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리를 만나다
민금순
화순 고인돌 유적지 위쪽으로 문중 선영이 있다. 여자라는 이유에서인지 가까운 광주에 살면서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화순으로 귀농을 준비하면서 전입할 주소지가 필요했다. 선영 관리사에 딸린 집이 있다고 해서 선영에 가게 되었다.
차에서 내리자 몸집이 나 만큼인 개가 꼬리를 흔들며 급하게 다가왔다. 비교적 큰 편이라서 내심 무서웠지만 “안녕?”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턱 밑도 가볍게 만져 주었다. 그런데 그 큰 개가 난생처음 보는 나에게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앞발을 높이 들고 나에게 안기는 것이다. 마치 무척 많이 기다렸던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졸졸 따라다니며 나에게 매달려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가만히 밀쳐보기도 하고 다른 쪽으로 발걸음을 바꿔보기도 했는데 여전히 꼬리를 열심히 흔들며 떨어지지 않았다. 동행한 남편에게는 살짝 반가움을 비추고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렇게 볼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도 나를 따라서 차까지 와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떼어 놓고 오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초등학교 4학년쯤에 아버지가 개를 한 마리 데리고 오셨다. 지인이 진돗개를 주셨다며 자랑도 하셨다. 나는 평소에 촌스러운 내 이름이 싫었다. 그 무렵 드라마에 혜리라는 주인공이 있었다. 그 이름을 따서 기어코 ‘혜리’라고 세련된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우겼다. 혜리는 영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번 본 사람은 절대로 짓지 않았고, 낯선 사람이 오면 반드시 큰 소리로 짖었다. 쥐는 잘 잡았지만, 사람은 단 한 번도 문 적이 없었다. 밥그릇도 깨끗하게 비웠다. 무엇보다도 ‘혜리!’, ‘혜리!’라고 부르는 어감이 좋아서 괜스레 혜리를 불러보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위의 오빠와 아래 남동생 사이에서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천방지축으로 놀았다. 그러면서도 농사일과 집안 대소사의 일로 바쁜 어머니를 도와야 했다. 어머니는 내가 조금 더 여자답고 조신하길 바랐다. 가족끼리 다 같이 모이는 시간이란 밥 먹는 시간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밥 먹는 시간이 편치 않았다. 아버지는 밥상머리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한학은 하신 아버지는 효는 어떻고, 충은 어떻고, 그런 것들을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늘 효자 효녀의 이야기를 잘 알고 들려주셨다. 우리 오 남매는 아예 세뇌되어 지금도 앞다투어 효를 실천하고 있다.
저녁밥을 먹을 때, 내 생각에는 억울하게 야단을 맞는 일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설거지를 마치고 부엌 뒤꼍에 있는 토방에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 밤하늘이 보이는 그곳에서 별을 보며 눈물을 흘릴 때면 혜리가 다가왔다. 혜리는 혀로 눈물 묻은 손등을 핥아주었다. 목을 감싸 안으면 어찌나 따스하고 사랑스럽던지 이 세상에 내 맘을 알아주는 누군가는 혜리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을 하기보다는 그냥 ‘혜리야!’라고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내 마음을 다 알아줄 것만 같았다. 어느 겨울날, 혜리는 산에 설치해 놓은 덫에 걸려 하늘나라로 갔다. 처음으로 이별을 경험한 나의 상실감은 너무 커서 며칠 동안 밥도 잘 못 먹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혜리와 함께 보았던 별들 사이에 혜리도 있을 것만 같아 더듬어 보곤 했다.
선영에서 만난 그 개는 혜리를 닮았다. 비슷한 체형에 쫑긋한 귀와 뚜렷한 얼굴 생김새도 닮았다. ‘친정 조상님들이 당신을 보살피고 있다’는 신탁을 들은 적이 있던 나는, 선영을 지키는 개의 예상치 못한 환대에 자연스럽게 혜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 후에는 아이를 키우거나 노모님을 모시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욱 애완견을 가정에서 키울 엄두도 못 냈다. 혜리의 등장은 지금이라도 애완견을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첫댓글 시와 동시, 동화를 쓰더니 수필까지 이렇게 잘 썼네요.
대단합니다.
사람마다 나름의 애환이 있고 특정한 사연이 있고 잊지못할 기억이 있게 마련이지만
해리에 대한 추억이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마음을 나눈 해리가 곁에 있다는 생각에 푸근함도 느껴지네요.
앞으로 서로 사랑하며 행복 나눠갖기를 기원합니다.
바쁘신 회장님께서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40년 전 별이 된 혜리가 지금도 생각나곤 합니다. 그러고보면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