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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여름휴가가 시작되면 가는 곳이 있다. 설악산이다. 그것도 등에 잔뜩 짊어지고....... 나는 올해에는 이렇게 무겁게 짊어지고 설악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작년 가을부터 허리에 문제가 생기면서 무거운 것을 짊어지지 말라는 진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몸은 결정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다소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 가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조금씩 회복되면서 올해도 여전히 설악 하계훈련은 계획되고 그 날이 되어 드디어 떠난다.
평생 동안 때마다 설악에 들어가지만 해마다 들어가는 팀은 다르다. 올해도 작년과 같이 산악동호회인 <산에 대하여> 친구들과 같이 들어간다. 친구들과 같이 가는 것은 다른 이들에 비해 부담이 적으며 다소의 실수도 용납되기에 많이 편하다. 작년 설악 친구들 중에 전현수, 이성표가 빠지고 대신 김경배, 이형섭, 반영환이가 참석했다. 하지만 여전히 취사반장은 장익진이고 총무는 전종성이고 오락, 사고뭉치는 문성호다.
우리는 산행 당일부터 폭우가 쏟아진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설악에 들어왔다. 모든 악조건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특히 문성호......ㅋㅋ)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다 떼어 붙여 꼬질꼬질 들어온 것이다. 그만큼 설악은 우리들에게는 대단한 장소인 것이다. 산에서 비를 만나든 무엇을 만나든 나로서는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기상 악화일 때 설악에 입산이 금지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설악에 입산만 금지되지 않는다면 무조건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일단 들어가면 모든 것은 자연에 맡기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애시당초 우리들의 목적은 자연 속으로의 몰입이었기에, 들어오고 난 뒤에는 모든 것을 자연 현상에 따라서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설악에 들어왔다.
나와 단미는 15일 밤에 경주를 출발해 강릉에서 자고 아침에 속초(요즘은 길이 좋아 강릉-속초까지 35분 걸렸다)를 거쳐 용대리로 왔고, 서울 친구들은 아침 7시 경에 잠실에서 만나 경춘고속도로를 통해서 용대리로 날라왔다. 그리고 바로 입산 준비에 들어간다. 1년 만에 만나 설악에 들어가는 친구들이지만 작년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들을 하고 있다. 1년 만에도 사람들은 많이 바뀐다. 더 늙은 사람, 더 젊어진 사람, 더 활기차게 보이는 사람, 늘어진 사람.......생활에서 온 모습들이겠지.
입산 준비를 대충 마치고 출발 직전에 기념촬영을 위해 나란히 섰다. 물론 촬영은 유일하게 우리들의 국민학교 동기가 아닌 단미가 한다.
산악동호회 <산에 대하여>의 2010 하계훈련지는 작년에 이어 여전히 설악산이다. 애시당초 산행 당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기에 산행지를 오대산 소금강과 가리왕산으로 잡았지만 친구들의 한결같은 바램은 설악이었다. 한마디로 '못 먹어도 Go!' 였다. 일단은 설악에 들어갈 수 있으니 들어가고 난 뒤에 판단하자는 의견들이었다. 설악은 그 만큼 좋은 곳인 것이다.
위는 좌로 부터..........전종성(총무), 강대춘(산행리더), 장익진(장비, 취사반장), 김경배(수송), 이유경(식량), 이명자(기록), 반영환(수송), 이형섭(수송), 문성호(서브리더), 그리고 위에는 없지만 촬영자는 김단미(의료)이다. 자! 2010년 설악 하계훈련, 출발!
인제 용대리에서 백담사 셔틀버스를 타고 약 10km를 달려 백담사로 들어왔다. 버스에서 내려 백담사 앞에서 출발 준비를 하는 대원들.
일부는 백담사를 구경하기 위해 경내로 들어간다. 과거 전두환 대통령이 몇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출사하면서 백담사에 시주한 돌다리 수심교이다. 이 다리 덕분에 초라하던 백담사가 큰 절로 거창해 졌지만 오히려 예전의 징검다리가 더 정겹게 느껴져 그립기만 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계시던 곳으로 유명했던 백담사가 이제는 전두환 대통령의 유배지로 더 유명하니 가치가 순간순간 쉽게 뒤바뀌는 오늘날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또 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용대리에서 백담사 지나서까지 흐르고 있는 백담계곡이다. 올 여름은 유난히 가물어 이 넓은 계곡에 물이 말랐다. 하지만 조금 있어 보라. 당장 오늘 오후가 되면 이 계곡에 물이 가득 찰 것이다. 오늘 오후에 중부지방에 엄청난 장마비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설악산>의 저자
설악산이 금강산보다 덜 유명했던 것은 교통 문제 때문이었다고 언급한다. 금강산은 교통이 편리해 삼국시대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설악산은 그렇지 않았다. 첩첩이 이어지는 산길을 타고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한계령과 미시령을 지나는 지금의 도로가 열린 것은 각각 1971년과 1989년으로 최근의 일이다. 그것도 비포장으로........ 44번 국도의 확장과 미시령 터널 관통으로 지금은 가기가 더욱 수월해졌지만. 예전에는 교통뿐만 아니라 산세도 접근을 까다롭게 했다. 잦은 입산 통제와 조난 사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설악산은 전문 산악인도 혀를 내두르는 산이다. <택리지>의 이중환은............... “설악은 돌산과 돌샘으로 이루어져 깊은 골짜기와 위태로운 봉우리가 겹쳐진 묏부리”..............라고 묘사했다. 또 송강 정철은.................‘설악이 아니라 벼락이요, 구경이 아니라 고경(苦境)이요, 봉정이 아니라 난정(難頂)이구나’...............라고 익살스럽게 꼬집었다.
백담사는 내설악(강원도 인제)에서는 이름이 높은 절이다.
당연히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백담사는 신라 647년(진덕여왕)때 자장이 창건하였는데, 그 후 여러번 불타고 중창하기를 거듭해 왔다. 명칭도 한계사-운흥사(신라 원성왕)-심원사(고려 성종)-선구사(조선 1934)-영축사(1447)-백담사(1456)로 바뀌어 왔다.
1772년(영조) 다시 불타버리자 1775년 최붕, 태현, 태수 등이 초암을 짓고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다시 심원사라 하였다가 1783년(정조)에 절 이름을 다시 백담사로 바꾸었다. 근대에 이르러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였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전두환 대통령이 유배생활을 여기에서 하게 됨으로써 더욱 유명해 졌는데 그 당시에 절의 시설들이 많이 증축되어 오늘날은 예전의 모습과는 달리 매우 화려하게 변하였다.
현재 백담사의 부속암자로는 봉정암, 오세암, 원명암 등이 있다.
백담사로 들어간 친구들이 한동안 나오지 않아 혼자서 먼저 출발한다. 지금부터 2시간 여는 평지길을 걸어야 하니 먼저 들어갈 판이다. 1시간 가량의 발품을 팔고 나면 영시암이 나타난다. 여기까지가 편평한 길이다.
영시암을 얘기하자면 약간의 역사를 얘기해야 한다.
조선조의 당쟁은 때로는 나라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많은 선비들이 사화(士禍)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갔고, 화를 피하기 위해 첩첩산중으로 피했다. 숙종16년(1689)에 있었던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고 요녀 장희빈이 중전으로 승격되면서 정권이 노론에서 남인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사건이다. 숙종의 비 민씨는 아기를 낳지 못해 늘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후궁 장희빈은 아들을 낳았고, 그아이가 원자(原子)로 책봉되었다. 장희빈을 사랑하던 숙종은 그녀를 왕비로 승격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이 반대하였고, 그래서 숙종은 이들 노론들을 숙청하고 남인을 등용했다. 희빈이 낳은 아이의 세자 책봉 문제가 나오자 노론의 총수 송시열은, "임금의 보령이 이제 겨우 29세시고 중전은 23세로 아직 젊으신데, 후궁의 아들로 세자를 책봉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다." 라고 극구 반대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말을 묵살하고 그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정권을 남인에게 넘긴 것이다. 숙청되어 사약을 받은 노론 중에 김수항(金壽恒)이 있었다. 그의 아들 김창흡은 어지러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를 하겠다고 이 깊은 내설악 계곡에 암자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시암이다. 그런데 이 암자를 세운지 6년이 지난 어느날 그의 하녀가 호랑이 한테 물려죽고 만다. 이후 김창흡은 암자를 떠나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혼란한 시대의 뒷면에 존재하는 슬픈 사연이다.
거의 20분을 기다렸나? 맨 먼저 전종성과 단미가 영시암으로 들어오고 있다. 멀리서도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 뒤로 패잔병(?)들이 속속들이 들어온다. 맨 앞에 장익진, 그 다음이 김경배................한명은 없네? 저 멀리 화장실 뒤에 있는 자가 문성호인가?
영시암의 본당이다. 조선조 숙종 15년 삼연 김창흡이 기사환국때 아버지 김수항이 죽임을 당하자 이곳에 들어와 정사를 짓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맹세(矢)의 의미로 영시라고 하였다고 한다.
永矢庵
내 생애에 괴롭고 즐거움이 없으니
속세에서는 모든 일이 견디기 어렵네
늙어서 설악에 투신하려고
여기에 영시암을 지었네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여 설악에 드는 등반객이 적다. 여기 보이는 사람들이 전부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 사람들은 오늘 산행 중 폭우속에서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잠시의 휴식 뒤 영시암 출발!
영시암에서 30분 쯤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편이 오세암-마등령 길이고, 오른편이 수렴동대피소-구곡담계곡 방면이다. 우리는 오른쪽 길로 간다.
수렴동대피소를 향해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있는 대원들.
드디어 수렴동대피소가 보인다. 우측 계곡은 이미 백담계곡이 아니다. 수렴동계곡이다. 수렴동의 렴자는 '簾' (발렴)으로 그 모습이 길게 늘어진 발과 같다는 금강산 수렴동 계곡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수렴동대피소는 중요한 곳이다. 여기서 길이 4갈래로 갈라지는데 왼편으로 오세암 길, 가야동계곡 길, 그리고 대피소 뒤 시작되는 산줄기가 유명한 용아장성릉, 맨 우측이 구곡담계곡 길이다. 우리들의 계획은 우측 구곡담계곡으로 들어갔다가 대청봉 치고 다시 내려올 때 가야동계곡으로 내려와 이 수렴동대피소로 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오늘부터 폭우라는데 계획대로 될까? 가 의심스럽다. 가야동계곡은 천혜의 비경지대이지만 비가 오면 들어가지 못한다. 계곡의 형태가 한마디로 큰 봅슬레이 홈 트랙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공룡능선과 용아장성릉이 그 사이에 파 놓은 긴 협곡인 셈이다.
수렴동대피소를 지나 이제 구곡담계곡이 시작된다. 원래 설악의 최고 클래식 코스는 백담사-구곡담계곡-대청봉-천불동계곡-비선대............이다. 이 코스가 내외설악을 관통하는 종주코스인 것이다. 적어도 백두대간 개념이 제시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구곡담계곡으로 속속들이 들어오는 대원들. 이유경이는 작년과 걸음걸이가 달라졌다. 하체가 뒤로 좀 빠진다. 1년만에 몸의 균형이 달라졌나?
구곡담계곡 우측으로는 서북능선 사면인데 이 속에 비경지대가 깔려 있다. 익히 알려져 있는 백운동계곡, 큰귀떼기골, 작은귀떼기골, 가는골, 대승골, 흑선동계곡....등등의 비경지대가 이 속에 있다.
전부 무엇을 쳐다 볼까? 아마 앞에 큰 경치가 나타난 모양이다.
구곡담계곡 왼편 저 위 능선으로 유명한 용아장성릉이 늘어서 있다.
용아장성릉 능선이지만 저게 다는 아니다. 저건 아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여전히..............
지도상에는 구곡담계곡에서 만수폭포, 용손폭포, 용아폭포, 쌍용폭포 등이 표시되어 있지만 쌍용폭포 말고는 어느 폭포가 어떤 폭포인지 알 수가 없다. 구곡담계곡에는 엄청나게 많은 폭포와 소, 담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위의 폭포도 무슨 폭포인지 모른다. 이정표도 없다. 하긴 일일이 알아서 무엇을 하겠느냐? 구곡담은 말 그대로 아홉개의 구비구비 구부러진 골짜기에 수많은 담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더냐!
일일이 경치가 사진에 다 나오지 않는다. 사진이 찍어내는 반경이 너무 좁다. 그저 카메라를 들이대고 마구잡이로 눌러댈 뿐이다. 아마 조금 있다 비가 쏟아지면 카메라로 촬영도 못할 것이니 부리나케 찍고 보자.
이런 沼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그저 뛰어들어 수영하고 싶은 마음 밖에...............
규정 지역 외에 취사 금지지만 그게 그렇게 되냐? 종성이는 가능하면 규정을 지키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壯子의 말씀 중에 物我一體라! 나는 자연 속에 들어가면 나도 하나의 자연속의 species(種)가 되어 나도 자연 그 자체가 되니,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니 나를 위시한 그 모든 것이 바로 자연이라! ㅋㅋㅋ 말이 되냐?
물개 문성호가 물에 뛰어 들어 시체 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에 내가 먼저 물에 뛰어 들었다. 아무도 촬영해 주지 않느니 사진이 없을 뿐이지............
라면을 끓인다. 무릎 관절이 좋지 않는 문성호 배낭에서 첫번째 식량이 나온다. 첫 식사는 이른바 수제비라면이다.
우리 10명중 여성 3명을 빼고 7명이 식량봉지를 7개로 나누어 전부 하나씩 맡았다. 각 봉지는 무게가 거의 같다. 그러나 꺼내는 순서는 다르다. 다리 관절이 시원찮은 문성호가 첫번째 식사 봉지를 꺼낸다. 그리고는 차례로 꺼내면 되는 것이다. 물론 내일 점심인 맨 마지막 봉지는 내 차지다. 결국 개봉도 못하고 경주까지 다시 가져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전종성이 짐이 많이 무거웠을 것 같다. 코펠, 버너에 막사후라, 밥그릇 10개, 가스통 전부에 식량까지 줬으니.......나는 그저 나만 하겠느냐고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지 못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전종성의 배낭이 무척 무거웠을 것이다. 본인이 말을 하지 않으니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사람들은 제 취향대로 짐을 무겁게도 가볍게도 하며 여러 형태로 꾸려온다. 이명자 같은 경우는 항상 배낭이 무겁다. 늘 남에게 먹이기를 좋아하니 음식을 잔뜩 싸오기 때문이다. 산에 가면 이명자나 장익진이 뒤를 따라가면 배를 주리지는 않는다. ㅋㅋㅋㅋ
옆에 겁대가리 없는 다람쥐가 놀고 있다. 사람들 본능 속에는 3가지 동물공포증이 있다는 데 쥐공포증, 거미공포증(aracnefobia), 뱀공포증이란다. 나는 그 가운데에 뱀공포증이 좀 있는데,.............. 쥐공포증이 있는 어떤 사람은 심지어 이 다람쥐만 봐도 겁을 낸다고 한다.
갑자기 물속에서 올라온 람보가 설겆이를 한다. 무두질 람보냐?
고요한 내설악의 계곡 모습. 하지만 몇 시간 뒤에는 미치광이 계곡이 될 것이다. 폭우가 내릴 것이니............ㅋㅋㅋ
내설악의 이런 저런 모습들
우리는 여전히 Go, Go! mountain!
또 나타나는 폭포.
나도 한 커트 할까?
4단폭인데 가려져서 1단 반이 겨우 보인다.
열심히 품을 팔고 있는 '무두질람보시끄새지랄뿡서브리더모기대장'................님.
돌을 갈라서 흘러가는 물길도 보이고..............
좌우 벽은 여전히 바위로 막혀있고...............
자꾸 깊이 들어간다. 이 후로 당분간 사진은 없다. 바로 폭우가 시작된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는데 대원들도 다 흩어지고 배낭은 물에 젖어 엄청난 무게감으로 나를 괴롭히는데...............하여튼 봉정암에 가야한다. 천둥, 번개가 심해 번개 칠 때마다 나의 쇠 스틱을 멀리 집어 던졌다. 혹시나 벼락이 떨어지지 않을까!................싶어. 유명한 쌍용폭포를 지나지만 폭우로 카메라를 꺼낼 수가 없다. 모두 비닐봉지에 넣어 배낭 깊숙이 집어 넣었다.
2시간 가량의 폭우와 번개, 천둥 뒤에 조금 조용해 질 즈음에 봉정암이 나타난다.
봉정암은 당연히 신흥사의 말사인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하지만 그 존재감은 그 위의 상급 절보다 더 크다. 봉정암은 불교성지인 5대적멸보궁(五大寂滅寶宮: 영축산 통도사, 백덕산 법흥사, 함백산 정암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가운데 하나로 불교도들의 순례지로서 유명하다. 643년(신라 선덕여왕) 자장(慈藏)이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여 창건하였다는데, 원효·보조 등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677년(문무왕) 원효가, 1188년(고려 명종) 지눌이 중건한 것을 비롯하여 6·25전쟁 이전까지 7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 화재로 자칫하면 명맥이 끊어질 뻔하였다고 한다.
봉정암은 대청봉 산마루 가까이에 있는데, 해발 1,244m 지점에 있어 백담사와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에 이르기 위한 불교도들의 순례 산행은 매우 힘겹다.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형국의 산세에 정좌하고 있는 봉정암은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가섭봉·아난봉·기린봉·할미봉·독성봉·나한봉·산신봉이 감싸고 있는 절경의 터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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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암 뒤의 암봉들. 저 외에도 많은 암봉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이른 바 용아장성릉의 시작부이다. 설화에 의하면 자장스님이 진신사리를 봉안할 장소를 찾아 금강산을 헤매고 있을 때 봉황이 나타나 이곳으로 인도하여 부처님 같이 생긴 바위 꼭대기 위에서 봉황이 머물다가 사라졌다 하니 이야기 속의 바위가 저 바위 중 하나가 아닐런지..............
봉정암에서 40분 쯤 오르막을 오르면 소청산장이 나타나고 그 산장의 마당은 설악산 최고의 경치를 가지고 있다. 설악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얘기한다. 설악산 최고의 경치는 공룡릉 신선대와 소청산장에서 볼 수 있다...........라고. 흐린 날씨지만 우리가 소청산장에 선 잠시 동안 그 아름다운 경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운이 매우 좋은 편이다.
용아장성릉의 시작부가 보인다. 저것이 용아장성릉의 전부는 아니다. 용아장성릉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기나긴 바위 산줄기이다.
용아장성릉은 내설악의 수렴동 산장에서 봉정암까지 약 5km에 이르는 긴 암릉으로서,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첨봉들이 연이어 솟아 긴 성벽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아장성릉에서는 아래로는 구곡담계곡과 백운동 계곡, 그리고 가야동계곡이 내려다 보이고, 위로는 대청봉을 정점으로 공룡능선과 서북능선이 좌우로 날개를 펼친듯 바라다 보여 내설악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예전에는 용아장성릉을 등반하기란 무척 어려운 난 코스였지만 그 뒤에 사람들에 의해서 우회 등반로가 개척되고 난 뒤에는 다소 수월해 지기도 했다. 하지만 끊임 없는 조난 사고로 이제는 폐쇄된 코스이다. 물론 나는 갔다왔다. 제대로 로프 걸고 클라이밍 하면서 제대로 등반을 했다. 그때 같이 등반했던 박광태, 故 이종률이가 그립다.
작년에 이어 다시 소청산장을 찾았다. 폭우 뒤에 어수선한 하늘은 잠시 두려움의 대상이다. 많은 구름이 지나고 있다. 바람에 쓸린 듯 비스듬히 늘어선 산줄기는 멀리 있는 듯 가까이 있는 듯하다. 모든 것들이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설악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도록 산과의 조화를 시도해 보려고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용아장성릉의 암봉 능선들이 아래로 계속 뻗어 내려가고 있다.
공룡능선의 일부이다. 내가 처음 산에 입문한 코스이다. 나는 대학시절 어느 가을, 첫 산행을 이 공룡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길이 없던 시기인 1977년 여름에...........그 뒤로 나는 설악에 매료되었다. 나는 평생 설악과 씨름하고 있다.
소청산장 마당에 선 친구들. 좌로 부터 문성호, 김경배, 전종성.............평생 많은 친구들과 산행을 했지만 최근의 나의 산행 친구들은 이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과의 인연은 전종성이한테서 연유되었다.
다시 한번 전체를 보고................
멀리 북으로 보이는 울산바위도 클로즈업시켜 다시 보고..............
우리가 오늘밤 거할 중청산장에는 물이 없어 소청산장에서 물을 짊어지고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쌀도 씻어서 가야한다. 물이 차서 손을 넣기가 어렵다.
어두워져 오지만 중청산장에 짐을 풀어놓고 잠시 대청봉 정상으로 올라간다. 어둠과 비와 가스, 그리고 바람이 뒤섞여 정상에 서기 조차 쉽지 않지만 기어코 촬영을 해 내고 만다.
대청봉은 높이가 1,707.9m로, 남한에서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세번째 고봉이다. 청봉은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봉우리가 푸르게 보인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대청봉은 공룡릉·화채릉·서북릉 등 설악의 주요 능선의 출발점으로 내설악·외설악의 분기점이 되며, 천불동계곡, 가야동계곡 등 설악산에 있는 대부분의 계곡이 이 곳에서 발원한다.
나야 지겹도록 이곳에 올라왔지만, 오늘은 특히, 대청봉에 처음 온다는 김단미, 장익진, 반영환, 그리고 30여년 만에 다시 온다는 이유경 등을 위하여 다시 그들과 함께 오른다.
악조건 속에 청봉에 서서 기념촬영하는 단미. 나름 정상에서의 의미를 새기고 있을 것이다. 한국 3번째 고봉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최고의 정상이 아니던가?!
오늘의 산중 숙박지는 중청산장이다. 대청봉 바로 600m 아래에 있는 중청봉 옆에 있다. 우리는 미리 방을 예약했고 일치감치 방에 들었다. 1인당 1가지씩 가져오라고 했던 반찬은 푸짐했고 거기다가 장익진이가 끓여낸 김치찌개와 꽁치찌개는 준비해 온 고사리, 우거지와 함께 제법 괜찮은 맛을 내 주었다. 일단 밥을 먹어야 술이 들어갈 것이 아닌가? 실내는 이래도 바깥은 산장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다. 에라! 설마 날라가기야 하겠는가? 일단 먹고 보자!
식사를 하면서 잠시 기념 촬영. 몰골들이 말이 아니다. 이래도 아래에 내려가면 모두들 점잖은 신사, 요조숙녀들인데 말이다.
강철맨들은 식사가 끝나도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음주 파티가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악조건이지만 친구들과 마시는 술은 어디서나 즐거울 수 밖에 없다. 근데 유경이는 뭘 하고 있을까?
산장 내부의 침실이다.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는 1층에 10명 모두의 자리를 잡았다. 금방 들어와서 조금 잤다가 금방 깨서 나가서 먹다가를 반복하는 반영환이가 이제 다시 자러 들어왔다. 그는 밤새도록 깼다 잤다를 반복하는 특이한 생체 리듬을 소유한 친구이다.
이른 아침 중청산장의 바깥은 그야말로 미스트 상태다. 어제밤 그 세찬 폭풍은 다소 멎었지만 대청봉은 어떤지 여기서는 알 수가 없다.
원래 두팀으로 나누어 공룡능선과 가야동계곡으로 내려가기로 했지만 지난 밤 호우로 공룡능선은 출입 통제되었고, 천불동계곡도 가지 말라고 권유한다. 희운각대피소 사람들은 천불동으로 내려가고, 중청산장 사람들은 오색으로 내려가라고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지침이 내려왔다. 그저 원하는 데로 내려가면 되지만 되도록이면 국립공원의 지침을 따르려고 애 쓴다. 오색으로 내려가기 전에 기념 촬영. 간밤에 모두들 무사하게 자긴 잔 모양이다. 한밤중에 모기 소리가 시끄럽던데 모두들 잠을 설치지 않았는가 걱정이 된다. 시끄러운 모기 새끼!
다시 대청에 선 대원들. 이렇게 올줄 알았으면 어제밤에 오르지 않았을 것을..............그런데 바람이 너무 세어 가만히 있으면 몸이 날려갈 지경이다.
단미는 설악에 한번 와서 대청에 두번이나 올랐다.
대청을 벗어나 하산 시작.............
비는 여전히 추절추절 내리고.................
작년에 이어 여전히 미녀3총사!
거의 모두가 다리 관절에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우리 나이가 그럴 때인 모양이다. 더러 무릅 보호대를 착용했고 아닌 친구들도 있지만 쩔뚝 거리는 친구들이 거의 태반이다. 나이가 가장 어린 단미도 역시 다리 관절은 정상이 아니다.
중간에 짐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역시들 다리를 쩔뚝 거린다.
이명자의 짐은 예상보다 크다. 늘 친구들 먹이려고 잔뜩 싸 지고 오는 명자의 마음 씀씀이는 너무나 고맙지만 힘이 들어 절절 매는 것을 보면 안 쓰럽다. 그래도 이럴 때가 좋은 시절 아니겠는가? 이 마저 못 오게 된다면 어쩌랴?
고도는 자꾸 낮아지고 친구들은 자꾸 지쳐간다.
이유경의 제의에 따라 설악폭포 부근에서 장비를 꺼내어 커피 타임을 갖는다. 3명이 미리 내려가 버렸는데 그 이유는 성호, 경배는 커피보다 쇠주를 마시겠다고, 익진은 커피가 싫다고................ㅋㅋ
오색에 도착하여도 용대리까지 차를 가지러 가는 데에 거의 2시간이 걸리니 안되겠다 싶어 모두에게 얘기하고 장익진과 함께 나는 미리 하산을 시도한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속보로 내려와 오색 근처로 온다. 쉬지 않아선지 여전히 짐이 무거워서 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드디어 장익진과 나는 오색에 도착하고, 앞에 대기하고 있던 대리운전차를 잡아 타고 바로 한계령 넘어 용대리로 날라간다. 서둘러 서둘러 달려오니 꼭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친구들은 오색그린온천탕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둘이 빠지고 나머지 조가 내려오면서 촬영을 한 모습들이다. 그들도 다 내려온 모양이다. 우리보다 50분 정도 늦게 내려왔다고 한다.
드디어 후발조가 오색에 도착하고 이번 등반의 성공의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우리가 넘어간 한계령 도로 모습이다.
장익진과 나는 1시간 30분 만에 다시 오색으로 왔고 모두들 오색그린온천탕에서 몸을 푹 담근다. 이틀 동안의 땀과 기름끼를 쫙 빼야지. 그리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도시로 돌아가야지. 특히 오늘은 장모님 기일이 아니던가!
서울로 가는 중에 인제군 원통에서 잠시 식사를 한다. 황태구이가 좋다고 해서 들렀는데............
황태구이 보다 나물이 죽인다. 온갖 나물이 다 나왔는데 보기보다 맛이 아주 좋았다.
이건 황태구이. 황태는 이 설악지구가 유명하기도 하지. 명태를 눈속에서 여러 차례 말려서 제조해 내는 것이니...............
자! 먹기 시작! 시간을 보니 시장하기도 하겠다. 술을 싫어하는 친구도 미녀가 있으면 술이 잘도 넘어 가는 모양이다. 술..........술.........!!
김경배 앞에 쌓아 놓은 그릇 좀 봐라. 무식한 놈! 체면 좀 차려라. 완전히 무자비하게 조져 버리네. 쩝~~~~~~
어랍쇼! 여긴 한술 더 떠? 그릇을 완전히 밥상 설겆이 완료하셨구만........그것도 취사반장님께서.............먹을 것이 없어 지금 쉬고 있는 거여?
우리들중 일부는 서울 마포 합정동 부근에서 서울의 이정이와 잠시 만나 간단하게 한잔하는데, 중간에 나와 단미는 빠져나와 수색으로 간다. 오늘이 장모님 기일인데 모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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