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군대 생활-전주
전방에서 그렇게 난리친후 군대 생활 마지막 1년을 전주에서 보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전주가 광주와 가까워도 안 가본
사람이 많을 겁니다.
나 역시 그 때가 첫 방문이었습니다.
전북의 귀에 익은 도시 이름도 서울가는 기차가 쉬는
정읍과 익산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의 본적이 전북 고창이어서 자기들깐에는
연고지에 보낸다고
선심써서 전주 35사단으로 발령한 모양입니다.
그 곳에서도 사단 의무 중대의 보급관으로 임명받았습니다.
전방에서 처럼 참모챙기고 내 몫챙기는 자리입니다.
우연히 사단에서 고광중을 만났습니다.
대위 계급장을 달고 사단 통신 중대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대위 진급이 한 달 늦었습니다.
사단 인사참모부에 알아 보니 전방에서의 영창사건 때문에
진급이 늦어 진다는 겁니다. 나의 강력한 항의로,
육본의 착오로 인지되어 소급해서 진급이 되었습니다.
광중이의 소개로 전주에 있었던 김재욱과 또 다른 서석 국민학교 동창 김정은을 만납니다. 그러고 보니 4명 모두 서석국민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재욱이는 중정 전주 분실에 있었습니다..
그 때 부터 음주가무의 전주 생활이 시작됩니다.
넷이서 많이 쏘 다녔습니다.
한 달에 적어도 두 서너번은 카바레에 가서 술 마셨을
겁니다.
그 때는 카드도 없는 때였으니 모두가 외상이었고 돈
생기면 정산해 주고…
술마시고 늦게 하숙집에 들어 가면 문이 잠겨 담 넘어
들어 가기를 밥 먹듯하고…
그 술값은 어떻게 댔는지? 지금도 불가사의입니다.
재욱이는 전세집빼고 하숙집으로 들어 갔고 나중에 그
마누라는 우리가
꼬드겨 살림망쳤다고 난리였지만 우리 모두가 공범이었습니다.
광주에서 봉석호, 신경규, 김석준, 최경식, 김형태등을 불러 술 마시며 허세도 부리고, 신원이
불명한, 우리에게 뭔가 숨기는 김국영도 가끔 만나 술도 하고. 전주제지인가에서
근무했던 장호성은 술을 못한다하여 밥만 먹고 들어 가고…
언젠가 한 번 그 집에서 저녁 대접받은 것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권순일, 조세현도 들렸고…
세현이는 사업차 재욱이 만나러 온 걸로 알고 있는데
순일이는 뭣때문에 왔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그리고 부대안에서는 이정연을 만납니다.
어느 날 밤 신병 교육대에 위생검사를 나갔습니다, 내무반 검열을 마치고 나오는데 훈령병 누가 나를 보자고 한다는 겁니다.
데려 오라 했더니 깜깜한데서 새까맣고 조그마한 이병이 내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다급한
목소리 였습니다. 감히 이병이 대위 이름을 부르다니…나는 내 눈을 의심했습니다.
거기에 정연이가 서 있는 겁니다. 어찌나 놀랐던지… 그 자리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내가 재수할때 우리 집에도 잘 놀러 왔으니 근10년만의 만남이었습니다. 나이29살에 늦깎이 입대를 한 겁니다. 그 뒤 몇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훈련기간이 끝날때쯤 사병 전출을 담당하는 부관실에 알아 봤더니 카츄사 자리가 하나 있다
합니다. 많은 사병들이 빽을 써서 청탁이 들어 오는 자리라 합니다. 돈은 내가 책임질테니 무조건 정연이를 보내라 해서 성사되었습니다. 그 후 부관실에서는 정연이가
떠난후 소식이 없다고 하도 징징대고 졸라대 약 몇병으로 때워 버렸습니다. 몇년전 한국에 나갔을 때 정연이
하는 말은 그 때 카츄사 한명, 보안대 한명이 배당되었다 합니다.
위문단 단장도 해 봤습니다. 군악대와 의무중대로 구성된 위문단을 만들어 지방 위문을 보름씩 나갑니다.
사단장 자신의 근무 평가를 올리기 위한 대민 봉사입니다. 군악대에서는 제일 높은
사람이 중사이니 단장은 물론 나 입니다.
어떤 곳은 환영하지만 어떤 곳은 민폐끼치러 왔다고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많이 다녔던 모양입니다. 낮에는 의료 봉사랍시고 사람 몇 명보다가
시간없으면 주민들 이름만 적어 숫자만 맞춰 놓고 소화제 몇 알씩 뿌리고 200명 봤다고 사단에 보고할 환자
명부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밤에는 군악대의 공연이 있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단장이랍시고 총알없는 권총차고 단상에 올라가 군수한테 감사장까지 받고…서너장은 거뜬히 받았던 것 같습니다. 김제, 옥구에 갔던
것은 생각납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우리가 그런 시대에 살았습니다.
군대 생활하면서 딴따라 대장까지 별 짓을 다 해 봤습니다.
전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낯선 이방인이었습니다.
떠날 때쯤은 전주의 펜이 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서인지도 모릅니다.
음식을 잘하는 맛 집이 그 때도 있었습니다.
족발집, 복어탕집, 콩나물 국밥집,
비빔밥 집등…
사람들의 성품도 유순하고 도시 전체가 조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있을 것은
다 있는 알 찬도시.
살 수록 은근히 매력있는 도시.
내 나름대로 표현해봅니다.
그런 곳에서 좋은 친구들 만나고 군대 생활을 마무리
한 것은 나의 행운이었습다.
재욱이는 그 때부터 나의 절친이 되어 광주 갈 때마다
만나서 술 한잔합니다.
미국올때 전주에 들려 마지막 술잔을 기울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습니다.
내가 돌아 올때 서로 잘 되어 만나자고 약속도 했는데...
어쩌다 일이 잘 안 풀려 지금 어렵게지내고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여리고 누구한테나 마음을 주는 녀석입니다.
권력기관에 있었으면서도 한번도 티를 안내는 매력있는
사나이입니다.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풍류나 즐기며 뭇 사람에게 인기
만점이었을 겁니다.
광중이는 1987년 대통령 선거때 서울의 자기 식당에 찾아가 한번 보고는 그 뒤
소식이 없고 지금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동창회 명부에도 안 보이고…
그렇게 밤 새 술 마시고도 아침 6시에는 출근하고 옆에 안 보이는 부지런한 성실한 친구였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소식을 알면 댓글에 달아 주기 바랍니다.
다른 서석 동창 하나는 몇년전 전주로 찾아가 모처럼
회포를 풀었고 잘 사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정연이는 1985년 김대중씨를 모시고 한국갔을때 다방에서 만난 뒤로 꾸준히 소식을
주고 받습니다. 귀국할 때마다 동창생들을 불러 모으는 연락책 역활도 톡톡이 해주고 있고...
다 좋은 친구였고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시카고 특파원 일용이가
후기: 다음은 나의 20대 유감입니다.
재욱이 이야기중에서 한가지 빠진게 있습니다.
그 의 포경수술은 나의 작품입니다.
그 때 쯤은 약간 숙련공이 되어 있었습니다.
술 한잔 살 때 짤라낸 그 것으로 숫불구이하면 좋겠다는
농담으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광중이에 관해서 상준이의 댓글이 있었습니다.
서중에 들어 오기는 했어도 아마 졸업을 안해서 동창회명부에
없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전휘남의 이름도 동연록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도 나의 서석동창입니다. 지산동에 살았으니 돈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둔지도 모릅니다.
내가 대학교때 그를 만났으니 다른 데로 전학간 것은
아닐테고…
두 사람이 졸업 안한것, 지금까지 몰랐던 일입니다.
첫댓글 내가 군대 제대하고 서울에 올라 갈려고 광주역에서 태극호를 탔는데 그때 재욱이 형님이 서류봉투를 들고 왔다 갔다 하시다가 나를 어떻게 알아보시고 "이 서류를 재욱이 에게 꼭 전해 주게, 중요한 서류인데 오늘 꼭 전해야 할 서류이네" 그 봉투를 들고 서울역에서 재욱이 에게 전해 주었드니 재욱이 왈 " 오늘 이서류를 중정에 제출해야 중정에 취직이 된다 마다" 한 기억이 난다. 그 후 재욱이가 전주 분실에 근무한다는 소식은 들었고. 그리고 또 광주에서 재욱이 결혼식이 끝나고 동창친구들이 우리 아버지 조문을 왔던것도 기억나고, 그해 12월에 우리 동창회인 청탑회가 창립되었지.벌써 44년이 훌쩍 지나버린 옛날 이야기 다.
다시 서중 졸업자 명단을 확인해 보니 전휘남은 3-1반이었고, 고광중은 3-4반으로 확인이 되었다. 동연록은 청탑회가 창립되고 3,4년 후에 처음 발간되었는데 그때 부터 주소나 연락이 안되는 회원은 올리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후에 동창회에 한번이라도 참석을 하였거나 연락이 된 회원은 전부 올렸는데 전휘남,고광중은 참석을 한번도 안했거나 연락이 안되는 회원인것 같다
언락 안된 사람이 그 둘 뿐이더냐? 다음 동연록에는 서중 일고 졸업한 사람은 다 집어 넣는게 글자 그대로 동연아니겠느냐? 네 말 처럼 임민식을 찾아 봤더니 없더라. 그 애야 한 때 해외 교포의 반한 거물이 되어 이북에서 대우 받았었지. 지금이야 늙었으니 토사구팽까지는 아니어도...우리나라에도 못 들어오는 신세가 되고 ...
현재 동연록에 올리지 못한 회원이 몇십명은 족히 될거라고 생각한다.
이제 동연록은 책자로 제작을 안하고 인터넷으로 홈페이지에 기재 하고 있으니 기세국 회원하고 의논을 해서 이름이라도 전부 올리도록 해 보겠다.
그런데 문제는 연락이 안되는 동창들은 어디에 사는지, 또 생사도 모르고...그렇단다
홈페이지 어디에 들어 가면 되냐?
42년전,전주예기속에 나의 이름이 나오니 감개가 무량하구나.71년정월달에 우리 큰 아들이 식중독이 걸려서 전주예수병원으로 들쳐업고 갔는데 정초휴일이라 아는사람은 없고 마음이 급해 부대로 연락을 했는데 마침 니가 달려나와서 주치의도 만나보고 윤영의가 레지로 있든예기듣고 수련의숙소로 갔더니 1년차를 하고 있어 여러가지 덕을 봤던기억이 나는구나.
그 때는 내가 전북대물리학과를 다니며 회사일을 보고 있을때라 시간이 없어 너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바쁘고 고달프게 지내던 시절이었으니 너희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그때 아펐던 큰 아들이 지금 44살이되어 우리들병원에
근무하고 있다.
애에게 그런 일이 있었냐? 기억이 안난다. 네가 열심히 살았던 것은 기억하지. 그래서 너를 집에 빨리 보냈었었고. 나도 그 옛날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없었던그 때가 더 좋았던 것같다. 10월에 만나자.
서부활극과 같은 너의 이야기를 읽으니 부러운 한 편 촌음을 아껴쓰며 버스비도 줄여가며 생활해야 했던 나의 핍박했던 전주생활이 떠올라 가슴 한 편이 아려온다. 하지만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느냐.노인은 과거에 산다더니 우리가 이제 노인이 된것만은 확실한가 보고나. 집사람에게 니예기를 하니 그때일을 기억하며 안부전해 달라는구나.10월에 나온다니 꼭 보자
서부활극이라 좋은 표현이네. 나처럼 서부활극했다간 우리 편 다 죽였겠다야. 방선이가 그러더라 일탈이라고 그게 한 때의 돌출 행동은 아니었던 같고...
잘 표현된 단어인지는 모르겠다만...일탈(逸脫, swerve) 어원은 ~벗어남(편안함, 안주에서..)을 의미하는 데... 근대 사상의 출발 사고인 "사물은 일탈의 결과로 태어난다," "일탈은 자유의지의 원천이다" 등...문명사에 창조와 파괴를 가져온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가 되었으면..외압에서 자유의지를 끌어낸 모습이겠지...과찬이 아닌지? ㅎ ㅎ^^*
너무 어려운 해석이다. 그냥 한문으로 궤도에서 벗어난 것으로 해석하면 나같은 문외한이 쉽게 이해할 것같다. 맥주만 마시던 사람이 갑자기 소주마시면 일탈아니겠냐? 그렇게 쉽게 해석하고 싶다. swerve란 단어가 일틸이란 의미인지는 몰랐고, 어떤 차가 다른 차선으로 끼어 들때 나는 그 단어를 많이 썼다. 미국에 온 뒤로 다른 분야의 책을 안 읽으니 내 지식에 많은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