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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122)
종교인인가 신앙인인가
(2022.10.18 화)
눅20:1-8 (마21:23-27, 막11:27-33)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주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고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 성전을 통해
이익을 누리던 자들의 비위를 거슬렀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름으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름 합법적인 방법으로 죽일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신 예수님>.....
예수님의 사역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성전을 찾으시고, 말씀 듣기를 원해서
모여드는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기에
유대교 지도자들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큰일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았기에
큰 손해를 보고 있는 데다가......
말씀 전하는 것을 독점하던 자신들의 권위가
크게 훼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큰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약점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예수님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골머리를 앓던 중 한 가지 묘안이 떠 올랐습니다.
<눅20:1-2>
1절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절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오늘 본문에서는 ‘하루는’이라고 막연한 날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마가복음에 의하면 성전 청결 사건이 있었던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찾아왔는지 보시지요. 대제사장들
[안나스(장인)와 가야바(사위)
–눅3:2, 요18:13, 행4:6]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입니다. 이들은 유대교의 최고지도자들일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운영하는 실질적인 장본인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주인 노릇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까지 왔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들은 말씀하시는 예수님 ‘가까이 와서’,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손상시켜서, 더 이상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유대교에서 공식적인 랍비 자격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 그냥 목수 출신입니다.
그래서 대답을 못 하거나, ‘내가 공식적인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성전을 정결케 하고, 또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은
당시의 제사장들의 몫이었습니다.
최소한 랍비은 되어야 그르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반 랍비들도 감히 성전 안에서는
가르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주로 각 마을의 회당에서만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공식적인 자격(권세)을 갖지 못한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고, 가르치는 것은
최소한 ‘랍비 사칭죄’, 내지는 ‘성전 소란죄’에
해당하여 정죄 받고 쫓겨날 판입니다.
제가 오늘 강단에서 말씀을 전한 권위를 인정받은 것은
제가 공식적으로 감리교 목사 안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지 못했더라면 성도님들은 여기 오셔서
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시겠습니까?
제가 목사 안수를 받았기에, 성찬을 집례하고,
세례를 베풀고, 축도를 하고, 말씀을 전하는
권위를 위임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공식적인
자격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은 예수님께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자신의 권위(자격)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단순히 그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백성들 앞에서 권위에 큰 손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면서 ‘하늘의 권세로
이 일을 행한다’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당장에 ‘신성 모독죄’로 체포될 것입니다.
즉, 어떤 대답을 해도 예수님의 그들의 계략과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역질문>.....
그럼 대답하기 어려운 함정을 예수님은
어떻게 피해 나가셨을까요?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그들에게
역질문을 던지셨습니다.
<3-4절>
3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예수님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들이 함정을 파 예수님께 질문했듯이 예수님도
그들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던지신 것은.....
그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세례 요한을 .....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늘로부터’는 ‘하나님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늘’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하는 완곡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역질문에 당황한 그들은 금방
답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의논합니다.
그 의논의 내용이 5-6절입니다.
5절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절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따라서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인정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고 질책할 것이고,
반대로 사람으로부터라 한다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의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대답은 이것입니다.
7절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곤란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그러자 예수님도 같은 대답을 하십니다.
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않겠다”고 대답하심으로
그들의 함정을 지혜롭게 피해가신 것입니다.
<신앙인과 종교인>......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내내 무거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계속해서 이들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안 보이고,
내내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한 직후에도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으나...
백성이 예수님을 따름으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고 누가는 기록했습니다(눅19:47-48).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는 더욱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막11: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 자신들의 자격과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위가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기가 떨어지면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롭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일관된 생각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까?’(하나님 나라 확장)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 자리를 유지할까’,.....
‘어떻게 하면 로마 권력자(총독)의 눈에 들까?’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해 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들만 아니라 헤롯도 마찬가지였고,
빌라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롯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옆에 두고도 거부했고......
빌라도도 재판을 하면서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 주었습니다(막15:15).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 한 종류의 사람은 ‘종교인’입니다.
-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은 ‘신앙인’입니다.
‘종교인’은 종교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비롯한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고
자신만의 출세와 성공, 그리고 부귀영화를
목적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며,....
그런 삶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종교(하나님)는 ‘탐심’을 채우는 수단일 뿐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신앙생활을 ‘우상숭배’로 규정합니다.
즉 독실한 신앙인으로 보일지라도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해도,
성경을 줄줄 외우고 다녀도, 거액의 헌금을 해도,
그것은 자신만을 위한 정성을 쏟는 것이기에
우상숭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반면 ‘신앙인’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생각합니다.
나아가 이웃과 사회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삽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행3-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장애인을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으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여 먹고 살았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니,.... 베드로가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일어서서 걷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준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습니다.
이에 놀란 유대교의 지도자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였습니다.
이때도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심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던진 같은 질문을 사도들에게도
던졌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미문 앞에서 치유 받은 사람이 증인이 되어주고,
이 놀라운 기적에 대한 소문이 온 예루살렘에 퍼졌으니
더 이상 가두어 둘 명분이 없자 풀어주면서
이렇게 협박을 합니다.
“이후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19-20절>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절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그러면 실제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단지 말만 하고 그들의 협박이 두려워
움츠러들었을까요? 아닙니다.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5장에 보면, 그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소문을 들은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다시 베드로와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시자, .....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있던 대제사장이 같이 심문할
유대교 지도자들을 모아놓은 후.....
옥에 가둔 베드로와 사도들을 잡아오라 시켰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간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감옥에 있어야 할 사도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와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가보니
사도들이 많은 사람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들은 다시 유대교 공회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도들의 대답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5:27-29>
27절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절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절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성령 충만하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어떠한가를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종교인’인가, ‘신앙인’인가?
나는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정말 우리가
늘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올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과감히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느냐, 사람을 두려워하느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이 두려워 대답을 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위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그들의 실상을 온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역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인’일 뿐 ‘신앙인’은 아닙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이것을 ‘코람데오’라고 합니다.
- ‘내가 예배를 드릴 때나
나가서 일을 할 때나, 하나님 앞에 있다.’
- ‘내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도 하나님 앞에 있다.’
- ‘사업의 어떤 거래를 할 때도 하나님 앞에 있다.’
- ‘직장에서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서
적당히 할까 하는 그때도 하나님 앞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참된
‘신앙인’의 태도 아니겠습니까?
혹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나는 하나님 앞에 있다’(‘코람데오’)는 사실을 의식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