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절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인 땅의 성전은 우리의 교육 보조 재료입니다.
아이들에게 송아지 그림을 보여주고 송아지를 가르쳤다가 송아지의 실물을 보면
그 실물을 가리키며 저것이 송아지라 가르치듯이 옛것들은 우리의 교보재입니다.
구약은 속죄제물이 좋은 제물이었다면 새 언약은 산제사가 좋은 제물입니다.
죽은 후에 다시 산 새 생명입니다. 눅15장에서 집안에 있던 맏아들과
돌아온 탕자 중에서 누가 산제사를 드린 걸까요? 돌아온 탕자입니다.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눅15:29)이 없는 맏아들이 아닙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내 아들이라고 한 둘째입니다(눅15:32) 참 회개입니다(눅15:7)
그가 바로 효자입니다. 눅15장과 16장이 연결이 되는데 16장에서 음부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호소합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나사로를 보내 그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눅16:24) 당연히 거절당했습니다. 지옥은 욕구는
그대로 있는데 자기 의지가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하니 그것도 안 되면 ‘저 세상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 저들에게 말해서 제발 여기에 오지 않게 해 달라’(눅16:28)고 말하니까
성경은 만약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눅16:31)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됩니까?
몸이 죽었다가 삼 일만에 다시 산 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담 안에
죽었다가 다시 산 자들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죽은 송장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도 그 사람의 말을 안 듣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아들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이라는 날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거든 강퍅(완고)하지 말라’(히3-4장)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립니다. 모세와 선지자로 말미암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만이 살아나는데 이와 같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아도 안 믿는 다는 겁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산 자는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을 압니다.
그런데 현재 죽어 있는 사람은 다시 사는 것이 뭔지 모릅니다. 회개가 안 되죠.
따라서 성령이 그 안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나타나기만 하십니다.
이는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회개와 세례로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이 임하셔서
다윗과 같이 하늘 문이 열려 산제사를 드리는 복을 받게 됩니다. 대단한 복입니다.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는 큰 구렁이 있어 철저하게 차단이 되어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는 죽은 자를 아는데 죽은 자는 산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에서 볼 때는 이쪽에서 그 안으로 넘어오는 사람이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 쪽의 동네에서는 누가 넘어가는지 눈을 씻고 봐도 안 보입니다.
24절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성소, 거룩한 곳, 손으로 만든 성소에 안 들어가시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들어가셨습니다. 속죄제물이 되시고 이제 영원한 중보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히브리서를 1장부터 따라오다 보면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 주님이 다윗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래야만 산제사를 드립니다.
아니면 죽은 자들로서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대용품을 드리는 제사를 하게 됩니다.
25-26절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4절에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하십니다. 그리고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하시는 겁니다.
죄를 없게 하신다는 뜻은 죄의 씨를 말려버린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서 9장에서
예언을 합니다. ‘영원한 속죄가 있을 것이다’라고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 끝에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우리 죄를 영속해 주실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 자를 부르러 오십니다.
죽은 죄인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불 심판의 대상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눈 깜박 사이에 오실 것인데 그 때에 죄의 영속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죄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끝을 냈습니다. 다만 이것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느냐 하지 못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죄 사함이 제대로 해결이
안 되었다면 들은 바 그 복음의 문제일 겁니다. 예컨대 ‘예수 믿는 우리는’ 하고
입에 달고 사는 한 목사가 자기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에 대해 자신이 없다고 하더군요.
50년 이상 한국교회에서 사역을 한 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죄 사함이 안 되어
성령이 그 안에 내주 역사하지 않으므로 보좌에 앉으신 주님과 연합이 되지 못한 겁니다.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 전체가 해방이 됐습니다. 8월 15일 날 해방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그 날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고, 8월 20일 날 들으면 20일 날
해방이 된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며 8월 25일 날 들은 사람은 그 날 그렇게 되었을 겁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괄 해결이 된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가
듣고 수용하므로 그 효력이 나타납니다. 내가 언제 듣고 내가 언제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그 시점에 따라 완전 속죄가 내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마지막 나팔 소리로 오시는
예수님이 언제 속죄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 때는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리고 이기는 사건 곧 홀연히 변화되는 사건 그것 밖에 없습니다. 죄의
영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이미 끝이 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신기한 사건으로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택한 자를 몽땅 그리스도 안으로 넘기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일망타진해 버렸습니다. 죄의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다만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니
죄인일 뿐입니다.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해도 진리의 말씀을
못 믿으면 죄 사함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드릴
이유가 로마서 7장과 같은 존재가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롬7:24)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누가 건지십니까? 주님이 건지십니다. 로마서8장 1절 바로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으로 첫 것은 점점 낡아지고 쇠하여 가므로(히8:13)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스테판역 참조)데 나아가게 되면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는 이 말씀이 실제화 되어 죄와 상관이 없는 자로서 항상 산제사를 드리게 되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주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