 두 사람은 이 고개 위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동거한다는 헛소문이 나돌았고, 급기야 상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노한 상전은 종의 딸에게 가문형(家門刑)을 내렸다.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당시에 종이 신분질서를 어지럽히면 상전의 명예도 크게 다치기 때문이었다. 가문형은 자결시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명분만 자결일 뿐 대들보에 목을 매어 교수시키거나 치마에 돌을 안겨 깊은 못에 떠밀거나 하는 방법으로 타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국 종의 딸은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안윤은 밤마 고개를 배회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안윤은 밤마다 고개를 배회하다가 실성하였고 그 역시 이 고개에서 죽어갔다. 이 후 마을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하여 고개이름을 정고개라 하였다 한다.
당고개堂峴 (창신동)
종로구 창신2동 1352번지∼창신1동 22618번지 사이 고개를 당고개라 하고, 배성여자고등학교와 창신아파트 부근 마을을 당현동(堂峴洞)이라 하였다. 당고개의 명칭은 배성여자고등학교 자리가 예전에 부락제를 지냈던 도당(都堂)터였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이 곳 일대에는 조선말 순조 때부터 서울의 점술가들이 모여들어 200여호가 밀집해 있었다 한다. 이곳에 점술가들이 집단 거주했던 것은 당고개 바로 위에 있던 큰 바위에 낙산신령이 모셔져 있기 때문에 점괘가 잘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때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다고 낙산의 바위를 깨고 파헤쳐 가므로 낙산의 산신령이 떠나가 버려 점괘가 잘 나오지 않는다면서 점술가들이 대부분 미아리고개 아래로 이전했다고 한다.
서울의 고개
첫머리에
서울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북부·북서부·동북부에는 산지가 많고, 남쪽은 낮고 평평한 U자형의 개방분지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한강이 강북과 강남의 자연적 경계를 이룬다. 전반적으로는 장기간의 침식을 받아 형성된 구릉지형(丘陵地形)이지만, 한강 주변 특히 한강 이남지역에는 충적지형(沖積地形)도 넓게 분포한다. 1394년 천도 당시 서울의 지형은 북악(342.2m), 남산(232.1m), 낙산(110.9m), 인왕산(338.2m)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며, 이들 주변 산지를 따라 도성이 축조되었다. 산줄기 사이사이의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작은 하천들이 모여 청계천을 이루며 이 청계천은 동쪽으로 흐르다가 한강으로 유입된다.
현재의 서울시역은 이 보다 넓어 시외곽에 북한산(836.5m), 도봉산(739.5m), 수락산(637.7m), 불암산(507m) 등이 있고, 불광천·중랑천·왕숙천 등이 한강으로 흘러들면서 곳곳에 넓은 충적지를 발달시키고 있다. 강북에 비하면 강남에는 산지의 발달이 미약하다. 서남부와 동남부는 충적지나 낮은 구릉지로서 거의 평탄하며, 남쪽에는 비교적 높은 관악산(632m)과 청계산(493m)이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안양천·탄천·양재천 등이 북으로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면서 충적지를 발달시키고 있다.
산줄기들은 북악산에서 남쪽으로, 남산에서 북쪽으로 여러 줄기가 뻗어내려 낮은 능선과 골짜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중앙의 종로·청계천 일대는 주변 산지와 계곡에서 운반되는 토사(土砂)로 평지를 이루었을 것이다. 때문에 종로와 청계천로는 동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사이에 기복이 없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퇴계로와 율곡로는 상당한 오르내림이 있음을 지금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종로와 청계천로 일대에는 산릉을 넘는 고개는 없었으나 동서를 가로지르는 길에는 많은 고개들이 있었다.
이러한 서울지형의 특성상 서울에는 230개 이상의 많은 고개가 있었다. 여기서 230개 이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문헌상으로, 또 구전되어 내려오는 고개들을 필자가 파악한 숫자이며, 실제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왔던 고개의 숫자는 이 보다 많았을 것이다. 현재 서울시내 전체 고개의 윤곽은 매우 복잡하여 살펴보기 어려우나, 조선시대 도성 내 고개의 윤곽을 알아보기 위하여 당시의 도성 내 지형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북악산에서 남쪽으로 뻗어있는 산줄기의 고개를 보면, 삼선교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동소문고개이고, 혜화동·명륜동에서 뻗어내린 작은 산줄기를 넘는 고개가 서울대 부속병원과 창경궁 정문 북쪽 사이의 박석고개(薄石峴)이다. 그리고 그 남쪽 동대문경찰서 부근에서 종로 5가로 넘어가는 고개가 배오개(梨峴)이다. 그 서쪽에는 계동의 고지가 있고, (주)현대 본사건물 앞길에는 조선시대에 관상감(觀象監)이 있어 관상감현이라고도 하고, 그 전신인 서운관(書雲館) 자리라 하여 운현(雲峴)이라 하였다. 그 다음 가회동의 지맥이 한국일보사에 이르는데, 그 앞길은 솔재(松峴)이고 그 북쪽이 송현동이다. 이 작은 산줄기는 북쪽으로 삼청동에 이르는데, 전 경기고등학교 북쪽 고개가 맹현(孟峴)이다.
인왕산 역시 많은 산줄기를 뻗었다. 내자동 부근을 남정문재(南征門峴), 당주동 중부를 야주개(夜珠峴)라 하고, 서울시청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도 언덕이 있었고 광화문 사거리 부근에 황토마루(黃土峴)가 있었다. 인왕산 서사면에는 현저동 북서쪽에 통일로로 통하는 무악재가 있다.
남산 북사면의 지맥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국대학교가 자리잡은 줄기이다. 이 줄기는 충무로에서 을지로까지 뻗는데, 여기에 풀무재(冶峴)가 있었다. 그 서쪽에 또 한 줄기가 을지로로 다가오는데 여기가 인현(仁峴)이고, 을지로를 횡단하는 근방에 구리개(銅峴)가 있었다. 그 서쪽 줄기는 충무로를 지나는데서 진고개(泥峴)가 되고, 명동성당이 있는 북고개(鐘峴)가 된다. 이 밖에도 마포로 나가는 애오개(阿峴), 신촌으로 나가는 대현(大峴), 의정부로 나가는 미아리고개, 청량리에서 양주로 나가는 망우리고개 등이 있다.
이러한 고개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변모되었다. 그나마 고개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악재·남태령·미아리고개·망우리고개 등 몇몇 큰 고개들 뿐이며, 대부분은 1960년대 이후 도로가 확장되고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깎여져서 고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많다.
고개의 흔적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 이름들은 지금도 동네이름으로, 지하철역 이름으로 남아 있어 우리에게 친숙한 느낌을 준다. 고개이름이 동명으로 남아있는 것은 인현동(仁峴洞), 송현동(松峴洞), 아현동(阿峴洞), 만리동(萬里洞), 무악동(毋岳洞), 망우동(忘憂洞) 등이 있으며, 지하철역 이름으로는 3호선에 무악재역이, 4호선의 남태령역·당고개역이 있으며, 5호선의 애오개역, 6호선의 버티고개역, 7호선의 장승배기역이 있다.
예전 인적이 뜸하고 수목이 울창한 험한 고갯길에는 호랑이·여우와 도적떼가 출몰하여 길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80여년 전만 하더라도 무악재에는 호랑이가 나타나 길손들을 괴롭혔으며, 호환(虎患)을 막기 위하여 군인들이 길손들을 모아 호송하였다 한다. 때문에 고개에는 서낭당이 많았다. 험한 고개를 무사히 넘게 해달라는 길손들의 기원이 담겨 서낭당이 생겨났으며, 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주막이 있게 마련이었다. 현재 남아 전하는 서울시내 고개이름 가운데 서낭당이고개, 서낭당고개, 사당이고개, 도당재 등으로 불리어지는 곳이 12곳이다.
이와 같은 고개에는 많은 전설들이 전하여 오고 있다. 호랑이·여우 등 동물에 얽힌 이야기, 풍수지리에 관련된 이야기, 고관·위인들에 얽힌 전설 등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곧 우리 선조들의 애환과 삶의 숨결이 배어있는 것들이다. 이제 각 구(區)별로 고개이름의 유래, 고개의 연혁, 전설, 문화유적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종로구
황토마루黃土峴 (세종로)
지금의 세종로와 신문로, 종로가 엇갈리는 네거리 남쪽 고개를 황토마루라 하고, 한자로 황토현(黃土峴)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고개를 중심으로 세종로와 신문로 1가에 걸쳐 있던 마을을 동령동(東嶺洞)이라 하였다. 마을에 황토마루가 있다 하여 ‘구리색의 누런 빛이 나는 고개가 있는 마을’의 의미로 동령동(銅嶺洞)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동령동(東嶺洞)이 되었다 한다.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과 궁궐, 관아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이곳 세종로는 한성부의 심장부가 되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남쪽으로 나 있는 대로 양편으로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중추원(中樞院), 사헌부(司憲府), 한성부(漢城府) 등의 관아건물들이 자리하여 여기를 육조(六曹)거리라 하였다. 육조거리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동서로 난 간선도로와 만나면서 끝이 나고 그 남쪽이 바로 황토마루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태평로(太平路)가 트여서 남대문까지 대로가 뻗었지만 애초에는 큰 길이 없었다. 즉 1914년 태평로가 폭 27m로 개통되기 전에는 남대문까지의 길은 종로를 돌아서 가는 지금의 남대문로였다. 황토마루 남쪽으로는 지금 프레스센터 자리에 군기시(軍器寺)가 있었고, 지금 정동 일대에는 태조의 비(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과 그 원당(願堂)인 흥천사(興天寺)가 있었으며 그 남쪽으로 태평관(太平館)이 자리하였다.
조선시대 경복궁과 서울의 주산(主山)인 백악(白岳)이 빚어내는 경관은 이 황토마루 위에서 바라볼 때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폭 50여척의 대로 양편으로 관아건물과 그 부속건물들이 들어서고 그 건물들의 담장과 처마, 지붕이 일렬로 늘어선 뒤로 광화문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고, 광화문 문루 어깨 너머로 경복궁의 전각들과 지붕의 선이 겹쳐지고, 다시 그 뒤로 백악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모습은 정녕 조선왕조의 위엄을 상징하였다 할 것이다.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길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세종로(世宗路)는 비각(碑閣)에서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광화문에 이르는 가로명이자 법정동의 명칭이다. 세종로는 길이는 600m에 불과하지만 폭은 10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도로이다. 세종로는 조선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이 넓은 길이었으며, 1912년 일제가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京城城市改修預定計劃)을 세워 세워 29개 노선을 고시하고 2년 후 1914년에 광화문에서 황토마루까지 도로를 개수하였다. 그 후 1936년 조선총독부고시 제722호로 이 도로의 폭을 30간(약 53m)으로 지정하였으니 지금의 절반 정도 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의 명칭을 육조거리, 육조앞이라 칭하였으며, 일제 때에는 1914년 4월 1일부터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 개칭하였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본식 동명을 우리 명칭으로 개칭할 때 동명(洞名)을 세종로라 고치고 도로명 역시 세종로라 하였다. 그것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기리기 위함에서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종로는 조선시대에 육조거리로 불리어온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부였으며, 지금도 세종로 서쪽에는 정부종합청사가, 동쪽에는 문화체육부와 미국대사관이 위치하고 있어 육조거리의 명맥을 600여년 동안 이어 오고 있다. 이 일대에는 지금도 옛 관청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토목·건축을 담당하던 공조(工曹)가 있었으므로 그 뒤쪽 동네를 공후동(工後洞) 혹은 공조뒷골이라 하였으며, 동아일보사와 교보빌딩 뒤쪽은 조선시대에 주석(놋쇠)을 파는 주석전이 있었으므로 주석전골 혹은 두석동(豆錫洞)이라 하였다.
세종로 네거리 동북편에 광무 6년(1902)에 세워진 비각(碑閣)이 서 있는데, 이것이 1969년 7월 18일 사적 제171호로 지정된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高宗卽位四十年稱慶記念碑)’이다. 비문을 읽어보면 그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40년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記念碑)’라 씌어 있다. ‘보령망육순(寶齡望六旬)’이라 함은 임금의 나이가 60세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51세란 말이며, ‘어극40년(御極四十年)’이라 함은 임금이 왕위에 오른지 40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곧 고종이 51세가 되고 왕위에 오른지 40년이 된 것을 기념해서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이 비각의 철제격자문(鐵製格子門)의 문임방(門楣)에 ‘만세문(萬歲門)’이라 새겼는데, 당시 영왕(英王)이던 이은(李垠)의 글씨이다.
비각 바로 앞에는 도로원표(道路元標)가 놓여 있다. 이 표석은 서울의 시가지 원표인데, 1914년에 설치되었다. 원래는 세종로 분리대의 이순신장군동상이 세워진 아래에 놓여 있었는데 이곳에 옮겨졌다.
남정문재-南征門峴 (필운동)
종로구 필운동 277번지와 내자동 147번지 사이에 있었던 고개를 남정문재, 한자로 남정문현(南征門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사직단(社稷壇) 정문턱 언저리인 이곳에 남정문(南征門)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고개 주위에 형성된 마을을 남정동(南征洞)이라 하였다.
붉은재紅峴 (화 동)
종로구 화동 22번지 정독도서관 남쪽에 있던 고개를 붉은재, 한자로 홍현(紅峴)이라 하였다. 그 연유는 고개의 흙이 다른 곳에 비해 빛깔이 붉었기 때문이라 한다.
맹 현孟峴 (삼청동)
종로구 삼청동 정독도서관 뒤 가회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바지 일대(삼청동 35119)를 맹현(孟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이곳에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孟思誠)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후손으로 숙종 때 황해·충청도감사를 지낸 맹만택(孟萬澤)도 이곳에서 살았으므로 이 일대를 맹동산이라 불렀다. 서울의 수많은 고개 가운데 개인을 지칭하여 명칭이 유래된 것은 이 고개가 유일한 것으로서, 그만큼 맹사성이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1360) 온양에서 태어나 세종 20년(1438) 79세로 세상을 떠난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창(新昌)이며,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이다. 고려 수문전 제학(修文殿 提學) 맹희도(孟希道)의 아들로 최영장군의 손자사위이다.
그는 고려 우왕 12년(1386)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로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역성혁명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조선 건국 후에도 계속 승진하여 태종 7년(1407)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이 후 판한성부사, 우부빈객, 대사헌, 판중추부사, 예조·호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가 좌·우의정을 지낼 때 영의정이 곧 명재상 황희(黃喜)였으며, 그의 정책은 대체로 황희와 일치하여 국정을 잘 운영하였으며, 세종으로부터도 깊은 신임을 받았다. 특히 그는 과거제도와 문교정책에 많이 간여하였으며, 무리하거나 급박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공과 사의 구분이 분명했지만 평소에는 조용하고 소탈하면서 유머를 즐길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랫사람에게는 자상하면서 엄하지 않았고 예의와 체면에 얽매이지 않아 평복을 입고 소 타는 것을 즐겨하였다. 집에 사람이 찾아오면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 맞아 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관료들 사이에는 같은 나이끼리 계를 조직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는 경자생(庚子生)이면서 장난으로 3살 아래인 계묘계(癸卯契)에 들어 어울려 지냈다고 하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세종이 그의 나이를 묻는 통에 들통이 나서 웃음꺼리가 되었다 한다. 상하구분과 예의범절이 엄격하던 당시에 이러한 파격적 행동은 그의 소탈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그 때문인지 그의 이러한 면모와 관련된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그가 온양에 근친(覲親: 관리가 휴가를 얻어 부모님을 찾아 뵙는 것)하여 오고 갈 때면 늘 간소한 행차를 하였고 소를 타고 가기도 하였다. 하루는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의 수령들이 그가 온양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길목인 장호원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소를 탄 어느 사람이 태연히 그들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에 수령들이 노하여 하인을 시켜 불러오게 하니, 그가 하인에게 이르기를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라고 하였다. 하인이 돌아와 고했더니 수령들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그만 못에 관인(官印)을 빠뜨리고 말았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그 못을 ‘도장을 빠뜨린 못’이라 하여 인침연(印沈淵)이라 하였다 한다.
또 하나 일화를 소개하면,
어느 날인가 맹사성이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비를 만나 길가 정자로 비를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행차를 성하게 꾸민 한 젊은 사람이 먼저 누상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는 아래층에서 비를 피했다. 젊은 사람은 영남사람으로 의정부의 하급 실무직인 녹사(錄事) 시험에 응시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맹사성을 누상으로 불러 올리고는 이야기도 하고 장기도 두게 되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심심풀이 삼아 말 끝에 ‘공(公)’ ‘당(堂)’자를 넣어 문답을 하기로 하였다. 맹사성이 먼저 물었다. ‘무엇하러 서울 가는공’하니 젊은이는 ‘벼슬 구하러 간당'하는 것이었다. ‘무슨 벼슬인공’ ‘녹사 시험이란당’ ‘내가 시켜주겠는공’ ‘웃기지 말랑’ 하였다.
그 후 그 영남사람이 시험에 합격하여 인사차 의정부에 들렀는데, 맹사성이 단상에 앉아 있다가 ‘어떠한공’ 하고 물으니 그가 비로소 깨닫고 사색이 되어 ‘죽어지이당’이라 하니 주위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이상하게 여겼다. 맹사성은 그를 녹사로 삼았고 나중에 맹사성의 추천으로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공당문답’이라 하였다 한다.
그는 음률에 조예가 깊어 박연(朴堧)이 아악(雅樂)을 정리할 때 매양 그의 자문을 받았으며, 스스로 악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한다. 그가 즐겨 불었다는 옥퉁소는 지금 아산 온양 고택(古宅)에 가보로 전해온다. 평소 피리 불기를 좋아하여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이르러 피리소리가 들리면 그가 있음을 알았다 한다. 그러나 사적으로 청탁하러 온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 안에서 피리만 불면서 스스로 돌아가게 하였고, 공무로 찾아온 사람은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한다.
그는 또한 청백리(淸白吏)로서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안 포단에 앉았는데, 집은 좁고 비가 샜다. 하루는 병조판서가 공무로 그의 집을 찾았는데, 때마침 소낙비가 내려 집안 곳곳에 비가 새어 의관이 모두 젖어버렸다. 이에 병조판서가 크게 깨닫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 집에 짓고 있던 바깥 행랑채를 뜯어버렸다고 한다.
솔 재松 峴 (송현동)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미대사관 직원용 제2관사 사이에 있던 고개를 솔재, 한자로 송현(松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예전 고개 주위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므로 불리어졌으며, 이 곳 송현동 뿐 아니라 수송동과 중학동에 걸쳐 소나무가 무성하였다 한다. 송현이 있으므로 해서 지금의 송현동(松峴洞)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태조실록』 권13 태조 7년 4월 임신조(壬申條)에 “경복궁 좌강(左岡)의 소나무가 번성하므로 인근의 인가를 철거토록 명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일대의 소나무는 국가에서까지 보호할 만큼 울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솔재는 지금은 많이 낮추어지고 넓혀져 포장되었지만 예전에는 높고 험한 고갯길이었음을 17∼18세기에 그려진 서울의 옛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곳 솔재에는 태조 7년(1398)에 있었던 제1차 왕자의 난에 얽힌 일화가 있다. 솔재에는 남은(南誾)이 살았는데, 태조의 여덟번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앞장섰던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 등이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날 이곳 남은의 집에 모여 있다가 정안군(靖安君: 후의 태종) 일당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솔재는 1911년 도시계획에 따라 폭이 12간으로 넓혀지면서 고개가 많이 깎여 낮아졌다. 서울에는 이곳의 송현과 소공동의 송현 두 곳이 있었는데, 이 곳이 북쪽이므로 북송현, 소공동쪽을 남송현이라 하였다.
박석고개薄石峴 (수송동)
종로구 수송동과 조계사 사이의 고개를 박석고개, 한자로 박석현(薄石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이 고갯길이 비가 오면 질퍽해서 통행이 불편하여 박석을 깔았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박석고개의 동쪽 마을을 동골(東谷), 서쪽 마을을 박동이라 하였다.
자하문고개창의문고개 (부암동)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자하문고개 혹은 창의문고개라 하였다. 고개 마루턱에 자하문(紫霞門)이 있으므로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자하문의 정식 이름은 창의문(彰義門)으로서 도성의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에서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있다. 창의문을 속칭 자하문이라 한 것은 창의문이 자핫골(지금의 청운동)에 있으므로 해서 생긴 속칭이다. 청운동 일대는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이라 하였다.
그리고 창의문을 장의문(莊義門 혹은 藏義門)이라고도 하였는데, 그로 해서 청운동·적선동 일대를 장의동(莊義洞), 줄여서 장동(莊洞)이라 칭하였다. 또 성밖 신영동에 있던 장의사(藏義寺)의 이름에 연유하여 일명 장의문(藏義門)이라고도 하였다.
창의문은 도성 4소문의 하나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의 서쪽 날개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태조 5년(1396) 서울성곽과 4대문 4소문이 건설될 때 함께 건립되었다. 그런데 창의문은 건립된지 18년 만에 한때 폐쇄되기도 하였다. 즉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백악산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아니 된다 하여 동령에 있는 숙청문과 서령에 있는 창의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두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원래 이 두 문은 높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길이 매우 험하고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으므로 숙청문에서는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 밖 경원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고, 창의문에서는 서쪽으로 세검정 골짜기로 빠져 나와 홍제원의 경의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또한 경원가도와 경의가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데에는 각기 동소문과 서소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하므로 두 문을 폐쇄하여도 별반 지장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후 세종 28년(1446)에 창의문에 대한 출입통제가 완화되어 왕명을 받아 출입하는 외에는 항상 닫고 열지 않도록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에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보면 항상 닫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도성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창의문은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정면 4간, 측면 2간,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이 목재 문루는 견실하고 정교하며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 또한 아담하다.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연속되어 있다.
다락에는 나무로 만든 큰 닭을 걸어 놓았는데, 그 까닭은 문 밖의 지세(地勢)가 지네와 흡사하기 때문에 그 기세를 제압하기 위하여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양을 만들어 걸어놓았다 한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1623) 이귀(李貴)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金),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李曙軍)과 이천의 이중로군(李重老軍)은 홍제원에서 김유군(金軍)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창의문을 나서면 부암동(付岩洞)이 된다. 1970년까지만 해도 창의문에서 세검정으로 가는 길 가 동쪽 부암동 134번지에 높이 2m 쯤 되는 부침바위(付岩)가 있었다. 부암동 동명은 이 부침바위가 있으므로 해서 유래되었다. 부침바위의 표면은 마치 벌집 모양 송송 뚫어진 것처럼 오목오목하게 패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 수대로 문지르다가 손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착 붙으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서 여인들이 돌을 붙이려 애쓴 흔적이 벌집처럼 보이게 되었고 바위의 이름도 유래되었다.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바위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여인들이 바위에 돌을 붙여놓고 정성스럽게 절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부침바위에 대한 유래는 고려 중엽 몽고의 침입을 받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많은 장정들이 원나라에 끌려갔는데, 그 중에는 신혼초야를 지낸 신랑도 섞여 있었다 한다. 혼인 하룻만에 생이별을 한 신부는 매일 소복을 하고 부침바위에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된 왕이 원나라 조정에 그 뜻을 전하여 마침내 신랑이 돌아와 부부가 상봉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소복을 하고 매일 같이 기도를 하며 빌 때는 바위에 붙인 돌이 떨어졌는데, 부부가 상봉한 후에는 붙인 돌이 그대로 있다 하여 부침바위라 하게 된 것이다. 이후 부터 아들 낳기를 바라거나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려는 부모들이 이 바위에 돌을 붙이고 빌었다 한다.
자하문고개, 자하문 밖 한길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간 부암동 산 161번지 넓은 터전에는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6호인 석파정(石坡亭)이 자리하고 있다. 주위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정교 화려한 정자와 건물이 어울려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으로 꼽히는 석파정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다. 바위에 삼계동(三溪洞)이란 글자를 새겨 놓아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별장을 차지하면서 앞산이 바위산이었으므로 대원군이 아호를 석파(石坡)라 하고 정자이름을 석파정(石坡亭)이라 하였다.
경내에는 안태각(安泰閣), 낙안당(樂安堂), 망원정(望遠亭),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 등 7동의 주요 건물이 남아 있으며, 뜰에는 오래 된 소나무들이 차일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사랑채는 1958년 종로구 홍지동으로 옮겨져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석파정의 원래 소유자는 안동김씨의 세도가 김흥근이었다. 아버지 김명순(金明淳)이 순조의 장인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과 사촌간이며, 일찍이 벼슬에 올라 예조판서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성격이 격하고 방자한 면이 있어 한 때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당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대원군이 집권의 야욕을 보이자 조의석상(朝議席上)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함으로서 대원군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원군이 집권한 후 많은 토지를 빼앗겼다.
특히 그가 소유했던 석파정은 장안에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 있어서 대원군이 팔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팔지 않았다. 이에 대원군이 한가지 꾀를 내어 그에게 하룻동안 석파정을 빌려줄 것을 간청하여 허락받았는데, 대원군은 그의 아들 고종을 대동하고 다녀 갔다. 국법에 임금이 와서 묵고 간 곳에는 신하가 감히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석파정은 대원군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석파정은 세습되어 이희(李喜)·이준(李埈)·이우(李)의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후 천주교 주관의 콜롬비아고아원에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개인 소유이다.
자하문고개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청운동(淸雲洞)으로, 그 동명 유래는 종전의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지금 청운초등학교 뒤쪽 일대의 청풍계는 인조 때의 문신 김상용(金尙容)이 청풍각(淸風閣)·태고정(太古亭) 등을 짓고 거주하던 곳으로, 많은 명사들이 찾아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후에도 청풍계의 건물들은 잘 보존되었으며, 조선후기에 그 집안인 안동김씨가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임금이 때로 태고정 등을 찾음으로서 청풍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인왕산의 동쪽 기슭, 자하문고개 아래에 위치한 백운동은 산이 그렇게 높지 않고 골짜기가 그렇게 깊지 않지만 작고 큰 산자락들이 둘러 앉고 푸른 소나무숲 사이 작은 길에는 덩굴나무들이 엉켜 있었으며, 그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아침 저녁으로는 흰구름이 덮여 있었으니 도성에서 가까운 명승지로서 많은 명사들이 이곳을 찾아 자연을 벗하였다고 한다.
자하문고개를 넘어 신영동 1686번지에는 정자 세검정(洗劒亭)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일대를 세검정동이라 하였으며, 세검정동은 다시 세검동으로 약칭되어 온다. 따라서 세검동은 현재 법정동명도 행정동명도 아니지만 신영동은 물론 자하문고개를 넘어서부터 홍지문안 북한산과 백악 뒤의 여러 골짜기 일대가 대개 세검동으로 불리어 왔다. 이러한 깊고 넓은 계곡, 그 중에서도 수석과 좌우 산림풍경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은 것이 세검정이었다.
예전 세검정 주위는 동령폭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바위 위로 소리내어 흘러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더구나 여름 장마철이 되면 많은 물이 모여서 부근 계곡에 넘쳐 흘러 일대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도성안 사람들이 많이 나가 넘쳐 흐르는 물결을 구경하였는데, 이를 연중행사로 삼았다 한다. 또 정자 앞에는 넓은 바위들이 깔려 있고 그 바위들은 물에 갈려서 깨끗하고 매끄럽기가 비단폭 같았으므로 평상시에는 근처의 학동들이 붓과 먹을 들고 나가 글씨를 연습하여 먹물 흔적이 가실 날이 없었다 한다.
세검정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먼저 인조반정 때의 이야기로서,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이괄을 비롯한 이귀·김자점·김유 등이 자하문 밖 이 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서 칼을 씻었다 하여 정자의 이름을 세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숙종 45년(1719)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고 평창(平倉) 등 시설을 그 부근에 두었으며, 영조 때에는 군문(軍門)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설치하고 종래 북한산성의 업무를 관장하던 경리청(經理廳)도 총융청과 합하니 이 곳은 국방의 요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때는 또 탕춘대의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고치고 왕이 때때로 거둥하여 장병들의 무예를 시험하기도 했으며, 300여간의 연융대 청사를 새로 지었다. 신영동(新營洞)의 동명은 새 군영(軍營)이 들어섰다 하여 붙여졌다. 이렇게 군사시설이 증대되면서 연융대 앞 시냇물이 흐르는 바위 위에 정자를 지으니 장병과 관민들이 수시로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정자 이름을 세검(洗劒)이라 한 것은 장소가 군영 앞이요, 또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공하였던 사실을 기념하면서 ‘칼을 씻어 칼집에 거둔다.’ 곧 평화를 구가한다는 뜻이었다 한다.
세검정은 1941년 부근의 종이공장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주초석(柱礎石)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5월에 복원하였다. 복원된 정자는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정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암반 위에 4각 장초석(長礎石)을 세우 고마루를 꾸몄으며 5평 반 가량의 규모로 기둥머리에는 익공계(翼工系) 양식의 간결한 수법으로 결구(結構)하였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세검동 일대는 산이 높고 물이 맑아 경치는 좋으나 논밭이 없고 다른 생산이 없어서 주민들이 생활고를 못이겨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한성시전(漢城市廛)에서 매매되는 포목의 마전(麻廛)과 각 관청에서 쓰는 메주와 종이 제조의 권리를 이 곳 사람들에게 주어서 생활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제야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면서 이 곳에 알맞는 여러 과목(果木)을 심어서 능금·자두밭으로 개발하여 생활의 자립을 확립하였다 한다. 세검동 일대는 봄에는 온갖 꽃의 아름다운 빛, 여름에는 싱싱한 과실, 가을에는 불타는 듯한 단풍, 다듬은 듯한 반석(盤石), 옥같이 맑은 시냇물이 온 골짜기를 장식하였다. 특히 세검동 일대는 능금과 자두의 명산지를 이루었다.
한편 자하문고개에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 침투를 막기 위해 최후로 이를 검문하다 순직한 당시 종로경찰서장 고 최규식경무관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1년 9월 9일 출생, 1968년 1월 21일 순직. 그는 용감한 정의인으로 종로경찰서에 재직 중 청와대를 습격하여 오는 공산유격대와 싸우다가 장렬하게도 전사하므로 정부는 경무관의 계급과 태극무공훈장을 내렸다. 비록 한 때의 비극 속에서 육신의 생명은 짧았으나 의를 위하는 그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 남으리라.
그리고 당시 최경무관과 함께 순직한 고 정종수경사의 순직비도 세워져 있다.
조석(朝夕)고개 (부암동)
종로구 부암동에서 신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조석(朝夕)고개라 하였다. 부암동 1311번지∼신영동 1506번지로 창의문 밖 버스종점에서 내려 세검정초등학교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지름길 중간에 있는 고개이다. 그 명칭 유래는 어려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성안으로 품팔이를 가는 가난한 서민들이 아침 저녁으로 넘어 다녔던 고개라 하여 조석고개라 하였다 한다.
이 고개는 신영동·구기동·평창동 주민들이 넘어 다녔는데, 고개의 폭이 좁고 험하였으며, 저녁에는 앞 뒤 사람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몹시 어두웠기 때문에 기다시피 넘어 다녔다 한다.
탕춘대고개조세고개(홍지동)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정자에서 평창동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를 탕춘대고개 혹은 조세고개라 하였다.
탕춘대고개의 명칭 유래는 고개의 오른쪽 언덕에 조선시대 연산군의 놀이터로서 탕춘대(蕩春臺)란 정자가 있었고,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을 쌓은 다음 숙종 45년(1719) 북한산성과 도성을 연결하는 새 성을 쌓고 그 명칭을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 하였으므로 연유한다. 그리고 조세고개의 명칭 유래는 고개 부근에 조선시대에 조지서(造紙署)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서를 일명 조세라고도 하였으므로 조세고개라 불리었다.
자하문 밖 세검정 일대를 지금도 탕춘대라 부르는데, 이는 연산군 때에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사찰 장의사(藏義寺)를 이궁(離宮)으로 쓰면서 그 아래 경치 좋은 언덕을 놀이터로 쓰면서 시작되었다. ‘탕춘(蕩春)’이란 봄기운을 만끽한다는 뜻으로 연산군이 질탕하게 놀기를 좋아하여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연산군 11년(1505)에 경치 좋은 이 곳에 탕춘대를 짓고 그 앞 시냇가에는 수각(水閣)을 세우고 유리를 끼워 냇가를 볼 수 있도록 하여 궁녀들과 놀았다 한다. 이 때 자하문과 홍은동 쪽을 막게 하여 도성민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보면,
창의문 밖 삼각·백운 두 산 사이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어서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아 연산군이 이궁(離宮)을 설치하고 수각(水閣)과 탕춘대와 석조를 꾸며 연희궁 놀이터와 함께 수시로 드나들면서 궁녀들과 놀았다.
고 하였다. 실제 탕춘대가 있던 부근의 시냇물이 감돌아 흐르는 신영동 137, 139, 141∼144번지 일대에는 승목소라는 마을이 있었고, 장의사계곡은 봄철의 꽃, 여름의 과일, 가을의 단풍이 어우러져 세검정 일대의 수석과 함께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였다. 이러하므로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 시인과 묵객들이 줄지어 찾았던 곳이며, 1970년대 초까지도 각급 학교의 소풍장소로서 애용되던 곳이었다.
이 때 놀이터의 중심이 된 장의사는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창건되었다. 신라 장수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이 백제와의 황산벌전투에서 전사하자 그 충의와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 절은 많은 고승들이 거쳐 갔고, 고려 현종 이후에는 왕과 왕비가 자주 불공을 드리러 가던 큰 사찰이었다.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서울 근교의 명소로 열손가락 안에 꼽혔다. 이러한 까닭에 세종 8년(1426)에는 이 절에 독서당을 설치하고 집현전 학사 가운데 자질이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서 휴가를 주어 공부에 진력하게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에 와서 이 제도도 없어지고 유서 깊은 절은 한낱 놀이터의 중심이 되고 말았으니, 그 놀이터의 이름이 바로 탕춘대였다.
1623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이 곳은 폐허가 되었는데, 영조 23년(1747) 삼청동에 있던 총융청(摠戎廳)을 이 곳 장의사터로 이전하면서 탕춘대는 연융대(鍊戎臺)라 고쳐 불리었다. 총융청은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겪은 후 군대를 정비할 목적으로 사직동 북쪽에 설치했다가 현종 10년(1669)에 삼청동으로 청사를 옮겼었다. 그러다가 영조 23년(1747) 북한산성을 관리하는 관청인 경리청(經理廳)을 폐지하고 그 관원들을 총융청에 이속시키면서 이 곳 장의사터로 이전한 것이다. 이 때부터 총융청의 감독 아래 북한산성관성장(北漢山城管城將)을 따로 두고 동시에 승병 350명을 지휘하게 하였다. 총융청은 지금의 수도경비사령부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고종 21년(1884)까지 존속하였다.
탕춘대성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청군에게 항복한 수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숙종 28년(1702)부터 북한산성의 축성 논의가 시작되어 찬반 양론 끝에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이 완성된 후 8년 후인 숙종 45년(1719)에 축조되었다. 즉, 국가 유사시에 북한산성에서 수비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탕춘대 일대에 창고를 짓고 군량을 저장해야 하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탕춘대성을 축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10월 6일까지 약 40일간 공사를 진행하여 전체 성 길이의 절반 가량을 쌓았는데, 자하문 서쪽 탕춘대성이 시작되는 곳에는 토성(土城)으로, 그 외는 석성(石城)으로 하였다. 성의 높이는 3.03m이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공사는 이듬해 2월부터 시작하여 약 40일만에 완공되었다.
공사에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문과 도성민이 동원되었으며, 성곽의 길이는 북한산 비봉에서부터 구기터널·홍지문을 거쳐 인왕산 정상까지 약 4㎞가 된다. 축성된 성 안에는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 창고·상평창·하평창 등 주요 군사시설을 설치하였다. 탕춘대성은 한마디로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성으로 축성 당시에는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성(西城)이라 불리었으나 후에 탕춘대성이라 정식 명명되었다.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체성(體城)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한편 모래내 옆을 지나는 세검정길을 내려가다 보면 성곽이 끊어진 곳, 홍지동 산24번지에 홍지문(弘智門)이 있다. 이 문은 숙종 45년(1719) 탕춘대성을 축조하면서 건축한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축조 당시에는 한성의 북쪽 문이라 하여 한북문(漢北門)이라 하고, 또는 북쪽을 호위한다는 뜻으로 한북문(北門)이라 하였는데,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써서 달게한 후로 공식명칭을 홍지문이라 하였다.
홍지문은 화강암으로 축조되어 중앙부에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이 꾸며진 위에 단층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부분 둘레에는 여장(女墻)이 둘러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정면 3간, 측면 2간에 우진각 지붕이며 사방이 틔어 있다.
이 성문에 잇대어 성벽은 모래내를 가로 질러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수문은 물이 빠져 흘러 내리게 한 화강암 월단이 5개 옆으로 늘어서 있는데, 총 길이 26.72m, 폭 6.8m, 높이 5.23m이다. 월단마다 수구(水口)의 규모는 폭 3.76m, 높이 2.78m이다. 홍지문은 원래 문루가 퇴락한데다 1921년 1월에 붕괴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대홍수로 인해 오간대수문마저 떠내려 갔다. 그 후 1977년 7월 서울시에서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복원하였다. 복원 당시 현판 글씨는 고 박정희대통령이 썼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1976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탕춘대고개를 일명 조세고개라고도 하였는데, 조세고개의 명칭 유래가 된 조지서(造紙署)는 조선시대에 종이를 제조하는 사무와 지장(紙匠)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던 관아이다. 조지서는 지금 세검정초등학교 동북쪽 신영동 196번지 일대의 세검정길 일부와 가로변에 위치하였다. 서울특별시기념표석위원회는 1987년 이 조지서터에 기념 표석(標石)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인 지장(紙匠)들은 조지서 주위에 모여 살았다. 종이 제조공장을 이 곳에 세운 것은 주위가 낮은 산으로 둘러 싸여 종이 원료인 닥나무 재배에 유리하였을 뿐 아니라 삶아낸 닥나무 껍질을 헹구어내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맑은 물이 북한산에서 흘러 내려와 홍제천(모래내)을 이루고 주위에 반석(盤石)이 많아서 종이를 제조하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본사료인 사관(史官)이 쓴 사초(史草)를 실록 편찬이 끝난 후에는 이 곳 세검정 일대의 맑은 물에 종이의 먹물을 씻어내렸다. 종이가 귀했던 당시에는 닥을 원료로 해서 만든 한지(韓紙)를 한번 썼다 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종이의 먹물을 맑은 물로 씻어내고 절구통에 넣고 빻은 다음 다시 물에 풀어 환지라는 재생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종이 제조공장이 이 곳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종이 제조공장은 태종 15년(1415) 7월 호조의 건의에 따라 처음 조지소(造紙所)라는 명칭으로 이곳에 설치되었다. 태종이 이곳에 조지소를 설치한 것은 태종 10년(1410)에 지폐인 저화(楮貨)를 통용하게 되자 이를 만들 종이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태종 때의 조지소는 단지 저화지의 생산에 그치고 다른 용도의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았던 듯하다. 이 후 본격적인 종이 제조업무를 맡은 조지소의 설치는 세종 때로서 세종 16년(1434)이 되면 종이 만드는 능력이 『자치통감(資治通鑑)』 5만권을 인쇄할 수 있는 분량에 이르렀다. 세종은 단순한 종이 생산에만 만족하지 않고 기술 개량과 외국의 선진 종이 제조기술을 도입하는데 힘썼다.
조지소는 세조 12년(1466) 조지서(造紙署)로 개편되었는데, 건물이 100여간에 이르렀다. 그 편성을 보면 경관직(京官職)에 제조(提調) 1명, 사지(司紙) 1명, 별제(別提) 1명을 두고 기술직으로 공조(工造) 4명과 공작(工作) 2명이 배속되어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였다. 실무 기술자로서 지장(紙匠) 81명, 염장(匠) 8명, 목장(木匠) 2명 등 모두 91명의 장인(匠人)들이 배치되었고, 이들의 보조원으로 차비노(差備奴) 90명과 거수노(踞隨奴) 4명이 딸려 잡일을 도왔다하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조지서는 이 후 고종 19년(1882)에 폐쇄되기까지 각종 종이 제조와 종이공장 관리를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전국에서 제조되는 종이 가운데 조지서의 제품이 그 종류와 질에서 최상품으로 꼽혔다. 생산품은 왕실이나 국가기관에서 사용하였고, 중국에 조공품으로 보내졌다. 그러므로 조지서의 종이 생산품은 항상 최상의 것이 요구되었으며, 그 질이 떨어지는 경우 매우 엄한 벌을 받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종이 제조과정에서 지장(紙匠)의 처음 잘못에는 매 80대를 때리며,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10대씩 더하여 100대에 이르도록 규정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관영수공업의 쇠퇴와 더불어 제지분야에서도 민간제지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탕춘대 일대에는 관 주도 제지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제지업 역시 크게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순조 때의 기록인 『한경지략(漢京識略)』 궐외각사조(闕外各司條)에는 “세검정 탕춘대 옆에는 민가 수백호가 제지업으로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전업적으로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종이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과거시험의 답안지인 시지(試紙)의 수요가 특히 많았다 한다. 당시 선비들은 당국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시험지를 선호하였다. 세력있는 집안의 자제들은 조지서의 지장(紙匠)에게 특별히 좋은 시지를 주문 생산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은 거의 지전(紙廛)에서 종이를 구입하였으며, 지전은 그 종이를 조지서 지장에게 주문하였다. 지전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원료와 공전의 값을 미리 지장에게 지급하였다. 이들 지전상인들의 주문은 계속적이고도 대량이었으므로 조지서의 지장들에게 있어서 지전상인들은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자본을 대는 물주(物主)로서 실질적으로는 지장을 고용한 고용주와 다를 바 없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참고로 조선시대 종이 제조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닥나무를 가마에 쪄서 껍질을 벗겨 흑피를 만들고, 그것을 물에 불궈서 껍질을 제거하여 원료로서의 백피를 만든 다음, 끓는 잿물에 백피를 표백하고, 표백한 섬유를 방망이로 다듬질한다. 그리고 다듬질한 원료를 녹조에 넣고 풀을 가하여 종이원료를 만든다. 이어서 그것을 대발 위에 옮겨 종이를 뜬다. 종이를 한장씩 떼어내 건조판에 붙여 말려 완성한다. 이러한 복잡한 공정에서 공정마다 맡은 사람이 있어 분업적 협업으로 일을 했다. 한마디로 세검정 일대는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품질이 좋은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업단지였다 할 것이다.
이러한 조지서는 고종 19년(1882)에 혁파되었다. 그러나 이 곳 일대에는 조선시대의 전통을 이어 받은 듯 1970년까지만 해도 창호지나 벽지 제조공장이 있어 종이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1971년 8월 30일 북악터널이 완공되고 이 앞을 흐르던 모래내의 일부 구간을 복개하여 그 위로 1973년 11월 22일 신영상가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종이공장들은 없어지고 말았다.
삼형제고개 (홍파동)
종로구 행촌동에서 사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홍파동 42번지 부근 일대를 삼형제고개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옛날 고개 밑에 주막을 경영하는 삼형제가 살았는데,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 조선시대에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그의 집 문앞에 세우는 붉은 문)이 세워졌으므로 삼형제고개라 하였다. 지금 이 고개는 사직터널과 성산로로 이어진 아스팔트도로로 바뀌어졌지만 사직터널이 개통되기 전에는 이 고개를 넘어다녀야 했다.
야주개夜珠峴 (당주동)
신문로 18번지와 20번지 사이 당주동과 신문로 1가에 걸쳐 있던 고개를 야주개, 한자로 야주현(夜珠峴) 또는 야조현(夜照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근처에 있는 경희궁(慶熙宮)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현판 글씨가 명필(名筆)로 어찌나 빛이 나든지 캄캄한 밤에도 이 고개까지 빛이 나므로 붙여졌다 한다. 이 야주개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을 야주갯골 또는 야주개라 불렀다. 약간의 높이 차가 남아있기는 하나 제법 높았던 야주개는 도로 포장공사로 깎여져 지금은 거의 평지화되어 고개라는 느낌마져 없어져 버렸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서 종로구 신문로 1가 581번지 구세군회관빌딩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이 문은 광해군 8년(1616)에 경희궁을 건립하면서 궁궐 동쪽에 정문으로 세운 것이다. 흥화문(興化門)이란 현판글씨는 이신(李紳)이 썼다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소개하고 있다. 이 글씨가 어찌나 명필이었던지 밤이면 서광(瑞光)을 발하여 당주동고갯길까지 훤하게 비추었으므로 이 고개를 ‘밤에도 빛을 발하는 고개’ 곧 야주개라 하였던 이다. 광복 후에도 노인층에서는 당주동길을 흔히 야주개라 하였다. 이에 따라 경희궁을 ‘야주개대궐(夜珠峴大闕, 夜照峴大闕)’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흥화문은 1915년에 일제가 경희궁을 헐어내고 경성중학교를 세울 때 경희궁의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매각되어 중구 장충동 2가 202번지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신주로 한 춘무신사(春畝神社)의 정문이 되었다. 광복 후 이 자리가 영빈관으로 바뀌면서 흥화문(興化門)이란 글씨 대신 영빈관(迎賓館)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신라호텔이 세워진 후에는 이 호텔의 정문이 되었다. 1988년 서울시에서 경희궁복원사업을 실시하면서 이 문을 서울고등학교 정문자리에 이전하였다.
이곳 야주개는 아동문학가로서 어린이운동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 소파 방정환선생(1899∼1931)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야주개 일대 당주동은 입시학원이 많이 들어섰던 골목길이었으며, 재수생과 입시생들이 드나들던 분식집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강남지역 개발과 1980년대 입시학원의 강남으로의 분산정책, 도심학교의 강남이전 촉진책에 의하여 이곳에 있던 입시학원들이 노량진과 영동 등지로 이전해 감에 따라 분식집들도 하나 둘씩 폐업하였다. 더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 지역의 재개발사업으로 낡은 단층 기와집 대신 고층빌딩이 건축되면서 각종 회사들이 입주하자 이 곳 골목길은 입시생 대신 회사원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세종로에 세종문화회관이 신축된 후에는 이곳에서 개최되는 각종 연주회와 음악회를 찾는 청중들의 오가는 장소로 변모되었다.
새문고개 (신문로 1가)
종로구 신문로 2가 2번지 옛 서울고등학교(경희궁터)에서 서대문로터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새문고개라 하였다. 지금 고려병원과 문화방송국 사이에 돈의문(敦義門서대문)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으로, 돈의문을 새문이라고도 하였으므로 새문고개라 불리어졌다. 돈의문이 새문으로 불리게된 것은 그 위치가 몇번 바뀌어 ‘새로 문을 냈다’ 하여 새문 또는 신문(新門)이라 하였으며, 문 밖을 새문밖, 문 안쪽을 새문안이라 하였고, 현재 세종로네거리∼서대문로터리에 이르는 길이름도 새문안길이라 이름하였다.
이 고개 위에 서 있던 돈의문에 대하여 살펴보자. 돈의문은 도성의 서쪽 대문으로서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제2차 공역이 끝나고 도성 8개의 문이 완공되었을 때 함께 세워졌다. 그런데 태종 13년(1413) 6월의 『태종실록』을 보면,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청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좌우 팔과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손상시켜서는 아니된다.”하여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두 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동시에 같은 이유로 돈의문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 서전문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역시 태종 13년 6월의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이 의정부에 명하여 새로 서문을 세울만한 곳을 찾아보게 했는데,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의 집 앞에 있는 옛길(舊路)을 따라서 문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이숙번이 인덕궁(仁德宮) 앞에 작은 동(洞)이 있는데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만한 곳이라 하여 그가 말하는 곳에 서전문(西箭門)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서전문은 경희궁(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이 있던 서쪽 언덕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세종 4년(1422) 도성을 수축할때에 서전문에 옹성(甕城)을 쌓기 위하여 특별히 평안도 군인 1,000명을 동원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옹성을 쌓지 않고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그 남쪽 마루턱에 새로 문을 세우고 그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돈의문은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新門)이라 불리어지기도 했다. 서전문을 헐고 새로 돈의문을 건립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서전문이 있던 곳은 지대가 높고 험하여 통행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보다 통행에 편리한 곳으로 문을 옮겼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돈의문이 있었던 위치와 서전문이 있었던 위치를 살펴보면 돈의문의 위치가 서전문에 비해 통행에 훨씬 편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돈의문을 새문이라 한 것은 ‘새로 세운문’이라는 뜻과 함께 또 하나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새문이란 말의 연유는 색문(塞門), 즉 막을 색(塞)자를 써서 문을 막았다는 뜻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1·2차 왕자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공헌한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이 서대문 안에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 돈의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과 마소의 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돈의문을 닫아버리고 통행을 금했다 하여 색문(塞門)이라 하였고 부근 마을을 색문동(塞門洞)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새문,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전문을 폐쇄하고 돈의문을 세운 것은 세종 때의 일이니까, 이 때 이숙번이 막은 문은 돈의문이 아니고 서전문인 것이다.
한편 색문동에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이 살았는데, 광해군 때 이 색문동에 왕기(王氣)가 서린다 하여 이를 막기 위해 새로 궁궐을 건축한 것이 경희궁이다. 사적 제271호이다. 신문로 2가 2번지에 위치하는 경희궁은 광해군 9년(1617)에 착공하여 3년 후 광해군 12년(1620)에 완공되었는데,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경희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왕 15년 3월에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추대된 인조는 정원군의 장남이었고, 정원군은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었으니 색문동의 왕기설(王氣說)이 적중된 셈이다. 인조 이후 역대 왕들이 수시로 거처하면서 창덕궁을 동궐(東闕), 경희궁을 서궐(西闕)이라 하였다.
돈의문은 조선시대에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에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었다. 조선시대 한성으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도로는 간선도로와 지선도로로 구분되었는데, 이 중 간선도로망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9개가 있었다. 이 가운데 제1로가 돈의문으로부터 무악재를 넘어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길로, 홍제원을 경유하여 고양·파주·개성·평산·황주·평양·정주·선천을 거쳐가는 총 1,086리의 장거리로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신들이 통행하는 가장 비중이 큰 도로였다.
그 옛날 이 곳 새문고개를 지나 돈의문을 나서게 되면 언덕 아래로 무악재에서 발원한 물이 흐르고, 그 위로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 이름을 경곳다리(京橋)라 하였는데, 그것은 다리가 경기감영(京畿監營) 창고의 앞쪽에 있다 하여 붙여졌다. 다리를 건너면 경기도의 행정을 담당하던 경기감영(현 서대문적십자병원 자리)이 나타나게 된다. 그 앞으로는 녹번고개를 넘어 무악재를 지나는 큰 길이 나오게 된다. 의주로변에 있는 경찰청과 미동초등학교 주변에는 ‘미나리깡’이라고 하는 미나리밭이 물결치고 충정로 동사무소와 인창중고등학교 주변에는 초가집들이 있었던 풍경을 1764년에 제작된 도성대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돈의문은 역사적으로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乙未事變)과 관련이 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인조 2년(1624),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은 반군을 이끌고 2월 10일 돈의문을 통해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괄군은 추격하여온 장만(張晩)·정충신(鄭忠信) 등 관군과 안산(무악)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쫓기자, 가까운 돈의문을 통하여 성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그러나 도성민들이 돈의문을 안에서 굳게 닫아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서 남대문을 통해 입성하였다. 이괄은 광희문으로 빠져나가서 이천으로 가는 길에 부하들에 의해 죽고 말았다.
그리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친일정권을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1895년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 불량배, 낭인들과 돈의문 앞에서 모였다. 새벽 5시경의 파루종이 울리자, 이들은 돈의문을 통과하여 경복궁을 침입,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니 이는 돈의문에 얽힌 민족적인 한이 아닐 수 없다.
돈의문은 도성 서북쪽의 관문으로 410여년간 인정(人定: 통행금지 시작시간)에 닫고 파루(罷漏: 통행금지 해제시간)에 열어 행인을 통제하고 유통하였으나, 1915년 시구역개수계획(市區域改修計劃)이라는 명목으로 도로확장을 할 때 일제에 의해 헐리고 말아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당시 일제는 돈의문의 목재와 기와 및 석재를 경매하였는데, 당시 염덕기란 사람에게 205원에 낙찰되었다 한다. 그가 문루를 헐어낼 때 그 속에서 불상과 많은 보물이 나와서 큰 횡재를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1985년 서울특별시기념표석위원회에서 돈의문터에 대한 표석을 설치하였다.
박석고개薄石峴 (명륜동)
창경궁의 정문 북쪽 곧 월근문(月覲門) 쪽에서 명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박석고개, 한자로 박석현(薄石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유래는 이 고개가 경모궁(景慕宮)의 입수목(入首목)이 되기도 하는데, 창경궁이나 경모궁에 비해 지대가 낮았으므로 낮은 지맥의 보호를 위하여 박석을 깔았기 때문에 박석고개가 된 것이다.
명륜동 2가와 명륜동 4가 사이에 걸쳐 있던 동네를 박석고개가 있다 하여 박석동(薄石洞)이라 하였다. 경모궁은 장헌세자(莊獻世子)와 그의 비 헌경왕후(獻敬王后)의 사당으로 영조 40년 (1764)에 세워졌다. 창덕궁 안에 있으며, 경모전(景慕殿)이라 하였다.
구름재雲峴 (운니동)
종로구 원서동 206번지 지금의 (주)현대 본사건물 대지에 오늘 날의 중앙천문기상대격인 서운관(書雲觀)이 있었으므로 운현궁과 (주)현대 본사건물 사이로 난 고갯길을 구름재 또는 운현(雲峴)이라 하였다.
서운관은 조선 개국 초에 설치되었으며, 세종 때에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서운관이란 명칭이 함께 통용되었다. 『단종실록』에는 서운관이 있는 이 고개를 서운관현(書雲觀峴)이라고 했는데, 운현(雲峴) 곧 구름재라는 명칭은 서운관현(西雲觀峴)이 운관현(雲觀峴)이 되었다가 다시 줄어서 운현(雲峴)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운현은 지금의 운니동(雲泥洞)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즉 종로구 익선동과의 경계가 되는 도로의 북쪽이 니동(泥洞)인데, 이곳은 비만 오면 몹씨 질퍽거렸으므로 진골, 곧 한자로 니동(泥洞) 또는 습동(濕洞)으로도 표기되었다. 영조 때 제작된 「도성지도」에는 이곳을 니동(泥洞)으로 표기하였는데, 진골이라 널리 불리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 중서(中署) 정선방(貞善坊) 돈녕계(敦寧契) 니동(泥洞), 구병조계(舊兵曹契) 니동(泥洞)이었는데, 1914년 4월 1일 ‘운현(雲峴)과 니동(泥洞)’의 머리글자를 따서 운니동(雲泥洞)이라 하였다.
운현의 명칭 유래가 된 서운관은 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측후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아였다. 지금 (주)현대 본사건물 앞에 서운관에 속하였던 관천대(觀天臺)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사적 제296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천대는 높이 3.46m, 너비 2.4m, 폭 2.5m로서 대 위에는 높이와 너비, 폭 각 70㎝인 정입방체의 돌이 놓여 있고 둘레에는 돌난간이 둘리어 있다.
운현이라고 하면 운현궁(雲峴宮)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운현의 남쪽 근방 운니동 80·85·114번지 일대에 일대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살았던 저택이 있는데, 운현의 지명을 따서 운현궁이라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현손(玄孫)으로서 아버지는 남연군 구(南延君 球), 어머니는 여흥민씨(麗興閔氏)였다. 숙종 이래 대대로 여흥민씨의 소유로 되어 왔던 안국동궁(安國洞宮)에서 출생, 구름재로 이사온 후 고종을 낳았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명으로 그의 아들 명복(命福)이 대통을 이어받아 입궐함에 따라 흥선군에게는 대원군의 칭호가 붙게 되었으며,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攝政)하였다. 그는 우선 조촐하던 집을 궁궐 못지 않은 대저택으로 개축하였다. 바깥채에 그의 집무실인 노안당(老安堂)과 아재당(我在堂)을, 안채에 고종이 태어난 노락당(老樂堂)과 별당으로 부인 민씨의 거처인 이로당(二老堂), 누정인 영화루(迎和樓)를 손질하였고, 할아버지 은신군(恩信君)과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사당을 집안에 신축하였다.
1898년 1월 흥선대원군이 이곳에서 별세하자 장손 이준용(李埈鎔)에게 양자로 들어온 의친왕 이강(李岡)의 차남 이우(李)가 운현궁을 지켜나갔다. 궁의 면적은 축소되어 현재 2,148평에 불과하고 건물 몇채만 남아 있다. 정원에는 고종이 어릴 때 올라가서 놀았다는 소나무가 있었다. 왕위에 오른 후 고종은 소나무에 종2품 벼슬아치가 다는 금관자를 달아주었으므로 이 소나무를 2품 대부송(大夫松)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소나무는 일제 때 벼락을 맞아 뿌리째 없어졌다.
사적 제257호로 지정된 운현궁은 대원군의 5대 직계손인 이청(李淸)의 개인 소유로 있었는데, 1991년 12월말 서울시에서 구입하여 1993년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96년 10월에 완공하여 전통문화공간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지금의 운현궁은 양관(洋館)을 포함한 대지는 덕성여자대학교가 소유하고 있으며, 현재는 운니동 98∼50, 71, 72, 80, 85, 114번지와 7, 10번지가 남아 있다.
가대(家垈) 안에는 운현궁의 몸채건물이었던 안채와 사랑채 일부, 북쪽에 별당건물이 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이 살던 양관은 1911∼1912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석재를 혼용한 벽돌 2층으로 프렌치 르네상스식으로 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1955년 학교법인 덕성학원이 소유하면서 덕성여자대학교 강의실 등으로 사용하다가 이 학교가 쌍문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2층은 창고로, 1층은 덕성여자대학교의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운현궁의 잔존 건물들 중 안채와 사랑채 일부를 살펴보면, 이 건물들은 격식이나 규모로 보아 일반 상류주택이라기 보다는 궁실(宮室)의 내전건물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러나 건물의 형태나 세부 구성요소는 상류주택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이 건물은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형태를 취하면서 이를 궁실의 격식으로 끌어올린 건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원군 집정시 운현궁에 전해오는 일화로는 이 곳 뜰에서 벌어졌던 방탄복 실험 이야기가 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부터 7년에 걸쳐 천주교에 대한 대박해를 가하였는데, 이를 응징하고자 프랑스의 동양함대가 1866년 강화에서 도발한 병인양요(丙寅洋擾)는 흥선대원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서양의 무력에 대항할 방책을 팔도에 공모하였다. 온갖 아이디어가 속출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서양총의 총탄이 뚫을 수 없는 방탄복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원리는 간단하였다. 서양총의 총탄이 뚫을 수 없을만한 두께로 무명베를 겹쳐 방탄복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운현궁 동남쪽 뜰에서 이 방탄복 실험이 벌어졌다. 먼저 아홉겹으로 겹친 베를 향해 서양총을 쏘아보니 뚫고 나간지라 한겹을 더해서 쏘아보고 또 한겹 더해 쏘아보길 거듭하니 열두겹 째에야 뚫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전하게 한겹 더 보태 열세겹의 방탄복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입어야 할 병사에 있었다. 그 두꺼운 방탄복에 투구와 배갑을 입고 보니 무겁고 둔하여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그 보다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운현궁에서 탄생한 방탄복은 실전에서 사용되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군측의 기록을 보면, 조선병사들이 입은 군복은 총탄을 막기 위해 1인치 이상 두꺼운데 이 옷에 불이 붙으면 꺼지지도 않고 끌 수도 없어 불에 타죽는 병사가 많았다는 것이다. 화상을 면하고자 포대 아래 바다로 뛰어드는 병사도 많았다고 적고 있다.
건양현建陽峴 (와룡동)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고개를 건양현(建陽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건양다경(建陽多慶)’에서 비롯되었으며, 창경궁과 창덕궁이 모두 조선시대 역대 임금이 머물던 곳으로서 경사스러운 일이 많았다는 뜻을 지녔다 한다.
배오개梨峴 (인의동)
종로구 인의동 112번지 지금의 해운항만청 동쪽에 있던 고개를 배오개, 한자로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인의동·종로 4가·예지동에 걸쳐 있던 마을을 이 배오개가 있으므로 해서 그 이름을 역시 배오개 혹은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이 고개의 명칭 유래는 예전 이 고개 입구에 배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배나무고개, 배고개라 하다가 세월이 가면서 음이 변하여 배오개가 되었으며, 한자로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한다. 또 하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예전 이 고개는 숲이 매우 울창하여 대낮에도 고개를 넘기가 무서워 길손 백명이 모여야 넘는다고 해서 백고개 혹은 백재라 하였는데, 백고개가 음이 변하여 배고개가 되었으며, 다시 배오개로 되었다 한다. 그리고 고개에 숲이 무성하여 짐승과 도깨비가 많다 하여 도깨비고개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배오개는 지금의 배오개길이 지나는 곳으로, 길을 넓히면서 평탄해져 고개의 흔적이 없어졌다. 배오개길은 종로 4가에서 중구청을 거쳐 동국대학교 입구까지의 폭 25m, 길이 950m의 도로로서, 이곳에 배오개가 있으므로 해서 배오개길이라 이름 지어졌다.
인의동 112번지와 48번지 일대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이현궁(梨峴宮)이 있었다. 이현궁의 명칭은 말할 것도 없이 부근에 배오개, 즉 이현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현본궁(梨峴本宮)이라고도 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왕 2년(1610) 세자빈의 간택이 있은 후 새로 수리하고 가례(嘉禮) 전에 옮겨 머물게 하는 별궁으로 삼았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의하면, 인조 원년(1623)에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비(妃)인 연주부부인 구씨(連珠府夫人 具氏)의 거소로 하면서 궁의 명칭을 계운궁(啓運宮)으로 고쳤다 한다.
후에 인조는 병자호란을 겪은 후 집이 없어진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을 이 궁에 거처하게 하였으며,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가례(嘉禮)를 이곳에서 거행하였다. 숙종 때에는 숙빈방(淑嬪房)이 되었고, 숙종 37년(1711)에는 연잉군(延仍君: 후의 영조)의 잠저(潛邸)를 이 궁안에 두기도 하였다. 정조 때에 궁이 폐지되고 그 건물을 중심으로 장용영(壯勇營)이 설치되었다가 장용영의 폐지와 함께 훈국(訓局), 동별궁(東別宮), 선혜청(宣惠廳), 동창(東倉) 등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현재 인의동 112번지는 해운항만청이 들어서 있고, 전매지국이 있던 48번지 일대는 1987년 4월부터 한국담배인삼공사 서울영업본부에서 사용하고 있다.
배오개하면 배오개시장을 떠올릴 만큼 예지동·인의동에서 종로 5, 6가에 이르는 지역에는 배오개시장이 서서 종루 앞 시전상가, 칠패시장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이름나 있었다. 배오개시장은 말할 것도 없이 인근에 배오개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배오개시장은 갖가지 상품이 갖추어진 큰 저자였다. 이곳의 상인들은 동대문을 통하여 여러 지방에서 올라온 곡물·과실·채소·포목 등을 위탁받아 판매하기도 하고, 그것을 중개하는 객주노릇을 겸하거나 지방상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잠깐 배오개시장의 성장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왕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정부가 주도하는 시전(市廛)을 설립하게 되는데, 정종 원년(1399)∼태종 14년(1414)까지 4차례에 걸쳐 행랑(行廊) 1,369간(間)이 세워졌다. 이들 시전은 독점판매권을 갖고 있었으며, 서울시민의 생필품 및 관수품의 조달과 함께 중국에 보내는 진공품 등을 공급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상거래를 엄격히 단속하여 한 시전에서 한가지 물품만을 취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규칙이 엄격하여 등록된 상품만 거래하였으며, 다른 상품을 거래할 때는 난전(亂廛)이라 하여 엄격히 처벌하였다. 대신 시전을 상·중·하의 3등급으로 구분하여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6가지 주요 생필품을 취급하는 시전들이 각각 조합을 만들어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였으며, 이들 육의전은 세금과 국역을 맡는 대가로 독점판매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관청의 허가를 받은 이러한 시전 외에도 주로 도성의 외곽지역에서 행상과 노점상들이 모여 비정규적인 소규모 시장을 꾸려 나갔다. 이러한 민간상인들은 특히 남대문 밖 칠패(七牌)와 동대문 근처 배오개, 마포 등지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꾸준히 펼쳐 16세기에는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였다. 임진왜란후 한성에는 ‘동부채칠패어(東部菜七牌魚)’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것은 동대문 근처 배오개에는 채소와 과일이 많고, 칠패에는 생선이 많다는 뜻이다. 이처럼 시전상인 외에 민간상인들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이 사상도고(私商都賈)로 성장하였다. 사상도고는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도매상인데, 생산과정을 장악하여 독점적인 매점행위를 하는 것으로 배오개와 칠패시장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와 금속화폐의 유통이 일반화되면서는 쌀과 무명 등을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삼던 종전의 상업질서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같이 활발해진 상거래를 밑거름으로 하여 객주(客主)·여각(旅閣) 등으로 불리던 민간상인들이 부를 축적하여 제도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던 시전의 금난전권에 도전하여 격렬한 상권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조 15년(1791)에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통공정책(通共政策)이 시행됨에 따라 배오개와 칠패의 상인들은 활동범위가 넓어졌으며, 일반상가로 공식 인정받아 번성기를 맞게 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의 「한양성시전도가(漢陽城市全圖歌)」 가운데,
이현(梨峴)과 종루(鐘樓) 그리고 칠패(七牌)는 온갖 공장(工匠)과 상인들이 모이는데, 도성에서도 유명한 3대 시장이라 많고 많은 물화를 따라 수레가 줄을 이었네.
라고 하는 글을 보면 이현시장(배오개시장)은 종루 앞,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유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76년 개항이 되고 외국 문물이 밀려들자 기존의 재래시장들이 변혁을 맞게 되었으며, 특히 일본상인들의 진출로 조선상인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1905년에 박승직·김종한·장두현·최익성 등이 자본금 78,000환으로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개항 후 격변기에 가까스로 파산을 면한 배오개시장과 종로상가의 상인들이었다.
광장주식회사는 188개의 점포로 구성되었다. 상인들은 종로 5가 쪽과 청계천 쪽 양편에 행랑을 짓고, 두 건물 사이에 또 한줄의 상가를 세웠다. 사람들은 이를 배오개시장 혹은 광장시장이라고 불렀는데, 이 시장은 당국으로부터 허가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장이었다. 광장시장이 특히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청량리에서 서대문까지 운행되던 전차의 정거장이 광장시장 입구인 지금의 종로 5가 지하철역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에도 광장시장은 서울의 대표적 시장이었으며,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광장시장은 그 명성을 자랑하였다. 1959년에는 김긍환 등이 중심이 되어 광장시장에서 동쪽으로 훈련원로 건너편 부지에 연건평 5,700평의 새 건물을 신축하였다. 새 시장을 기존의 광장시장과 구별하여 동대문시장이라고 하는데, 1960년대는 동대문시장의 전성기였다. 이 시장에서는 포목·의류·생선·정육·야채 등이 주로 거래되었다. 1만여 점포에 하루 평균 20여만명의 고객이 몰렸다 하며 밤에도 장사를 하여 야시장으로도 이름났다. 동대문시장은 전국 어느 곳과도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었고, 물건이 매우 풍부하여 “돈만 주면 고양이뿔도 판다”는 우스개소리도 생겨났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는 그 형세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평화시장·중부시장·경동시장·노량진시장 등이 곳곳에 생겨나 점차 시장이 전문화되어 갔고, 또 대형 백화점들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70년 정시봉 등은 동대문 서남쪽에 있던 전차차고 부지 6,300평에 현대식 6층 건물로 새로이 시장을 세우고 이를 동대문종합시장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넓은 의미로 광장시장·동대문시장·동대문종합시장을 포괄하고 있는 동대문시장은 그 뿌리를 배오개시장에 두고 있다. 오늘날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동대문시장은 포목 등의 거래에서는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으로 꼽힌다.
잣배기고개 (원남동)
종로구 원남동로터리에서 연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잣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잣배기고개라 불리었다. 이 고개 남서쪽에 있는 마을을 한 때 신민동(新民洞)이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명나라의 지사(志士)들이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왔는데, 조정에서 종묘 동북쪽 담 아래 잣배기고개 남서쪽에 살게 했으므로 신민동이라 하였다 한다.
도깨비고개獨脚峴 (연건동)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남쪽과 옛 창경초등학교의 경계지점 부근의 고개를 도깨비고개 또는 독갑이재라 하고, 한자로 독각현(獨脚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이 고개에 숲이 울창해서 도깨비가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도깨비는 우리나라의 전설이나 설화 속에 많이 등장하는데,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전해온다. 비상한 힘과 괴상한 재주를 가져 사람을 호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험상궂은 짓을 많이 한다 하였다.
동소문고개 (혜화동)
종로구 혜화동에서 성북구 돈암동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동소문고개라 하였다. 그것은 이 고개턱에 동소문(東小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에 지금 성북구 성북동 101번지 주변에 동소문이 복원되었지만, 원래는 복원된 자리가 아니고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큰 길 언덕 마루턱에 있었다.
동소문(東小門)은 혜화문(惠化門)의 속칭으로 도성 4소문의 하나이다.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함께 건설되어 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 그런데 성종 14년(1483) 창경궁을 신축하고 그 정문을 역시 홍화문이라 했으므로 2개의 홍화문이 생겨났다. 이에 중종 6년(1511)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 곳 홍화문을 혜화문으로 고친 것이다. 혜화(惠化)란 ‘은혜를 베풀어 교화 한다’는 뜻이며, 동소문은 도성의 4개 소문 가운데 동쪽 소문이므로 그렇게 불리어졌다.
동소문은 원래 다른 소문들인 광희문(光熙門)·소의문(昭義門)·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 위에 목조로 된 문루(門樓)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후로 오랫동안 홍예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영조실록』 권60 영조 20년 8월 경술조에 보면 “혜화문에 전에 문루가 없던 것을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다시 짓게 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52년만인 영조 20년(1744)에야 문루를 복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루를 복원한 후 당시의 명필 조강이(趙江履)가 혜화문(惠化門)이라 쓴 현판을 새로 달았다.
그런데 동소문 문루의 천장에는 다른 문의 문루처럼 용을 그리지 않고 봉황(鳳凰)을 채색하여 그린 것이 특색이다. 그 이유는 혜화문 밖 삼선교에서 돈암동 일대는 울창한 산림지대인지라 온갖 새들이 모여들어 농사에 피해가 컸으므로 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조류의 왕격인 봉황을 그렸다는 것이다.
동소문은 일제 때 방치되어 문루가 크게 퇴락하게 되었고, 일제가 1928년 이를 헐어버려 홍예만 남았는데, 이 마저 1939년 돈암동까지 전차선로를 연장하며 헐어버렸으므로 동소문고개, 혜화문고개, 혜화동, 동소문동 등의 명칭만 남아 있었다. 서울특별시기념표석위원회에서는 1985년 동소문터에 표석을 설치하였으며, 1994년 말 서울시에서 한양정도 600주년을 맞아 동소문고개 옆에 동소문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경도조 (京都條)에 보면,
도성의 동북쪽 문을 혜화문이라 한다. … 대개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혜화문이 정문이고, 그 외의 문은 사잇문(間門)이다.
라고 하여 도성 북대문인 숙청문(肅淸門)을 제치고 동소문인 혜화문을 북대문으로 적고 있다. 그 연유는 조선시대에 숙청문을 닫아둔 채 혜화문을 통해 경원가도(京元街道)로 출입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혜화문의 파수 자체를 남대문·동대문·서대문과 같이 출직호군(出直護軍) 30명으로 지키게 하였다. 원래 소문은 20명이 지키던 제도였다.
이렇듯 소문인 혜화문이 대문 구실을 하도록 북대문인 숙청문을 닫아두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숙청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 즉 북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고 있는 북대문으로서 남대문(숭례문)·동대문(흥인지문)·서대문(돈의문)과 함께 태조 5년(1396) 건립되었다. 그런데 17년 후인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건의하기를, 북악산의 동쪽 능선과 서쪽 능선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은 것인데, 동쪽 능선에 있는 숙청문과 서쪽 능선에 있는 창의문에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하여, 곧 숙청문과 창의문을 폐쇄하고 일대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원래 이 두 문은 높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길이 매우 험하고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으므로, 숙청문에서는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혜화문 밖 경원가도(京元街道)로 나오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고, 창의문에서도 서쪽으로 세검정 골짜기로 빠져 나와 홍제원의 경의가도(京義街道)로 나오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오히려 경원가도와 경의가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데에는 각기 혜화문과 서대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했기 때문에 숙청문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두 문은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며, 특히 숙청문은 전혀 사람이 다니지 아니 하므로 조선시대에 계속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는 북문, 즉 숙청문을 열고 남문, 즉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요,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물 때 양을 억누르고 음을 부추겨야 비가 온다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숙청문(肅淸門)은 어느 때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종실록』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숙청문을 폐쇄하게된 데에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이유 외에도 또 하나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순조 때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숙청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양주 북한산으로 통하는 숙정문 역시 지금 폐문하고 쓰지 않으니, 언제부터 막았는지 알 수가 없다. 속전된 바로는 이 성문을 열어두면 성안에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 불어댄다 하여 이를 폐했다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중하간지풍’이란 부녀자의 음풍(淫風), 곧 풍기문란을 뜻한다. 옛부터 전해오는 서울의 세시풍속을 보면, 정월 보름 이전에 부녀자들이 숙청문까지 세번만 다녀오면 그 해의 액운이 없어진다 하여 숙청문 주변에 장안 부녀자들의 출입이 매우 빈번했다는 것이다. 그저 단 한번 다녀오는 것이 아니고 정월 보름안에 세번이니까 3일을 계속 가거나 아니면 2, 3일에 한번씩 왕래했을 것이니 숙청문으로 가는 길은 장안 부녀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정월 보름 안에 세번 북문까지 갔다 오는 것이 어려워지자 차츰 정월달 안에 세번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1년 내내 아무 때나 세번 다녀오면 액운을 뗄 수 있는 것으로 변하였다.
평생을 울 안에 갇혀 살아야 했던 조선시대 부녀자들에게 이 북문 나들이는 큰 해방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며, 너도 나도 나들이를 나섰을 것임은 능히 짐작되는 일이다. 게다가 그 시대에 부녀자들이 나들이를 나선다면 결코 혼자 나서는 법이 없다. 양가집 규수나 아낙네들은 몸종 한 두명을 데리고 나섰다. 그리하니 북문 일대는 꽃밭이 되게 마련이었고 짓궂은 사내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사내 못난 것 북문에서 호강받는다.’는 옛 서울속담에서도 이 북문의 풍기를 엿볼수 있게 해준다. 여자에게 농 한번 못하던 못난 사내라도 북문에 가면 그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부녀자들에게 환대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문란한 풍기에 엄했던 조선시대의 도덕규범에 본다면 이것은 대단한 사회문제가 되었을 것이며, 북문 폐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 되었다.
어쨌든 숙청문이 폐쇄되면서 동소문의 역할이 커졌으니, 도성에서 의정부·포천·원산 등으로 가거나 반대로 경원가도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 중요시 되었으며, 동소문고개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동소문은 원래 여진족 사신의 도성출입 전용문이었다. 그 숙소인 북평관(北平館)이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 후 청을 건국한 여진족이 종전 명나라 사신이 드나들던 서대문으로 출입하면서 그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이 곳 동소문 부근에는 19세기에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라는 동리 이름이 있었다. 지금의 동소문동·동선동·삼선동·돈암동 일대를 일컫는데, 그 가운데로 성북천이 성북동 골짜기에서 흘러 청계천으로 유입되었다. 개천이 구비구비 흘러가는 곳의 남과 북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였고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조선말기에는 이곳을 군대의 연병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고종 때의 문인 이제구(李齊九)는 어느 늦은 가을날 이 일대를 지나면서 주변 경치를 시로 읊었다.
소청문(小靑門) 밖 나서니 성시(城市) 티끌 볼 수 없고,
나귀 등에선 붉은 석양이 이글거린다.
들판의 국화 시냇가의 단풍이,
서로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이루었구나.
이 시를 보면 조선말기에는 동소문을 일명 소청문(小靑門)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동소문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는 겸재 정선(鄭敾)의 「동소문」(17.5㎝×13.5㎝,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이 있다. 지금 명륜동 큰길로 꺾어지는 창경궁 모퉁이쪽 언덕 위에서 동소문을 바라본 모습인데, 원래는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뒷편과 창경궁의 동편 산줄기가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을 일제 때 새길을 내면서 현재와 같이 산 언덕을 끊어낸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양 언덕의 높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위치에서 바라본 각도이다.
동소문 옆에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무당이 살았다 한다. 예전에는 동소문 안 일대에 앵두나무가 많았다 하여 앵두나무골이라 불렀다. 현재 혜화동로터리에서 서울시장 공관, 혜성교회에 이르는 구릉 상의 언덕이 온통 앵두나무로 뒤덮혀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동소문이 헐리고 돈암동까지 전차선로가 연장되면서 성문 안 옛 정취가 사라져 버렸다.
정(情)고개 (명륜동)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내 성균관 정문에서 성균관을 안고 부엉바위 쪽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사잇길을 정(情)고개라 하고, 정고개 너머 마을이름을 정(情)골이라 불렀다.
이 정고개의 명칭 유래에는 조선시대 한 선비와 종의 딸 사이에 있었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있다. 예전 문과시험을 보기 위해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안윤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어느 날 안윤은 성균관 옆길을 오가는 대감집 종의 딸을 보고 반하여 미행 끝에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르렀고, 두 사람은 이 고개 위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동거한다는 헛소문이 나돌았고, 급기야 상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노한 상전은 종의 딸에게 가문형(家門刑)을 내렸다.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당시에 종이 신분질서를 어지럽히면 상전의 명예도 크게 다치기 때문이었다. 가문형은 자결시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명분만 자결일 뿐 대들보에 목을 매어 교수시키거나 치마에 돌을 안겨 깊은 못에 떠밀거나 하는 방법으로 타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국 종의 딸은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안윤은 밤마 고개를 배회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안윤은 밤마다 고개를 배회하다가 실성하였고 그 역시 이 고개에서 죽어갔다. 이 후 마을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하여 고개이름을 정고개라 하였다 한다.
당고개堂峴 (창신동)
종로구 창신2동 1352번지∼창신1동 22618번지 사이 고개를 당고개라 하고, 배성여자고등학교와 창신아파트 부근 마을을 당현동(堂峴洞)이라 하였다. 당고개의 명칭은 배성여자고등학교 자리가 예전에 부락제를 지냈던 도당(都堂)터였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이 곳 일대에는 조선말 순조 때부터 서울의 점술가들이 모여들어 200여호가 밀집해 있었다 한다. 이곳에 점술가들이 집단 거주했던 것은 당고개 바로 위에 있던 큰 바위에 낙산신령이 모셔져 있기 때문에 점괘가 잘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때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다고 낙산의 바위를 깨고 파헤쳐 가므로 낙산의 산신령이 떠나가 버려 점괘가 잘 나오지 않는다면서 점술가들이 대부분 미아리고개 아래로 이전했다고 한다.
서울의 고개
첫머리에
서울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북부·북서부·동북부에는 산지가 많고, 남쪽은 낮고 평평한 U자형의 개방분지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한강이 강북과 강남의 자연적 경계를 이룬다. 전반적으로는 장기간의 침식을 받아 형성된 구릉지형(丘陵地形)이지만, 한강 주변 특히 한강 이남지역에는 충적지형(沖積地形)도 넓게 분포한다. 1394년 천도 당시 서울의 지형은 북악(342.2m), 남산(232.1m), 낙산(110.9m), 인왕산(338.2m)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며, 이들 주변 산지를 따라 도성이 축조되었다. 산줄기 사이사이의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작은 하천들이 모여 청계천을 이루며 이 청계천은 동쪽으로 흐르다가 한강으로 유입된다.
현재의 서울시역은 이 보다 넓어 시외곽에 북한산(836.5m), 도봉산(739.5m), 수락산(637.7m), 불암산(507m) 등이 있고, 불광천·중랑천·왕숙천 등이 한강으로 흘러들면서 곳곳에 넓은 충적지를 발달시키고 있다. 강북에 비하면 강남에는 산지의 발달이 미약하다. 서남부와 동남부는 충적지나 낮은 구릉지로서 거의 평탄하며, 남쪽에는 비교적 높은 관악산(632m)과 청계산(493m)이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안양천·탄천·양재천 등이 북으로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면서 충적지를 발달시키고 있다.
산줄기들은 북악산에서 남쪽으로, 남산에서 북쪽으로 여러 줄기가 뻗어내려 낮은 능선과 골짜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중앙의 종로·청계천 일대는 주변 산지와 계곡에서 운반되는 토사(土砂)로 평지를 이루었을 것이다. 때문에 종로와 청계천로는 동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사이에 기복이 없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퇴계로와 율곡로는 상당한 오르내림이 있음을 지금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종로와 청계천로 일대에는 산릉을 넘는 고개는 없었으나 동서를 가로지르는 길에는 많은 고개들이 있었다.
이러한 서울지형의 특성상 서울에는 230개 이상의 많은 고개가 있었다. 여기서 230개 이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문헌상으로, 또 구전되어 내려오는 고개들을 필자가 파악한 숫자이며, 실제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왔던 고개의 숫자는 이 보다 많았을 것이다. 현재 서울시내 전체 고개의 윤곽은 매우 복잡하여 살펴보기 어려우나, 조선시대 도성 내 고개의 윤곽을 알아보기 위하여 당시의 도성 내 지형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북악산에서 남쪽으로 뻗어있는 산줄기의 고개를 보면, 삼선교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동소문고개이고, 혜화동·명륜동에서 뻗어내린 작은 산줄기를 넘는 고개가 서울대 부속병원과 창경궁 정문 북쪽 사이의 박석고개(薄石峴)이다. 그리고 그 남쪽 동대문경찰서 부근에서 종로 5가로 넘어가는 고개가 배오개(梨峴)이다. 그 서쪽에는 계동의 고지가 있고, (주)현대 본사건물 앞길에는 조선시대에 관상감(觀象監)이 있어 관상감현이라고도 하고, 그 전신인 서운관(書雲館) 자리라 하여 운현(雲峴)이라 하였다. 그 다음 가회동의 지맥이 한국일보사에 이르는데, 그 앞길은 솔재(松峴)이고 그 북쪽이 송현동이다. 이 작은 산줄기는 북쪽으로 삼청동에 이르는데, 전 경기고등학교 북쪽 고개가 맹현(孟峴)이다.
인왕산 역시 많은 산줄기를 뻗었다. 내자동 부근을 남정문재(南征門峴), 당주동 중부를 야주개(夜珠峴)라 하고, 서울시청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도 언덕이 있었고 광화문 사거리 부근에 황토마루(黃土峴)가 있었다. 인왕산 서사면에는 현저동 북서쪽에 통일로로 통하는 무악재가 있다.
남산 북사면의 지맥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국대학교가 자리잡은 줄기이다. 이 줄기는 충무로에서 을지로까지 뻗는데, 여기에 풀무재(冶峴)가 있었다. 그 서쪽에 또 한 줄기가 을지로로 다가오는데 여기가 인현(仁峴)이고, 을지로를 횡단하는 근방에 구리개(銅峴)가 있었다. 그 서쪽 줄기는 충무로를 지나는데서 진고개(泥峴)가 되고, 명동성당이 있는 북고개(鐘峴)가 된다. 이 밖에도 마포로 나가는 애오개(阿峴), 신촌으로 나가는 대현(大峴), 의정부로 나가는 미아리고개, 청량리에서 양주로 나가는 망우리고개 등이 있다.
이러한 고개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변모되었다. 그나마 고개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악재·남태령·미아리고개·망우리고개 등 몇몇 큰 고개들 뿐이며, 대부분은 1960년대 이후 도로가 확장되고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깎여져서 고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많다.
고개의 흔적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 이름들은 지금도 동네이름으로, 지하철역 이름으로 남아 있어 우리에게 친숙한 느낌을 준다. 고개이름이 동명으로 남아있는 것은 인현동(仁峴洞), 송현동(松峴洞), 아현동(阿峴洞), 만리동(萬里洞), 무악동(毋岳洞), 망우동(忘憂洞) 등이 있으며, 지하철역 이름으로는 3호선에 무악재역이, 4호선의 남태령역·당고개역이 있으며, 5호선의 애오개역, 6호선의 버티고개역, 7호선의 장승배기역이 있다.
예전 인적이 뜸하고 수목이 울창한 험한 고갯길에는 호랑이·여우와 도적떼가 출몰하여 길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80여년 전만 하더라도 무악재에는 호랑이가 나타나 길손들을 괴롭혔으며, 호환(虎患)을 막기 위하여 군인들이 길손들을 모아 호송하였다 한다. 때문에 고개에는 서낭당이 많았다. 험한 고개를 무사히 넘게 해달라는 길손들의 기원이 담겨 서낭당이 생겨났으며, 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주막이 있게 마련이었다. 현재 남아 전하는 서울시내 고개이름 가운데 서낭당이고개, 서낭당고개, 사당이고개, 도당재 등으로 불리어지는 곳이 12곳이다.
이와 같은 고개에는 많은 전설들이 전하여 오고 있다. 호랑이·여우 등 동물에 얽힌 이야기, 풍수지리에 관련된 이야기, 고관·위인들에 얽힌 전설 등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곧 우리 선조들의 애환과 삶의 숨결이 배어있는 것들이다. 이제 각 구(區)별로 고개이름의 유래, 고개의 연혁, 전설, 문화유적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종로구
황토마루黃土峴 (세종로)
지금의 세종로와 신문로, 종로가 엇갈리는 네거리 남쪽 고개를 황토마루라 하고, 한자로 황토현(黃土峴)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고개를 중심으로 세종로와 신문로 1가에 걸쳐 있던 마을을 동령동(東嶺洞)이라 하였다. 마을에 황토마루가 있다 하여 ‘구리색의 누런 빛이 나는 고개가 있는 마을’의 의미로 동령동(銅嶺洞)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동령동(東嶺洞)이 되었다 한다.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과 궁궐, 관아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이곳 세종로는 한성부의 심장부가 되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남쪽으로 나 있는 대로 양편으로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중추원(中樞院), 사헌부(司憲府), 한성부(漢城府) 등의 관아건물들이 자리하여 여기를 육조(六曹)거리라 하였다. 육조거리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동서로 난 간선도로와 만나면서 끝이 나고 그 남쪽이 바로 황토마루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태평로(太平路)가 트여서 남대문까지 대로가 뻗었지만 애초에는 큰 길이 없었다. 즉 1914년 태평로가 폭 27m로 개통되기 전에는 남대문까지의 길은 종로를 돌아서 가는 지금의 남대문로였다. 황토마루 남쪽으로는 지금 프레스센터 자리에 군기시(軍器寺)가 있었고, 지금 정동 일대에는 태조의 비(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과 그 원당(願堂)인 흥천사(興天寺)가 있었으며 그 남쪽으로 태평관(太平館)이 자리하였다.
조선시대 경복궁과 서울의 주산(主山)인 백악(白岳)이 빚어내는 경관은 이 황토마루 위에서 바라볼 때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폭 50여척의 대로 양편으로 관아건물과 그 부속건물들이 들어서고 그 건물들의 담장과 처마, 지붕이 일렬로 늘어선 뒤로 광화문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고, 광화문 문루 어깨 너머로 경복궁의 전각들과 지붕의 선이 겹쳐지고, 다시 그 뒤로 백악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모습은 정녕 조선왕조의 위엄을 상징하였다 할 것이다.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길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세종로(世宗路)는 비각(碑閣)에서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광화문에 이르는 가로명이자 법정동의 명칭이다. 세종로는 길이는 600m에 불과하지만 폭은 10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도로이다. 세종로는 조선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이 넓은 길이었으며, 1912년 일제가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京城城市改修預定計劃)을 세워 세워 29개 노선을 고시하고 2년 후 1914년에 광화문에서 황토마루까지 도로를 개수하였다. 그 후 1936년 조선총독부고시 제722호로 이 도로의 폭을 30간(약 53m)으로 지정하였으니 지금의 절반 정도 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의 명칭을 육조거리, 육조앞이라 칭하였으며, 일제 때에는 1914년 4월 1일부터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 개칭하였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본식 동명을 우리 명칭으로 개칭할 때 동명(洞名)을 세종로라 고치고 도로명 역시 세종로라 하였다. 그것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기리기 위함에서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종로는 조선시대에 육조거리로 불리어온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부였으며, 지금도 세종로 서쪽에는 정부종합청사가, 동쪽에는 문화체육부와 미국대사관이 위치하고 있어 육조거리의 명맥을 600여년 동안 이어 오고 있다. 이 일대에는 지금도 옛 관청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토목·건축을 담당하던 공조(工曹)가 있었으므로 그 뒤쪽 동네를 공후동(工後洞) 혹은 공조뒷골이라 하였으며, 동아일보사와 교보빌딩 뒤쪽은 조선시대에 주석(놋쇠)을 파는 주석전이 있었으므로 주석전골 혹은 두석동(豆錫洞)이라 하였다.
세종로 네거리 동북편에 광무 6년(1902)에 세워진 비각(碑閣)이 서 있는데, 이것이 1969년 7월 18일 사적 제171호로 지정된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高宗卽位四十年稱慶記念碑)’이다. 비문을 읽어보면 그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40년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記念碑)’라 씌어 있다. ‘보령망육순(寶齡望六旬)’이라 함은 임금의 나이가 60세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51세란 말이며, ‘어극40년(御極四十年)’이라 함은 임금이 왕위에 오른지 40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곧 고종이 51세가 되고 왕위에 오른지 40년이 된 것을 기념해서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이 비각의 철제격자문(鐵製格子門)의 문임방(門楣)에 ‘만세문(萬歲門)’이라 새겼는데, 당시 영왕(英王)이던 이은(李垠)의 글씨이다.
비각 바로 앞에는 도로원표(道路元標)가 놓여 있다. 이 표석은 서울의 시가지 원표인데, 1914년에 설치되었다. 원래는 세종로 분리대의 이순신장군동상이 세워진 아래에 놓여 있었는데 이곳에 옮겨졌다.
남정문재-南征門峴 (필운동)
종로구 필운동 277번지와 내자동 147번지 사이에 있었던 고개를 남정문재, 한자로 남정문현(南征門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사직단(社稷壇) 정문턱 언저리인 이곳에 남정문(南征門)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고개 주위에 형성된 마을을 남정동(南征洞)이라 하였다.
붉은재紅峴 (화 동)
종로구 화동 22번지 정독도서관 남쪽에 있던 고개를 붉은재, 한자로 홍현(紅峴)이라 하였다. 그 연유는 고개의 흙이 다른 곳에 비해 빛깔이 붉었기 때문이라 한다.
맹 현孟峴 (삼청동)
종로구 삼청동 정독도서관 뒤 가회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바지 일대(삼청동 35119)를 맹현(孟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이곳에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孟思誠)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후손으로 숙종 때 황해·충청도감사를 지낸 맹만택(孟萬澤)도 이곳에서 살았으므로 이 일대를 맹동산이라 불렀다. 서울의 수많은 고개 가운데 개인을 지칭하여 명칭이 유래된 것은 이 고개가 유일한 것으로서, 그만큼 맹사성이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1360) 온양에서 태어나 세종 20년(1438) 79세로 세상을 떠난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창(新昌)이며,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이다. 고려 수문전 제학(修文殿 提學) 맹희도(孟希道)의 아들로 최영장군의 손자사위이다.
그는 고려 우왕 12년(1386)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로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역성혁명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조선 건국 후에도 계속 승진하여 태종 7년(1407)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이 후 판한성부사, 우부빈객, 대사헌, 판중추부사, 예조·호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가 좌·우의정을 지낼 때 영의정이 곧 명재상 황희(黃喜)였으며, 그의 정책은 대체로 황희와 일치하여 국정을 잘 운영하였으며, 세종으로부터도 깊은 신임을 받았다. 특히 그는 과거제도와 문교정책에 많이 간여하였으며, 무리하거나 급박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공과 사의 구분이 분명했지만 평소에는 조용하고 소탈하면서 유머를 즐길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랫사람에게는 자상하면서 엄하지 않았고 예의와 체면에 얽매이지 않아 평복을 입고 소 타는 것을 즐겨하였다. 집에 사람이 찾아오면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 맞아 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관료들 사이에는 같은 나이끼리 계를 조직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는 경자생(庚子生)이면서 장난으로 3살 아래인 계묘계(癸卯契)에 들어 어울려 지냈다고 하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세종이 그의 나이를 묻는 통에 들통이 나서 웃음꺼리가 되었다 한다. 상하구분과 예의범절이 엄격하던 당시에 이러한 파격적 행동은 그의 소탈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그 때문인지 그의 이러한 면모와 관련된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그가 온양에 근친(覲親: 관리가 휴가를 얻어 부모님을 찾아 뵙는 것)하여 오고 갈 때면 늘 간소한 행차를 하였고 소를 타고 가기도 하였다. 하루는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의 수령들이 그가 온양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길목인 장호원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소를 탄 어느 사람이 태연히 그들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에 수령들이 노하여 하인을 시켜 불러오게 하니, 그가 하인에게 이르기를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라고 하였다. 하인이 돌아와 고했더니 수령들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그만 못에 관인(官印)을 빠뜨리고 말았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그 못을 ‘도장을 빠뜨린 못’이라 하여 인침연(印沈淵)이라 하였다 한다.
또 하나 일화를 소개하면,
어느 날인가 맹사성이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비를 만나 길가 정자로 비를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행차를 성하게 꾸민 한 젊은 사람이 먼저 누상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는 아래층에서 비를 피했다. 젊은 사람은 영남사람으로 의정부의 하급 실무직인 녹사(錄事) 시험에 응시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맹사성을 누상으로 불러 올리고는 이야기도 하고 장기도 두게 되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심심풀이 삼아 말 끝에 ‘공(公)’ ‘당(堂)’자를 넣어 문답을 하기로 하였다. 맹사성이 먼저 물었다. ‘무엇하러 서울 가는공’하니 젊은이는 ‘벼슬 구하러 간당'하는 것이었다. ‘무슨 벼슬인공’ ‘녹사 시험이란당’ ‘내가 시켜주겠는공’ ‘웃기지 말랑’ 하였다.
그 후 그 영남사람이 시험에 합격하여 인사차 의정부에 들렀는데, 맹사성이 단상에 앉아 있다가 ‘어떠한공’ 하고 물으니 그가 비로소 깨닫고 사색이 되어 ‘죽어지이당’이라 하니 주위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이상하게 여겼다. 맹사성은 그를 녹사로 삼았고 나중에 맹사성의 추천으로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공당문답’이라 하였다 한다.
그는 음률에 조예가 깊어 박연(朴堧)이 아악(雅樂)을 정리할 때 매양 그의 자문을 받았으며, 스스로 악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한다. 그가 즐겨 불었다는 옥퉁소는 지금 아산 온양 고택(古宅)에 가보로 전해온다. 평소 피리 불기를 좋아하여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이르러 피리소리가 들리면 그가 있음을 알았다 한다. 그러나 사적으로 청탁하러 온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 안에서 피리만 불면서 스스로 돌아가게 하였고, 공무로 찾아온 사람은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한다.
그는 또한 청백리(淸白吏)로서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안 포단에 앉았는데, 집은 좁고 비가 샜다. 하루는 병조판서가 공무로 그의 집을 찾았는데, 때마침 소낙비가 내려 집안 곳곳에 비가 새어 의관이 모두 젖어버렸다. 이에 병조판서가 크게 깨닫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 집에 짓고 있던 바깥 행랑채를 뜯어버렸다고 한다.
솔 재松 峴 (송현동)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미대사관 직원용 제2관사 사이에 있던 고개를 솔재, 한자로 송현(松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예전 고개 주위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므로 불리어졌으며, 이 곳 송현동 뿐 아니라 수송동과 중학동에 걸쳐 소나무가 무성하였다 한다. 송현이 있으므로 해서 지금의 송현동(松峴洞)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태조실록』 권13 태조 7년 4월 임신조(壬申條)에 “경복궁 좌강(左岡)의 소나무가 번성하므로 인근의 인가를 철거토록 명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일대의 소나무는 국가에서까지 보호할 만큼 울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솔재는 지금은 많이 낮추어지고 넓혀져 포장되었지만 예전에는 높고 험한 고갯길이었음을 17∼18세기에 그려진 서울의 옛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곳 솔재에는 태조 7년(1398)에 있었던 제1차 왕자의 난에 얽힌 일화가 있다. 솔재에는 남은(南誾)이 살았는데, 태조의 여덟번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앞장섰던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 등이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날 이곳 남은의 집에 모여 있다가 정안군(靖安君: 후의 태종) 일당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솔재는 1911년 도시계획에 따라 폭이 12간으로 넓혀지면서 고개가 많이 깎여 낮아졌다. 서울에는 이곳의 송현과 소공동의 송현 두 곳이 있었는데, 이 곳이 북쪽이므로 북송현, 소공동쪽을 남송현이라 하였다.
박석고개薄石峴 (수송동)
종로구 수송동과 조계사 사이의 고개를 박석고개, 한자로 박석현(薄石峴)이라 하였다. 그것은 이 고갯길이 비가 오면 질퍽해서 통행이 불편하여 박석을 깔았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박석고개의 동쪽 마을을 동골(東谷), 서쪽 마을을 박동이라 하였다.
자하문고개창의문고개 (부암동)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자하문고개 혹은 창의문고개라 하였다. 고개 마루턱에 자하문(紫霞門)이 있으므로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자하문의 정식 이름은 창의문(彰義門)으로서 도성의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에서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있다. 창의문을 속칭 자하문이라 한 것은 창의문이 자핫골(지금의 청운동)에 있으므로 해서 생긴 속칭이다. 청운동 일대는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이라 하였다.
그리고 창의문을 장의문(莊義門 혹은 藏義門)이라고도 하였는데, 그로 해서 청운동·적선동 일대를 장의동(莊義洞), 줄여서 장동(莊洞)이라 칭하였다. 또 성밖 신영동에 있던 장의사(藏義寺)의 이름에 연유하여 일명 장의문(藏義門)이라고도 하였다.
창의문은 도성 4소문의 하나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의 서쪽 날개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태조 5년(1396) 서울성곽과 4대문 4소문이 건설될 때 함께 건립되었다. 그런데 창의문은 건립된지 18년 만에 한때 폐쇄되기도 하였다. 즉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백악산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아니 된다 하여 동령에 있는 숙청문과 서령에 있는 창의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두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원래 이 두 문은 높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길이 매우 험하고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으므로 숙청문에서는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 밖 경원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고, 창의문에서는 서쪽으로 세검정 골짜기로 빠져 나와 홍제원의 경의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또한 경원가도와 경의가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데에는 각기 동소문과 서소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하므로 두 문을 폐쇄하여도 별반 지장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후 세종 28년(1446)에 창의문에 대한 출입통제가 완화되어 왕명을 받아 출입하는 외에는 항상 닫고 열지 않도록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에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보면 항상 닫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도성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창의문은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정면 4간, 측면 2간,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이 목재 문루는 견실하고 정교하며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 또한 아담하다.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연속되어 있다.
다락에는 나무로 만든 큰 닭을 걸어 놓았는데, 그 까닭은 문 밖의 지세(地勢)가 지네와 흡사하기 때문에 그 기세를 제압하기 위하여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양을 만들어 걸어놓았다 한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1623) 이귀(李貴)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金),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李曙軍)과 이천의 이중로군(李重老軍)은 홍제원에서 김유군(金軍)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창의문을 나서면 부암동(付岩洞)이 된다. 1970년까지만 해도 창의문에서 세검정으로 가는 길 가 동쪽 부암동 134번지에 높이 2m 쯤 되는 부침바위(付岩)가 있었다. 부암동 동명은 이 부침바위가 있으므로 해서 유래되었다. 부침바위의 표면은 마치 벌집 모양 송송 뚫어진 것처럼 오목오목하게 패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 수대로 문지르다가 손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착 붙으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서 여인들이 돌을 붙이려 애쓴 흔적이 벌집처럼 보이게 되었고 바위의 이름도 유래되었다.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바위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여인들이 바위에 돌을 붙여놓고 정성스럽게 절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부침바위에 대한 유래는 고려 중엽 몽고의 침입을 받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많은 장정들이 원나라에 끌려갔는데, 그 중에는 신혼초야를 지낸 신랑도 섞여 있었다 한다. 혼인 하룻만에 생이별을 한 신부는 매일 소복을 하고 부침바위에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된 왕이 원나라 조정에 그 뜻을 전하여 마침내 신랑이 돌아와 부부가 상봉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소복을 하고 매일 같이 기도를 하며 빌 때는 바위에 붙인 돌이 떨어졌는데, 부부가 상봉한 후에는 붙인 돌이 그대로 있다 하여 부침바위라 하게 된 것이다. 이후 부터 아들 낳기를 바라거나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려는 부모들이 이 바위에 돌을 붙이고 빌었다 한다.
자하문고개, 자하문 밖 한길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간 부암동 산 161번지 넓은 터전에는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6호인 석파정(石坡亭)이 자리하고 있다. 주위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정교 화려한 정자와 건물이 어울려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으로 꼽히는 석파정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다. 바위에 삼계동(三溪洞)이란 글자를 새겨 놓아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별장을 차지하면서 앞산이 바위산이었으므로 대원군이 아호를 석파(石坡)라 하고 정자이름을 석파정(石坡亭)이라 하였다.
경내에는 안태각(安泰閣), 낙안당(樂安堂), 망원정(望遠亭),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 등 7동의 주요 건물이 남아 있으며, 뜰에는 오래 된 소나무들이 차일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사랑채는 1958년 종로구 홍지동으로 옮겨져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석파정의 원래 소유자는 안동김씨의 세도가 김흥근이었다. 아버지 김명순(金明淳)이 순조의 장인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과 사촌간이며, 일찍이 벼슬에 올라 예조판서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성격이 격하고 방자한 면이 있어 한 때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당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대원군이 집권의 야욕을 보이자 조의석상(朝議席上)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함으로서 대원군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원군이 집권한 후 많은 토지를 빼앗겼다.
특히 그가 소유했던 석파정은 장안에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 있어서 대원군이 팔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팔지 않았다. 이에 대원군이 한가지 꾀를 내어 그에게 하룻동안 석파정을 빌려줄 것을 간청하여 허락받았는데, 대원군은 그의 아들 고종을 대동하고 다녀 갔다. 국법에 임금이 와서 묵고 간 곳에는 신하가 감히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석파정은 대원군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석파정은 세습되어 이희(李喜)·이준(李埈)·이우(李)의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후 천주교 주관의 콜롬비아고아원에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개인 소유이다.
자하문고개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청운동(淸雲洞)으로, 그 동명 유래는 종전의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지금 청운초등학교 뒤쪽 일대의 청풍계는 인조 때의 문신 김상용(金尙容)이 청풍각(淸風閣)·태고정(太古亭) 등을 짓고 거주하던 곳으로, 많은 명사들이 찾아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후에도 청풍계의 건물들은 잘 보존되었으며, 조선후기에 그 집안인 안동김씨가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임금이 때로 태고정 등을 찾음으로서 청풍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인왕산의 동쪽 기슭, 자하문고개 아래에 위치한 백운동은 산이 그렇게 높지 않고 골짜기가 그렇게 깊지 않지만 작고 큰 산자락들이 둘러 앉고 푸른 소나무숲 사이 작은 길에는 덩굴나무들이 엉켜 있었으며, 그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아침 저녁으로는 흰구름이 덮여 있었으니 도성에서 가까운 명승지로서 많은 명사들이 이곳을 찾아 자연을 벗하였다고 한다.
자하문고개를 넘어 신영동 1686번지에는 정자 세검정(洗劒亭)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일대를 세검정동이라 하였으며, 세검정동은 다시 세검동으로 약칭되어 온다. 따라서 세검동은 현재 법정동명도 행정동명도 아니지만 신영동은 물론 자하문고개를 넘어서부터 홍지문안 북한산과 백악 뒤의 여러 골짜기 일대가 대개 세검동으로 불리어 왔다. 이러한 깊고 넓은 계곡, 그 중에서도 수석과 좌우 산림풍경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은 것이 세검정이었다.
예전 세검정 주위는 동령폭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바위 위로 소리내어 흘러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더구나 여름 장마철이 되면 많은 물이 모여서 부근 계곡에 넘쳐 흘러 일대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도성안 사람들이 많이 나가 넘쳐 흐르는 물결을 구경하였는데, 이를 연중행사로 삼았다 한다. 또 정자 앞에는 넓은 바위들이 깔려 있고 그 바위들은 물에 갈려서 깨끗하고 매끄럽기가 비단폭 같았으므로 평상시에는 근처의 학동들이 붓과 먹을 들고 나가 글씨를 연습하여 먹물 흔적이 가실 날이 없었다 한다.
세검정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먼저 인조반정 때의 이야기로서,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이괄을 비롯한 이귀·김자점·김유 등이 자하문 밖 이 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서 칼을 씻었다 하여 정자의 이름을 세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숙종 45년(1719)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고 평창(平倉) 등 시설을 그 부근에 두었으며, 영조 때에는 군문(軍門)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설치하고 종래 북한산성의 업무를 관장하던 경리청(經理廳)도 총융청과 합하니 이 곳은 국방의 요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때는 또 탕춘대의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고치고 왕이 때때로 거둥하여 장병들의 무예를 시험하기도 했으며, 300여간의 연융대 청사를 새로 지었다. 신영동(新營洞)의 동명은 새 군영(軍營)이 들어섰다 하여 붙여졌다. 이렇게 군사시설이 증대되면서 연융대 앞 시냇물이 흐르는 바위 위에 정자를 지으니 장병과 관민들이 수시로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정자 이름을 세검(洗劒)이라 한 것은 장소가 군영 앞이요, 또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공하였던 사실을 기념하면서 ‘칼을 씻어 칼집에 거둔다.’ 곧 평화를 구가한다는 뜻이었다 한다.
세검정은 1941년 부근의 종이공장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주초석(柱礎石)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5월에 복원하였다. 복원된 정자는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정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암반 위에 4각 장초석(長礎石)을 세우 고마루를 꾸몄으며 5평 반 가량의 규모로 기둥머리에는 익공계(翼工系) 양식의 간결한 수법으로 결구(結構)하였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세검동 일대는 산이 높고 물이 맑아 경치는 좋으나 논밭이 없고 다른 생산이 없어서 주민들이 생활고를 못이겨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한성시전(漢城市廛)에서 매매되는 포목의 마전(麻廛)과 각 관청에서 쓰는 메주와 종이 제조의 권리를 이 곳 사람들에게 주어서 생활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제야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면서 이 곳에 알맞는 여러 과목(果木)을 심어서 능금·자두밭으로 개발하여 생활의 자립을 확립하였다 한다. 세검동 일대는 봄에는 온갖 꽃의 아름다운 빛, 여름에는 싱싱한 과실, 가을에는 불타는 듯한 단풍, 다듬은 듯한 반석(盤石), 옥같이 맑은 시냇물이 온 골짜기를 장식하였다. 특히 세검동 일대는 능금과 자두의 명산지를 이루었다.
한편 자하문고개에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 침투를 막기 위해 최후로 이를 검문하다 순직한 당시 종로경찰서장 고 최규식경무관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1년 9월 9일 출생, 1968년 1월 21일 순직. 그는 용감한 정의인으로 종로경찰서에 재직 중 청와대를 습격하여 오는 공산유격대와 싸우다가 장렬하게도 전사하므로 정부는 경무관의 계급과 태극무공훈장을 내렸다. 비록 한 때의 비극 속에서 육신의 생명은 짧았으나 의를 위하는 그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 남으리라.
그리고 당시 최경무관과 함께 순직한 고 정종수경사의 순직비도 세워져 있다.
조석(朝夕)고개 (부암동)
종로구 부암동에서 신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조석(朝夕)고개라 하였다. 부암동 1311번지∼신영동 1506번지로 창의문 밖 버스종점에서 내려 세검정초등학교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지름길 중간에 있는 고개이다. 그 명칭 유래는 어려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성안으로 품팔이를 가는 가난한 서민들이 아침 저녁으로 넘어 다녔던 고개라 하여 조석고개라 하였다 한다.
이 고개는 신영동·구기동·평창동 주민들이 넘어 다녔는데, 고개의 폭이 좁고 험하였으며, 저녁에는 앞 뒤 사람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몹시 어두웠기 때문에 기다시피 넘어 다녔다 한다.
탕춘대고개조세고개(홍지동)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정자에서 평창동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를 탕춘대고개 혹은 조세고개라 하였다.
탕춘대고개의 명칭 유래는 고개의 오른쪽 언덕에 조선시대 연산군의 놀이터로서 탕춘대(蕩春臺)란 정자가 있었고,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을 쌓은 다음 숙종 45년(1719) 북한산성과 도성을 연결하는 새 성을 쌓고 그 명칭을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 하였으므로 연유한다. 그리고 조세고개의 명칭 유래는 고개 부근에 조선시대에 조지서(造紙署)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서를 일명 조세라고도 하였으므로 조세고개라 불리었다.
자하문 밖 세검정 일대를 지금도 탕춘대라 부르는데, 이는 연산군 때에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사찰 장의사(藏義寺)를 이궁(離宮)으로 쓰면서 그 아래 경치 좋은 언덕을 놀이터로 쓰면서 시작되었다. ‘탕춘(蕩春)’이란 봄기운을 만끽한다는 뜻으로 연산군이 질탕하게 놀기를 좋아하여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연산군 11년(1505)에 경치 좋은 이 곳에 탕춘대를 짓고 그 앞 시냇가에는 수각(水閣)을 세우고 유리를 끼워 냇가를 볼 수 있도록 하여 궁녀들과 놀았다 한다. 이 때 자하문과 홍은동 쪽을 막게 하여 도성민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보면,
창의문 밖 삼각·백운 두 산 사이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어서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아 연산군이 이궁(離宮)을 설치하고 수각(水閣)과 탕춘대와 석조를 꾸며 연희궁 놀이터와 함께 수시로 드나들면서 궁녀들과 놀았다.
고 하였다. 실제 탕춘대가 있던 부근의 시냇물이 감돌아 흐르는 신영동 137, 139, 141∼144번지 일대에는 승목소라는 마을이 있었고, 장의사계곡은 봄철의 꽃, 여름의 과일, 가을의 단풍이 어우러져 세검정 일대의 수석과 함께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였다. 이러하므로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 시인과 묵객들이 줄지어 찾았던 곳이며, 1970년대 초까지도 각급 학교의 소풍장소로서 애용되던 곳이었다.
이 때 놀이터의 중심이 된 장의사는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창건되었다. 신라 장수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이 백제와의 황산벌전투에서 전사하자 그 충의와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 절은 많은 고승들이 거쳐 갔고, 고려 현종 이후에는 왕과 왕비가 자주 불공을 드리러 가던 큰 사찰이었다.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서울 근교의 명소로 열손가락 안에 꼽혔다. 이러한 까닭에 세종 8년(1426)에는 이 절에 독서당을 설치하고 집현전 학사 가운데 자질이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서 휴가를 주어 공부에 진력하게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에 와서 이 제도도 없어지고 유서 깊은 절은 한낱 놀이터의 중심이 되고 말았으니, 그 놀이터의 이름이 바로 탕춘대였다.
1623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이 곳은 폐허가 되었는데, 영조 23년(1747) 삼청동에 있던 총융청(摠戎廳)을 이 곳 장의사터로 이전하면서 탕춘대는 연융대(鍊戎臺)라 고쳐 불리었다. 총융청은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겪은 후 군대를 정비할 목적으로 사직동 북쪽에 설치했다가 현종 10년(1669)에 삼청동으로 청사를 옮겼었다. 그러다가 영조 23년(1747) 북한산성을 관리하는 관청인 경리청(經理廳)을 폐지하고 그 관원들을 총융청에 이속시키면서 이 곳 장의사터로 이전한 것이다. 이 때부터 총융청의 감독 아래 북한산성관성장(北漢山城管城將)을 따로 두고 동시에 승병 350명을 지휘하게 하였다. 총융청은 지금의 수도경비사령부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고종 21년(1884)까지 존속하였다.
탕춘대성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청군에게 항복한 수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숙종 28년(1702)부터 북한산성의 축성 논의가 시작되어 찬반 양론 끝에 숙종 37년(1711) 북한산성이 완성된 후 8년 후인 숙종 45년(1719)에 축조되었다. 즉, 국가 유사시에 북한산성에서 수비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탕춘대 일대에 창고를 짓고 군량을 저장해야 하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탕춘대성을 축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10월 6일까지 약 40일간 공사를 진행하여 전체 성 길이의 절반 가량을 쌓았는데, 자하문 서쪽 탕춘대성이 시작되는 곳에는 토성(土城)으로, 그 외는 석성(石城)으로 하였다. 성의 높이는 3.03m이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공사는 이듬해 2월부터 시작하여 약 40일만에 완공되었다.
공사에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문과 도성민이 동원되었으며, 성곽의 길이는 북한산 비봉에서부터 구기터널·홍지문을 거쳐 인왕산 정상까지 약 4㎞가 된다. 축성된 성 안에는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 창고·상평창·하평창 등 주요 군사시설을 설치하였다. 탕춘대성은 한마디로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성으로 축성 당시에는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성(西城)이라 불리었으나 후에 탕춘대성이라 정식 명명되었다.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체성(體城)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한편 모래내 옆을 지나는 세검정길을 내려가다 보면 성곽이 끊어진 곳, 홍지동 산24번지에 홍지문(弘智門)이 있다. 이 문은 숙종 45년(1719) 탕춘대성을 축조하면서 건축한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축조 당시에는 한성의 북쪽 문이라 하여 한북문(漢北門)이라 하고, 또는 북쪽을 호위한다는 뜻으로 한북문(北門)이라 하였는데,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써서 달게한 후로 공식명칭을 홍지문이라 하였다.
홍지문은 화강암으로 축조되어 중앙부에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이 꾸며진 위에 단층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부분 둘레에는 여장(女墻)이 둘러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정면 3간, 측면 2간에 우진각 지붕이며 사방이 틔어 있다.
이 성문에 잇대어 성벽은 모래내를 가로 질러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수문은 물이 빠져 흘러 내리게 한 화강암 월단이 5개 옆으로 늘어서 있는데, 총 길이 26.72m, 폭 6.8m, 높이 5.23m이다. 월단마다 수구(水口)의 규모는 폭 3.76m, 높이 2.78m이다. 홍지문은 원래 문루가 퇴락한데다 1921년 1월에 붕괴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대홍수로 인해 오간대수문마저 떠내려 갔다. 그 후 1977년 7월 서울시에서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복원하였다. 복원 당시 현판 글씨는 고 박정희대통령이 썼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1976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탕춘대고개를 일명 조세고개라고도 하였는데, 조세고개의 명칭 유래가 된 조지서(造紙署)는 조선시대에 종이를 제조하는 사무와 지장(紙匠)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던 관아이다. 조지서는 지금 세검정초등학교 동북쪽 신영동 196번지 일대의 세검정길 일부와 가로변에 위치하였다. 서울특별시기념표석위원회는 1987년 이 조지서터에 기념 표석(標石)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인 지장(紙匠)들은 조지서 주위에 모여 살았다. 종이 제조공장을 이 곳에 세운 것은 주위가 낮은 산으로 둘러 싸여 종이 원료인 닥나무 재배에 유리하였을 뿐 아니라 삶아낸 닥나무 껍질을 헹구어내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맑은 물이 북한산에서 흘러 내려와 홍제천(모래내)을 이루고 주위에 반석(盤石)이 많아서 종이를 제조하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본사료인 사관(史官)이 쓴 사초(史草)를 실록 편찬이 끝난 후에는 이 곳 세검정 일대의 맑은 물에 종이의 먹물을 씻어내렸다. 종이가 귀했던 당시에는 닥을 원료로 해서 만든 한지(韓紙)를 한번 썼다 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종이의 먹물을 맑은 물로 씻어내고 절구통에 넣고 빻은 다음 다시 물에 풀어 환지라는 재생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종이 제조공장이 이 곳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종이 제조공장은 태종 15년(1415) 7월 호조의 건의에 따라 처음 조지소(造紙所)라는 명칭으로 이곳에 설치되었다. 태종이 이곳에 조지소를 설치한 것은 태종 10년(1410)에 지폐인 저화(楮貨)를 통용하게 되자 이를 만들 종이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태종 때의 조지소는 단지 저화지의 생산에 그치고 다른 용도의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았던 듯하다. 이 후 본격적인 종이 제조업무를 맡은 조지소의 설치는 세종 때로서 세종 16년(1434)이 되면 종이 만드는 능력이 『자치통감(資治通鑑)』 5만권을 인쇄할 수 있는 분량에 이르렀다. 세종은 단순한 종이 생산에만 만족하지 않고 기술 개량과 외국의 선진 종이 제조기술을 도입하는데 힘썼다.
조지소는 세조 12년(1466) 조지서(造紙署)로 개편되었는데, 건물이 100여간에 이르렀다. 그 편성을 보면 경관직(京官職)에 제조(提調) 1명, 사지(司紙) 1명, 별제(別提) 1명을 두고 기술직으로 공조(工造) 4명과 공작(工作) 2명이 배속되어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였다. 실무 기술자로서 지장(紙匠) 81명, 염장(匠) 8명, 목장(木匠) 2명 등 모두 91명의 장인(匠人)들이 배치되었고, 이들의 보조원으로 차비노(差備奴) 90명과 거수노(踞隨奴) 4명이 딸려 잡일을 도왔다하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조지서는 이 후 고종 19년(1882)에 폐쇄되기까지 각종 종이 제조와 종이공장 관리를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전국에서 제조되는 종이 가운데 조지서의 제품이 그 종류와 질에서 최상품으로 꼽혔다. 생산품은 왕실이나 국가기관에서 사용하였고, 중국에 조공품으로 보내졌다. 그러므로 조지서의 종이 생산품은 항상 최상의 것이 요구되었으며, 그 질이 떨어지는 경우 매우 엄한 벌을 받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종이 제조과정에서 지장(紙匠)의 처음 잘못에는 매 80대를 때리며,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10대씩 더하여 100대에 이르도록 규정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관영수공업의 쇠퇴와 더불어 제지분야에서도 민간제지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탕춘대 일대에는 관 주도 제지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제지업 역시 크게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순조 때의 기록인 『한경지략(漢京識略)』 궐외각사조(闕外各司條)에는 “세검정 탕춘대 옆에는 민가 수백호가 제지업으로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전업적으로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종이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과거시험의 답안지인 시지(試紙)의 수요가 특히 많았다 한다. 당시 선비들은 당국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시험지를 선호하였다. 세력있는 집안의 자제들은 조지서의 지장(紙匠)에게 특별히 좋은 시지를 주문 생산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은 거의 지전(紙廛)에서 종이를 구입하였으며, 지전은 그 종이를 조지서 지장에게 주문하였다. 지전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원료와 공전의 값을 미리 지장에게 지급하였다. 이들 지전상인들의 주문은 계속적이고도 대량이었으므로 조지서의 지장들에게 있어서 지전상인들은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자본을 대는 물주(物主)로서 실질적으로는 지장을 고용한 고용주와 다를 바 없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참고로 조선시대 종이 제조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닥나무를 가마에 쪄서 껍질을 벗겨 흑피를 만들고, 그것을 물에 불궈서 껍질을 제거하여 원료로서의 백피를 만든 다음, 끓는 잿물에 백피를 표백하고, 표백한 섬유를 방망이로 다듬질한다. 그리고 다듬질한 원료를 녹조에 넣고 풀을 가하여 종이원료를 만든다. 이어서 그것을 대발 위에 옮겨 종이를 뜬다. 종이를 한장씩 떼어내 건조판에 붙여 말려 완성한다. 이러한 복잡한 공정에서 공정마다 맡은 사람이 있어 분업적 협업으로 일을 했다. 한마디로 세검정 일대는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품질이 좋은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업단지였다 할 것이다.
이러한 조지서는 고종 19년(1882)에 혁파되었다. 그러나 이 곳 일대에는 조선시대의 전통을 이어 받은 듯 1970년까지만 해도 창호지나 벽지 제조공장이 있어 종이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1971년 8월 30일 북악터널이 완공되고 이 앞을 흐르던 모래내의 일부 구간을 복개하여 그 위로 1973년 11월 22일 신영상가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종이공장들은 없어지고 말았다.
삼형제고개 (홍파동)
종로구 행촌동에서 사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홍파동 42번지 부근 일대를 삼형제고개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옛날 고개 밑에 주막을 경영하는 삼형제가 살았는데,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 조선시대에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그의 집 문앞에 세우는 붉은 문)이 세워졌으므로 삼형제고개라 하였다. 지금 이 고개는 사직터널과 성산로로 이어진 아스팔트도로로 바뀌어졌지만 사직터널이 개통되기 전에는 이 고개를 넘어다녀야 했다.
야주개夜珠峴 (당주동)
신문로 18번지와 20번지 사이 당주동과 신문로 1가에 걸쳐 있던 고개를 야주개, 한자로 야주현(夜珠峴) 또는 야조현(夜照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근처에 있는 경희궁(慶熙宮)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현판 글씨가 명필(名筆)로 어찌나 빛이 나든지 캄캄한 밤에도 이 고개까지 빛이 나므로 붙여졌다 한다. 이 야주개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을 야주갯골 또는 야주개라 불렀다. 약간의 높이 차가 남아있기는 하나 제법 높았던 야주개는 도로 포장공사로 깎여져 지금은 거의 평지화되어 고개라는 느낌마져 없어져 버렸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서 종로구 신문로 1가 581번지 구세군회관빌딩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이 문은 광해군 8년(1616)에 경희궁을 건립하면서 궁궐 동쪽에 정문으로 세운 것이다. 흥화문(興化門)이란 현판글씨는 이신(李紳)이 썼다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소개하고 있다. 이 글씨가 어찌나 명필이었던지 밤이면 서광(瑞光)을 발하여 당주동고갯길까지 훤하게 비추었으므로 이 고개를 ‘밤에도 빛을 발하는 고개’ 곧 야주개라 하였던 이다. 광복 후에도 노인층에서는 당주동길을 흔히 야주개라 하였다. 이에 따라 경희궁을 ‘야주개대궐(夜珠峴大闕, 夜照峴大闕)’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흥화문은 1915년에 일제가 경희궁을 헐어내고 경성중학교를 세울 때 경희궁의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매각되어 중구 장충동 2가 202번지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신주로 한 춘무신사(春畝神社)의 정문이 되었다. 광복 후 이 자리가 영빈관으로 바뀌면서 흥화문(興化門)이란 글씨 대신 영빈관(迎賓館)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신라호텔이 세워진 후에는 이 호텔의 정문이 되었다. 1988년 서울시에서 경희궁복원사업을 실시하면서 이 문을 서울고등학교 정문자리에 이전하였다.
이곳 야주개는 아동문학가로서 어린이운동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 소파 방정환선생(1899∼1931)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야주개 일대 당주동은 입시학원이 많이 들어섰던 골목길이었으며, 재수생과 입시생들이 드나들던 분식집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강남지역 개발과 1980년대 입시학원의 강남으로의 분산정책, 도심학교의 강남이전 촉진책에 의하여 이곳에 있던 입시학원들이 노량진과 영동 등지로 이전해 감에 따라 분식집들도 하나 둘씩 폐업하였다. 더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 지역의 재개발사업으로 낡은 단층 기와집 대신 고층빌딩이 건축되면서 각종 회사들이 입주하자 이 곳 골목길은 입시생 대신 회사원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세종로에 세종문화회관이 신축된 후에는 이곳에서 개최되는 각종 연주회와 음악회를 찾는 청중들의 오가는 장소로 변모되었다.
새문고개 (신문로 1가)
종로구 신문로 2가 2번지 옛 서울고등학교(경희궁터)에서 서대문로터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새문고개라 하였다. 지금 고려병원과 문화방송국 사이에 돈의문(敦義門서대문)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으로, 돈의문을 새문이라고도 하였으므로 새문고개라 불리어졌다. 돈의문이 새문으로 불리게된 것은 그 위치가 몇번 바뀌어 ‘새로 문을 냈다’ 하여 새문 또는 신문(新門)이라 하였으며, 문 밖을 새문밖, 문 안쪽을 새문안이라 하였고, 현재 세종로네거리∼서대문로터리에 이르는 길이름도 새문안길이라 이름하였다.
이 고개 위에 서 있던 돈의문에 대하여 살펴보자. 돈의문은 도성의 서쪽 대문으로서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제2차 공역이 끝나고 도성 8개의 문이 완공되었을 때 함께 세워졌다. 그런데 태종 13년(1413) 6월의 『태종실록』을 보면,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청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좌우 팔과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손상시켜서는 아니된다.”하여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두 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동시에 같은 이유로 돈의문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 서전문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역시 태종 13년 6월의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이 의정부에 명하여 새로 서문을 세울만한 곳을 찾아보게 했는데,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의 집 앞에 있는 옛길(舊路)을 따라서 문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이숙번이 인덕궁(仁德宮) 앞에 작은 동(洞)이 있는데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만한 곳이라 하여 그가 말하는 곳에 서전문(西箭門)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서전문은 경희궁(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이 있던 서쪽 언덕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세종 4년(1422) 도성을 수축할때에 서전문에 옹성(甕城)을 쌓기 위하여 특별히 평안도 군인 1,000명을 동원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옹성을 쌓지 않고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그 남쪽 마루턱에 새로 문을 세우고 그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돈의문은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新門)이라 불리어지기도 했다. 서전문을 헐고 새로 돈의문을 건립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서전문이 있던 곳은 지대가 높고 험하여 통행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보다 통행에 편리한 곳으로 문을 옮겼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돈의문이 있었던 위치와 서전문이 있었던 위치를 살펴보면 돈의문의 위치가 서전문에 비해 통행에 훨씬 편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돈의문을 새문이라 한 것은 ‘새로 세운문’이라는 뜻과 함께 또 하나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새문이란 말의 연유는 색문(塞門), 즉 막을 색(塞)자를 써서 문을 막았다는 뜻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1·2차 왕자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공헌한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이 서대문 안에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 돈의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과 마소의 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돈의문을 닫아버리고 통행을 금했다 하여 색문(塞門)이라 하였고 부근 마을을 색문동(塞門洞)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새문,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전문을 폐쇄하고 돈의문을 세운 것은 세종 때의 일이니까, 이 때 이숙번이 막은 문은 돈의문이 아니고 서전문인 것이다.
한편 색문동에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이 살았는데, 광해군 때 이 색문동에 왕기(王氣)가 서린다 하여 이를 막기 위해 새로 궁궐을 건축한 것이 경희궁이다. 사적 제271호이다. 신문로 2가 2번지에 위치하는 경희궁은 광해군 9년(1617)에 착공하여 3년 후 광해군 12년(1620)에 완공되었는데,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경희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왕 15년 3월에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추대된 인조는 정원군의 장남이었고, 정원군은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었으니 색문동의 왕기설(王氣說)이 적중된 셈이다. 인조 이후 역대 왕들이 수시로 거처하면서 창덕궁을 동궐(東闕), 경희궁을 서궐(西闕)이라 하였다.
돈의문은 조선시대에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에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었다. 조선시대 한성으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도로는 간선도로와 지선도로로 구분되었는데, 이 중 간선도로망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9개가 있었다. 이 가운데 제1로가 돈의문으로부터 무악재를 넘어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길로, 홍제원을 경유하여 고양·파주·개성·평산·황주·평양·정주·선천을 거쳐가는 총 1,086리의 장거리로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신들이 통행하는 가장 비중이 큰 도로였다.
그 옛날 이 곳 새문고개를 지나 돈의문을 나서게 되면 언덕 아래로 무악재에서 발원한 물이 흐르고, 그 위로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 이름을 경곳다리(京橋)라 하였는데, 그것은 다리가 경기감영(京畿監營) 창고의 앞쪽에 있다 하여 붙여졌다. 다리를 건너면 경기도의 행정을 담당하던 경기감영(현 서대문적십자병원 자리)이 나타나게 된다. 그 앞으로는 녹번고개를 넘어 무악재를 지나는 큰 길이 나오게 된다. 의주로변에 있는 경찰청과 미동초등학교 주변에는 ‘미나리깡’이라고 하는 미나리밭이 물결치고 충정로 동사무소와 인창중고등학교 주변에는 초가집들이 있었던 풍경을 1764년에 제작된 도성대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돈의문은 역사적으로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乙未事變)과 관련이 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인조 2년(1624),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은 반군을 이끌고 2월 10일 돈의문을 통해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괄군은 추격하여온 장만(張晩)·정충신(鄭忠信) 등 관군과 안산(무악)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쫓기자, 가까운 돈의문을 통하여 성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그러나 도성민들이 돈의문을 안에서 굳게 닫아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서 남대문을 통해 입성하였다. 이괄은 광희문으로 빠져나가서 이천으로 가는 길에 부하들에 의해 죽고 말았다.
그리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친일정권을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1895년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 불량배, 낭인들과 돈의문 앞에서 모였다. 새벽 5시경의 파루종이 울리자, 이들은 돈의문을 통과하여 경복궁을 침입,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니 이는 돈의문에 얽힌 민족적인 한이 아닐 수 없다.
돈의문은 도성 서북쪽의 관문으로 410여년간 인정(人定: 통행금지 시작시간)에 닫고 파루(罷漏: 통행금지 해제시간)에 열어 행인을 통제하고 유통하였으나, 1915년 시구역개수계획(市區域改修計劃)이라는 명목으로 도로확장을 할 때 일제에 의해 헐리고 말아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당시 일제는 돈의문의 목재와 기와 및 석재를 경매하였는데, 당시 염덕기란 사람에게 205원에 낙찰되었다 한다. 그가 문루를 헐어낼 때 그 속에서 불상과 많은 보물이 나와서 큰 횡재를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1985년 서울특별시기념표석위원회에서 돈의문터에 대한 표석을 설치하였다.
박석고개薄石峴 (명륜동)
창경궁의 정문 북쪽 곧 월근문(月覲門) 쪽에서 명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박석고개, 한자로 박석현(薄石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유래는 이 고개가 경모궁(景慕宮)의 입수목(入首목)이 되기도 하는데, 창경궁이나 경모궁에 비해 지대가 낮았으므로 낮은 지맥의 보호를 위하여 박석을 깔았기 때문에 박석고개가 된 것이다.
명륜동 2가와 명륜동 4가 사이에 걸쳐 있던 동네를 박석고개가 있다 하여 박석동(薄石洞)이라 하였다. 경모궁은 장헌세자(莊獻世子)와 그의 비 헌경왕후(獻敬王后)의 사당으로 영조 40년 (1764)에 세워졌다. 창덕궁 안에 있으며, 경모전(景慕殿)이라 하였다.
구름재雲峴 (운니동)
종로구 원서동 206번지 지금의 (주)현대 본사건물 대지에 오늘 날의 중앙천문기상대격인 서운관(書雲觀)이 있었으므로 운현궁과 (주)현대 본사건물 사이로 난 고갯길을 구름재 또는 운현(雲峴)이라 하였다.
서운관은 조선 개국 초에 설치되었으며, 세종 때에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서운관이란 명칭이 함께 통용되었다. 『단종실록』에는 서운관이 있는 이 고개를 서운관현(書雲觀峴)이라고 했는데, 운현(雲峴) 곧 구름재라는 명칭은 서운관현(西雲觀峴)이 운관현(雲觀峴)이 되었다가 다시 줄어서 운현(雲峴)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운현은 지금의 운니동(雲泥洞)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즉 종로구 익선동과의 경계가 되는 도로의 북쪽이 니동(泥洞)인데, 이곳은 비만 오면 몹씨 질퍽거렸으므로 진골, 곧 한자로 니동(泥洞) 또는 습동(濕洞)으로도 표기되었다. 영조 때 제작된 「도성지도」에는 이곳을 니동(泥洞)으로 표기하였는데, 진골이라 널리 불리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 중서(中署) 정선방(貞善坊) 돈녕계(敦寧契) 니동(泥洞), 구병조계(舊兵曹契) 니동(泥洞)이었는데, 1914년 4월 1일 ‘운현(雲峴)과 니동(泥洞)’의 머리글자를 따서 운니동(雲泥洞)이라 하였다.
운현의 명칭 유래가 된 서운관은 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측후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아였다. 지금 (주)현대 본사건물 앞에 서운관에 속하였던 관천대(觀天臺)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사적 제296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천대는 높이 3.46m, 너비 2.4m, 폭 2.5m로서 대 위에는 높이와 너비, 폭 각 70㎝인 정입방체의 돌이 놓여 있고 둘레에는 돌난간이 둘리어 있다.
운현이라고 하면 운현궁(雲峴宮)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운현의 남쪽 근방 운니동 80·85·114번지 일대에 일대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살았던 저택이 있는데, 운현의 지명을 따서 운현궁이라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현손(玄孫)으로서 아버지는 남연군 구(南延君 球), 어머니는 여흥민씨(麗興閔氏)였다. 숙종 이래 대대로 여흥민씨의 소유로 되어 왔던 안국동궁(安國洞宮)에서 출생, 구름재로 이사온 후 고종을 낳았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명으로 그의 아들 명복(命福)이 대통을 이어받아 입궐함에 따라 흥선군에게는 대원군의 칭호가 붙게 되었으며,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攝政)하였다. 그는 우선 조촐하던 집을 궁궐 못지 않은 대저택으로 개축하였다. 바깥채에 그의 집무실인 노안당(老安堂)과 아재당(我在堂)을, 안채에 고종이 태어난 노락당(老樂堂)과 별당으로 부인 민씨의 거처인 이로당(二老堂), 누정인 영화루(迎和樓)를 손질하였고, 할아버지 은신군(恩信君)과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사당을 집안에 신축하였다.
1898년 1월 흥선대원군이 이곳에서 별세하자 장손 이준용(李埈鎔)에게 양자로 들어온 의친왕 이강(李岡)의 차남 이우(李)가 운현궁을 지켜나갔다. 궁의 면적은 축소되어 현재 2,148평에 불과하고 건물 몇채만 남아 있다. 정원에는 고종이 어릴 때 올라가서 놀았다는 소나무가 있었다. 왕위에 오른 후 고종은 소나무에 종2품 벼슬아치가 다는 금관자를 달아주었으므로 이 소나무를 2품 대부송(大夫松)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소나무는 일제 때 벼락을 맞아 뿌리째 없어졌다.
사적 제257호로 지정된 운현궁은 대원군의 5대 직계손인 이청(李淸)의 개인 소유로 있었는데, 1991년 12월말 서울시에서 구입하여 1993년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96년 10월에 완공하여 전통문화공간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지금의 운현궁은 양관(洋館)을 포함한 대지는 덕성여자대학교가 소유하고 있으며, 현재는 운니동 98∼50, 71, 72, 80, 85, 114번지와 7, 10번지가 남아 있다.
가대(家垈) 안에는 운현궁의 몸채건물이었던 안채와 사랑채 일부, 북쪽에 별당건물이 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이 살던 양관은 1911∼1912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석재를 혼용한 벽돌 2층으로 프렌치 르네상스식으로 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1955년 학교법인 덕성학원이 소유하면서 덕성여자대학교 강의실 등으로 사용하다가 이 학교가 쌍문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2층은 창고로, 1층은 덕성여자대학교의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운현궁의 잔존 건물들 중 안채와 사랑채 일부를 살펴보면, 이 건물들은 격식이나 규모로 보아 일반 상류주택이라기 보다는 궁실(宮室)의 내전건물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러나 건물의 형태나 세부 구성요소는 상류주택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이 건물은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형태를 취하면서 이를 궁실의 격식으로 끌어올린 건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원군 집정시 운현궁에 전해오는 일화로는 이 곳 뜰에서 벌어졌던 방탄복 실험 이야기가 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부터 7년에 걸쳐 천주교에 대한 대박해를 가하였는데, 이를 응징하고자 프랑스의 동양함대가 1866년 강화에서 도발한 병인양요(丙寅洋擾)는 흥선대원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서양의 무력에 대항할 방책을 팔도에 공모하였다. 온갖 아이디어가 속출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서양총의 총탄이 뚫을 수 없는 방탄복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원리는 간단하였다. 서양총의 총탄이 뚫을 수 없을만한 두께로 무명베를 겹쳐 방탄복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운현궁 동남쪽 뜰에서 이 방탄복 실험이 벌어졌다. 먼저 아홉겹으로 겹친 베를 향해 서양총을 쏘아보니 뚫고 나간지라 한겹을 더해서 쏘아보고 또 한겹 더해 쏘아보길 거듭하니 열두겹 째에야 뚫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전하게 한겹 더 보태 열세겹의 방탄복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입어야 할 병사에 있었다. 그 두꺼운 방탄복에 투구와 배갑을 입고 보니 무겁고 둔하여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그 보다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운현궁에서 탄생한 방탄복은 실전에서 사용되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군측의 기록을 보면, 조선병사들이 입은 군복은 총탄을 막기 위해 1인치 이상 두꺼운데 이 옷에 불이 붙으면 꺼지지도 않고 끌 수도 없어 불에 타죽는 병사가 많았다는 것이다. 화상을 면하고자 포대 아래 바다로 뛰어드는 병사도 많았다고 적고 있다.
건양현建陽峴 (와룡동)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고개를 건양현(建陽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건양다경(建陽多慶)’에서 비롯되었으며, 창경궁과 창덕궁이 모두 조선시대 역대 임금이 머물던 곳으로서 경사스러운 일이 많았다는 뜻을 지녔다 한다.
배오개梨峴 (인의동)
종로구 인의동 112번지 지금의 해운항만청 동쪽에 있던 고개를 배오개, 한자로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인의동·종로 4가·예지동에 걸쳐 있던 마을을 이 배오개가 있으므로 해서 그 이름을 역시 배오개 혹은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이 고개의 명칭 유래는 예전 이 고개 입구에 배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배나무고개, 배고개라 하다가 세월이 가면서 음이 변하여 배오개가 되었으며, 한자로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한다. 또 하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예전 이 고개는 숲이 매우 울창하여 대낮에도 고개를 넘기가 무서워 길손 백명이 모여야 넘는다고 해서 백고개 혹은 백재라 하였는데, 백고개가 음이 변하여 배고개가 되었으며, 다시 배오개로 되었다 한다. 그리고 고개에 숲이 무성하여 짐승과 도깨비가 많다 하여 도깨비고개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배오개는 지금의 배오개길이 지나는 곳으로, 길을 넓히면서 평탄해져 고개의 흔적이 없어졌다. 배오개길은 종로 4가에서 중구청을 거쳐 동국대학교 입구까지의 폭 25m, 길이 950m의 도로로서, 이곳에 배오개가 있으므로 해서 배오개길이라 이름 지어졌다.
인의동 112번지와 48번지 일대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이현궁(梨峴宮)이 있었다. 이현궁의 명칭은 말할 것도 없이 부근에 배오개, 즉 이현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현본궁(梨峴本宮)이라고도 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왕 2년(1610) 세자빈의 간택이 있은 후 새로 수리하고 가례(嘉禮) 전에 옮겨 머물게 하는 별궁으로 삼았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의하면, 인조 원년(1623)에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비(妃)인 연주부부인 구씨(連珠府夫人 具氏)의 거소로 하면서 궁의 명칭을 계운궁(啓運宮)으로 고쳤다 한다.
후에 인조는 병자호란을 겪은 후 집이 없어진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을 이 궁에 거처하게 하였으며,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가례(嘉禮)를 이곳에서 거행하였다. 숙종 때에는 숙빈방(淑嬪房)이 되었고, 숙종 37년(1711)에는 연잉군(延仍君: 후의 영조)의 잠저(潛邸)를 이 궁안에 두기도 하였다. 정조 때에 궁이 폐지되고 그 건물을 중심으로 장용영(壯勇營)이 설치되었다가 장용영의 폐지와 함께 훈국(訓局), 동별궁(東別宮), 선혜청(宣惠廳), 동창(東倉) 등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현재 인의동 112번지는 해운항만청이 들어서 있고, 전매지국이 있던 48번지 일대는 1987년 4월부터 한국담배인삼공사 서울영업본부에서 사용하고 있다.
배오개하면 배오개시장을 떠올릴 만큼 예지동·인의동에서 종로 5, 6가에 이르는 지역에는 배오개시장이 서서 종루 앞 시전상가, 칠패시장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이름나 있었다. 배오개시장은 말할 것도 없이 인근에 배오개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배오개시장은 갖가지 상품이 갖추어진 큰 저자였다. 이곳의 상인들은 동대문을 통하여 여러 지방에서 올라온 곡물·과실·채소·포목 등을 위탁받아 판매하기도 하고, 그것을 중개하는 객주노릇을 겸하거나 지방상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잠깐 배오개시장의 성장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왕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정부가 주도하는 시전(市廛)을 설립하게 되는데, 정종 원년(1399)∼태종 14년(1414)까지 4차례에 걸쳐 행랑(行廊) 1,369간(間)이 세워졌다. 이들 시전은 독점판매권을 갖고 있었으며, 서울시민의 생필품 및 관수품의 조달과 함께 중국에 보내는 진공품 등을 공급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상거래를 엄격히 단속하여 한 시전에서 한가지 물품만을 취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규칙이 엄격하여 등록된 상품만 거래하였으며, 다른 상품을 거래할 때는 난전(亂廛)이라 하여 엄격히 처벌하였다. 대신 시전을 상·중·하의 3등급으로 구분하여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6가지 주요 생필품을 취급하는 시전들이 각각 조합을 만들어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였으며, 이들 육의전은 세금과 국역을 맡는 대가로 독점판매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관청의 허가를 받은 이러한 시전 외에도 주로 도성의 외곽지역에서 행상과 노점상들이 모여 비정규적인 소규모 시장을 꾸려 나갔다. 이러한 민간상인들은 특히 남대문 밖 칠패(七牌)와 동대문 근처 배오개, 마포 등지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꾸준히 펼쳐 16세기에는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였다. 임진왜란후 한성에는 ‘동부채칠패어(東部菜七牌魚)’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것은 동대문 근처 배오개에는 채소와 과일이 많고, 칠패에는 생선이 많다는 뜻이다. 이처럼 시전상인 외에 민간상인들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이 사상도고(私商都賈)로 성장하였다. 사상도고는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도매상인데, 생산과정을 장악하여 독점적인 매점행위를 하는 것으로 배오개와 칠패시장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와 금속화폐의 유통이 일반화되면서는 쌀과 무명 등을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삼던 종전의 상업질서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같이 활발해진 상거래를 밑거름으로 하여 객주(客主)·여각(旅閣) 등으로 불리던 민간상인들이 부를 축적하여 제도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던 시전의 금난전권에 도전하여 격렬한 상권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조 15년(1791)에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통공정책(通共政策)이 시행됨에 따라 배오개와 칠패의 상인들은 활동범위가 넓어졌으며, 일반상가로 공식 인정받아 번성기를 맞게 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의 「한양성시전도가(漢陽城市全圖歌)」 가운데,
이현(梨峴)과 종루(鐘樓) 그리고 칠패(七牌)는 온갖 공장(工匠)과 상인들이 모이는데, 도성에서도 유명한 3대 시장이라 많고 많은 물화를 따라 수레가 줄을 이었네.
라고 하는 글을 보면 이현시장(배오개시장)은 종루 앞,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유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76년 개항이 되고 외국 문물이 밀려들자 기존의 재래시장들이 변혁을 맞게 되었으며, 특히 일본상인들의 진출로 조선상인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1905년에 박승직·김종한·장두현·최익성 등이 자본금 78,000환으로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개항 후 격변기에 가까스로 파산을 면한 배오개시장과 종로상가의 상인들이었다.
광장주식회사는 188개의 점포로 구성되었다. 상인들은 종로 5가 쪽과 청계천 쪽 양편에 행랑을 짓고, 두 건물 사이에 또 한줄의 상가를 세웠다. 사람들은 이를 배오개시장 혹은 광장시장이라고 불렀는데, 이 시장은 당국으로부터 허가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장이었다. 광장시장이 특히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청량리에서 서대문까지 운행되던 전차의 정거장이 광장시장 입구인 지금의 종로 5가 지하철역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에도 광장시장은 서울의 대표적 시장이었으며,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광장시장은 그 명성을 자랑하였다. 1959년에는 김긍환 등이 중심이 되어 광장시장에서 동쪽으로 훈련원로 건너편 부지에 연건평 5,700평의 새 건물을 신축하였다. 새 시장을 기존의 광장시장과 구별하여 동대문시장이라고 하는데, 1960년대는 동대문시장의 전성기였다. 이 시장에서는 포목·의류·생선·정육·야채 등이 주로 거래되었다. 1만여 점포에 하루 평균 20여만명의 고객이 몰렸다 하며 밤에도 장사를 하여 야시장으로도 이름났다. 동대문시장은 전국 어느 곳과도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었고, 물건이 매우 풍부하여 “돈만 주면 고양이뿔도 판다”는 우스개소리도 생겨났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는 그 형세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평화시장·중부시장·경동시장·노량진시장 등이 곳곳에 생겨나 점차 시장이 전문화되어 갔고, 또 대형 백화점들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70년 정시봉 등은 동대문 서남쪽에 있던 전차차고 부지 6,300평에 현대식 6층 건물로 새로이 시장을 세우고 이를 동대문종합시장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넓은 의미로 광장시장·동대문시장·동대문종합시장을 포괄하고 있는 동대문시장은 그 뿌리를 배오개시장에 두고 있다. 오늘날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동대문시장은 포목 등의 거래에서는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으로 꼽힌다.
잣배기고개 (원남동)
종로구 원남동로터리에서 연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잣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잣배기고개라 불리었다. 이 고개 남서쪽에 있는 마을을 한 때 신민동(新民洞)이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명나라의 지사(志士)들이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왔는데, 조정에서 종묘 동북쪽 담 아래 잣배기고개 남서쪽에 살게 했으므로 신민동이라 하였다 한다.
도깨비고개獨脚峴 (연건동)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남쪽과 옛 창경초등학교의 경계지점 부근의 고개를 도깨비고개 또는 독갑이재라 하고, 한자로 독각현(獨脚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이 고개에 숲이 울창해서 도깨비가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도깨비는 우리나라의 전설이나 설화 속에 많이 등장하는데,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전해온다. 비상한 힘과 괴상한 재주를 가져 사람을 호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험상궂은 짓을 많이 한다 하였다.
동소문고개 (혜화동)
종로구 혜화동에서 성북구 돈암동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동소문고개라 하였다. 그것은 이 고개턱에 동소문(東小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에 지금 성북구 성북동 101번지 주변에 동소문이 복원되었지만, 원래는 복원된 자리가 아니고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큰 길 언덕 마루턱에 있었다.
동소문(東小門)은 혜화문(惠化門)의 속칭으로 도성 4소문의 하나이다.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함께 건설되어 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 그런데 성종 14년(1483) 창경궁을 신축하고 그 정문을 역시 홍화문이라 했으므로 2개의 홍화문이 생겨났다. 이에 중종 6년(1511)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 곳 홍화문을 혜화문으로 고친 것이다. 혜화(惠化)란 ‘은혜를 베풀어 교화 한다’는 뜻이며, 동소문은 도성의 4개 소문 가운데 동쪽 소문이므로 그렇게 불리어졌다.
동소문은 원래 다른 소문들인 광희문(光熙門)·소의문(昭義門)·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 위에 목조로 된 문루(門樓)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후로 오랫동안 홍예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영조실록』 권60 영조 20년 8월 경술조에 보면 “혜화문에 전에 문루가 없던 것을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다시 짓게 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52년만인 영조 20년(1744)에야 문루를 복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루를 복원한 후 당시의 명필 조강이(趙江履)가 혜화문(惠化門)이라 쓴 현판을 새로 달았다.
그런데 동소문 문루의 천장에는 다른 문의 문루처럼 용을 그리지 않고 봉황(鳳凰)을 채색하여 그린 것이 특색이다. 그 이유는 혜화문 밖 삼선교에서 돈암동 일대는 울창한 산림지대인지라 온갖 새들이 모여들어 농사에 피해가 컸으므로 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조류의 왕격인 봉황을 그렸다는 것이다.
동소문은 일제 때 방치되어 문루가 크게 퇴락하게 되었고, 일제가 1928년 이를 헐어버려 홍예만 남았는데, 이 마저 1939년 돈암동까지 전차선로를 연장하며 헐어버렸으므로 동소문고개, 혜화문고개, 혜화동, 동소문동 등의 명칭만 남아 있었다. 서울특별시기념표석위원회에서는 1985년 동소문터에 표석을 설치하였으며, 1994년 말 서울시에서 한양정도 600주년을 맞아 동소문고개 옆에 동소문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경도조 (京都條)에 보면,
도성의 동북쪽 문을 혜화문이라 한다. … 대개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혜화문이 정문이고, 그 외의 문은 사잇문(間門)이다.
라고 하여 도성 북대문인 숙청문(肅淸門)을 제치고 동소문인 혜화문을 북대문으로 적고 있다. 그 연유는 조선시대에 숙청문을 닫아둔 채 혜화문을 통해 경원가도(京元街道)로 출입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혜화문의 파수 자체를 남대문·동대문·서대문과 같이 출직호군(出直護軍) 30명으로 지키게 하였다. 원래 소문은 20명이 지키던 제도였다.
이렇듯 소문인 혜화문이 대문 구실을 하도록 북대문인 숙청문을 닫아두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숙청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 즉 북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고 있는 북대문으로서 남대문(숭례문)·동대문(흥인지문)·서대문(돈의문)과 함께 태조 5년(1396) 건립되었다. 그런데 17년 후인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건의하기를, 북악산의 동쪽 능선과 서쪽 능선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은 것인데, 동쪽 능선에 있는 숙청문과 서쪽 능선에 있는 창의문에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하여, 곧 숙청문과 창의문을 폐쇄하고 일대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원래 이 두 문은 높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길이 매우 험하고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으므로, 숙청문에서는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혜화문 밖 경원가도(京元街道)로 나오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고, 창의문에서도 서쪽으로 세검정 골짜기로 빠져 나와 홍제원의 경의가도(京義街道)로 나오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오히려 경원가도와 경의가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데에는 각기 혜화문과 서대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했기 때문에 숙청문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두 문은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며, 특히 숙청문은 전혀 사람이 다니지 아니 하므로 조선시대에 계속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는 북문, 즉 숙청문을 열고 남문, 즉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요,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물 때 양을 억누르고 음을 부추겨야 비가 온다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숙청문(肅淸門)은 어느 때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종실록』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숙청문을 폐쇄하게된 데에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이유 외에도 또 하나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순조 때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숙청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양주 북한산으로 통하는 숙정문 역시 지금 폐문하고 쓰지 않으니, 언제부터 막았는지 알 수가 없다. 속전된 바로는 이 성문을 열어두면 성안에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 불어댄다 하여 이를 폐했다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중하간지풍’이란 부녀자의 음풍(淫風), 곧 풍기문란을 뜻한다. 옛부터 전해오는 서울의 세시풍속을 보면, 정월 보름 이전에 부녀자들이 숙청문까지 세번만 다녀오면 그 해의 액운이 없어진다 하여 숙청문 주변에 장안 부녀자들의 출입이 매우 빈번했다는 것이다. 그저 단 한번 다녀오는 것이 아니고 정월 보름안에 세번이니까 3일을 계속 가거나 아니면 2, 3일에 한번씩 왕래했을 것이니 숙청문으로 가는 길은 장안 부녀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정월 보름 안에 세번 북문까지 갔다 오는 것이 어려워지자 차츰 정월달 안에 세번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1년 내내 아무 때나 세번 다녀오면 액운을 뗄 수 있는 것으로 변하였다.
평생을 울 안에 갇혀 살아야 했던 조선시대 부녀자들에게 이 북문 나들이는 큰 해방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며, 너도 나도 나들이를 나섰을 것임은 능히 짐작되는 일이다. 게다가 그 시대에 부녀자들이 나들이를 나선다면 결코 혼자 나서는 법이 없다. 양가집 규수나 아낙네들은 몸종 한 두명을 데리고 나섰다. 그리하니 북문 일대는 꽃밭이 되게 마련이었고 짓궂은 사내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사내 못난 것 북문에서 호강받는다.’는 옛 서울속담에서도 이 북문의 풍기를 엿볼수 있게 해준다. 여자에게 농 한번 못하던 못난 사내라도 북문에 가면 그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부녀자들에게 환대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문란한 풍기에 엄했던 조선시대의 도덕규범에 본다면 이것은 대단한 사회문제가 되었을 것이며, 북문 폐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 되었다.
어쨌든 숙청문이 폐쇄되면서 동소문의 역할이 커졌으니, 도성에서 의정부·포천·원산 등으로 가거나 반대로 경원가도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 중요시 되었으며, 동소문고개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동소문은 원래 여진족 사신의 도성출입 전용문이었다. 그 숙소인 북평관(北平館)이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 후 청을 건국한 여진족이 종전 명나라 사신이 드나들던 서대문으로 출입하면서 그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이 곳 동소문 부근에는 19세기에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라는 동리 이름이 있었다. 지금의 동소문동·동선동·삼선동·돈암동 일대를 일컫는데, 그 가운데로 성북천이 성북동 골짜기에서 흘러 청계천으로 유입되었다. 개천이 구비구비 흘러가는 곳의 남과 북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였고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조선말기에는 이곳을 군대의 연병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고종 때의 문인 이제구(李齊九)는 어느 늦은 가을날 이 일대를 지나면서 주변 경치를 시로 읊었다.
소청문(小靑門) 밖 나서니 성시(城市) 티끌 볼 수 없고,
나귀 등에선 붉은 석양이 이글거린다.
들판의 국화 시냇가의 단풍이,
서로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이루었구나.
이 시를 보면 조선말기에는 동소문을 일명 소청문(小靑門)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동소문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는 겸재 정선(鄭敾)의 「동소문」(17.5㎝×13.5㎝,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이 있다. 지금 명륜동 큰길로 꺾어지는 창경궁 모퉁이쪽 언덕 위에서 동소문을 바라본 모습인데, 원래는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뒷편과 창경궁의 동편 산줄기가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을 일제 때 새길을 내면서 현재와 같이 산 언덕을 끊어낸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양 언덕의 높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위치에서 바라본 각도이다.
동소문 옆에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무당이 살았다 한다. 예전에는 동소문 안 일대에 앵두나무가 많았다 하여 앵두나무골이라 불렀다. 현재 혜화동로터리에서 서울시장 공관, 혜성교회에 이르는 구릉 상의 언덕이 온통 앵두나무로 뒤덮혀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동소문이 헐리고 돈암동까지 전차선로가 연장되면서 성문 안 옛 정취가 사라져 버렸다.
정(情)고개 (명륜동)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내 성균관 정문에서 성균관을 안고 부엉바위 쪽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사잇길을 정(情)고개라 하고, 정고개 너머 마을이름을 정(情)골이라 불렀다.
이 정고개의 명칭 유래에는 조선시대 한 선비와 종의 딸 사이에 있었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있다. 예전 문과시험을 보기 위해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안윤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어느 날 안윤은 성균관 옆길을 오가는 대감집 종의 딸을 보고 반하여 미행 끝에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르렀고, 두 사람은 이 고개 위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동거한다는 헛소문이 나돌았고, 급기야 상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노한 상전은 종의 딸에게 가문형(家門刑)을 내렸다.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당시에 종이 신분질서를 어지럽히면 상전의 명예도 크게 다치기 때문이었다. 가문형은 자결시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명분만 자결일 뿐 대들보에 목을 매어 교수시키거나 치마에 돌을 안겨 깊은 못에 떠밀거나 하는 방법으로 타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국 종의 딸은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안윤은 밤마 고개를 배회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안윤은 밤마다 고개를 배회하다가 실성하였고 그 역시 이 고개에서 죽어갔다. 이 후 마을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하여 고개이름을 정고개라 하였다 한다.
당고개堂峴 (창신동)
종로구 창신2동 1352번지∼창신1동 22618번지 사이 고개를 당고개라 하고, 배성여자고등학교와 창신아파트 부근 마을을 당현동(堂峴洞)이라 하였다. 당고개의 명칭은 배성여자고등학교 자리가 예전에 부락제를 지냈던 도당(都堂)터였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이 곳 일대에는 조선말 순조 때부터 서울의 점술가들이 모여들어 200여호가 밀집해 있었다 한다. 이곳에 점술가들이 집단 거주했던 것은 당고개 바로 위에 있던 큰 바위에 낙산신령이 모셔져 있기 때문에 점괘가 잘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때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다고 낙산의 바위를 깨고 파헤쳐 가므로 낙산의 산신령이 떠나가 버려 점괘가 잘 나오지 않는다면서 점술가들이 대부분 미아리고개 아래로 이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