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의 첫 번째 도입부터 인상 깊다.
예레미야는 “살았던 대로 썼고, 쓴 대로 살았다.”는 글이다.
사람은 대부분
삶보다 글이 더 거룩하다.
그리고 생각과 글처럼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인생의 최종 목적,
성숙의 마지막 단계처럼 여긴다.
그런데 삶과 글이 같았다니......
예레미야가 특별해지는 이유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있다.
히브리 역사상 가장 격변의 시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다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던 시기이다.
그는 이 위태롭고 공포스러운 시대에도
하나님의 진리 앞에 정직했다.
기도했고,
설교했고,
고초를 겪었고,
싸웠으며,
끝까지 견디어 냈다.
글을 쓰고,
믿음을 지켜 가면서 말이다.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외부에서는 조롱과 폭풍 같은 공격이 있었고,
내면에서는 외부의 도전과
스스로의 의심으로
몸과 마음과 감정이
극한까지 내몰렸을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고투를
숨기지 않고 글로 남겼다.
“더 이상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면,
말씀이 제 뱃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며
뼛속까지 태웁니다.
참아 보려고 했지만,
이제 지쳤습니다.
더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 등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기, 사면초가 운운했던 자다.
저 자를 잡아라!
신고하여라!’
전에 친구였던 자들이,
지금은 제가 바닥에 고꾸라지기만을 기다립니다.”
그의 고투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세상이 골치 아픈 이유는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거룩을 말하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엮이기 싫어
기계적 중립이나 양비론을 주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진리도 아니고,
사실도 아니며,
왜곡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마치 정의를 위해 고난받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옹호한다.
기계적 중립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왜곡된 현실을
묵인하거나 편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려 있지 않으면
세상은 결국
요지경이 되고,
아노미가 된다.
머리말에서는 이런 현실을
'하나님께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의 상황'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현실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1.
그동안 상상했던 하나님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을 만나
그 과정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되는가?
2.
아니면 하나님을
헌신짝 버리듯 떠나가는가?
3.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무너진 신념과 환상을
끝까지 붙잡으려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가?
얼핏 보면
2번이 가장 심각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3번에 주목하게 된다.
2번은 욕망을 따라 떠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너짐과 바닥 경험이
회개와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반면 3번은
자기의 신념 체계와
결정권 자체가
이미 오염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너졌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사실보다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붙드는 모습.
그래서 나는
어설픈 종교적 확신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예레미야는
격변의 시대,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참되고 정직한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좋은 길동무가 되어 줄 것 같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렘 31:3)
이 한 문장이
예레미야 전체를 읽어 가는 동안
끝까지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마음처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