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龍)난다.
고조본기를 읽으면서...
역사가, 그것도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시조의 이야기를 써야 한는 역사가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말 한 번 잘못해서 목숨을 잃을 뻔한 역사가가 자신에게 벌을 가한 최고 권력자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씁니다.
가장 먼저 한고조의 출신지 그리고 부모님의 이야기 태몽 등을 서술합니다.
"고조(高祖)는 패현(沛縣) 풍읍(豐邑) 중양리(中陽里) 사람이다. 성은 유(劉), 자는 계(季)라 했다. 아버지는 태공(太公)이며 어머니는 유온(劉媼)이라 했다. 그 어머니 유온이 일찍이 큰 연못가에서 휴식을 취하다 꿈에서 신을 만났다. 이때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하늘이 어두워졌다. 태공이 가서 보니 교룡(蛟龍)이 그 몸 위를 올라타고 있었다. 그러고는 잉태하여 고조를 낳았다.
부모의 이야기로 그 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빈약해 보입니다. 이름이 계(季)라고 했다는 말은 정식이름이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계라는 말은 막내, 혹은 꼬마라는 뜻입니다. 유비의 형제이야기가 없으므로 그냥 '유씨집 꼬마'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가 태공이라고 한 것은 당연히 이 꼬마가 훗날 통일왕국의 창업자가 되었기에 그냥 그렇게 이름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어머니 이름을 유온이라고 한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성동본이었을까요? 아니면 서양에서 하듯이 시집와서 남편의 성을 받은 것일까요?
여기서 온(媼)이라는 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글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반고는 패현 지방의 한 석비에서 '溫'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것으로보아 '마온씨(馬溫氏)'의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구지 성을 부여해서 뿌리가 있는 집안의 여인임을 강조한 것은 반고 역시 한나라의 역사가였기에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저 '할머니'라고 해석합니다. 유비가 어린시절 잘 드나들었던 술집 중 한 곳의 주인이 왕온(王媼)이었다는 표현이 조금 뒤쪽에 나옵니다. 이런 표현들을 살펴볼 때 유비의 어머니는 '유씨집의 늙은 여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하루는 큰 연못 곁에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아마 뒤에 나오는 교룡(蛟龍)을 설명하기 위해 연못을 동원한 듯 하나, 어떤 조신한 가문의 여인이 길바닥에서 잘까요? 그리고 사마천의 표현에 의하면 남편이 그 주변에 있었습니다. 이들이 물가에 있는 들에서 노동을 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을 하다가 지친 여인이 잠시 눈을 붙인 거죠...
태몽은 멋있어야 합니다. 꿈속에서 신을 만남과 동시에 하늘이 어두워지고 교룡이 자고 있는 유비의 어머니를 겁탈합니다. 교룡은 뿔이없는 완성되지 않은 용을 의미합니다. 모습은 도룡뇽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어쨌던 실존하는 동물은 아닙니다. 왜 하필이면 교룡인가? 황룡도 있고, 푸른 빛을 띄었다고 하면 청룡일 수도 있고, 비룡일 수도 있고, 많이 양보해서 익룡일 수도 있는데, 왜 하필 교룡이었을까요....
유비의 출생과 태몽, 그리고 그 부모님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신이 납니다. 왜냐하면 유비의 처지와 형편이 최소한 어린시절 부터 그의 젊은 시절가지 '개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훗날 모든 면에서 도저히 상대도 되지 않는 항우를 물리치며, 통일황국의 창업자가 되었는데, 그의 성공에서 조건과 형편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이납니다.
사마천은 제왕의 조건에 출생과 그의 조건은 큰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자신의 글 속에 숨긴의미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자본에 의한 '계급'이 형성되고, 이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세습'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조건없이 증여합니다. 그래서 공정한 경쟁이란 불가능해졌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라는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경쟁의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이난다'는 희망의 메세지는 이젠 옛 이야기가 되버렸습니다.
제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는 그래도 조금 실력이 있는 아이들이 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때깔이 달라집니다. 교수보다 큰 차를 몰고 다니며, 비싼 옷, 가방 그리고 최고가의 기기들로 무장을 하고 다닙니다. 처음 학교에 갔을 때는 츄리닝을 입고 다니는 아이들, 군복을 물들여 입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다릅니다. 소위 몇 백만원의 교육비를 들이는 아이들이 고작 교육방송에서 공부한 아이들과 경쟁이 될 수 없습니다.
제도를 바꾸던, 인식을 바꾸던 아니면 자격증과 같은 대학을 없애든, 정당한 경기가 이루어지는 풍토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언젠가 그렇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