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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루이 14세(Louis 14)와 프랑스의 절대왕정(絶對王政) (2)
임광자 추천 0 조회 123 08.05.09 08: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루이 14세(Louis 14)와 프랑스의 절대왕정(絶對王政)(2)                     이길상

 

나. 루이 14세와 절대왕정(絶對王政 / Absolutism)

 

(1) 콜베르티슴(Colbertisme)

 

센강, 시티섬, 그리고 노틀담 사원의 야경"국가의 부강(富强)은 그 나라의 은(銀 / 貨幣)이 풍부할 때만 유지된다......

 

무역의 분량은 일정하다. 제한적인 일정량에서 프랑스의 무역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무역을 제한하여야 한다....

 

경제 생활 역시 국가가 간섭하고 규제해야 한다...."

 

이상은 콜베르티슴(Colbertisme)이란 이름이 붙여진17세기 프랑스 중상주의 경제 정책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제정책은 리슐리외로 부터시작되어 마자랭을 거쳐 콜베르에 의해서 실천 단계에 들어갔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여졌고, 이와 병행해서 프랑스 절대왕정도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를 다시 풀어보면, 프랑스의 부강(富强)을 위해서는그만큼 다른 나라가 소유한 은을 빼앗아야하고, 이런 이유에서 상업은 곧 화폐전쟁이고,화폐를 많이 보유하기 위해서는 수출을 늘리고 수입은 억제 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무역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무역을 제한해야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자면 무역에 필요한 선박 대부분을 프랑스가 차지해야 하고, 개인의 경제생활도 이런 국가 정책에 동조해야 된다........

 

이런 정책들을 이끌어 나간 콜베르는 어떤 인물인가? 프랑스의 랭스 출신인 그는 마자랭의 측근으로 발탁되었다가,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되었을 때, 재무장관 푸케가 독직 혐의로 실각한 후 재정에 관한 일을 맡게 되었다(1661).

 

합리주의 신봉자로 알려진 그는 질서와 규율(規律), 이것이 생활 철학이었다. 아침 다섯 시가되면 근엄하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어김없이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냈고, 여가를 즐긴다거나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담을싸고 살았다. 이래서 그를 대야망의 사나이, 대리석 인간, 북방인(北方人)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가 재정 일을 맡고 처음으로 실시한 것이 재정관계에 종사하는 금융업자들의 공금횡령 여부를 적발하는 특별재판소 설치, 명분은 금융업자들의 부정 방지를 들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만성적인 적자 재정을 타개하고 세수(稅收) 증대와 주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직접세(直接稅)를 줄이고 간접세(間接稅)를 늘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무역을 진흥시키기 위해서 상선(商船) 건조를 후원하고, 특정 회사에 독점권을 주어 네덜란드나 스페인의 무역 시장을 파고들게 하였고, 이들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해군력을 증강시키고 많은 군함(軍艦)도 건조하였다.

 

값비싼 수출품을 공급하기 위해서 직물과 사치품 생산을 장려하였고, 제품은 철저히 규제되었다. 이래서 고블랭(Gobelin)직을 비롯한 파리에서 생산되는 화려한 상품들은 당시 세계에서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는데, 왕립회사가 운영하고 생산했던 이들 제품에는 아낌없는 투자와 국가적인 지원에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제품이 최고라는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여기에 종사하는사람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최하위였다고 한다. 노동자의 십중팔구는 고아(孤兒), 부랑아(浮浪兒), 정치범(政治犯)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모든 것이 열악한 병영식 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이상의 가혹한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공업위주의 프랑스식 중상주의라고 할 수 있는콜베르티즘과 중세정책, 그리고 4차례의 국제 전쟁은 상대적으로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그 영향은 루이 14세의 치세기간 두 차례의 전국적인 대기근을 만나게 되었다.

 

1660에서 63년에 걸쳐 일어난 1차 대기근은 루이 14세나 콜베르의 잘못이 아니라 마자랭을 비롯한 전임자들의 후유증이라고 치더라도, 1700년에서 13년까지, 즉 1709년 매서운 추위(苦寒)를 정점으로 14년간이나 지속된 2차 대기근은 어떤 면죄부도 그들의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입품에는 높은 관세를 적용하고, 전통적인 길드 조직을 국가가 인위적으로 재편성 하였으며, 국산품 애용을 강권하는 등, 국민들의 소비생활에까지 간섭하여, 증대된 세수(稅收)로 얻어진 국부(國富)가 일부만 확대재생산의 투자재원이 되고, 대부분이 국왕의 권위와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소비되었다면, 민중의 고통은 피할 수가 없게 되고, 이런 파장은 루이 14세의 집권말기에 전국적인 민중폭동으로 이어졌다.

 

콜베르티즘의 지나친 규제는 상업발전에 적지 않은 장애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그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고 하는데, 1683년 그의 죽음으로 콜베르식 경제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경제를 크게 향상시켰다는 공로는 지금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수출(輸出)만이 살길이다. 근검절약(勤儉節約), 국산품애용, 기름 한 방울은 피 한 방울, 달러, 달러,..... 1960년대부터 후발 공업국가로 출발한 우리 나라에서 이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본 소리들이다. 산업을 일으킬만한 자본도 기술도 시설도 시장도 없었던 당시로서는 이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경제적인 체질화로 고착되어 지금까지이어지고 있다.

 

누가? 어떻게? 얼마나? 노력해서 얻은 결과인가? 라는물음표에 대한 대답은 고도의 검증을 요하겠지만, 여하튼 지금은 세계 10대 경제권에 들어 갈만한 경제 대국이 되었고, 이런 경제적인 번영은 문화적인 생활 수준까지도크게 향상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수출·입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 구조는,국제수지(國際收支 / balance of payments)에서 무역수지(貿易收支 / trade balance)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고, 적자를 면하고 흑자를 이루기 위해서는(더 잘살기 위해서는), 60년대부터 고정 메뉴로 통용된 근검절약, 국산품애용 등이 필요하겠지만,다른 측면에서는 이를 지키기 위한 각종 정부규제가 시장경제 발전에 저해 요인이 되기도 하고, 계층간 국제간의 마찰 요인도 된다고 하는데, 그 문제는 여기서 논의할 성질은 아닌 것 같고,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어떤 경제적인 변화가 있었는지 잠시살펴보기로 하자.

 

콜베르티즘이 진행된 것은 17세기 후반기로서 조선왕조에서는 현종(1660 ~ 74)과 숙종(1674 ~ 1720) 재위 년 간에 해당한다. 정치적으로는 현종년간에 서인과 남인들 사이에 예송(禮訟)논쟁이 일어났고, 숙종 초기에는 서인이 스승인 송시열과 제자인 윤증 사이에 의견 대립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이시기에 새로운 명분과 이념의 대립이 극심하게 나타났다는 반증이다.

 

고려후기부터 이룩된 중앙집권화는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더욱 굳어졌고,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 다시 360 여 개의 크고 작은 고을을 만들어 수령이라는 지방관을 임명해서 보내면, 이들은 지방관아의 행정실무자인 아전들을 통솔하여 행정과 사법 기능까지 담당하였고, 중앙의 최고정치기구로 의정부를 두고 정승들의 합의로 정책이 마련되면, 6조를 통하여 집행하게 하는 등 매우 합리적인 관료제를 운영하였으나, 지엄한 어명(御命)은 그 자체가 법이기도 했다.

 

경제적인 변화로는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주조되어(1674)그 통용의 범위가 넓어졌으며, 대동법(大同法)이 경상도까지 시행(1677)되어 전국적인 범위로 확대되었다. 화폐의 등장은 유통경제의 활기를, 대동법의 실시는 공인(貢人)이라는 새로운 산업자본가의 형성을 이룰 수도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근대 산업 및자본주의의 모체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고 보면, 여기에 대한 국내학계의 활발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같다고 하나, 지역과 문화 전통이 전혀달랐고,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개의 큰  공간을 이어줄 교통·통신이 발달되지 못했던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두고,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판별한 기준은 마련할수도 없을 것이고, 마련되었다 해도 선 듯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중앙집권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고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2) 프랑스식 중앙집권(왕권강화)

 

파리 시가지국왕이래야 다른 영주들에 비해서 소유영지를 조금 더 가졌거나, 신종(臣從)을 서약한 기사(騎士)들이 많았다는 것뿐,

 

그의명령이 통하는 곳은 자신의 소유 영지에 한정되었다는 봉건제도하의 서유럽에 대해서는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시 범위를 좁혀 루이 14세 치하에서이들간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귀족을 비롯한 유력자들이 공식적으로 정치에 참여할수 있는 길은 의회(議會)가 으뜸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의회인 전국 삼부회가 1614년국왕 루이 13세의 결혼 동의를 얻기 위해 소집되었다가 곧 바로 해산된 후, 왕실로서는이를 소집할 기미가 도무지 없었다.

 

이웃 섬나라 영국이 의회 때문에 왕실이 당하는 고통이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었을 것이다. 귀족들은 궁정의 한직(閒職)에 만족해야 했고,부루주아지들은 법관직을 돈으로 사서 마련한 고등법원이 그들의 유일한 숨통이었다.루이 14세는 이 고등법원마저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국왕이 이끄는 국무회의는 1661년, 최고 법원들이 국왕 직할의 국무회의에서 결정한 사실에 대해 절대 복종할 것을 명령했고, 1665년에는 최고법원(Cour Superine)이라는 명칭을 상급 법원(Cour Sperieur)이라는 이름으로 격하 시켰다. 그리고 1667년에는 공공연히 저항하는 법관들을 추려내서 이들을 추방해버렸다.

 

1673년 2월에는 고등법원이 국왕의 명령을 등기시킨 후에, 비로소 수정(修訂) 또는 보완(補完)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내도록 했다. 이로써고등법원은 칙령(勅令)을 거부할 수 있는 등기 거부권을 상실하였고, 국왕이 제정한 칙령을 등기하는 하수인(下手人)으로 전락하였다.

 

"너희들이 할 일은 재판뿐이다"라는 것이 루이 14세가 고등법원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왕권의 독주가 가능했던 것은 어떤 힘이 있었기 때문인가? 걸핏하면 반란으로 맞섰던 파리 시민들은왜 조용히 있었는가?

 

최고의 의사 결정기관인 3인조 최고국무회의는 국왕의 의견을 추인(追認)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이외에도 국왕은 여러 개의 전문별 국무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국왕 직속의 중앙의 이들 기관들은 왕의 귀, 눈, 팔의 역할을 맡고있었던 지방총감(앵탱당)들과 수시로 연결, 종전의 관직 보유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여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

 

1667년 3월, 루이 14세는 칙령으로 파리의 치안을 담당할 강력한 권한을 가진 경찰총감제도를 설치했다. 지금까지 파리의 경찰권은고등법원, 시청 등 세 곳의 기관에 소속된 순라(巡邏)들이 맡고 있었는데, 상호간의 권한과 역할이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말썽을 부리고 있었다. 이런 사이 파리의 치안은 문란하기 그지없었다.

 

경찰총감 아래로 각 구역별로 경찰서장을 배치하고, 이들로 하여금 예심판사의 기능까지 맡게 했는데, 당시의 경찰은 말이 경찰이지 모든것을 다 관장하고 있었다. 치안은 물론이고, 식량공급, 상공업 규제, 도로, 화재, 토목 등 일반행정을 비롯해서 풍기단속, 서적의 출판과 판매까지, 다시 여기에 예심판사의 기능까지 광범위하게 시민들의 생활에 파고들었다.

 

경찰간부들은 국왕에게 충성하는 척도로 보다 높은 실적을 올려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많은 정보원을 거느리고 항상 주변을 살피면서 감시 하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눈치가 보이면 체포하고 조사하여 그 자체만으로도 지루하고 불안하여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파리의 치안은 질서가 잡혀갔지만, 전체국민생활에 권력의 행위가 가해지기 시작했고, 공공의 복지나 미풍양속을 유지하고 지배체제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슴없이 왕권은 국민들의 가정생활이나 정신생활에까지그 촉수를 뻗어 나갔다.

 

그렇다면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은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이것은 다만 서곡에 불과했다.

- 다음 호에서 계속 -

 

 

 

 세계는지금..... Mon. 15. Oct. 2001....

서울에서는10윌 15일, 이번에는 꽁치어장 문제로 시끄러운 가운데,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방한, 그의 인형 화형식과 함께 반일 데모가일어났고....

이런 가운데 고이즈미일본 총리는 국립묘지와 옛 서대문 형무소
자리에 만들어진 독립 공원을 찾아,..... 현충탑과 추모비에 각각헌화 분향.....
골 깊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달래보지만...양국간의 현안 타결을 잘 될 것인지.....

페루의Colca 강에서는 관광객들이 계곡의 급류타기를 즐기고 있고,..이 협곡은....
화산의 정상으로부터 계단처럼 층층이 이루어진.... 그 깊이가 6마일,.....
산정에서 활강하여 아래로 내려오면서 볼 수 있는 감격적인 장관을....
안데스 인들은 이곳을 관광산업으로 육성코자 하고, 있다고 하는데..
REUTERS / Promperu / FOR STORY PERU-CANYON.....

10월 13일이른 아침, 걸프 전쟁에서 위용을 자랑했던 미국의 항공모함 데오도르루스벨트 호는
페르시아 만으로 가기 위해 당당한 모습으로 수에즈운하를 건너, 홍해로 들어서고 있다....
(Aladin Abdel Naby/Reuters) 

 

아라비아해에 정박 중인 항공 모함에서는 임무를 마치고 여명을
가르면서귀환 하는 전투기가 착륙을 서두러고...

또 다른거대한 항공모함에는 출격 명령을 기다리는 전투기들이 늘어서 있다.....

 

아프가니스탄다슈트 이 칼라 지역에서는 북부 동맹(반 탈레반 동맹) 탱크 1대가
탈레반 진영(position)을 향해 불을 뿜고 있다. 이곳에는 반탈레반전사
약 1만 5천명이 여기 저기 진을 치고 있고 전국적으로는
약4만명이 된다고..... 추정 하고 있다는데.........
영국의 읍서버지는 탈레반의 1개사단 병력이 다시
14일 북부동맹 측에 귀순했다고 보도했다.
Dasht-I-Qala,Afghanistan, Saturday, Oct. 13, 2001. (AP Photo/Misha Japaridze)

북쪽 아프가니스탄Khwaja-Bahauddin 들판에는 미국에서 떨어뜨린 식품(foot packets)을
아프가니스탄 인들이 이를 모으고(pick up)...
in a field nearKhwaja-Bahauddin, in northern Afghanistan, Saturday, Oct. 13, 2001.
(AP Photo/Misha Japaridze)

아프간난민 소년들이 물통을 실은 나귀 수레를 몰고, 물을 찾아
옛 피난민캠프인 Saranan으로 가기 위해 Quetta-Chaman 길에 들어서는
모습에서는근심이라고는 보이질 않는데, 어쩐지 옛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같다.맨발에...
October 13, 2001. REUTERS/ Zahid Hussein
 

곧 닥칠혹독한 아프가니스탄의 겨울 추위를 이들은 어떻게 보내게 될지.......

 

 

 이라크의수도 바그다드에서는 이라크 국기와
사담 후세인의 초상화를 든여성들의 반미 대모가 한창이고,...

파키스탄의국경도시 페스와르에서는 난민들을 위해
세계식량프로그램(WFP)으로들어온 곡물 하역에 열중하고 있다...
Peshawar, Pakistan, Thursday,Oct. 11, 2001. (AP Photo/Xinhua, Liu Weib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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