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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인천 95코스 제2부
문학산옛이야길-삼호현-청학사거리-
백제사신길벽화거리-능허대공원입구
2024년 8월 14일
1.코스 소개
1)코스개요
- 물길이 열리고 새 문물이 밀려들었던 인천에서 만나는 역사 문화거리를 지나는 코스
- 개항기의 흔적이 남은 다양한 박물관과 이국적 정취가 흐르는 차이나타운에서 인천항이 간직한 옛이야기와 마주하는 코스
2)관광포인트
- 하수처리시설을 지하화하여 그 위에 조성된 갯골을 살린 생태공원 '학익에코테마파크'
- 오래된 창고를 리모델링한 곳으로 한국 근대문학과 관련된 전시를 하는 '한국근대문화관'
- 개항기 인천의 풍경, 철도, 은행 등 자료를 전시한 '인천개항박물관'
- 한국 최초의 짜장면 집인 공화춘을 개조한 박물관 '짜장면박물관'
- 세계 명작 동화가 그려진 벽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
3)여행정보(주의사항)
- 학익에코테마파크는 가을에 갈대숲이 장관을 이룸
- 인천차이나타운은 인천항 개항기에 중국인들이 정착한 곳으로 중국 음식점이 많이 있음
- 시점 : 인천시 연수구 선학동 406-9, 선학역 3번 출입구. 교통편) 인천 1호선 선학역
- 종점 : 인천시 중구 북성동3가 6-9, 선린문 부근. 교통편) 지하철1호선 인천역에서 도보 500m
- 주요 경로 : 선학역3번출입구 2.6Km 문학산 6.9Km 남항그린공원 3.6Km 숭의역 3.9Km 자유공원 입구
- 길이 17.0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어려움
2.문학산 삼호현에서 백제 사신길을 따라 능허대로 가다
제2부 : 문학산 옛 이야기 길의 문학산과 문학산성 게시판을 살피고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미추홀구 문학동으로 내려러가는 임도와 헤어져 왼쪽의 삼호현 문주를 통하여 삼호현으로 이어간다. 삼호현은 한성백제 위례성을 출발하여 중국으로 떠나는 백제사신이 현재의 남동구 만수동 비루고개(별리현別離峴)에서 가족들과 헤어져 삼호현(三呼峴)에서 가족을 세 번 부르고 능허대 한나루로 향했다는 전설이 있는 고개로 미추홀구 문학동과 연수동 청학동을 잇는 고개다. 삼호현 쉼터에는 이 슬픈 이별의 장면을 그림과 함께 전설 내용을 적은 게시판들이 붙어 있다.
삼호현에서 북쪽 길은 문학공원과 연경산으로 이어지는 길로서 술바위(중바위), 갑옷바위, 배바위가 있다고 한다. 탐욕을 경계하는 술바위, 금기 사항을 준수하라는 갑옷바위, 문학산의 지형적 특성과 창조신화 성격을 지닌 배(船)바위가 있는 지역과 반대로, 서해랑길은 문학산 남쪽 백제 사신길을 따라간다.
문학산 능선 남쪽 암벽 아래 넓은 터에 삼호현 전통숲 공원이 조성되고 있다. 삼호정을 건축하였으며, 절벽에는 인공폭포, 넓은 터에는 잔디밭과 다른 조형물들을 더 조성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삼호현 전통숲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문학터널 상단에 이른다. 이곳에서 내려보는 풍경이 가슴을 달뜨게 한다. 문학산 능선은 동쪽 선유봉에서 주봉을 거쳐 서쪽의 연경산과 노적산으로 이어진다. 이 능선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미추홀구, 남쪽은 연수구이다. 북쪽 미추홀구 문학동과 남쪽 연수구 청학동을 잇는 미추홀대로는 문학산 삼호현 아래를 뚫은 문학터널로 이어진다. 그리고 문학산 남쪽과 청량산 북쪽 사이로 비류대로가 동서로 가로지르며 미추홀대로와 교차한다. 비류와 미추홀이 교차하며 지나는 곳이 청학사거리, 이 풍경은 인천광역시의 선사시대 모습을 현재에 그려낸 축도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비류백제의 미추홀을 살피고 백제 사신들의 출항지, 청량산 서북쪽의 능허대 한나루를 가늠하면 인천광역시가 학의 나래를 펼치고 바다로 날아가는 듯한 환각에 빠진다. 백제 사신들은 삼호현에서 비류마을의 백제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능허대 한나루로 가서 출항을 기다린다. 드디어 출항하기 적절한 바람과 날씨, 백제의 기술로 만든 대형 선박 '방(舫)'을 띄운다. 배는 자연도(紫燕島, 영종도)를 지나 덕물도(德勿島, 덕적도)를 거쳐 중국 산동반도 항로를 택하여 등주(登州)나 내주(萊州)로 들어간다.
비류마을로 내려가며 발과 장딴지에 경련이 일어나더니 다리가 그대로 휘어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몸이 일으켜지지 않고 통증이 심해진다. 한성백제 위례성에서 예까지 온 백제 사신들은 편안히 이 길을 갔는데, 인천광역시 남동구 수산동에서 출발하여 오봉산을 넘고 승기천을 건너서 문학산을 넘었을 뿐인데, 이 지경이 되다니. 그대는 체력이 저질이로구나. 쓰러진 채로 다리를 주물러 겨우 몸을 일으켰다. 과연 능허대를 지나 멀고 먼 차이나타운까지 갈 수 있을까? 백제 우물터를 지나 청학교차로에서 미추홀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비류대로 북쪽에 자리한 청학문화센터 건물로 무조건 들어갔다. 실내 계단에 몸을 앉히고 등산화를 벗고서 발과 장딴지를 꼬옥 꼭 눌러가며 계속 풀었다. 아쉬운 대로 한결 좋아졌다.
청학문화센터 정문 입구 왼쪽에 백제사신길 벽화거리 안내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이 게시판의 장문의 내용을 여러 게시판에 간략하게 나누어 작성하여 이 게시판들을 거리에 전시한 것이 백제사신길 벽화거리이다. 백제사신길 벽화거리로 들어섰다. 백제사신길 벽화거리는 중국을 왕래하던 백제사신의 여정을 벽화로 구현한 거리로, 비류대로 일대 두 곳에 총 200m 길이로 조성되어 있으며, 게시판 내용은 한국어, 중국어, 영어 등 3개 국어로 작성되어 있다. 첫 번째 구간은, 백제 사신들이 삼호현에서 출발하여 백제 우물을 지나 능허대로 향하던 모습과 각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으며, 두 번째 구간은, 백제사신들이 능허대 아래 한나루에서 중국으로 떠나는길을 소개한다. 고구려로 인해 육로가 막힌 백제가 능허대 길을 통과해 바다로 중국과 교류한 기간은 근초고왕 27년(372)부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개로왕 21년(475)까지의 100여 년 동안이며, 이것이 한반도에서 외국으로 나간 최초의 바닷길이라 한다. 백제사신길 벽화거리는 이 역사적 의미를 기리며 걷는 길이다.
백제사신길을 지나 비류대로 북쪽 보도를 따라간다. 남쪽에는 청량산이 길게 이어지고 그 오른쪽 자락 북서쪽의 능허대 한나루를 가늠한다. 수인선 협궤철도 폐역 송도역 앞 비류대로 송도역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은 비류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한나루로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 멍청하게도 이 삼거리를 지나 비류대로 북쪽 보도를 따라 신설된 수인분당선 송도역 입구를 지나 옥련고개로 이어가고 말았다. 되돌아가서 서해랑길 정코스를 이어가야 하는데, 몸과 마음은 되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서해랑길과 재회하기 위해 옥련고개에서 비류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한진로를 따라가서, 결국 옥련로와 한진로가 교차하는 사거리 옥련현대2차아파트 단지 앞에서 잃었던 서해랑길을 찾았다. 이 잃어버린 서해랑길 구간은 어느 때 찾아볼 기회가 올 것이다.
잠시 잃어 버렸다가 찾은 백제 사신을 따라 옥련2동 행정복지센터, 옥련초등학교, 독배로40번길, 옥련시장, 독배로, 능허대로103번길, 럭키아파트를 거쳐 능허대 입구에 이른다. 백제 사신의 긴긴 행로는 능허대에 이르러 이제 더 멀고 험한 출항길로 나선다. 탐방객 또한 능허대터가 있는 능허대공원 입구에서 숨을 고른다. "긴 언덕은 물에 잠겨 아득히 대(臺)를 이루고/ 만 리는 될 듯 길게 드리운 구름은 모래밭처럼 한눈에 펼쳐 있구나/ 바다에 달이 뜨면 푸른 학이 울고/ 그침 없는 높은 바람에 갈매기들 날아드네 - 이병연(李秉淵, 1671~1751), '능허대'
3.탐방 과정
전체 탐방거리 : 17.9km
전체 소요 시간 : 6시간 44분
문학산 옛 이야기 길은 비류와 미추홀, 문학산과 시, 문학산과 설화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산 옛 이야기 길 중 '문학산과 설화'를 살피고 내려오며 앞쪽을 바라보면 미추홀구 학익동에 해발 175.86m 연경산이 솟아 있다. 연경산(衍慶山)은 학익산(鶴翼山) 혹은 청명산이라고도 불리며, 멀리서 보면 문학산과 연경산이 ‘학이 날개를 편 모양’처럼 보여서 문학산은 학산, 연경산은 학익산이라 이른다고 한다.
'문학산과 설화' 게시판 아래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오른쪽은 미추홀구 문학동, 왼쪽은 미추홀구 학익동이다.
문학산성, 역사 속의 문학산성, 문학산성의 여러 이름들 게시판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산성 : 문학산성은 인천 지역의 대표적인 관방 시설이다. 처음에는 토성이었던 것이 삼국시대 말기 또는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석성으로 개축되어 이것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까지 이어진다. 일정한 크기로 자른 돌을 다듬지 않은 상태로 자연 지형을 최대로 잘 이용해 산성 전체 구간을 쌓았다. 2017년 실측 조사에 따르면 성벽의 둘레는 587m이며, 육안으로 확인되는 성벽의 길이는 232m이고 내부 면적은 총 20,800㎡이다.
역사 속의 문학산성 : ■『동사강목』과 『여지도서』에 의하 문학산은 백제 미추왕(비류)의 도읍지로 돌로 만든 산성의 터와 성 안에 비류정이라는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천부읍지』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인천부사 김민선(1542~1592)이 산성을 수리하고 백성들과 함께 왜병으로부터 산성을 지켰다고 한다. ■1711년(숙종 37) 민진후의 "영종과 제물포에 군사진지를 설치하고, 문학산성과 서해도서 진보의 봉화대를 연결하는 등 인천부를 중심으로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라는 의견이 비변사에서 논의되기도 했다. ■1871년 신미양요에 이르 문학산과 봉수대 등 군사를 배치하여 매 및 요양의 임무를 수행했고 『소성진중일지』에 기록되어 있다.
문학산성의 여러 이름들 : 문학산성은 역사적으로 남산석성, 남산고성, 비류성, 미추홀고성, 문학산성, 문학산고성, 문학고성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문학산, 눔학사의 옛 명칭, 문학산 명칭의 유래 게시판들이 전시되어 있다.
인천 역사의 태동지 문학산 : 문학산(높이217m)은 5개의 봉우리(노적산, 연경산, 문학산, 수리봉, 길마산)가 동서로 가로지르며 약 4.5km 산록이 이어져 있는 산괴이다. 문학산 일대는 바다와 인접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선사시대부터 생활 터전이었다. 기원전 18년 비류 세력의 미추홀 정착 이래, 문학산을 빼놓고 인천의 역사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항상 인천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
문학산의 옛 명칭 : 인천도호부 남쪽에 위치해 있어 남산, 산의 형세가 학의 모습과 같아 학산, 산 꼭대기에 봉수가 있어 봉화둑산, 산 위에 산성이 있어 성산, 멀리서 본 봉화의 모양이 배꼽 같아 배꼽산이라 불린다.
문학산 명칭의 유래 :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인천서원'이 1708년(숙종 34) '학산서원'이라 사액을 받게 되는데 이때 '문묘'와 '학산'의 첫 음을 따서 '문학'이라 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하였으나, 그 이전 시기에 '문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한시 〔'등문학봉(登文鶴峰)', 권시(權諰, 1604~1672)〕이 발견됨에 따라, 그 이전부터도 이미 문학이라고 불려왔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학산'이라는 명칭이 '주변을 빙 둘러싸다'는 '두르다'의 옛말 '두루다'의 명사형인 '두룸'이 '두루미'로 발음되고, 이 말이 날아다니는 새(鳥) '두루미', 곧 학으로 붙어져 '학산'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었다는 설(說)이 유력하다. 따라서, 문학산은 산의 형세와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학산이 인천의 태동지, 백제 비류의 발상지라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왼쪽 난간에 문학산 옛 이야기길 위치도와 안내 게시판이 붙어 있다.
문학산 등산길을 따라 걸으면 문학산에 담긴 이야기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문학산과 문학산성에 대한 소개로 옛 이야기 길이 시작됩니다. 문학산에 관련된 설화와 시를 만나고 나면 수천 년 전 미추홀에 도읍을 내린 비류의 이야기로 마무리 됩니다.
문학산 정상에서 서쪽 출입문을 통과하여 임도를 따라 문학산 옛 이야기 길을 살피며 내려왔다.
문학산 옛 이야기 길을 내려오면, 오른쪽은 문학동으로 내려가는 길, 왼쪽 둘레길 문주를 통하여 삼호현쉼터로 이어간다.
삼호현(三呼峴) 쉼터에 그림과 함께 삼호현을 설명하는 게시판들이 전시되어 있다.
삼호현(三呼峴)은 옛날 사람들이 인천 읍내에서 문학산 기슭을 넘어 옛 송도 방면 바다로 갈 때 이용하던 고개다. 현재는 미추홀구 학익동과 문학동에서 연수구 청학동을 연결하는 등산로로 이용된다./ 아버지가 중국 사신으로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습니다. "얘들아 아버지가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모두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지내라." 아내는 함께 봇짐을 싸다 눈물을 훔칩니다. 온 가족이 아버지의 사신길을 함께 배웅하러 갑니다. 가족은 별리현에 도착했습니다. "얘들아! 여보!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오." "네. 어서 가세요." 아버지는 다시 길을 나서지만 아이들과 아내는 뒷 모습을 보며, 발길을 돌리지 못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떠나질 못합니다. 아버지가 삼호현 고개에서 뒤돌아 아이들과 아내를 바라봅니다. "얘들아! 잘 있어라!" "여보! 잘 있으시오!" "모두들 건강하게 잘 있으시오." 아버지는 삼호현 고개에 서서 가족을 향해 이렇게 세 번을 외치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아버지는 능허대(한나루)에 도착해 기다리는 배에 몸을 싣고 중국으로 향합니다. 별리현에서 손을 흔들던 아이들과 아내를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쉼터에서 내려오면, 오른쪽은 미추홀구 연경산으로 가는 길, 서해랑길은 왼쪽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어간다.
삼호현의 슬픈 사연과 술바위(중바위)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세 번 이름을 부르고 이별하던 가슴 아픈 삼호현(三呼峴) :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문학산과 연경산 사이에 있는 고갯길을 삼호현·삼해주현·사모현이라 한다. 발음에 따라 사모지 고개, 사모재 고개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부평의 별리현(비류고개)을 거쳐 이 고개를 넘어 능허대로 갔다. 배웅하러 왔던 가족들은 별리현에서 이별을 했고, 사신들도 삼호현에 오르면 그때까지 별리현에 서 있던 가족들에게 큰 소리로 이별 인사를 세 번 하고 이 고개를 넘어갔다 하여 고개를 삼호현이라 불렀다. 고개 위에 있는 큰 바위를 삼해주바위·중바위 등으로 부른다. 옛날에 이 바위에는 물동이 모양으로 패인 부분이 있었는데 여기에 삼해주[酒]가 고여 있어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갈증을 풀 수 있었다. 한 잔으로도 능히 갈증을 풀 수 있어 욕심을 부려 더 마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술을 두 잔 이상 마셨더니 술이 말라 없어졌다고 한다. 그 후로 그 고개를 삼해주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어느 파계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술맛이 너무 좋아 한 번에 몇 잔을 마신 뒤로는 술이 말라 없어졌다고 하여 중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삼호현에서 청학동으로 내려가는 길에 여러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삼호현에서, 황운조 청백선정비, 백제 우물터, 청학복합문화센터, 백제사신길 벽화거리, 송도역전시장, 조각의 거리, 옥련시장, 능허대터를 거쳐간다.
대표관광지 네 곳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을 옮긴다.
1.황운조 청백선정비 : 청학사 입구에는 커다란 바위에 글귀를 새 비석이 있다. 조선 정조 21년(1797년) 및 23년(1799년)에 인천부사를 지낸 황운조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정조 23년에 현재 위치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조성되었으나 1998년에 청학사 입구로 옮겨졌다. 서예가로도 유명하였던 황운조의 선정비는 인천향교 앞에도 2개가 남아 있다.
2.백제 우물터 : 문학산(文鶴山) 동남쪽 청학동에 위치한 샘으로, 백제(百濟) 우물이라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비류 왕자가 문학산 아래에 '미추홀(백제 초기의 도읍)'을 세운 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인천 지역에서 유일하게 백제라는 이름이 붙어 전해지는 유적이다.
3.백제사신길 벽화거리 : 중국을 왕래하던 백제 사신의 여정을 벽화로 구현한 거리이다. 비류대로 일대 두 곳에 총 200m 길이로 조성하였다. 백제 사신들이 삼호현에서 출발하여 백제 우물을 지나 능허대로 향하던 모습과 각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백제 사신길은 한반도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최초의 바닷길로 알려져 있다. 백제 사신길 벽화거리는 소중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거리다.
4.능허대지 : 능허대는 백제시대에 선착장이 있던 자리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8호이다.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배를 타던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며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백제와 고구려의 정치적 갈등 때문에 백제 사신들은 중국을 왕래할 때 육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능허대 밑 한나루에서 산둥반도의 등주, 내주에 이르는 해로를 이용하였다.
문학선 남쪽 자락길을 따라 청학동으로 내려간다. 바로 아래 왼쪽에 삼호현 전통숲 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삼호현 전통숲은 시민을 위한 그린공원으로 조성 중이다. 왼쪽에 삼호정을 세웠고, 절벽에 인공폭포를 조성하는 듯.
삼호현에서 250m 지점의 미추홀대로 문학터널 상단이다. 오른쪽 145m 지점에 황운조 청백선정비가 있으며 서해랑길은 왼쪽 비류대로331번길로 내려가 미추홀대로와 비류대로가 교차하는 오른쪽 청학사거리로 내려간다.
문학터널 상단에서 남쪽을 조망한다. 미추홀대로가 연수구의 연수동(왼쪽)과 청학동(오른쪽)을 가르며 청학사거리에서 비류대로와 교차하고, 중앙 뒤에 청량산이 솟아 있다.
천연아카시아 꿀을 판매하는 일송정 농장 입구에 一松亭 표석과 수령 80년의 곰솔나무가 솟아 있다. 一松亭 표석에는 윤해영(尹海榮) 작사, 조두남(趙斗南) 작곡의 가곡 '선구자' 노랫말이 적혀 있다.
1절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2절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절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오른쪽 뒤 문학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와 삼호현에서 왼쪽으로 꺾어 삼호현전통숲과 문학터널 상단을 거쳐왔다.
사모지(사모재, 삼호현) 아래 비류마을에 사모지 근린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비류대로331번길을 따라 내려간다.
비류대로331번길이 갈림길을 지나 미추홀대로304번길로 바뀐다. 미추홀대로304번길을 따라 비류마을을 통과한다.
연수구 연수동 비류마을 미추홀대로304번길에 백제 우물터가 있다. 왼쪽 앞에 백제 우물터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백제 사신들이 삼호현에서 능허대로 향해 가던 길에 잠시 들려 자주 이용하던 백제시대 우물터라고 한다.
비류(沸流)의 도읍 미추홀의 문학산(文鶴山) 동남쪽 청학동에 위치한 이 샘은 백제(百濟) 우물이라 알려져 있다. 인천에서 백제 관련 유적과 전승은 대부분 문학산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어 이곳은 선사시대 이래 인천 역사의 중심지였다. 우물은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을 이루는 생활 근거지로 정보 교류가 이루어지는 만남과 소통의 장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문학산성(文鶴山城)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니 이곳 우물은 성 밖 일반 백성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물이 길다는 의미의 '백자(百尺)' 우물이 '백제' 우물로 전승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연수구 연수1동은 비류마을이라 불린다. 미추홀대로304번길 서쪽 출입구에 미추홀대로가 남북으로 달리고 있다.
미추홀대로의 비류마을 입구에 비류마을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연수구 청학동과 연수1동을 비류마을이라 이르는데, 비류마을의 청학동을 연수1동으로 편입하는 경계 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미추홀대로와 비류대로가 교차하는 청학사거리에서 미추홀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미추홀대로 북쪽 보도로 넘어간다.
미추홀대로가 문학산 삼호현 아래를 뚫은 문학터널을 통과한다. 문학터널 상단에 삼호현 전통숲이 보인다. 오른쪽 버스정류소 위 미추홀대로304번길에서 미추홀대로로 나왔다.
동서로 지나는 비류대로와 남북으로 지나는 미추홀대로가 교차하는 청학사거리 지역이다.
청학사거리의 미추홀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비류대로 북쪽 보도로 이어간다.
비류대로 북쪽 보도를 따라 청학동의 비류마을 지나간다. 오른쪽은 청학사거리 소공원이다.
비류대로 북쪽 보도 위에 청학사거리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비류대로 북쪽 보도에 청학문화센터 건물이 솟아 있다.
백제사신길 표지판이 길바닥에 설치되어 있다. 삼호현 1.15km, 능허대지 2.77km 지점이다.
청학문화센터에 연수문화원과 연수청소년문화의집이 자리한다.
청학문화센터 정문 왼쪽에 백제사신 벽화거리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벽 위에 '문화예술의 미래를 상상하다'가 붙어 있다.
청학문화센터 정문 왼쪽에 백제사신길 벽화거리 스토리텔링과 백제사신길 안내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이 게시판의 장문의 내용을 여러 게시판에 간략하게 작성하여 이 게시판들을 전시한 것이 백제사신길 벽화거리이다.
백제 사신들이 능허대로 향하던 옛길을 따라 걸으며 : 능허대(凌虛臺)로 가는 길은 옛날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갈 때 수도 위례성을 떠나 오늘날 남동구 만수동 별리고개 [별리현(別離峴)]를 넘고 문학산(文鶴山)과 노적봉(露積峯)이라고도 불리는 연경산(衍慶山) 사이의 사모지고개[삼호현(呼峴)]를 거쳐, 옥련동 옛 능허대 아래 한나루 [대진(大津)]에 도착해 배를 띄운데서 전해진다. 고구려로 인해 육로가 막힌 백제가 이 능허대 길을 통과해 바다로 중국과 교류한 기간은 근초고왕 27년(372)부터 개로왕 때까지의 100여 년 동안이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외국으로 나간 최초의 바닷길이다.
삼호현에서 부르는 이름 :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은 가족들과 함께 수도를 출발해 서해바다 능허대 한진나루로 통하는 길목, 오늘의 남동구 별리고개에 이른다. 기약할 수 없는 멀고 험난한 뱃길을 떠나는 사신을 전송하고 무사 귀국을 빌기 위해 가족들도 따라나선 길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함께 갈 수는 없다. 사신과 가족들은 이곳에서 마지막 애끓는 작별을 나눈다. 그 작별이 얼마나 서럽고 애가 탔으면 고개 이름을 이별의 뜻, 별리고개[別離峴]라 불렀으랴. 사신은 나라를 대표해 중국으로 가는 외교관. 체통과 위엄을 버리고 사사로이 이별을 서러워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소리 죽여 흐느끼는 가족들의 서러운 눈물을 뒤로 한 채 의연한 듯 발걸음을 옮겨 어느덧 문학산 사모지고개, 즉 삼호현에 닿는다. 아, 이 고개만 넘어서면 이제 가족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구나. 아무리 사신이라는 중책을 맡은 고관이라 해도 어찌 가족에 대한 뜨거운 정을 억누르고만 있을 수 있으랴. 사신은 마침내 몸을 돌려 아직 별리현 고개 위에 서 있는 가족들을 돌아보며 "여보, 부인, 잘 다녀오리다!" "아들아, 잘 있어라!" 목멘 목소리로 세 번을 내처 부르고 돌아서니, 돌부리 하나, 초목 한 잎에도 그 애끓는 심사가 사무쳐서 고개 이름을 사모(思慕)의 의미인 사모지고개 혹은 세 번 부른다는 뜻의 삼호현(三呼峴)이라 일렀던가.
삼호현을 지나 능허대로 가는 길 : 쓸쓸한 마음, 무거운 발걸음으로 삼호현을 넘어 내려오던 사신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유서 깊은 문학산 봉우리를 한번 올려다본다. 문학산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는 한 핏줄 한 형제로, 형인 비류왕이 성을 쌓고 미추홀왕국을 도읍했던 곳. 역사는 바뀌어 이제는 온전히 백제 땅이 되었으니, 등성이 아래로 흐르는 물과 울창한 숲, 마을의 논과 발, 모든 경치가 백제 왕조와 만대(萬代) 번성을 이야기하는 듯 참으로 태평스럽구나. 잠시 감개에 젖어 있던 사신은 아까 삼호현을 넘을 때 본 중바위 때문인지 문득 목이 컬컬해짐을 느낀다. 구멍이 움푹 팬 중비위는 술에 관련한 고사가 있다. 옛날 어떤 중이 이 고개를 넘다가 덥고 목이 말라 "시원한 술이나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고 혼자 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홀연히 한 낭자가 술잔을 받쳐 들고 권하는 것이었다. 석 잔을 얻어 마신 중은 이번에는 술보다 낭자에 마음이 끌려 넉 잔째를 청해 보았으나 더 이상 낭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이 무릎을 꿇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애타게 낭자를 불러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바위에 팬 구멍은 그 중의 두 무릎과 양손 자국이라는 것이다. 사신은 피식 웃으며 그냥 연수동 백제우물가로 내려간다. 문학산성 안에도 두 개의 우물이 있다고 들었으나 그것은 길을 거꾸로 가는 것이다.
우물가에 다다르니 방금 여염(閭閻)의 한 아낙네가 물을 길어 가는 것인지 언뜻 그 뒷모습이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진다. 물은 지극히 맑고 시원하다. "이 우물이야말로 저 문학산 정기가 고여 솟은 물이 아니더냐. 아, 참으로 시원하구나." 목을 축인 사신은 상쾌한 기분으로 다시 문학산을 올려다본다. 비류왕의 도읍지이면서 이 고장의 진산(鎭山)답게 일대에는 전설이 많다. 중바위 건너편에는 갑옷바위가 있다. 옛날 어느 장수가 투구와 갑옷을 땅 속에 감추고 그 위에 큰 바위를 덮어 놓았다는 것이다. 아무나 함부로 바위를 건드리면 천둥 번개가 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뿐이랴. 문학산과 수리봉 사이에는 배바위가 있는데 하느님이 장차 비닷물이 문학산까지 치밀어 오를 것에 대비하여 만들어 두신 배라는 것이다. 기독교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와 비슷한 전설이 서려 있는 것이다. 오, 신령스런 문학산이여!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며 바다 쪽을 바라보니 멀리 능허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망망한 서해바다에 외로이 뜬 작은 섬인 듯, 누대(樓臺)인 듯, 하얗게 펼쳐진 백사장 위로 갈매기 나래짓하는 아름다운 나루다. "오냐. 저기서 배를 띄운다는 말이로구나." 어서 가자. 마음 속 번뇌 다 잊고 능허대로 가서 나라가 명한 이 중한 사명을 몸 바쳐 훌륭히 이루어 내자! 사신의 발걸음은 바람처럼 표표하고 가벼워진다. 아마 훨씬 후대 사람인 조선의 시인 이병연(李秉淵)도 저 멀리 바라보이는 능허대 풍경에 대해 백제 사신과 똑같은 감회를 느꼈나 보다. 그의 시에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우리도 이병연이 읊은 '능허대' 시 몇 줄을 감상해 보자.
긴 언덕은 물에 잠겨 아득히 대(臺)를 이루고/ 만 리는 될 듯 길게 드리운 구름은 모래밭처럼 한눈에 펼쳐 있구나/ 바다에 달이 뜨면 푸른 학이 울고/ 그침 없는 높은 바람에 갈매기들 날아드네 - 이병연(李秉淵, 1671~1751), '능허대(凌虛臺)'
능허대에 올라 : 사신이 도착한 능허대는 동쪽의 청량산 자락이 흘러내리다 잘록하게 멈추어 선 듯, 작은 섬 형상을 하고 있다. 그동안 백제의 사신들은 이 능허대 아래 한나루에서 중국 산동반도, 등주(登州)나 내주(萊州)로 배를 띄웠던 것이다. 사신은 객관(客館)에 미처 여장을 풀 새도 없이 백 척(尺) 높이라는 능허대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바다는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다. 뒤로 보이는 것은 문학산과 이어지는 연경산뿐이다. 방금 저 연경산과 문학산 사이의 삼호현을 지나온 것이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멀리 청량산 뒤쪽 동북 방향으로 문학산 주봉과 수리봉, 그리고 길마산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을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더불어 이 일대가 앞에는 바다, 뒤에는 산을 둔 요지라는 생각이 든다. 능허대 서북쪽 옆으로는 드문드문 아름드리 해송(海松)이 그윽하게 가지를 늘어뜨린 말굽형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백사장 저쪽 끝에는 석산(石山) 하나가 바다로 달려 나가다 급히 멈춰선
듯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 문득 사신은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렇다. 이렇게 이곳 경치에만 취해 있을 수는 없다. 사신은 행낭 속 임금님의 친서를 다시 한 번 조심스레 확인해 본다. 그리고 내일이라도 날씨만 허락한다면 당장 중국으로 떠나 임금님의 명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히 수행하리라. 사신은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중국으로 떠날 사신의 배는 이미 한나루에 돛을 내린 채 날씬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출발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
중국으로 떠나는 뱃길 : 지난날 궂은 일기 때문에 여러 날을 이곳 능허대에서 허송한 사신들도 있고, 또 중도에서 회항(回航)한 일도 수차 있었다고는 하지만, 하늘의 도움인가. 사신은 이틀 만에 배를 띄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종꾼들은 이미 배에 실을 모든 물자를 안전하고 가지런하게 정리해 놓은 뒤다. 배는 백제의 기술로 만든 '방(舫)'이라는 대형 선박이다. 사신은 출발에 앞서 다시 한 번 이상 유무를 꼼꼼히 확인한다. 이어 자신의 의관(衣冠)을 고치고 조정을 향해 큰 절을 올린 뒤 배에 오른다. 배는 돛을 올리고 한나루를 뒤로 한 채 바다로 나아간다.
이제 덕물도(德勿島, 덕적도)를 거쳐 산동반도로 가는 항로를 택할 것이다. 어느새 자연도(紫燕島, 영종도)가 배의 오른쪽 옆으로 미끄러져 멀어진다. 사신은 고개를 돌려 떠나온 능허대 쪽으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새삼 삼호현에서 마지막 작별한 가족들, 부인과 아들이 눈에 밟힌다. 사신은 조용히 입속으로 뇐다. "내 잘 다녀오리다. 크게 걱정하지 마시오. 이번 일은 우리 백제로서 지극히 큰일이 아니오. 내가 무사히 다녀오면 나라에 큰 공이요, 집안에도 영예일 터이니 모두 잘 건사하고 계시오. 아들아 너 또한 자신을 갈고 닦는 데 하루도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는 날까지 건강히 잘 있어라." 사신은 이제 배의 중앙에 정좌(正坐)한 채 서쪽을 응시한다. 바람은 순풍이고 하늘은 맑다. 가슴속은 끓는 의지와 자신감으로 충만하다. 나는 완벽하게 나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며, 견문과 지식을 넓혀 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나라의 번영, 발전을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이다. 나는 분명 빛나는 성공과 함께 영예롭게 고국에 돌아올 것이니....
백제 사신들이 배를 내어 중국으로 향하던 능허대 옛 한나루는 바로 우리나라가 바닷길을 열어 외국과 교류한 역사상 최초의 지점이다. 우리 인천은 서기 372년, 오늘의 연수구 옥련동 능허대 한나루와 1883년 개항에 이른 제물포 등 국가 문호 개방에 있어 두 차례 중요한 역사 기록을 가진다. 한반도 중심에 자리한 우리 인천이 오늘날 국내 육지 교통의 요충인 동시에 바다와 하늘을 잇는 동아시아 지역 최대의 세계 교통 허브로 자리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온갖 난관과 역경을 무릅쓰고 능허대 뱃길을 개척해 낸 백제 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상이 면면히 이어져 온 결과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능허대로 향해 가고 오던 옛 백제 사신들의 발걸음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능동적 개방 의지와 더불어 세계와의 교류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 우리도 옛 백제 선인들이 걷던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세계와 능동적으로 교류하는 진취적인 구민의 자세와 함께 당당한 세계인의 일원으로서 의연한 의지를 가다듬어 보자.
청학사거리에서 비류대로 북쪽 보도를 따라 청학사거리 소공원과 청학문화센터 앞을 지나왔다.
백제사신길 벽화거리 첫 구간은, 백제사신들이 삼호현에서 백제우물을 지나 능허대로 향해 가는 길을 소개한다.
능허대(凌虛臺)로 가는 길은 옛날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갈 때 수도 위례성을 떠나 오늘날 남동구 만수동 별리고개(별리현, 別離峴)를 넘고, 문학산(文鶴山)과 연경산(衍慶山) 사이의 사모지고개(삼호현, 三呼峴)를 넘어, 옥련동 옛 능허대 아래 한나루(대진大津)에 도착해 배를 띄운 데서 전해진다.
백제사신길 게시판은 국문, 영문, 중문, 3개 국어로 적혀 있다.
고구려로 인해 육로가 막힌 백제가 이 능허대 길을 통과해 바다로 중국과 교류한 기간은 근초고왕 27년(372)부터 개로왕때까지의 100여 년 동안이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외국으로 나간 최초의 바닷길이다.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은 가족들과 함께 수도 위례성을 출발해 서해바다 능허대 한진나루로 통하는 길목, 오늘의 남동구 만수동 별리고개(별리현別離峴)에 이른다. 사신과 가족들은 이곳에서 드디어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그 마음이 얼마나 서럽고 애가 탔으면 고개 이름조차 이별의 뜻, 즉 별리고개(별리현別離峴)라 불렀으랴.
문학산 사모지고개(삼호현三呼峴)에 도착한 사신은 몸을 돌려 아직 별리현 고개 위에 서 있는 가족들을 돌아보며 "어머님, 부인, 잘 다녀오리다!" "얘들아, 잘 있어라!" 하며 목멘 목소리로 세 번을 내처 부르고는 돌아선다. 돌부리 하나, 초목 한 줄기에도 그 애끓는 심사가 사무쳐서 고개 이름을 사모(思慕)의 의미인 사모지고개, 혹은 세 번 부른다는 뜻의 삼호현(三呼峴)이라 일렀다.
문학산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는 한 핏줄 한 형제로, 형인 비류왕이 성을 쌓고 미추홀왕국을 도읍했던 곳. 역사는 바뀌어 이제는 온전히 백제 땅이 되었으니, 등성이 아래로 흐르는 물과 울창한 숲, 마을의 논과 발, 모든 경치가 백제 왕조와 만대(萬代) 번성을 이야기하는 듯 참으로 태평스럽구나.
삼호현 근처에는 구멍이 움푹 팬 중비위가 있다. 옛날 어떤 중이 이 고개를 넘다가 덥고 목이 말라 "시원한 술이나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고 혼자 소리를 했다. 그러자 홀연히 한 낭자가 술잔을 받쳐 들고 권하는 것이 아니가. 석 잔을 얻어 마신 중은 이번에는 술보다 낭자에 마음이 끌려 넉 잔째를 청해 본다. 그러나 더 이상 낭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이 무릎을 꿇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애타게 낭자를 불러 보았으나 허사였다. 바위에 팬 구멍은 그 중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엎드려 부르다 생긴 두 무릎과 양손 자국이라는 것이다.
중바위 건너편에는 갑옷바위도 있다. 옛날 어느 장수가 투구와 갑옷을 땅 속에 감추고 그 위에 큰 바위를 덮어 놓았다는 것이다. 아무나 함부로 바위를 건드리면 천둥 번개가 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문학산과 수리봉 사이에는 배바위가 있는데 하느님이 장차 비닷물이 문학산까지 치밀어 오를 것에 대비하여 만들어 두신 배라는 것이다. 기독교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와 비슷한 전설이 서려 있다.
문학산성 안에도 두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 연수동에 백제우물터로 추정되는 곳이 또 하나 있다. 여염(閭閻)의 아낙네가 물을 긷던 곳이리라. 언뜻 그 뒷모습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듯하다. 이 우물이야말로 저 문학산 정기가 고여 솟은 물이리라.
조선의 시인 이병연(李秉淵)도 저 멀리 능허대 풍경을 보며 백제 사신과 똑같은 감회가 솟았나 보다. 그의 시에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병연이 읊은 '능허대' 시 몇 줄을 감상해 보자.
긴 언덕은 물에 잠겨 아득히 대(臺)를 이루고/ 만 리는 될 듯 길게 드리운 구름은 모래밭처럼 한눈에 펼쳐 있구나/ 바다에 달이 뜨면 푸른 학이 울고/ 그침 없는 높은 바람에 갈매기들 날아드네 - 이병연(李秉淵, 1671~1751), '능허대(凌虛臺)'
백제사신길 벽화거리는 비류대로 일대 두 곳에 총 200m 길이로 조성하였다. 중국을 왕래하던 백제사신의 여정을 벽화로 구현한 거리 중 첫 번째 구간이다. 백제 사신들이 삼호현에서 출발하여 백제 우물을 지나 능허대로 향하던 모습과 각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백제 사신길은 한반도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최초의 바닷길로 알려져 있다.
비류대로 건너편 청량산 북쪽 지역이 청학동 청릉마을인 것 같다.
연수구 청학동 청량산 동북쪽 기슭에 청릉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청량산 아래에 있었다는 무덤 ‘청릉(靑陵)’ 때문에 생겼다. 이 무덤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서해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산기슭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무덤의 정체가 불분명했던 것처럼 위치 역시 분명치는 않다. 전설에는 이 무덤이 백제를 세운 온조(溫祚)의 형 비류(沸流)의 것으로 전해온다. 비류에 관한 전설은 『삼국사기』에 잘 나와 있지만 거기서 청릉에 대한 내용은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여지도서』 등의 다른 문헌에는 “문학산 정상에 미추왕(비류) 고도(古都)가 있다”든가 “인천부 남쪽 10리쯤 된 곳에 큰 산소가 있는데 낮은 담이 둘러쳐 있고 망부석이 흩어져 있는 고총(古塚)이 미추왕묘”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들 기록 속의 무덤이 바로 청릉일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무덤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으니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청량산의 다른 이름이 청릉산이기도 하다는 점까지 따져볼 때 가능성이 적지 않은 얘기로 받아들일 뿐이다. 형편이 이러하니 그 무덤의 이름이 왜 청릉이라 불리게 됐는지도 물론 알 길이 없고, 그 이름 유래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도 없다. - 인천광역시사
백제사신길 벽화거리 두 번째 구간으로, 백제사신들이 능허대 아래 한나루에서 중국으로 떠나는길이다.
사신이 도착한 능허대는 동쪽의 청량산 자락이 흘러내리다 잘록하게 멈추어 선 듯, 작은 섬 형상을 하고 있다.
그동안 백제의 사신들은 이 능허대 아래 한나루에서 중국 산동반도, 등주(登州)나 내주(萊州)로 배를 띄웠다. 사신이 능허대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앞으로는 바다가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고, 뒤로는 문학산과 연경산이 이어져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능허대 서북쪽 옆으로는 드문드문 아름드리 해송(海松)이 그윽하게 가지를 늘어뜨린 긴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백사장 저쪽 끝에는 석산(石山) 하나가 바다로 달려 나가다 급히 멈춰선 듯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 사신은 임금님의 친서를 확인하며, 그리고 내일이라도 날씨만 허락한다면 당장 중국으로 떠나 임금님의 명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수행하리라 다짐한다.
중국으로 떠날 사신의 배는 한나루에 돛을 내린 채 날씬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출발의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
사신은 출발에 앞서 자신의 의관(衣冠)을 고치고 조정을 향해 큰 절을 올린 뒤 배에 오른다. 배는 돛을 올리고 한나루를 뒤로 한 채 바다로 나아간다. 배는 백제의 기술로 만든 '방(舫)'이라는 대형 선박이다.
이제 덕물도(德勿島, 덕적도)를 거쳐 산동반도로 가는 항로를 택할 것이다. 어느새 자연도(紫燕島, 영종도)가 배의 오른쪽 옆으로 미끄러져 멀어진다.
백제 사신들이 배를 내어 중국으로 향하던 능허대 옛 한나루는 바로 우리나라가 바닷길을 열어 외국과 교류한 역사상 최초의 지점이다. 우리 인천은 서기 372년, 오늘의 연수구 옥련동 능허대 한나루와 1883년, 개항에 이른 제물포 등 국가 문호 개방에 있어 두 차례 중요한 역사 기록을 가진다.
백제사신길 벽화거리 두 번째 구간을 지나와 뒤돌아본다. 바닷길의 의미를 되새기는 의미 있는 거리이다.
한반도 중심에 자리한 우리 인천이 오늘날 국내 육지 교통의 요충인 동시에 바다와 하늘을 잇는 동아시아 지역 최대의 세계 교통 허브로 자리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온갖 난관과 역경을 무릅쓰고 능허대 뱃길을 개척해 낸 백제 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상이 면면히 이어져 온 결과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능허대로 향해 가고 오던 옛 백제 사신들의 발걸음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능동적 개방 의지와 더불어 세계와의 교류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 우리도 옛 백제 선인들이 걷던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세계와 능동적으로 교류하는 진취적인 자세와 함께 당당한 세계인의 일원으로서 의연하게 의지를 가다듬어 보자.
청학동 비류대로 북쪽 보도에 조성된 백제사신길 벽화거리를 지나 안골마을을 지나와 뒤돌아본다.
청학동(靑鶴洞)은 구한말 인천부의 먼우금면에 속해 있던 곳이다. 청학동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 이곳에는 청릉마을, 뒷골, 물푸레골, 안골, 옥터 등의 마을이 있었고 대부분이 바다에 맞닿아 있었다. 이들 동네는 문학산 뒤쪽에 있기 때문에 1903년 인천부가 동네 이름을 지을 때 한데 합쳐 산후동(山後洞)이라 했다. 그뒤 이들 마을은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 조정 때 일제에 의해 모두 합해져 청학리가 됐고, 당시 새로 생긴 부천군의 문학면에 편입됐다. 그 뒤 1940년 4월에 다시 인천부로 편입됐으며, 광복 뒤에 청학리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청학동이 됐다. 여기서 청학은 일본인들이 청릉(靑陵)마을의 ‘청’자와 문학산의 ‘학’자를 따서 멋대로 붙인 이름이며, 선학동이나 문학동 등과 마찬가지로 민족문화 말살 정책의 하나로 저지른 일이다. 일설에는 ‘문학산 남서쪽에 위치한 푸른 숲 속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그 푸르름[靑]을 가리켜 청학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해석도 있지만 타당성이 적어 보인다. - 인천광역시사
비류대로 북쪽 청학동 안골마을 입구에서 남쪽의 청량산을 바라본다. 청량산 서북쪽 자락에 능허대 한나루가 있다.
청학동에서 옥련동으로 넘어왔다. 송도역삼거리 직전 비류대로 북쪽 보도에 인천연수경찰서 옥련지구대가 있다.
비류대로 송도역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은 비류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한나루로'로 이어가야 한다.
서해랑길은 한나루로 서쪽 보도를 따라가다 옥련중학교 방향 옥련로를 따라가야 한다. 왼쪽 뒤에 청량산 자락이 보인다.
옥련동(玉連洞)은 문학산 서남쪽 기슭에서부터 남쪽으로 청량산의 북쪽 기슭에 닿고, 서쪽으로는 황해 바다에 맞닿아 있는 동네다. 넓은 의미에서 송도(松島)로 불리기도 하는데 옥련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조정을 위해 전국 여러 곳의 동네 이름을 바꾼 때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이곳은 구한말 인천부의 먼우금면에 속해 있으면서 한진마을을 중심으로 옥골, 독배, 대암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 마을이 1914년 부천군이 새로 생길 때 대부분 부천군으로 들어가며 한데 합쳐져 옥련리가 된 것이다. 옥련리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이곳에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하는 동네 옥골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대략 지금의 송도역 앞인 옥골은 이곳에 백옥 같은 돌이 많아 생긴 이름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제대로 고증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는 오히려 옥골의 뜻을 ‘안쪽으로 들어와 있다’는 뜻의 우리말 ‘오그라지다’에서 찾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곧 옥골은 ‘오그라진 마을’, 곧 ‘오근 골’의 준말로 보는 것인데, 송도 바다쪽에서 볼 때 마을이 안으로 들어와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 인천광역시사
송도역삼거리에서 한나루로를 따라가야 하는데 길을 놓치고 비류대로 북쪽 보도를 따라 계속 올라가고 있다.
비류대로 북쪽 보도를 따라서 송도역 입구를 지나간다. 뒤쪽에 노적산이 보인다.
멍청하게도 서해랑길을 벗어나 비류대로 북쪽 보도를 따라 옥련동 옥련고개로 오르고 있다.
송도역세권구역 도시개발공사 부지조성공사가 진행 중이며, 오른쪽은 래미안 송도역 센트리폴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다. 오른쪽 뒤에 옥련국제사격장이 보이고, 중앙 뒤에 노적산이 예쁘게 솟아 있다.
서해랑길은 송도역삼거리에서 비류대로를 건너 이어가는데 멍청하게 비류대로 북쪽 보도를 따라 올라왔다.
비류대로 북쪽 보도를 따라 옥련고개로 올라가다가 서해랑길을 이탈한 것을 알았다. 되돌아가기가 멀어 옥련고개에서 비류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옥련초등학교로 가서 서해랑길과 만나기로 한다.
송도역세권 아파트 공사와 진입로 공사가 한창이다. 건너편 인천해양경찰서 왼쪽에 옥련여자고등학교가 있다.
아파트 건축 부지에 새 도로가 놓였다. 중앙 뒤에 노적산, 그 오른쪽 아래에 옥련국제사격장과 인천해군실내사격장이 있다.
잃어 버린 서해랑길을 찾아가기 위해 비류대로를 건너 맞은편의 한진로를 따라간다. 왼쪽에 서해그랑블아파트가 솟아 있다.
한진로 동쪽에 송도역 서해그랑블아파트가 자리한다.
한진로 서쪽에 송도역서해그랑블 2차아파트가 신축되는데, 1차와 마주보고 있다. 서해랑길을 찾아 한진로를 따라간다.
옥련로가 교차하는 사거리를 횡단하여 옥련현대2차아파트단지 동쪽 한진로에서 헤어졌던 서해랑길과 재회한다.
서해랑길과 재회하여 옥련현대2차아파트단지 동쪽 한진로 서쪽 보도를 따라간다.
한진로 동쪽 보도에 옥련2동 행정복지센터가 자리한다.
한진로 동쪽의 옥련2동 주민센터와 새싹공원까지의 한진로38번길은 2006년부터 주말 '차 없는 거리'로 지정돼 가족 단위 주민들의 놀이공간으로 활용되어 2018년 7월 옥련2동 주민자치회에서 옥련문화의 거리로 선포하였다고 한다.
한진로 동쪽에 옥련초등학교가 보수 공사 중에 있고, 뒤쪽에는 옥련현대4차아파트 단지 건물들이 솟아 있다.
한진로는 직진하여 끝에서 송도역삼거리에서 내려오는 한나루로와 만난다. 서해랑길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이어간다.
한진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오면 독배로40번길이 이어진다. 독배로40번길을 따라 독배로까지 이어간다.
독배로40번길에 옥련시장이 자리한다.
한진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독배로40번길을 따라 옥련시장 입구로 왔다.
독배로40번길이 독배로와 만나는 교차로에서, 서해랑길은 독배로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능허대로103번길로 이어간다.
독배로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송도전화국 앞부터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는 숭의로터리까지 이어지는 길이 5.04km, 왕복 5~8차로의 도로. 도로명은 이 도로가 지나는 옥련동, 학익동의 옛 지명인 독바위에서 유래하였다. - 나무위키
독배로40번길 서쪽 출입구에서 독배로 횡단보도를 건너 능허대로103번길을 따라왔다.
능허대로103번길 럭키아파트 정류소에서 끝의 능허대로를 바라본다.
능허대로103번길 남쪽에 능허대공원이 있다. 서해랑길은 능허대공원을 돌아서 이 길 끝의 능허대로로 나온다.
능허대터에 능허대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공원에 고대 능허대 백제사신선 모형배가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