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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고 활동하는 그리스도인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2)
“위대한 관상가는 훌륭한 활동가이기도 하다”
기도해야만 내쫓을 수 있는 마귀가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귀머거리 마귀,자만심, 근심,절망,고독등의 마귀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활동을 해야만 내쫓을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마귀도 있다. 환상, 자아도취, 태만 등의 마귀이다. 만일 우리가 기도에만 집중한다면 활동을 해야만 내쫓을 수 있는 마귀를 마음에 담게 될 것이고, 활동에만 집중한다면 기도를 해야만 내쫓을 수 있는 마귀를 마음에 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활동과 관상을 구별하지 않고 통합한다. 기도도 활동도 하느님의 사랑의 기원을 두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식의 관상은 신에게 공헌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다. 정의를 내리자면, 관상은 ‘신과 직접적인 친교를 체험하기 위한 수단의 총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성령의 역사에 따라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힘써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사랑하고 기도하고 계신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사람을 완전히 차지할 수 있도록 그분을 도와드리는 것이다. 일단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은 거기서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신다. 그 일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하시는 일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 이웃을 사랑할 때 당신 자신이 우리를 완전히 차지하셨으면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생활은 기도와 같아지고 하느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노동을 육체 노동과 정신노동으로 구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다움을 상실하게 한다. 어떻게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둘로 나눌 수 있겠는가? 그분은 일하고 기도하셨다. 만일 찬미가와 하느님의 뜻만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실 필요는 없었으리라. 그리스도는 하늘의 완전한 수도원 불가침의 천상 낙원에 머물러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 인간을 담을 뛰어넘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되었고 계속 구원받고 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신자는 살아가면서 기도나 활동 중 어느 한 편에 좀 더 비중을 두는 정도이다. 어느 사람이 활동을 택할 것인지 관상을 택할 것인지 하는 것은 주로 그의 타고난 경향이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기질의 문제일 뿐이다. 관상가가 활동이나 자선 행위로 이끌어낼 수도 있고 활동가가 기도를 배울 수도 있다. 그 사람이 택한 길이 어디에 도착하는지는 신앙을 통해 얻어지는 성질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위대한 관상과는 훌륭한 활동가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아주 깊이 관상한 결과 구원의 하느님이 그들 마음속에 충만해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가 묵상한 그 하느님과 같아졌다. 그리스도교적 관상의 유일한 대상은 관상과 활동의 사람인 그리스도이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또한 진정한 활동가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사랑 자기 얼굴 자기의 재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함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사랑의 계시를 받도록 도와주며 자기가 변모되어, 하느님이 자신이나 다른 이가 빈곤할 때 베풀어 주시는 일을, 자기 스스로 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언적 성격은 훌륭한 활동이다. 예언적 성격은 하느님이 성취해야 할 사회 정의가 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친교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언적 선교의 목표는 자신이 도달한 관상을 다른 이에게도 전달되는 유익을 주는 데 있다.
기도는 우리 각자를 예언자가 되게 한다. 기도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과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일해 주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이 어떻게 고요한 예배를 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시겠는가?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관상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당신과 같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냐시오 수도회는 중세기 수도 생활의 기초이며 중심이었던 공동 전례를 대담하게 폐지하였다. 하느님이 필요로 하시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 사색하는 사람들이나, ”주님,주님“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임을 이냐시오 성인은 간파했던 것이다.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숭배인가? 협력인가? 결혼을 생각해 보면 알기 쉬울 것이다. 만일 결혼할 생각이라면 자신을 숭배하는 남성과 여성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숭배자와의 결혼 생활은 잠시는 좋겠지만, 곧 변화와 활력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결혼하려면 무엇인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 가정을 건설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1년 내내 서로 상대방의 얼굴만 잠자코 바라보는 숭배로는 살 수 없지 않겠는가?
관상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는 그들이 모두 하늘을 쳐다보며 탈혼 상태에 빠져 희열에 잠겨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을 보고 감탄했다. 그들은 참된 관상으로 참으로 하느님이 계시는 것을 알아보는데 명석한 분들이었다. 이웃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려면, 아주 예리한 눈을 가져야 하며 오랫동안 관상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은 동료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형제의 형태로 실현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본질을 터득한 많은 사람이 모여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현존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치스터' 회의 한 친구가 아프리카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방문하고 돌아와 감격에 차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수도원이 무엇 때문에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렇군요. 그래 무엇 때문인가요?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기는 정말 훌륭해요. 400리의 주민 전부가 그 수도원에서 도움을 받아 살고 있더군요. 사람들은 수도원으로 농업, 독서, 재봉, 금속, 간호법, 기도를 배우러 찾아와요. 그러나 그 때문에 수호자들의 기도가 방해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들은 그 지역의 혼이며 그 점에 진정으로 정신적인 책임을 느끼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 때문에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틀에 짜인 것만 하고 있으며 아무에게도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주지 않고 있어요.”
유럽 수도회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서구 문명을 리드해 왔다. 그런데 왜 그들은 유럽에서 자신들의 일을 계속하지 못했을까? 무엇이 그들을 문명 선구자의 자리에서 박물관에 유물이나 고고학자와 같은 존재로 만들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관상한다는 그 천직과 아무 관계 없는 일 (다만 그들이 그러한 천직에 보다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샤를르 푸코 성인의 형제회에서 피정 지도를 할 때, 6일간 계속 성체를 현시하고 여섯 명씩 교대로 밤낮 기도했다. 마지막 날에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여러분은 이 성체를 하느님이 여러분 안에서 사랑을 바치시고 봉사하는 모습이 부단히 현존하시는 것으로 조배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성체로서 가득 채워질 정도로 충분히 그에게 묵상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나는 이 성체를 할 수 있는 한 많은 조각으로 나누어 최후의 미사 때 여러분에게 드리겠습니다. 그 새로운 거처의 깊은 데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이 성체에 대해서 성실하고 깊이 묵상하셨습니까? 이 성체는 성체 현시대 안에 가만히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형제들 안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사랑과 존경은 거기까지 그분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아무 말씀도 없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고 거기에 놓여 있는 그분을 예배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남편, 부인, 자녀, 친척, 이웃들 안에 강생(육화)하셔도 역시 그분을 예배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는 부당하고 무리하게 금이나 은 그릇에 강제로 넣어지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죄인들 안에 살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자기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이웃들이 예배할 수 있을 정도로 주인이 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하느님이 알고 계십니다.” 실천 없는 기도는 하느님을 하느님답지 못한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위도 추락시킨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교묘하게도 하느님에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는 책임회피, 직무유기 방종의 결과를 초래한다.
캐나다에서 어느 소아마비 환자에게 아주 교훈적인 말을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섯 살 때부터 계속 아팠습니다. 부모님은 이 근처 마을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분들은 한 달에 한두 번씩 나를 성지순례에 데려갔지요. 나를 고칠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며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기적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내 인생이 어떠했는지 좀 생각해 보십시오. 매 번 허무한 희망과 기대를 가졌다가 실망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매번 집에 돌아오자마자 부모님은 다음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랜 세월이 소년은 어른이 되는데 방해를 받았고 자기 병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지 않도록 인도되었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 내가 16세가 되었을 때 더 이상 그런 일을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에게도 하느님에게도 반항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앙이라든가 기도나 종교 같은 것에 대해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부에만 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공부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직장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25세가 되었으며 종교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고 다시 신앙을 찾았습니다. 지금 내 신앙 나를 어린이로 머물러 있도록 하는 그런 신앙은 아닙니다. 지금은 어른으로서 신앙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데,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자유와 노력으로 이루하고 도모할 것을 부탁하신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무엇을 받을 때도, 하느님은 우리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기를 바라신다. 기도가 활동에 의해 자라지 않는다면 한없이 신비화되어 가고 만다. 누가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고 말해도 그것은 당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 주는 것이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의 일을 아무것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오직 하느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하느님이 갖고 계시는 유일한 손은 바로 우리의 손일 뿐이다.
옛날 프랑스의 식사 전 기도문에 이런 것이 있었다. “주님 우리를 축복해 주소서. 이 식사를 우리를 환영해 주는 이 식탁을 축복해 주소서. 굶주린 자에게는 빵을 주소서. 아멘!” 이 말은 “나는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내 것은 내가 마련했습니다. 주님, 다른 이의 식사는 당신이 마련해 주십시오.” 하는 말과 같다. 각자는 자기 것을 하느님은 모든 위의 것을 마련하신다라는 말이다. 위의 ‘우리를 환영해 주는 이 식탁’이라는 말은 나중에 ‘이것을 마련해 주신 분들’이라고 바꾸었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소서’ 하는 말은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 줄 빵 우리에게 주소서!’라는 말로 바꾸었다 나는 오히려 “당신은 당신의 빵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셨으니, 우리도 우리의 빵을 다른 이와 나누기를 원하며 때로는 그런 용기까지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도할 것을 제안한다.
“아멘(그대로 이루어지소서)도 힘없고 맥 빠지는 말이다. 차라리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천하겠습니다“,”우리는 그것을 실천하려 합니다”라는 말로 바꿔야 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적인 기도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인을 위한 새로운 기도 방법이 나오지 않으면 그들은 앞으로 전혀 기도를 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비를 내려 주소서, 햇볕을 주소서“ 하는 기도는 그리스-로마적인 기도가 아닐까? 당신은 진정 하느님이 기후를 좌우하신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하느님이 추위와 더위를 좌우하신다면, 인간의 기후를 지배하게 될 때(언젠가는 분명히 인간이 그것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바뀔까?
어느 본당의 주임 신부와 일곱 살짜리 어린이의 대화를 들어보자.
신부: 햇볕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란다
어린이: 아니에요. 그건 우리 아빠에요.
신부:어째서?
어린인:우리 아빠는 포도를 가꾸는데요, 우박이 내리려 할 때, 아빠가 구름에 대고 대포를 쏘면 우박이 비가 되거든요.
인간이 진보하는 만큼 하느님은 후퇴해 버린다. 우리는 자주 자기 아이들이 16살이 되기까지는 그들을 무신론자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교육 방법으로 신앙을 길러 주려 한다.
다른 일을 하나 더 들어본다. 언제나 물이 부족한 산골에서 항상 주님이 승천 대축일이 되면 3일간 간절히 기도했다. 비를 내려 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지역 당국에서 기술자를 파견해서 저수지를 만들었다. 지금은 동네 사람들이 언제나 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주님 승천 대축일의 3일간 기도하는데 참여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말았다. 저수지가 기도를 대체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저수지에 댐 공사를 한 기술자들은 기도하지 않았다. 기도를 주관하는 자들은 댐 공사에 협력하지 않았다. 이는 둘 다 좋지 않은 일이다. 기도하는 자가 기도하지 않을 때 일하는 자도 기도를 포기한다. 기도하는 것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가 될 수 없고, 일하는 것이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는 될 수 없다. 기도는 하느님이 그분의 힘과 창조하고 사랑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자 원하는 것을,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다.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시고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무한한 힘을 주셨다.
결정하는 것은 당신이다. 즉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마태 17, 20)라는 말은 옳다. 이 구절은” 당신들에게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은 당신들이 원하는 것으로 산을 옮겨 주실 것이다. “하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능력을 가진 이는 당신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계신 곳을 통과해야 한다. 당신이 먼저 변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기도의 가치를 따져보라. 당신을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을 하느님일 수 없다. 당신 없이 하느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
옛날 생각이 확실히 편리하였다. 우리는 가만히 있고, 하느님만 다 해 주시면 되었다. 종교상의 크나큰 기만( 순수하게 기도만 하면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곳은 유물론적인 차원도 아니고 관념론적인 차원도 아니다. 교회는 성상의 차원에 속한다. 당신이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언제나 그 기도에서 최초로 생기는 결과는, 밖에 나가 그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당신이 그럴 의향을 가지면 항상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는 진리를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이 일어나는 나라 같은 경우가 그렇다. 정말 누구도 도와줄 수 없을까? 잘 생각해 보라 당신은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관련된 잡지를 구독한 적이 있는가? 데모에 참가한 적이 있는가? 계몽, 서명, 모금 운동을 한 일이 있는가? 신문에 투고하거나 지방자치에 의원이나 대사 등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는가? 바다의 돌멩이를 던지면 그 파문은 받아 전체에 퍼진다. 나는 은총이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표지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스도 신자의 사랑 만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빵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의 기도가 예외 없이 모두 무엇인가 실천으로 옮겨진다면, 이 세상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편지를 보내거나, 책을 보내 주거나, 전화를 걸어 주거나, 누구에게 전달하거나, 무엇인가 정보를 수집하거나 하는, 김 씨 혹은 박 씨와 연락을 취하거나 하는 활동을 한다는 말이다. 기도는 하느님이 우리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열도록 하느님에게 우리 마음을 여는 것을 뜻한다.
진정한 사랑은 활동 안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헌신적인 태도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마음속에도 있는 법이다. 오늘 사람의 일을 마음을 다해 생각하면 확실히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어느 사람의 일을 애정을 가지고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랑은 그것이 연결시켜 주는 사람 사이에 성도의 친교 (성인의 통공) 즉 직접적인 연결의 길을 만들어 낸다.
‘기도는 모든 사도적 활동에 혼魂이다’ 라는 말은 고려해 봐야 한다. 첫째, 기도는 활동과 똑같이 완전히 활동적이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일처럼 활동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이유는 명백해질 것이다. 둘째, 활동은 기도와 똑같이 완전히 하느님에게로 향하고 있으며 또한 상대방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도적 활동이 혼이란 기도의 혼을 말한다. 즉 하느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 역사하심에 자신도 가담하는 것뿐이다.
오랫동안 이런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기도와 성사를 통해서만 이룩되며, 사람은 이미 도달한 성화의 수준에 머무르도록 노력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리스도 신자의 생애는 사람이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건전지를 재충전시키는 어느 특정한 때 (묵상 기도 때나 피정 때)와, 그 건전지를 다 써 버렸을 때, 그것을 갈아 넣는 것과 같은 그것으로 생각했다. 팽창과 수축 긴장과 이완 이것이 인생과 신앙의 암담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활동이 기도와 똑같이 영감에 의한 것이라면, 활동도 기도와 마찬가지로 성화에 수단이 될 수 있다.
현대인은 점점 기도의 전념할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들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며 또 활동의 영성을 몸에 지니도록 해야 한다.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할때는 언제나 잠시라도 성령에게 여쭈어 보고 하라. 당신은 알지 못하지만 은총이 당신의 인도해 줄 것이다. 누가 질문할 때는 우선 나오려는 대답을 잠시 멈추었다가 기도하고 자기가 해야 할 말을 듣도록 하라. 말할 때야말로 듣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누구와 만나려 할 때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른 한 분 (주님)을 동반하고 가도록 하라.
그러나 나는 항상 기도하기 때문에, 전례나 예배 기도등으로 자신을 수련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기도한다는 것은 지도를 보는 것과 같다. 먼 곳으로 여행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자주 지도를 보아야 한다. 확실히 당신의 목적은 여행하는 일이므로 지도 없이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지도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자기의 출발점과 목적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기도하고자 원한다면 잠깐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신에게 물어보라. 누가 나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는가? 누가 나를 인도하고 계시는가? 누가 나에게 사랑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며 나를 길러주고 나에게 생명을 주었으며, 나를 부활하게 할 것인가? 나를 보는 사람들은 나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신 아버지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내 음울한 한 얼굴 또는 자만심에 가득 찬 얼굴만 볼 것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를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무엇을 찿는가? 나와 함께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각 사람 안에 숨어 계시며 그 안에서 자라나시도록 사랑을 받고자 원하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하느님에게서 나와 하느님에게로 돌아간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위탁하셨으며 아버지에게서 나와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나와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때, 그 사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예수님은 수건을 허리에 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이것이 기도와 활동이 합치되는 점이다. 하느님으로 충만해져 하느님이 침투하시고. 하느님의 숨결을 받을 때 당신은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향해서 나갈 수 있다. 당신은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이 일하러 나가며, 이웃의 발을 씻어 주고, 구두를 닦아 주거나,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즉 예수님이 즐겨 하셨던 일을 하게 된다. 당신은 이웃을 돕는 자가 된다.
‘그러면 하루에 몇 번이나 지도(기도)를 보아야 할 것인가?’ 하고 세상 사람들은 질문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답은 없다, 그것은 오직 당신이 어떤 여행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하느님이 언제나 현존하실 때는 멈출 필요가 없다, 그러나 뒷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계속 확인할 필요가 있다, 완전히 미로에 빠졌다고 느꼈을 때는 더욱 오래 지도를 보아야 한다. 그때는 30분 동안 지도를 보고서야 자기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겨우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럼, 만일 지도가 없었다면 당신은 어디로 가버렸겠는가? 성인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들은 여정 맨 처음에는 지도를 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여행을 떠난 다음에는 지도를 볼 필요 없이 긴 여행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들과 반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현대인의 대부분은 합주合奏에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제 악기 음률을 맞출 여유를 갖지 못한 연주자와 같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줄로 착각하고 맞지도 않는 악기를 필수적으로 연주한다. 그러나 연주를 중지하고 잠시 퇴장했다가 악기 음을 맞춘 다음, 다시 내가 올바르게 연주할 용기와 수치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기도한다는 것을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닿았을 때, 우리가 바라는 음향과 같은 것을 경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약하며 희미하고 애매한 소리인가? 우리는 성령이라는 음차音叉를 가지고 나와 어떻게 하면 명확하고 음률이 맞는 소리를 낼 수 있는지를 연습해야 한다.(즉 자신의 악기를 조율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런 후에 연주회에 나와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사람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우리의 음악에 귀를 기울여줄 것이다.
루이 에블리,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기도하고 활동하는 그리스도인 171~198p
요약: 루이 에블리,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기도하고 활동하는 그리스도인 171~198p.
참고: 약간의 편집이 있습니다.(저자님과 역자님께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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