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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시사사》 3-4월호 대담
<이은봉 시인과의 대담-대담자 나민애(평론가)>
‘좋은 세상-주의자’는 온몸으로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사람이면서도 짐승인가. 짐승이면서도 사람인가. 나는 무엇인가. 정신인가, 물질인가. 정신이면서도 물질인가. 물질이면서도 정신인가.
나는 있는가, 없는가. 있으면서도 없는가. 없으면서도 있는가. 空인가, 色인가. 공이면서 색이고, 색이면서 공인가. 나는 하나인가, 둘인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가.
- 「시 : 자유, 비애, 사랑, 그리고 기타」중에서, 『화두 또는 호기심』(2005)
나민애 : 오늘은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은봉 시인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최근에도 여러 가지 일이 많으셨죠? 각종 회의도 그렇지만,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직을 새로 선출된 공광규 시인께 넘기고, 인터뷰 직전에는 몇몇 문인들과 중국 계림 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선은 지난 1년의 시간에 대해 듣고 싶어요.
지난 1년간 재직하는 학교에서는 연구년이었죠. 선생님께서 연구년이었던 작년에 작가회의 사무총장직을 ‘몸으로 연구한다’고 표현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이 몸으로의 연구(?)가 심신 양면으로 힘들고 고단했을 거라 짐작합니다.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이 시간이 어떤 1년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까요.
이은봉 : 자신의 문학에 대한 애정이 큰 문인들은 대개 한국작가회의 등 문인단체의 소임을 맡지 않으려고 하지요. 나도 나 스스로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이라는 직책을 맡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국작가회의의 소임이라면 이미 나도 2010년 2월 정기총회부터 부이사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거든요.
2010년 2월의 정기총회에서는 김남일 소설가가 한국작가회의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막 업무를 집행하던 김남일 소설가가 그해 5월 갑자기 위암수술을 하게 되었어요. 당연히 업무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죠. 병세가 빨리 호전되지 않아 김남일 사무총장은 다음해인 2011년 1월까지도 업무에 복귀하지 못 했어요. 한국작가회의의 업무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자 당연히 회원들 사이에 말이 많았지요. 사무총장을 다시 뽑아야 한다고요.
그 참에 이시영 자문위원, 도종환 부이사장, 김사인 이사, 정우영 이사 등이 나서서 마침 연구년이고 하니 1년만 봉사를 하라고 강권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책임을 맡게 된 것이죠. 이시영, 도종환, 김사인, 정우영 등 내가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분들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거지요.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일들도 많잖아요. 그래요. 사무총장 직을 맡기로 결심을 하는 이삼일 사이에 그동안 세워두었던 연구년 프로그램이 훌쩍 날아가 버렸지요.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참 많은 것을 배웠어요. 한국작가회의라는 크고 품위 있는 문인단체가 어떻게 운영되는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정부의 문예정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대해서도 배웠지요. 그리고 문화예술위원회라든지, 기타 여러 문화재단 등에 대해서도 좀 알게 되었고요. 문학 혹은 문화의 배후에 대해 공부를 좀 한 셈이지요. 배우지 못 할 것이 어디 있겠어요. 은 힘들고 고단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세계를 배우고 경험했던 1년이었지요. 한국작가회의가 지니고 있는 진보적 가치만큼은 진보적 가치를 재확인할 수도 있었고요.
나민애 : 사실 선생님께서 한국작가회의 총회를 끝내고 푹 주무시거나 쉬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다시 바쁘게 중국 계림으로 여행을 다녀오셨지요?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활동적이고 열정적이어서 보는 입장에서는 늘 감탄을 하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이번 여행은 재충전의 시간이라는 의미 외에,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기를 준비하는 다짐의 여행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번 여행은 어떠셨나요? 선생님께서 느끼고 얻으신 점을 듣고 싶습니다.
이은봉 : 이번 중국 계림 여행은 서둘러 한국작가회의를 잊기 위한, 아니 한국작가회의 사무실을 잊기 위한 것이었어요. 매일 아침 한국작가회의 사무실로 출근을 했는데, 갑자기 이 일을 그만 두게 되면 습관화되어 있던 몸이 좀 어색해질 것 같아서요. 물론 우스갯소리에요. 한국작가회의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랄까, 미련이랄까, 뭐 그 비슷한 것을 좀 털어내고 싶었어요. 시인으로, 문인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늘 한국작가회의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1984년 재창립할 때부터 줄곧 한국작가회의에 참여해왔었거든요.
날씨가 좀 춥기는 했지만 여행 자체는 아주 좋았어요. 계림은 중국에서 산수가 가장 수려한 곳으로 알려져 있잖아요. 직접 가서 보니 계림산수 갑천하(桂林山水 甲天下)라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그런데 이처럼 수려한 산수도 계속 보고 경험하니까 금방 익숙해지더군요. 언제나 군계(群鷄) 중의 일학(一鶴)이 돋보이고 아름다운 것이지요. 학(鶴) 중의 학(鶴)한테서는 감흥이 계속되기 어렵지요. 모든 새로움은 제 안에 낡음을, 모든 신선함은 제 속에 지루함을 거느리고 있기 마련이지요.
중국 계림의 산수에서 호연지기, 통 큰 마음을 배운 것은 사실이에요. 자잘하거나 찌질하지 않게 살려고 하는 것, 사사건건 따져 가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으며 살려고 하는 것 말이에요. 훌훌 털어버리는 마음을 배웠다고 해도 좋고요.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는 동안 이런저런 일에 연루되어 마음고생도 좀 했습니다. 특히 실천문학사의 조사위원, 이사로 참여하게 되어 많이 힘들었습니다. 무슨 이런 나쁜 운명이 있는가 싶어 탄식을 한 적도 적잖았습니다. 앞으로도 한참 더 탄식을 해야 할 것 같아 괴롭습니다. 나와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 대해 공부하는 중이라고 생각해도 고통은 쉽게 가시지 않네요.
나민애 : 우연한 여행이 아니라 ‘비움’을 위해 기획된 여행이었군요. 선생님께서는 늘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주변 분들을 맞아주시죠. 지난 1년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선생님의 웃는 얼굴 뒤에는 심적인 고충들이 숨겨져 있었네요. 그걸 몰랐다는 사실이 작가회의 회원으로서, 아, 사뭇 반성하게 됩니다.
여행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의 다음 카페에서 본 ‘강정평화걷기 릴레이’ 사진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다음 카페(<돌과 바람의 시>)는 회원수 729명이고요, 저는 그 729명 중의 한 사람 자격으로 종종 방문하곤 하는데요. (웃음) 카페에 스크랩된 기사에 따르면 선생님께서는 이번 1월 달에 강정마을에 희망 메시지를 전달하는 걷기 행사에 참여했더군요. 사진을 보고 개인적으로는 걱정이 되었어요. 선생님께서는 당뇨가 있잖아요. 평소에도 과로가 염려되는데 오랜 걷기가 무리되지는 않으셨나요? 「강정의 아침」이라는 선생님의 작품을 읽었지만 실제 강정마을 행사 이야기를 독자들에게도 들려주시겠어요?
이은봉 : ‘강정평화걷기 릴레이’에 대해 지금 와서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도 독자들을 위해 몇 마디만 하지요. 강정은 제주도 서귀포 근처에 있는 자연부락인데요, 이곳에 해군기지를 만든다고 해서 제주도민들과 함께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이 반대운동에 나섰던 것이지요. 해군기지반대운동의 일환으로 임진각에서 제주도 강정까지 국토순례대행진을 강행했던 것이 ‘강정평화걷기 릴레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2011년 12월 26일에 출발을 해 25박 26일 동안 걸었지요. 여성과 인권위원회 조정 위원장이 기획을 하고 한국작가회의 사무국이 뒷받침을 해서 소속회원 520여명이 참여했던 대장정이었지요.
12월 26일 눈이 하얗게 쌓인 임진각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간략한 출발형식을 갖고 제주도 강정을 향해 걷기 시작했는데, 걷는 일 자체로 장관이었어요. 나는 모두 세 차례 참가를 했어요. 처음 임진각에서 출발을 할 때, 그리고 연기휴게소에서 대평휴게소까지 걸을 때, 그러니까 세종시 구간을 걸을 때, 마지막으로 제주도 강정마을로 들어갈 때가 그것이지요. 특히 눈보라를 맞으며 연기를 지나고, 금강을 지나고, 대평에 이를 때의 풍광이 가장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이 구간에 저의 고향마을인 ‘막은골’이 있기도 하거든요. 마구 파헤쳐져 있는 이 세종시 구간을 걸을 때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폐허 속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파괴된 구럼비 바위 위를 걷는 기분 말이에요. 물론 제주도 강정마을이 내 고향마을 ‘막은골’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도 있었지요. 물론 제주도의 중문에서 강정까지 걸을 때가 기분은 좋았지요. 들뜬 철부지 소년의 기분이 들었다고 하면 안 되겠지요. 이때는 소설가 현기영, 조정래, 공지영 선생, 시인 도종환 선생도 함께 참가했었지요.
물론 제주도에 건설 중인 해군기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지요. 애국주의 시각에서는 제주도의 해군기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아요. 우리나라의 기상이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려면 제주도의 해군기지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대양해군 전략의 일환이지요. 하지만 이런 견해는 제주도의 해군기지로 하여 제주도 전체가 불바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지요. 미래의 어느 날 미국과 중국 사이에 불화가 심화되어 국지전이라도 일어난다면 제주도의 해군기지가 공격의 대상이 될 것은 뻔하잖아요. 제2의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나는 셈인데, 더는 우리나라를 강대국의 전쟁터로 빌려주어서는 안 되잖아요. 특히 제주도가 지난 시대의 4ㆍ3 때처럼 다시금 초토화되어서는 안 되잖아요. 그러고 보면 ‘강정평화걷기 릴레이’는 평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민애 : 카페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쭤보겠습니다. 항상 카페 메인 화면을 볼 때마다 드는 뜬금없는 질문입니다. 왜 카페 이름이 ‘돌과 바람의 시’인가요? 선생님께서는 내륙 평야 지대, 충남 공주에서 자라셨잖아요. 그렇다면 이 ‘돌과 바람’은 어떤 시련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표현한 건가요?
이은봉 : 돌과 바람이라고 하면 흔히 삼다도라고 불리는 제주도가 생각날지도 모르겠네요. ‘돌과 바람과 여자’의 시라고 하면 더욱 그렇겠고요. (웃음) 사실 내 시에 그런 면이 없지 않아요. 돌과 바람과 여자가 내 시의 주요 소재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에요. (웃음) 내가 제주도를 깊이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에요. 2012년에는 무려 4번이나 제주도를 방문을 했어요.
하지만 그런 뜻에서 카페의 이름을 정한 것은 아니에요. 돌과 바람은 흙과 공기의 구체적인 형상물이잖아요. 돌이 부서지면 흙이 되고, 바람이 자면 공기가 되거든요.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원소, 가스통 바쉴라르가 말하는 4원소 중의 두 원소가 돌과 바람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돌과 바람이라는 말은 물과 불을 포함한 존재의 근원을 구체화한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어요. 이 카페를 만들던 2000년대 초, 내가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돌과 바람 등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에 깊이 빠져 있었어요.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이 존재의 근원인 물, 불, 공기, 흙에 대한 관심을 낳게 했던 것이지요. 한때는 이것들이 제자리에 제대로 있도록 하는 것이 바른 생태환경운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도 돌과 바람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시를 많이 썼어요. 돌의 이미지, 나아가 흙의 이미지를 다룬 시들은 이미 대부분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등의 시집으로 묶여 있지요. 공기의 이미지, 바람의 이미지를 다룬 시는 아직 시집으로 묶여 있지 않지만요. 바람은 운동성의 상징, 곧 기(氣)의 물질화된 모습이기도 하지요.
이번 질문에 대해서는 대강 이런 정도로 대답을 하지요. 자세한 얘기는 다른 기회에 더 하기로 하고요.
나민애 : 선생님이 강정마을에 서 계신 사진을 보고 저는 강정마을은 또다른 ‘막은골’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제 선생님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자리를 옮겨 볼까요. 다들 알겠지만 근자에 선생님께서는 ‘막은골 이야기’라는 연작시를 쓰고 계신데요. 저도 선생님과 고향(충남 공주)이 같은지라 ‘막은골 이야기’는 제 아재들의 이야기, 또는 어렸을 적에 보았던 그 키 큰 어른들의 세계여서 매우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이 시세계에 관한 언급은 《시작》인터뷰(2011. 겨울)에서도 밝히신 적이 있지요. 거기서 선생님께서는 ‘막은골’이 자신의 유년이나 고향, 또는 고유명사로서의 어떤 장소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실되어 가는 모든 공동체의 상징적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공동체로서의 ‘막은골’에 주목한 이유는 선생님의 시적 여정과 어떤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하나의 ‘좋은 세상’이라는 모토가 담겨 있다고나 할까요. 선생님의 첫 개인 시집(『좋은 세상』, 1986)의 제목 역시 ‘좋은 세상’이었지요. 이 ‘좋은 세상’에 대한 꿈꾸기는 선생님께 있어 매우 중요한 시적 주제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작(詩作)의 처음부터 지금의 ‘막은골’까지 선생님께서 지닌 ‘좋은 세상’에 대한 생각과, 그에 기여하는 시의 의미를 여쭤 보겠습니다.
이은봉 : 모든 창조적인 예술이 다 그렇듯이 시도 결핍의 산물이지요. 결핍은 타자를 발견하면서 구체화되는 것이거든요. 타자 중에서도 가장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누구에게나 역사적 현재로서의 이 지구, 이 나라, 이 땅, 이 사회 등이지요. 지구, 나라, 땅, 사회 등을 타자의 영역으로 삼고 있지만 이것들이 실은 다 나 자신이지요. 나 자신의 결핍이 이것들의 결핍을 자각하게 하거든요. 지구, 나라, 땅, 사회 등을 배우는 것이 실제로는 나 자신을 배우는 것이라는 얘기에요.
‘막은골’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20여 호 남짓한 시골 마을이에요. 내가 유년 시기를 살았던 고향의 쬐그만 동네지요. 제2차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되던 1968년, 1970년 무렵까지만 해도 행복하고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가 그대로 살아 있던 곳, 늘 흥성대던 곳이지요. 1980년대 중반 무렵까지만 해도 마을 공동체의 긍정적인 가치가 남아 있었고요.
‘막은골’에서 대전 쪽, 남쪽을 바라보고 서면 장남평야 멀리 금강의 둑이 보였고, 더 멀리 계룡산의 지류인 우산봉이 보였지요. 왼편으로는 방축천과 합류해 금강으로 흘러드는 모듬내(濟川)의 둑이 마을을 가로막고 있었고요. 모듬내 건너편으로 들길을 좀 걸어가면 장터이며 연기군 남면의 면소재지인 종촌이 나왔지요. 오른편으로는 높지 않은 산언덕이 거의 12시 방향까지 뻗어 나와 겨울의 차가운 서북풍을 막아주는 마을이 ‘막은골’이었지요. 말 그대로 ‘막은골’이었지요.
나민애 : 네, 선생님의 묘사만으로도 머리에 소박하고 평화로운 마을이 떠오르네요.
이은봉 : 그 막은골이 이제는 세종시의 건설로 다 파괴되어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그리움을 남기잖아요. 지금은 어느 누구도 돌아갈 수 없는 곳, 그래서 마음속에 화인(火印)이 되어버린 곳이 ‘막은골’이지요. 우리 집 터는 빗물 따위를 가두는 저류지가 들어선다는군요. 세종시를 생태 환경이 자연 그대로 살아 있는 꿈의 행복도시를 만든다고 하니까 좀 지켜봐야 하겠지만요. 내가 「神市 航行」라는 시에서 노래한 정말 명품 행복도시가 될는지도 모르지요.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개발을 바탕으로 생존하게 마련이지요. 개발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예요. 모든 개발은 자연의 파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개발이라는 것은 자연의 파괴만이 아니라 항상 마을의 파괴를 동반합니다. 자연의 파괴도 문제지만 실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마을의 파괴,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마을 공동체의 파괴라는 부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문화라고 하는 것, 윤리라고 하는 것, 도덕이라고 하는 것, 철학이라고 하는 것 등이 실제로는 다 마을 공동체를 기반으로 해서 출현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동양의 것이든 서양의 것이든 마을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인간의 바람직한 가치와 관련된 모든 것이 다 마을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예의는 물론 에티켓이라는 것도, 인간의 품위며 품격이라고 하는 것도 다 자본주의 이전, 산업화 이전의 마을 공동체에서 체계화되고 규범화된 것들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나민애 : ‘막은골’이 ‘막은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이은봉 : 안타깝게도 자연의 파괴, 마을의 파괴가 불러올 세계는 뻔하지요. 그런 점에서 내가 쓰고 있는 연작시 「막은골 이야기」는 아주 절박한 세계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백석의 『사슴』이나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가 보여주는 세계와는 또 다르지요. 이들 시집은 무자비한 개발에서 야기되는 끔찍한 세계인식을 동반하고 있지는 않잖아요. ‘막은골’이 백석의 ‘여우난골’이나 서정주의 ‘질마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요. 백석의 ‘여우난골’과 서정주의 ‘질마재’도 무의식한 가운데 근대 혹은 산업화, 곧 자본주의에 대한 공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마을 공동체가 살아 있던 지난 어느 한 때의 ‘막은골’은 마음 속에서 ‘좋은 세상’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역사적 현재로서의 지구, 나라, 땅, 사회 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이 없이는 생기지 않아요.
자본주의 사회가 더욱 심화되면 상호부조, 상호협력, 상호양육 등 마을 공동체의 모든 생명적 가치는 끝내 소멸되고 말겠지요. 인간의 삶이 점차 개별화되고 파편화되면서 모든 주체가 공동체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 테니까요. 모든 ‘근대’가 문제투성이지요. 도무지 희망이 없는 게 ‘근대’ 자체이잖아요.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서든 근대의 밖으로 나가야 해요. 물론 근대의 밖은 근대의 앞이기도 하고, 근대의 옆이기도 하고, 근대의 뒤이기도 하겠지만요. 근대의 안에도 근대의 밖은 있겠지요. 시인이라면 누구라도 근대의 밖을 향한 꿈과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막은골’은 개발 중심의 자본주의 이후에 상실된 공동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때의 상실된 공동체도 근대 밖의 한 모습이겠지요. 도시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체계가 강화되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실된 공동체의 상징적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로 미루어 보면 나는 ‘좋은 세상’의 원형, 곧 이상향을 과거의 낙원, 곧 잃어버린 파라다이스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일종의 상고주의자(尙古主義者)라고도 할 수 있지요. 여전히 동아시아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셈이지요. 원형으로서의 ‘좋은 세상’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공동체적 가치관을 공유하며 상호부조하는 공간이 아니겠어요.
나민애 : 선생님께 있어 과거는 어디까지나 현재적 과거이고, 현재는 어디까지나 과거적 현재로 이어져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막은골’ 역시 한 시인의 과거 유년이 아니라, 지금 현재 진행형인 시대와 시의 몫의 일부를 표상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근대의 안에서 근대의 밖을 꿈꾸는 의지를 말씀하신 대목을 매우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말씀을 해준 부분이 시세계의 지향성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제 방향을 바꾸어 선생님 내면의 창작 원동력이 무엇인지 여쭤보겠습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는 ‘각자’에 대한 이야기를 시론집 『화두 또는 호기심』에 실으신 적이 있고, 그와 관련하여 김수이 선생님은 「각자各自 刻字 覺者의 시학」(《유심》, 2011. 11/12월호)이라는 글을 통해 주목하신 바 있어요. 저는 이 ‘각자’라는 문제가 아직도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혼란스러운 한 사람의 내면에 살고 있는 제각기의 ‘각자(各自)’ - 곧 사람, 짐승, 공, 색, 아버지, 아들, 남편, 학자, 시인 등등이 공존한다고 인정하셨어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각자들의 혼란과 혼합은 상당히 조율하기 힘듭니다. 선생님께서 그 혼합을 개인적으로나 시적으로 인정하고 다루는 방식을 들을 수 있을까요.
이은봉 : 모든 언어는 본래 여러 개의 의미를 거느리기 마련이지요. 국어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의 기표가 하나의 기의를 거느리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각자’라는 기표도 마찬가지에요. ‘각자’라는 기표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지면에서 말한 적이 있지요. 그래서 부연해 말하기가 좀 쑥스러운데, 일단 표의문자인 한자로 표현하면 各自, 刻字, 覺者, 恪子 등의 내포를 갖는 것이 ‘각자’라는 기표이지요. 그 중에서도 오늘의 이 시대와 관련해 주목이 되는 것은 각각 각(各) 자(字)에 스스로 자(自‘) 자(字)를 쓰는 각자(各自)’입니다. 오늘의 이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개별자로서의 각자(各自)를 전제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개별자로서의 ‘각자(各自)’, 그 일자(一者)가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로서의 주체라는 것이지요. ‘각자(各自)’라는 일자(一者)를 흔히 ‘나’라고, ‘자아’라고 말하잖아요. 이 ‘나’라고, ‘자아’라고 하는 존재도 실제로는 일자(一者)가 아니지요. ‘나’라고 하는 자아가 일자(一者)로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나’, ‘자아’라고 하는 존재가 본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기 때문이지요. 관계와 역할에 따라 “사람, 짐승, 공, 색, 아버지, 아들, 남편, 학자, 시인” 등등으로 바뀌고 변하며 존재하는 것이 ‘나’라는, ‘자아’라는 것이에요.
욕망으로서의 ‘나’를 생각하면 ‘나’는 좀 더 복잡해지지요. 누구에게나 ‘나’ 속에 너무 많은 ‘나’가 살고 있잖아요. 그때그때의 욕망에 따라 혹은 의지에 따라 무수하게 얼굴을 바꾸는 것이 ‘나’이지요. 상황과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모하는 것이 ‘나’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아함경』에서 無自性(무자성), 無自己(무자기)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無自性(무자성)이라는 말은 변하지 않는 ‘나’라고 하는 특성, 곧 자성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無自己(무자기)라는 말은 自己(자기), 곧 자아,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고요. 이때의 자기와 타자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숙지할 필요가 있어요.
이들의 관계를 주체와 객체라는 기표로 바꾸어 받아들여도 마찬가지에요. 우선 주체라는 기표부터 주목해볼까요? 언제나 분열되는 가운데 다극적(多極的)으로 존재하는 것이 주체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자아’, 곧 주체라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無自性(무자성), 無自己(무자기)의 시각으로 말하면 있으면서 없는 것이 ‘나’, 곧 ‘자아’라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하나이면서 둘로, 一而二로, 一卽多로 존재하는 것이 ‘나’, 곧 ‘자아’라는 얘기지요. 실제로는 모든 세계가, 존재가 다 그래요. 물론 시세계도, 시라는 존재도 다를 것이 없지요. 복합적이고 다극적이라는 것이에요. ‘동일성의 시학’에서 말하는 시에서의 합일도 실제로는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김준오 선생이 말하는 동화나 투사도 다를 바 없지요. 본래 주체와 객체, 자아와 세계가 不一而不二(불일이불이)의 관계로, 곧 不二(불이)의 관계로 존재하잖아요. 物心一如(물심일여)라고 할 때의 一如(일여)가 실제로는 不二(불이)라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이런 존재의 원리를 체화하고 있어야 민주주의 사회, 성숙한 사회도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나민애 : 지금까지 말씀을 들어보면 선생님께서는 단일한 사상이 아닌 전통적인 여러 사상들과 시인들과 개념들에 대해 다양한 섭렵을 보여주고 계세요. 이 복합성이야말로 선생님의 ‘각자론’ 긍정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선생님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매력을 한데 지닌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매우 곱고 여린 감성의 소유자이고, 어느 때는 반대로 열정적이고 추진력 있는 활동가의 모습이에요. 또 어느 때는 당대의 사회에 대한 첨예한 비판가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고전적인 사유의 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밖에서 파악하는 선생님과 선생님 스스로 생각하는 자아의 상은 어느 정도 일치할까요. 선생님께서는 스스로를 어떤 기질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은봉 : 어떤 기질의 사람이라? 생각해보니 나민애 선생이 질문을 통해 말한 이런저런 특징을 다 지니고 있는 듯싶네요.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조건과 관계하면서 그때그때의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나’라고나 할까요. 하여튼 제가 상대적으로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자아를 많이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실제로도 내가 남자보다는 여자를 더 좋아하거든요. (웃음) 내 시집 중에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라는 것이 있거든요. 이때의 달이 여성을 가리킨다는 것은 잘 알겠지요.
본래 나는 균형과 조화, 중도에 민감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세상 전체가 균형과 조화, 중도를 잃고 있거든요. 세상 전체의 균형과 조화, 중도를 회복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 왜곡된 시각으로 볼 때 내가 다소 과격해 보이는 것이겠지요. 나는 균형과 조화, 중도를 회복하려고 애를 쓰는 것 자체가 만물의 보편적인 법칙, 나아가 역사의 법칙이라고 믿는 사람이에요. 언제나 균형과 조화, 중도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 역사라고 믿는 것이지요. 내게 열정적이고 추진력 있는 활동가의 모습이 보인다면 조금은 용감하게 역사의 이런 방향을 따르려는 것 때문이지 않나 싶네요.
나한테서 고전적인 사유의 장이 보인다면 아마도 내가 法古創新(법고창신),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을 좋아하기 때문이겠지요. 이 세상에서 나보다 앞서 산 사람들의 지혜와 진실은 그 자체로 흥미롭잖아요. 더구나 그들이 남긴 典籍(전적)은 더욱 그렇고요. 젊었을 때 무엇을 잘 모르면서 사서오경이나 『노자』 등을 읽었는데, 그것이 시를 쓰는데 좀 도움이 되는 듯도 싶고요. 청소년 시절을 아무런 상처나 절망도 겪지 않고 보냈으면 아마도 지금쯤 고전을 연구하는 진짜(?) 학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고등학교 때는 조건과 환경이 허락된다면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거든요. 돌이켜보면 시를 쓰는 것이 잘 한 것이지만요.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내가 ‘복합적인’ 자아를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복합적인’ 자아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징이 아닌가요.
나민애 : 그 복합적인 자아 중에서도 사실 저는 선생님을 떠올리면, 부드러운 외면 아래 믿음과 신념을 세우고 지키는 현대적인 선비상의 기운을 자꾸만 느끼게 됩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선생님께서는 영향을 받은 시인들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영향을 받은 사상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후배 문인들에게 유교적 사상의 전통이나 불교의 세계, 전통적 문사와 고전적 지식에 대해 깊이 있는 말씀을 종종 들려주시죠. 사실 이 부분은 공부 없이는 알 수 없는 점 아닙니까. 선생님의 시론(「그윽하고 오묘한 세계」, 『화두 또는 호기심』)을 보면 『노자』 번역을 하신 얘기도 담겨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이 고전적 사상들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선생님께 고전의 의미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이은봉 : 내가 타자에 대해 맨 처음 고민을 하고, 나를 포함한 타자의 질서나 원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인 듯합니다. 물론 타자에 대한 사유는 나에 대한 사유이기도 하지요. 고등학교는 공주를 떠나 대전에서 다녔는데, 그때 한 인척의 소개로 ‘YKA’라고도 부르는 ‘아카데미’라는 동아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아카데미’는 인재를 기르자는 흥사단(興士團)의 청소년 운동 조직이지요. 흔히 흥사단 아카데미라고 부르지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미주에서 결성한 애국운동 단체가 흥사단인데, 흥사단의 청소년 운동 조직인 아카데미에 나가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내게는 세계를 알고 깨닫는데 큰 계기가 되었지요.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인격함양과 관련해 실천의 덕목으로 강조한 흥사단의 4대정신, 곧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은 내가 가치관,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지요. 삶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정말 늘 무실, 역행, 충의, 용감하려고 했어요.
『노자』도 처음 읽은 것은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부터였어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러니까 1970년인 듯싶네요. 지금의 한남대학교 유칠노 교수, 충남대학교 황의동 교수가 충남대 철학과 학생이었던 시절이지요. 이들 선배가 대학생 및 고등학생을 묶어 『노자』를 읽는 스터디그룹을 만들었어요. 나도 그 모임에 나갔지요. 여름방학이 되자 그럭저럭 모임이 해체되어 그때 『노자』를 완독하지는 못 했어요. 그래도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읽은 『노자』의 각 구절은 가슴에 깊이 각인이 되어 있어요.
물론 『노자』의 〈道可道〉 章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지요. 그 뒤에는 1999년 번역을 하면서 대강 일독(一讀)을 했고요. 조태일 시인이 돌아가시던 1999년에는 여러 가지 일로 너무 힘들었거든요. 2000년대에 들어서도 『노자』는 일독을 더 했어요. 『노자』의 〈道可道〉章에 나오는 有, 無의 개념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空, 色의 개념과 다르지 않은 듯도 싶어요. 불교철학, 특히 선불교에 대한 이해도 고등학교를 다니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었어요. 내가 다닌 대전의 보문고등학교는 불교종단에서 운영하는 사학이었거든요. 시인이었던 이재복 교장 선생님은 대처승이기도 했는데, 태고종의 대종사였지요. 무시로 대종사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었지요. 불교 과목은 동국대학교 승가학과를 나온 이은정 법사님이 가르치셨는데, 나중에 모교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퇴임을 한 이은정 법사님(덕운 스님)은 고향의 먼 친척 형 뻘이기도 했어요. 그런저런 이유로 나는 법사님의 특별한 애정을 받았어요. 그러다 보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등학교 1, 2학년 때 열심히 불교 공부를 했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그때 공부했던 내용을 반추하며 불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했지만요.
기독교 사상도 아주 자연스럽게 익혔어요. 미션계 대학인 숭전대, 지금의 한남대학교에 다닐 때 무려 10학점의 기독교 과목을 이수해야 졸업을 할 수 있었거든요. 기독교개론 4학점, 구약개론 3학점, 신약개론 3학점 등을 이수하며 기독교 사상을 공부했던 기억이 나내요. 선지자 정신, 원죄의식, 삼위일체설, 실재론과 명분론 등은 대학 1학년 때부터 토론의 대상이었어요. 1970년대 한남대학교의 교육 시스템은 전국 최고의 수준이었을 거예요. 특히 이한빈 총장 시절에는 교수진들도 아주 좋았지요. 캠퍼스의 분위기가 아주 지적이면서도 자유로웠어요. 국문과의 김현승, 박요순, 소재영, 이봉채, 김대행 교수님, 영문과의 김종철, 윤삼하, 강선구 교수님, 불문과의 이가림 교수님, 교육학과의 연문희 교수님 등이 당시 한남대학교의 교수로 있었어요. 나는 이분들 모두와 가깝게 지냈고,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이분들 모두가 나를 아주 예뻐하기도 했고요. 스승 복이 아주 많은 학생이었던 셈이지요.
나민애 : 지금도 주변 분들은 선생님의 친화력에 치명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인 관계가 넓고 타인의 장점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이은봉 : 아, 그래요. 나는 늘 남의 의견을, 남의 입장을 존중하려고 할 뿐이에요. 나보다는 남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애를 쓸 따름이지요.
아무튼 공주대학교의 조재훈 교수님도 우리 대학에 강의를 나오셨는데, 조재훈 교수님도 나를 아주 예뻐하셨어요. 정말 박식하고 올곧은 분이지요. 특히 영문과의 김종철 교수, 불문과의 이가림 교수, 교육학과의 연문희 교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녹색평론은 만드는 김종철 선생님은 우리 시대의 정신적 사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김종철 선생님의 저희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정말 특별했어요. 당시에는 나, 유도혁, 박용남, 김영호, 전인순, 윤중호 등이 늘 김종철 선생님의 곁에 늘 붙어 있었지요. 이가림 교수님한테서는 불문학과 관련된 방대한 지식을 배우고 익혔고요.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연문희 교수님한테서는 프로이트는 물론 미국의 인본주의 심리학에 대해 배우고 익힐 수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영향을 준 것은 책이지요, 책 중에서도 동양의 고전들이지요. 석사 3학기 때인 1979년 봄 이후 석정(石庭) 송각헌(宋恪憲) 선생님을 모시고 동양의 고전들을 읽었는데,『소학』을 읽을 때 가장 많은 깨달음을 얻은 듯싶네요. 그런 뒤에 이어 『고문진보』를 읽고 사서오경 등을 읽었지요. 사서오경 중에서는 『논어』가 내 취향에 가장 잘 맞지 않나 싶어요. 아무 구절이나 뽑아 읽어도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이 『논어』이지요.
마르크스라든지 기타 진보적인 사상을 접한 것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요. 1984년 12월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재구성되고 나서 내가 연구조사분과 간사를 맡았었거든요. 요즈음의 직제로는 한국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의 소장인 셈인데요. 그때 연구조사분과 부간사를 맡았던 것이 김사인 시인이었는데, 나, 김사인, 이재현, 현준만, 최두석, 이창동, 임우기 등이 이 집 저 집으로 몰려다니며 스터디그룹 형식으로 많은 글을 읽었지요. 특히 로젠타리, 누시노프 등의 리얼리즘에 관한 글, 레닌의 「당문학과 당조직」, 모택동의 「연안문예강화」 등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 모임에서는 백낙청 선생님의 모든 저술들을 꼼꼼하게 찾아 읽고 검토하기도 했지요. 해가 바뀐 뒤에는 김사인 시인이 연구조사분과 간사를 맡았는데, 이 공부모임에 채광석, 황광수, 김명인 등도 합류를 했지요. 1980년대 말 한 때는 강형철, 김형수, 고규태, 백진기 등과 함께 마포의 신수동 어느 출판사 사무실에 모여 마르크스 공부를 한 적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런 형태의 공부모임에 줄곧 참여를 해온 것이 나인 듯도 싶네요. 2002년부터인가요. 지금도 2주일에 한 번씩 돈암동에서 모이는 ‘일요고전모임’에 참여를 하고 있거든요. 이 ‘일요고전모임’에서도 배운 것이 참 많아요. 이 ‘일요고전모임’에는 신달자, 유안진, 윤석산, 박종국, 최동호, 한영옥, 이승하, 맹문재, 이수영, 박미산 시인 등이 참여하고 있지요.
영향을 받은 사상에 대해 얘기를 해달라고 했는데, 엉뚱하게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한 얘기를 했군요. 과거의 지식과 지혜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예요. 모더니티에 대한 자각이 없이 리얼리티에 대한 자각은 없지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각이 오늘을 사는 진실이나 진리, 곧 리얼리티를 낳는다는 얘기지요. 물론 오늘을 사는 진실이나 진리, 곧 리얼리티에 대한 자각이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각, 곧 모더니티에 대한 자각을 낳기도 하지만요.
나민애 : 네, 주간으로 계시는 <시와시> 창간사에도 리얼리티가 있는 모더니티, 모더니티가 있는 리얼리티를 강조하셨던 점이 생각나네요. 방금 선생님의 청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더 이전으로 거슬러 가서 이은봉 선생님의 개인사에 대해 잠깐 여쭤볼게요. 우선 선생님께서는 어려서부터 몸집도 작고 힘도 약해 잘하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시 쓰는 것만은 잘했다고 쓰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린 어느 시기부터 시의 습작을 시작하신 건가요? 선생님의 문학청년으로서의 꿈은 어떤 계기를 통해 자각하게 되신 건가요?
이은봉 : 지금 질문한 내용을 내가 어디서 말한 듯도 한데, 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했던 말이에요. 하여튼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키도 작고 몸집도 작았어요. 초등학교 때는 늘 2번이었지요. 유인호라는 친구가 1번이었고요. 그때는 키가 작은 순서로 반의 번호가 정해졌어요.
실제로 처음 시를 써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에요. 다른 글에서도 말했듯이 누가 써보라고 말하기 전에 ‘자기 주도’로 쓴 것이지요. 물론 동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돗자리」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어머니가 시집을 올 때 해온 돗자리가 집에 있었어요. 제사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이 돗자리가 항상 골방 구석에 세워져 있었지요. 하지만 이렇게 쓴 시로 무슨 상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럴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었거든요. 1960년대 초 내가 다닌 공주군 장기면의 당암초등학교에서는 무슨 글을 쓴다든지 하는 분위기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어요. 이런 정도의 문화적 차원에 전혀 이르지 못했던 것이 당시의 당암초등학교였다는 것이에요.
읍내의 공주중학교에 다닐 때는 학내에 문예반이 있었던 듯한데, 나는 문예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어요. 고향 막은골에서 읍내의 공주중학교로 진학했던 나로서는 문예반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어요. 물론 그런 가운데에도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3학년 때 교지에 시를 게재하기는 했지요. 고등학교 때도 문예반 활동을 하지는 못했어요. 당시 학내에는 문예반이 없었지 않나 싶네요. 김영찬, 송근배 등의 선배, 서완환 등의 동기가 학생문인으로 유명하기는 했지만요. 나는 그냥 혼자 소설과 시를 즐겨 읽었을 뿐이에요. 특히 손창섭의 소설과 김소월의 시를 좋아했지요. 홍희표 시인이 국어 선생님으로 부임한 뒤인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지만,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 창작 작품을 모집했는데, 시를 제출해 가작인지, 차하인지 하는 낮은 품계의 상을 받았던 기억이 나기는 합니다.
대전 시내의 고등학교 문예반 연합회인 ‘판도라’에는 다수 참석을 했던 기억이 나기는 하네요. ‘돌샘’이라는 대전 시내의 고등학교 문예반 연합회에도 두어 차례 참석하지 않나 싶고요. 그러나 이들 문예반에서 정식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어요. 문예반보다는 흥사단 아카데미가 훨씬 더 재미있었거든요. 흥사단 아카데미의 친구들이 스케일이나 상상력도 컸고요.
돌이켜 보면 내가 본격적으로 시 비슷한 것을 습작한 것은 재수할 때였던 것 같네요. 《문학사상》(2010년 8월호)에서도 말했듯이 고등학교 때 이미 신구문화사의 한국문학전집, 세계전후문학전집 등과 박종화의 장편 역사소설『임진왜란』, 『자고 가는 저 구름아』 등을 읽었거든요. 그래도 정작 시창작의 길로 들어선 것은 대학에 들어온 이후부터였어요. 재수를 하고서도 대학입시에 낙방을 해 지방대학에 가기로 했을 때는 시라도 써야 나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거든요.
나민애 : 선생님의 청년기에는 주변 시인들 어느 분과 인연을 맺으셨나요? 대학교 시절 김현승 시인을 만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데요 선배 시인, 선생님 시인 등을 비롯해서 선생님의 젊은 시절 인간적․문학적 교류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이은봉 : 문학공부를 하기로 작정한 뒤 내가 최초로 만난 시인은 나태주 선생이었어요. 나태주 시인이 누구신지는 나민애 선생이 더 잘 알겠지요. (웃음)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을 한 나태주 시인이 막 첫 시집 『대숲 아래서』를 간행했던 1973년 가을이었어요. 내가 대학 1학년 때 가을이었지요. 대학에 ‘여명문학회’라는 동아리가 있었는데, 그 동아리의 선배들이 이제 막 시집을 출간한 나태주 선생을 초청한 것이지요. 문학에 대한 소견도 듣고, 시집에 실려 있는 시의 낭송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뒤 나태주 시인과는 따로 편지도 주고받으며 지금까지도 계속 세교를 하고 있지요. 이 무렵에는 박용래 시인도 자주 뵐 수 있었는데요. 박용래 시인은 내가 살던 용두동과 별로 멀지 않은 오류동에서 살았거든요.
다형 김현승 시인을 가까이에서 뵌 것은 내가 대학 2학 때, 그러니까 1974년 봄의 일이었지요. 다형 선생님이 강의를 하던 ‘시론’, ‘문예사조’, ‘시창작 실기’ 등의 과목을 도강하던 기억이 새롭네요. ‘시론’은 3학년 과목, ‘문예사조’와 ‘시창작 실기’는 4학년 과목이었지 않나 싶은데요. 2학년 때 도강을 했다가 들켜 심하게 혼났는데, 심지어는 타이어 슬리퍼로 얻어맞기까지 했어요. 건방지게 2학년이 3학년 강의를 들으러 왔다는 것이지요. 3학년 학생들이 가까운 동춘당으로 학술답사에 갔다가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강의실에서 몸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날 선생님의 역정은 대단했어요. 내년에 똑같은 과목을 정식으로 들으면 시시해지고 재미없어진다는 것이 다형 김현승 선생님의 말씀이었어요. 하지만 그때 김현승 선생님의 강의를 듣지 못했으면 영영 듣지 못했을 거예요.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에서 설교를 하다가 쓰러져서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거든요. 선생님이 돌아가던 1975년 봄 선생님의 이름으로 주던 학보사에서 주최하는 제2회 다형문학상 수상자가 나였어요. 1974년 봄의 제1회 수상자는 박만춘 선배였고요. 등록금이 7만 5천 원이던 때였는데, 상금이 5만 원이었어요. 당시 5만원은 꽤 큰돈이었어요. 상금으로 여자 친구의 원피스, 머플러, 속옷 등을 사주었던 기억이 나네요.
나민애 : 보통은 상금을 술값으로 다 썼다, 이렇게들 말씀 하시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의 여자 친구 분이 사모님은 아니 실거라 생각됩니다만, 너무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괜찮으실까요?
이은봉 : 아무 것도 모르고 까불던 철부지 시절의 얘기인데요, 뭐. 그냥 웃고 말겠지요. 아무튼 「귀 기울이고 들어 봐」라는 당시의 내 수상작은 김지하의 시로부터 영향을 받아 쓴 시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러운 일이지요. 실질적인 심사는 이성부 시인이 맡아서 했어요. 이성부 시인은 그때의 나를 지금까지도 잘 기억하고 계세요. 그런 이후 김현승 선생님과 급속히 가까워졌는데, 이소룡이 주인공으로 출현하는 영화를 좋아하시어 따라갔던 기억이 나네요. 원고를 들고 수색의 선생님 댁에 들려 전기곤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끓여주는 커피를 마시던 기억도 나고요. 그럴 무렵에 이가림 선생님도, 윤삼하 선생님도 처음 뵈었지요. 물론 정작 이분 선생님들께 좀 더 많은 것을 배운 것은 방위병으로 군역을 마친 1976년 가을 이후부터이지만요. 이가림 선생님, 김종철 선생님을 따라서 대전 신도극장 근처의 젓갈 백반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자리에서도 듣고 배우는 것도 큰 공부였지요.
1975년 4월 김현승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1977년쯤부터인가 시 강의를 공주대학교의 조재훈 선생님이 맡아 했어요. 선생님은 강의를 마친 뒤 곧장 공주로 가지 않고 따로 나를 불러 시내의 찻집에서 시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어요. 그런 자리에서 배운 것도 굉장했지요. 이들 선생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어요. 1980년대에 들어 『삶의문학』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친구들이 다 이들 선생님으로부터 주목을 받았지요. 그때의 『삶의문학』 동인 중에는 나, 이재무, 임우기 정도가 지금까지 글을 쓰고 있지만요. 물론 『삶의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은 1983년 이후의 일이지요. 『창과벽』의 발전적 형태인『삶의문학』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글에서 자세히 말한 적이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지요.
나민애 : 선생님 작품에는 ‘연애’의 감정을 담은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인생에서 연애의 시기가 분명 있었을 텐데 선생님께서 굳이 배제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선생님의 인생에서 ‘연애’에의 기억과 사건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요?
이은봉 : 그렇지 않아요. 발표는 했지만 시집에 넣지 않은 연애시, 사랑시가 시집 한 권 정도는 될 듯싶어요. 언젠가는 연애시, 사랑시를 모은 시집을 한 권 간행할 거예요. 그동안 간행한 시집 8권에도 매 번 한 두 편씩은 연애시, 사랑시를 넣었어요. 겉으로 표가 나지 않았다면 참 다행이네요. 연애시, 사랑시와 관련해 내가 시도한 위장과 장식, 수사가 성공한 셈이니까요. 물론 사랑시의 대상이 아내인 경우도 있기는 해요. 이 또한 위장과 장식, 수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내게 연애의 시기가 왜 없었겠어요. 비밀을 폭로하는 것인데, 내 인생에서 ‘연애’는 언제나 진행형이었어요. 그것은 혼전이나 혼후나 마찬가지이고요. 더러는 휴지기가 있었지만요. 다만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시끄럽고 요란해야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잖아요. 하지만 사랑이나 연애는 좀 은밀해야 하지 않나요. 아무튼 감정으로서의 연애는 그친 적이 별로 없어요.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이 메마른 사막의 세상을 건널 수 있겠어요, 그리고 어떻게 계속해서 시를 쓸 수 있겠어요. 으음, 사랑이나 연애에 관한 세세한 얘기는 나중에 시집으로 말하기로 하지요.
나민애 : 감정으로서의 연애는 그친 적이 별로 없다는 말씀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시인은 늘 사랑에 용감하고 성실한 것 같아요. 연애와 결혼은 또 다른데, 시인의 아내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개 문학인들은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늦은 시간까지 술 한 잔 걸치는 일도 잦잖아요. 시인과 결혼해 사는 일을 사모님께서 그런 일들로 힘들어하지는 않으셨나요? 우리에게 문학인으로서의 선생님 모습은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데, 가정에서는 어떤 아버지, 어떤 남편이신가요?
이은봉 : 대부분의 시인들이 대책 없이, 자연 그대로, 욕망에 쫓기면서 살아가지요. 내게도 그런 면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요. 안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기는 하지만요. 나는 문인들이 비정상적인 행태, 상식적이고 뻔한 파격, 작위적인 기행, 위악적인 포오즈 등을 아주 싫어해요. 연출된 파행 말이에요. 나는 시를 수행의 한 형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나’를 갈고 닦는 형식, ‘나’를 더 높은 정신의 경지에 올려놓는 형식이 시라는 얘기지요. 시에는 반드시 시인의 정신차원이 담기게 마련이거든요. 문단에는 내가 범생이로 알려져 있잖아요. (웃음) 그런데 실제로는 범생이로 사는 것이 훨씬 더 높은 정신차원으로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가장으로서의 나, 남편으로서의 나, 아버지로서의 나도 나는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평범하게 살려고, 성실하게 살려고, 표나지 않게 살려고 무척 노력을 하지요.
아내와의 연애, 결혼, 살림 등에 대해 얘기하려면 시간이 좀 더 많이 필요해요. 그러니 몇 가지만 간략히 얘기할게요. 아내는 내가 석사 3학기 때, 그러니까 석정(石庭) 송각헌(宋恪憲) 선생님을 모시고 『고문진보』를 읽을 때 처음 만났어요. 아내도 『고문진보』를 읽는 석정 선생님 반의 학부 학생이었어요. 강의가 끝나면 석정(石庭) 선생님은 자주 나와 아내를 불러 저녁을 사주셨어요. 식사 뒤에는 커피도 한 잔씩 사주시고요. 선생님께서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일부로 묶어주지 않았나 싶어요. 아내와 결혼을 하기까지에는 사연이 좀 있는데,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지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처복(妻福)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에요. 아내 덕분에 계속 시도 쓰고, 공부도 할 수 있었거든요. 아내는 참 좋은 여자예요.
나민애 : 선생님께서는 사모님 얘기, 그리고 장성한 두 아드님 얘기를 하실 때 정말로 행복한 표정, 뿌듯한 표정을 하고 계세요. 그것만으로도 선생님의 개인적 삶이 지닌 든든한 유대와 세월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참, 얼마 전에 아드님이 논산훈련소에 입소했죠. 가족에 대한 언급도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아드님을 훈련소에 보내고 선생님께서는 숨어서 울지 않으셨을까 생각도 되는데요. 아들에 대한 그리움도 더해지실 테고요. 그러다 보면 아들을 위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실제로 창작하신 작품이 있나요?
이은봉 : 그래요? 몰랐네요. 내가 그런 표정을 지어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해 내가 긍정적인 자아개념을 갖고 있나 보네요. 물론 부정적인 자아개념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요. 작은 애가 군대에 갈 때 조금 안쓰러웠던 것은 사실이에요. 논산의 육군훈련소에 따로 떼어놓고 오려니까 마음이 참 편치 않더군요. 이 녀석은 3수를 해서 겨우 겨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거든요. 그래도 숨어서 울지는 않았어요. 큰 애가 군대에 갈 때는 말할 것도 없었고요. 큰 애는 군대에 보내는 것 자체가 힘들었거든요.
큰 애와 관련해서는 시를 쓴 적이 있어요. 큰애가 다섯 살 때였어요. 유아원 미끄럼틀에서 팔을 다쳐 오래 입원을 했었어요.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한 뒤에도 오랫동안 병원에 다니며 재활치료를 했지요. 그때의 얘기를 시대상황과 관련해 시로 쓴 적이 있어요. 생각해 보니 아내를 대상으로 쓴 시는 있어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쓴 시는 없네요. 물론 아이들을 위해 동시를 쓴 적은 있지만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요.
나민애 : 제가 뵙기에 선생님께서는 활동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굉장히 바쁘게 스케줄을 소화하시거든요. 회의, 강의, 그리고 여기 저기 이동하면서 사람을 만나야 할 일도 잦고요. 지난 1년간 사무총장직에 있을 때도 정말 바빴을 텐데 꾸준히 신작시를 선보였어요. 시를 위한 어떤 특별한 시간이나 비법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얗게 밤을 밝히며 컴퓨터로 시를 쓰는지, 걸어가면서 작은 노트에 정리하는지, 그리고 시를 쓴다면 계속 다듬고 고치는 편인지 아니면 첫 시상을 유지하는지 등등 선생님께서는 시를 쓸 때 어떤 방식으로 시상을 옮기는지 구체적인 방식이 궁금합니다.
이은봉 : 바쁘게 이동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은 제가 처한 삶의 형편 때문이지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광주대학교 문창과 교수로 있는 데도 서울에서 간행하는 《시와시》의 주간을 맡고 있고, 한국작가기회의 소임을 맡고 있으니까요. 형편이 이러니 너무 탓하지 말고 이해해주세요. (웃음) 그러니까 이번 질문은 창작의 비밀을 얘기해 달라는 뜻이겠군요. 일단은 일필휘지(一筆揮之)하는 스타일에요. 더러는 오래 붙잡고 붓방아를 찧으며 시를 완성시키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요. 영감이나 직관으로 시를 쓰는 편이라는 얘기지요. 50행이 넘는 긴 시도 초고는 대개 10분 안에 마무리를 짓지요. 짧은 시는 3분 안에 초고를 마치고요. 들뜬 영혼으로 순식간에 시를 쓰는 스타일인 셈이지요. 물론 초고를 쓴 뒤에는 수도 없이 다듬고 고치지요. 하얗게 밤을 밝히며 컴퓨터로 시를 쓰는 경우는 많지 않은 셈이지요. 언제나 초고는 연필로 작은 노트에 쓰지요. 그래서 늘 작은 노트와 연필을 몸에 지니고 다녀요. 시가 찾아오면 곧바로 받아 적으려고요. 지금까지 쉬지 않고 시를 써온 것을 보면 시가 나를 아주 좋아하나 봐요. 하여튼 걸어가면서 작은 노트에 시의 초고를 쓰는 경우도 없지 않고, 운전을 하다가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초고를 쓰는 경우도 없지 않지요. 글쎄요. 늘 ‘시’라는 화두를 잃지 않고 있으니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나민애 : 시를 쓰고 정리하는 선생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사모님이 계실 텐데요. 선생님 작품의 첫 번째 독자는 사모님이신가요? 사모님이야말로 시인이 아니면서도 시인을 개인적으로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을 위치에 놓인 분인데요, 사모님께서는 선생님의 작품을 어떻게 읽으시나요?
이은봉 : 아내는 본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특히 내 시를 좋아하지요. 실제로는 좋아하는 척하는 지도 모르지만요. 시를 쓸 때마다 시를 읽어보라고 권하지는 못하지요. 서로 사는 곳이 다르니까요. 나는 광주에서 살고, 아내는 서울에서 살잖아요. 그래도 가끔은 새로 쓴 시를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더러 몇 군데 고칠 곳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은 칭찬 일색이에요. 내가 좌절할까 봐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요.
나민애 : 네, 그렇군요. 선생님의 창작 이야기를 들으니까 떠오르는 구절이 있어요. 선생님께서는 시론집에 ‘시에 함몰되어 산다’고 적으신 적이 있는데 이 부분을 저는 참 복되면서도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선생님께서는 시인의 인생을 살명서 시에의 함몰이 정말 힘들다고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글 쓰는 사람 누구에게든 정말 글쓰기 자체가 힘겨워질 순간이 있을 수 있잖아요. 선생님은 시가 정말 힘들 때, 시를 놓고 싶을 때가 있었나요. 그때 어떤 마음으로 견뎠는지 후배 시인들이나 후학들에게 지침을 알려 주세요.
이은봉 : 단 하루도 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으니 늘 ‘시에 함몰되어 산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겠네요. 그만큼 시를 쓰기에 좋은 조건과 상황에서 살아왔다는 뜻도 되겠지요. 물론 시가 싫어졌을 때도 없지는 않았어요. 좋은 시가 찾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고요. 하지만 특별히 정서가 메마르거나 건조해진 시기가 따로 있지는 않았던 같아요. 나는 부지런히 쓰다 보면 좋은 시가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타작이 많다 보면 개중에 수작이 튀어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닭이 많다 보면 더러 학도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요. 결핍이 충족을 낳지만 충족이 결핍을 낳기도 하지요. 하나의 충족은 하나의 결핍을 꿈꾸게 하거든요.
나민애 : 선생님의 열정적인 삶과 시쓰기의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선생님의 다음 시집에는 분명 ‘막은골’ 연작을 포함한 새로운 시편들이 포함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새 시집 구상에 대해서 어떤 기획을 하고 계신지, 최근 관심사는 무엇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이은봉 : 다음 시집의 구상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도 얘기를 했는데, 일단은 자연 속에서 삶의 원리를 발견하고, 삶 속에서 자연의 원리를 발견하는 내용의 시집을 먼저 간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의 관심사는 여전히 자본주의, 곧 근대 밖의 세계에 대한 꿈이지요. 오늘의 인간이 나날의 현실 혹은 삶과 관련해서 어떻게 자본주의의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근대의 밖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늘 관심사에요. 우선 개별적인 차원에서 물어볼게요. 인간이 아주 높은 교양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이 가능할까요, 아주 무지한 가슴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이 가능할까요? 아니면 아주 이성적인 품성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이 가능할까요, 아주 비의적인 품성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이 가능할까요? 하여튼 나는 늘 질문 중에 있어요. 확답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에요.
나민애: 인터뷰 응해주시느라고 긴 시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 기회에 선생님의 생각과 시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리고요. 개인적으로는 말씀하신 연애 시편을 담은 시집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올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2년 3.4월호)
첫댓글 잘 읽고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