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의 뿌리 신라의 '걸사표'와 닮은꼴 |
미국 신봉자인 이승만도 사대주의자의 초라한 처지를 절감한 사건 |
|
|
망국적 사대주의는 반드시 토사구팽당하고 후대를 고통스럽게 한다! [네티즌칼럼] '걸사표(乞師表)'란 병력동원과 대리통치을 구걸하는 상주문을 말한다. 사표(師表)는 병력을 동원할 때 임금에게 올리는 표(상주문)다. 관복과 제도를 당나라식으로 바꾸고 김춘추의 호까지 당나라 이세민의 호(태종)로 바꾼 신라에게 있어 임금은 당나라 왕이였던 셈이다.
▲ 김유신 영정. 신라 42대 흥덕왕 때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어 죽어서도 왕까지 되는 영광을 누렸다. | | 신라는 553년 고구려와 백제가 조여들어오자 당나라에 도움을 구걸하는 소위 걸사표를 작성해 보낸다. 그 이전까지는 없던 일이다. 고구려가 독립 연호인 영락을, 그리고 신라도 건원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사대 굴욕적인 외교가 원래부터 우리 민족의 숙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형성된 사대주의의 유전인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전세계가 자주 독립 국가임을 천명해 나가는 21세기 대낮에 우리나라 한나라당이 다시 걸사표를 꺼내고 있으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논의 중단을 요청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한나라당 2차 방미단 단장 이상득 부의장은 지난 9월 20일 워싱턴 특파원들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우리가 옛날에 중국에 죽지 않으려고 조공도 바치고 책봉도 받아가면서 살아남지 않았느냐"면서 "(미측 인사들이 만나기) 귀찮다고 해도 국익에 필요하면 귀찮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람이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608년 신라 지도층은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쳐달라고 출병을 요청하는 걸사표를 작성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4 신라 본기 진평왕편 30년 조의 기록이다. 14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2006년 대한민국은 미국을 향해 전작권을 제발 가지고 있어 달라고 걸사표를 던졌다.
비굴한 굴욕 외교는 대를 잇는다. 1894년 2월 전봉준의 농민 혁명이 삼남 일대를 휩쓸고 드디어 북상해 올라오자 임금은 밤중에 중신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당시 병조판서(현 국방장관)는 “전세가 호대하여 우리나라 군대로는 초멸할 수 없으니 청병(淸兵)을 청차(請借)하면 곧 일전으로 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아뢴다. 21세기 대한민국 전직 국방장관의 발언들과 어쩌면 이렇게도 닮은 것인지.
중신회의를 주재하던 고종은 “외병은 초청하지 않겠으나 우리나라 조신 중에는 도시 호령을 발하고 명령을 시행할 자가 없으니 청나라 원세개로 하여금 전주 등지로 하왕케 하여 순변사와 초토사의 군대를 지휘케 함이 좋겠다”고 말한다. (김의환의 『전봉준전기』159쪽) 병조판서와 임금의 대화는 그들이 이미 썩은 고목이고 사대주의가 체질화되어 자기 말을 객관화 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상일(한신대 전 교수, Korea Project Director, Claremont Center for Process Studies)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한 신라의 걸사표
수나라 문제가 중원을 통일하자 그 5년 뒤인 진평왕 16년(594년) 신라는 조공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굳건한 군사동맹과 유대관계를 맺는다. 이는 수 문제가 고구려를 치겠다고 위협한 서한을 고구려에 보낸 직후이다. 물론 문제의 1차 공격(598년)은 완전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문제의 뒤를 이은 수양제가 2차 공격을 시도한 것은 607년이다. 이 희소식(?)에 희희낙락한 신라 지도층이 611년 걸사표를 작성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핵 문제로 북한을 치겠다고 협박한 것을 빌미로 대한민국 모정당이 미국에 걸사표를 던진 것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고구려와 발해는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민족의 대동단결을 강조했거늘 반도 남단의 신라는 외세의 등을 업고라도 동족을 멸망시키려 들었다. 같은 겨레끼리의 갈등을 외세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유전인자는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신라의 걸사표를 받은 다음 해인 612년 수나라는 30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한다. 그 당시 300만 대군이란 엄청난 수다. 이만한 대군을 이끌고도 도저히 자기들 혼자의 힘으로는 고구려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수나라에게 신라의 걸사표는 그야말로 희소식이었다.
중국이 지금 고구려를 자기들의 지방 정권이라고 하는데 세계 역사상 중앙 정부가 지방 정부를 공격하다 왕의 눈이 빠지고 지방 정부에 거의 전멸을 당한 역사는 드물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후진타오 정부가 신라는 왜 지방정부라고 하지 않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신라야말로 지금 대한민국과 같이 그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여기서 동북공정의 논리가 허구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고구려는 당당하게 맞서 수나라 대군과 싸웠으며 당당하게 이들을 다 격퇴하였다. 수양제가 어떤 수모를 당했고 당태종이 어떤 말로를 맞이했는가는 잘 아는 역사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는 그로 인해 멸망하고 이어 등장한 당태종은 한 눈을 잃는 수모까지 당한다. 한나라당 방미단의 한 의원은 "미국과 동맹관계인 나라 가운데 야당이 이처럼 미국에 찾아와 외교를 하는 경우가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일본이나 호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원웅 국회 전 통일외교통상위원장은 "21세기판 모화(慕華)주의자들이 동맹과 예속을 분별하지 못하는 서글픈 사대주의로 나라 망신 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날 사대주의에 찌든 지배층이 조선의 안위와 중국의 안위를 분별 못하고 자주적 인식을 결여해 병자호란을 자초했다"며 "자국 국익에 충실한 외국군 장성 등에게 전시작통권을 되받아가 달라고 애원하는 건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 않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 부의장의 위 '조공 외교' 발언에 대해 "그러면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연개소문도 바보짓을 했단 말이냐"며 "살아남기 위해 일본의 식민 지배를 환영한 이완용도 지하에서 '나도 당시 같은 생각이었다'고 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위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도대체 우리가 지금 6세기에 사는지 21세기에 사는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이다. 이런 한국 여야 국회의원 사이에 오가는 사대주의 논쟁은 신라 지도층이 걸사표를 쓸 당시에도 있었다. 원광법사나 원효대사는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김부식이 자세하게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지금 못지않은 구걸 외교에 대한 찬반 논쟁이 있었을 것이다. 원효대사가 사실 경주를 떠나 걸인의 옷을 입고 민초들 속에 숨어 스스로 ‘화쟁거사(和諍居士)’라고 한 이유도 바로 신라 권부 중심의 사대주의 근성에 몸으로 저항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걸사표는 사실상 통수(帥)권을 구걸한 것이다. 자주적인 힘이 없으니 나라를 온통 맡기겠다는 것이 아닌가? 고종과 이승만 정권으로 이어진 걸사표의 내력
▲ 1950년 9월29일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 수복식. 이승만 뒤로 맥아더 장군이 버티고 앉아 있다. | | 한나라당의 걸사표는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굴한 굴욕 외교는 대를 잇는다. 1894년 2월 전봉준의 농민 혁명이 삼남 일대를 휩쓸고 드디어 북상해 올라오자 임금은 밤중에 중신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당시 병조판서(현 국방장관)는 “전세가 호대하여 우리나라 군대로는 초멸할 수 없으니 청병(淸兵)을 청차(請借)하면 곧 일전으로 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아뢴다. 21세기 대한민국 전직 국방장관의 발언들과 어쩌면 이렇게도 닮은 것인지.
중신회의를 주재하던 고종은 “외병은 초청하지 않겠으나 우리나라 조신 중에는 도시 호령을 발하고 명령을 시행할 자가 없으니 청나라 원세개로 하여금 전주 등지로 하왕케 하여 순변사와 초토사의 군대를 지휘케 함이 좋겠다”고 말한다. (김의환의 『전봉준전기』159쪽) 병조판서와 임금의 대화는 그들이 이미 썩은 고목이고 사대주의가 체질화되어 자기 말을 객관화 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라당 방미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동포간담회를 갖고 "그동안 만난 인사들로부터 한미동맹이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는지를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전여옥 최고위원은 "(그동안 만난 미측 인사들 중 상당수가 한국에서) 반미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보고 '모든 게 끝났다고 느꼈다'고 했다"면서 "특히 대북 인식에서 한미 간 차이가 벌어지는데 대해 (그들은) 한국인만큼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고 말했다. 줄줄이 대를 잇는 사대 굴욕 외교는 이렇게 점철되고 있다.
그러면 고종이 청병을 청한 결과 과연 나라의 안위가 유지되었던가? 결코 아니다. 조선이 청나라에 통수권을 청하자 일본이 상관하며 간섭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1894년 청일전쟁이 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의해 궤멸 당하고 만다. 일군은 총구를 남에서 북으로 돌려 조정으로 올라와 민비를 시해하고 결국 우리 국군 통수권은 모두 일본군에 넘어간다. 그 다음 결과는?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합방, 1918년 고종 사망(고종도 일본의 시해라는 것이 정설임). 외세를 끌어들인 최대 피해자는 결국 고종 자신이었다.
이러한 사대주의 유전인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의 피 속에 용해되어 흐르고 있다. 한나라당 방미단은 "미 국무부와 국방부의 실무관계자,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 등 의회 관계자, 한국문제 전문가 등과 접촉하고 허드슨연구소에서 세미나를 개최해 그들의 입장을 전해 듣는 등 심도 있는 의견을 나눴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과연 그들이 바라는 대로 우리 역사가 그렇게 답을 줄 것인가? 이승만이 어떤 경우를 당했는지 살펴보자.
이승만은 1950년 7월 15일 전시 작전권을 미국에 넘겨주면서 “...본인은 현 작전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며... 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라고 했다. 한국은 이승만이 말하는 '영광' 속에 반세기를 살아왔다. 이승만은 국회 동의도 국민들의 의사도 물어봄이 없이 종이 한 장으로 이 모든 것을 대신하였다. 우리 군의 작전권이 미국에 넘어 간 과정은 이러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말은 부메랑이 되어 두 달 후에 자신에게 돌아왔다. 전세가 반전하여 인민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이승만은 의기양양하였고 기세등등하여 통일이 다 되어 북을 당장이라도 접수할 태도였다. 그러나, 그러나, 보라. 1950년 11월 25일 혜산진과 청진까지 올라간 미군은 38선 이북 수복지구에 군정을 실시할 준비를 하였다. 이승만은 수복지구가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에 귀속될 줄로만 알았는데 느닷없이 미군정이라는 말이 나오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국토회복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1950년 10월 15일 평양을 방문하기를 원했으나 미국은 이승만에게 대통령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방문하라고 통보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과인가. 아무리 철저한 기독교 감리교 장로요 미국 신봉자인 이승만도 이 순간만큼은 사대주의자의 초라한 처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이 작전권을 넘겨준 부메랑은 참혹했다. 작전권을 건네준 단 두 달 만에 그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게 외교의 천재라던 이승만이 왜 작전권을 미국에 넘겨주었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이승만은 결코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정권 안보만 안중에 있었을 뿐이고 한배를 탄 기득권자들의 위기의식만이 큰 문제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정통성 없는 친일 매국노들이 포진한 정권, 사대주의 정권의 유지가 이승만에게는 중요했던 것이다.
면면히 이어지는 걸사표를 요구하는 세력들의 본질 그리고 그 결과를 이승만은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걸사표, 그것은 사대주의자들의 전매특허다.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 [역사비평]출세에 눈 먼 김유신.이승만의 사대주의
국내 유학자들은 사대주의를 미화하고 국사학자들은 사대주의를 합리화하는데 급급하다. 유학자들은 중국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 숭상한 것이라며 미화하고, 국사학자들은 신라의 사대주의 외교가 아니었다면 우리 민족은 오래 전에 몽고족이나 만주족 같이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조선은 명나라가 망해 없어졌는데도 청을 멸시하고 송장의 시체를 부등켜 안으며 명을 그리워했다. 모두들 명의 위대한 유교 문화인 주자가 만들어 놓은 사상 체계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자가례(주자가 유가의 예법의장에 관해 상술한 책)를 맹목적으로 도입하는 과정에서 조선 사회 전반은 경색되고, 반상 차별은 물론 여성 차별도 야기했다.
한편 국사학자들은 고구려가 통일을 했더라면 하는 가설은 아예 설정조차 안하고 신라 통일을 합리화하고 있다 . 이 점만으로도 이들은 경주 중심의 김부식 사관의 추종자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대주의는 본심을 숨기고 자신들의 의도를 미화하고 합리화 함으로써 그 정체를 쉽게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김유신이 사대를 한 진짜 이유는?
사대주의는 기득권층에게 자기 안전 장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승만과 주변 친일파들, 고종과 주변 중신들, 신라 경주 중심의 기득권층들, 현재 야당 안에 포진한 이승만 자유당 때부터 대물림한 기득권층들이 바로 사대주의의 담당자들이다. 이들은 개인 출세욕이 국가나 민족의 이익보다 앞서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무엇이든 하게 만드는 게 바로 사대주의이다. 그러나 사대주의자들의 이익은 민중의 이익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민중들은 언제나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살아오며 이 나라의 역사를 지켜왔다. 동학 농민전쟁의 주인공인 농민들이, 지금 산업 현장에서 일 하는 의식있는 노동자들이 그러하다.
그럼 지금부터 김유신의 사대주의 배경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하여 우리 주변에 김유신과 같은 인간들이 있는지도 살펴 경계해야 할 것이다. 신라 지도층이 걸사표를 당에 보낸 612년(진평왕 34년)은 사대주의의 원년이라고 할 수 있다. 걸사표를 작성한 주체는 김유신과 김춘추다. 김유신의 출신 배경을 알면 그가 얼마나 출세를 갈망 했는지, 왜 그렇게 망국적 굴욕 외교를 하면서까지 사대주의 행각을 벌렸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출세욕이 사대주의의 씨앗
보통 김유신을 경주 출신으로 알고 있으나 그가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진천이다. 그는 진천읍에서도 오지인 계양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서현은 진평왕 16년(594년)에 만노군 태수로 진천에 부임한다. 진천이란 어떤 곳인가? 진천은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변 경지대이다. 지금도 이 일대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나오고 있다. 진천은 신라의 북방 한계선이었으며 김서현은 이곳의 수비대 대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수비대장의 자격으로 변방으로 보냈다는 점은 신라에 대한 그의 충성이 보통 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가 안보의식이 남다르지 않으면 이런 위치에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신라에 대한 그의 확고한 정신은 출신배경에서도 분명히 증명된다. 김서현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仇衡)왕의 손자이다. 금관가야는 신라에 패망한 나라로 김유신의 가문은 패잔국의 후예들인 것이다. 때문에 김유신과 그의 가문이 신라의 상층부에 올라가자면 경주 지도부에 웬만큼 충성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다. 김유신 가문은 금관가야를 부흥시키기 위해 신라에 저항하든지 아니며 신라 지도층에 개같이 충성하든지 하는 양자 선택의 길 외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김유신 가문은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결국 이러한 충견같은 기질, 즉 사대주의 기질은 가문의 배경에서 이미 명확하였다. 후에 그가 당나라에 그렇게 비굴한 외교를 편 것도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김서현은 한 건 잡아 신라 지도 층에 눈도장을 찍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산골 계양마을에서 무술 연마로 한 건 잡는 일 외에 출세가 어렵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았다. 그가 문인으로 출세 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김서현의 아버지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고, 그의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아양공주였다. 백제 성왕은 백제를 가장 부흥시킨 왕이 아니던가. 이런 왕이 김유신 일가의 손에 전사하였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서현은 대원신동이란 신분이었다. 대원신동도 진골 정통에 버금 가기는 하나 경주의 주류는 아니었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의 아버지는 숙흘종이며, 숙흘종은 법흥왕의 동생 갈문왕의 아들이다.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가 진흥왕과 결혼하여 낳은 딸이 만명부인이다.
김서현과 만명부인은 길에서 우연히 만나 눈이 맞아 중매도 없이 야합하여 김유신을 낳았다. 이런 야합에 의한 결혼을 만명의 어머니 만호태후가 허락할 리 만무하였다. 그 이유는 서현이 진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명을 벌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현은 약탈혼즉 문을 부수고 들어가 만명을 데리고 도망쳤다. 이에 진평대왕은 딸이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서현을 만노군 태수로 임명 하게 된다. 그러나 서라벌로 돌아 올 수는 없는 몸이었다.
출세에 눈 먼 김유신과 이승만
이런 가문의 배경을 김유신은 타고났다. 주변부 인물로 태어난 김유신이 경주 중앙 무대로 진출하려는 욕망은 너무나도 철저한 것이었다. 김유신은 한 건을 하지 않고서는 자기 신분으로 경주 지도층인 진골의 숲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계책을 세워 김춘추와 처남매부 간의 관계를 강고하게 맺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누구 보다 앞장서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려 혈안이 되었다. 이는 그의 조부 때부터 내려온 '가문의 부흥' 전략과 맥을 같이 한다. 드디어 김유신은 그의 할머니 만호 태후로부터 “너는 진실로 내 손자”라는 격찬을 받는다. 서현과 만명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던 만호태후도 김유신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마음을 돌린 것이다. 김유신은 이런 칭찬을 들을수록 더욱 분발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것이 기록으로 남은 김유신의 행각 일부이다. 김유신 같은 인간의 유전자는 진평왕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역사 속에 그 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사대주의는 이렇게 인간의 출세욕에 의하여 형성되었고, 그 혈맥은 굳건히 우리 역사의 역사관이 되고 역사 철학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대주의 하는 것은 당연하고 조공 외교가 왜 잘못된 것이냐며 뻔뻔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세욕과 개인의 기득권 쟁취를 위한 야망과 야심이 사대주의의 배경을 이룬다. 우리는 김유신과 같은 사대주의 피를 이승만에게서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여운형의 좌우합작 나라를 한 치도 사랑하지 않으며 반쪽짜리라도 대통령이 되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민족이 둘로 갈라지건 말건 정권을 잡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친일 매국노들을 자기 기반으로 삼았다. 결국 그 때 형성된 매국노들은 남한 사회에서 기득권층이 되어 보수의 이름으로 행세를 하고 있다.
이승만은 김유신과 같이 동족을 토벌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지연과 전명운 두 열사의 법정 영어 통역을 부탁받았으나 두 열사가 테러리스트라고 통역을 거부 했다. 그 당시 교민들이 돈을 모아 미국 동부에서 서부까지 비행기 값까지 주며 이승만을 초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하고 동부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당시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에 유학가 있던 신흥우가 통역을 대신하였다.
이승만은 우리 땅에 친미 사대 주의를 심은 장본인이다. 그는 안중근 그리고 백범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지목하고 자기와 차별화하였다. 그는 국군 작전권을 1950년 미국에 넘겨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어찌 김유신의 사대주의 유전인자가 이승만 한 개인에게만 흘러들어 갔겠는가? 사대주의는 21세기 백주 대낮에 백악관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기웃거리며 나라의 운명을 통째로 내맡기려는 모든 정치인들의 혈맥 속에 흐르고 있다.
우리는 사대주의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그런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순수한 민족정기로 무장한 지도자가 선출되어야 오랜 사대주 의 고질병을 치유할 역사적 기회를 만들 수 있다.
|
|
|
기사입력: 2009/11/07 [08:20] 최종편집: ⓒ pluskorea | |
첫댓글 역시 혜도짱 님은 혜안이 있어요. 그래서 닉도 慧道인가...?
일단 삼국이 아닌 사국시대였다는 것을 먼저 학생들과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신라에 의한 통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 역시 알려야 합니다. 사국이 되어야 일본의 본국이 어디 인지 정확히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신라의 최초 지배층(성골, 진골)들은 우리 민족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민족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자기들 민족의 살 길만을 찾던 무리들이죠... 지금도 그들의 후예들이 국가와 민족은 내팽게친 체로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차떼기 할 때 완전히 갈아 엎어 줬어야 하는데, 참으로 국민들이 우매합니다.
적극 공감하는 뜻이 된다 신라가 우리민족의 정통으로 삼는것은 잘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