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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종과 나비> 프랑스, 줄리앙 슈나벨 감독, 드라마, 111분, 2007년
이거 맥빠진다. 기껏 내용을 쳤더니, 에러가 발생해 날렸다. 그래 다시 쓰려니 그게 또 쉽지 않다. 김빠진 콜라같이. 제목이 낯익어서 처음에 내가 본 영화인가 싶었다. 하지만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봤고, 보고나서야 <잠수복과 나비>라는 책이 있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어쩐지 수상했다. 아름다운 영화다. 잠수종은 불구가 된 육체의 구속을 나타내고, 나비는 기억과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자유롭게 날아가니는 영혼의 자유를 의미한다. 정말 우리는 아파봐야 세상을 안다. 감각은 물론 숨쉬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모두를 너무나 당연하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다 독감이라도 걸리면 정말 먹고 숨쉬고 자는 것은 물론 맨날 보는 사람들 모두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지 절감한다. 병과 죽음이 없다면 인생은 인생이 아닐 것이다. 상대성이 없다면 존재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하다. 이 영화는 생의 감각을 자극한다. 바로 어제 <비투스>를 소개하며 <베를린 천사의 시> 얘기를 한 적 있다. 인간의 삶을 동경해 따분한 천사를 거부하고 겨울 아침 동서를 가른 베를린 장벽 아래 내동댕이 쳐진 천사가 온몸의 추위를 느끼고, 손이 긁혀 피가 나자 피맛을 처음 보고, 뜨거운 커피를 감미롭게 마신다. 지지고 볶는 일상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새로울 수 있는 것인지 잘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러고보니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차이도 생각해볼 만하다.(생략) 전신불구가 되어 유일하게 왼쪽 눈만 움직일 수 있는 도미니크의 글쓰기를 생각할 때, 글쓰기가 갖는 의미가 새삼스럽다. 기억과 상상! 그 사이를 비행하며 삶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는 주인공에게 정말 가혹한 병은 180도 인생전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글(말)도 자연 간절해지는 법. 명예과 성공을 위해 쓰던 글이 사랑과 아름다움을 기록하는 글로 바뀐다. 요며칠 새 나도 그런 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글을 쓰되 정말 말의 힘-옛날 사람들은 말을 주술적 힘이 있는 것으로 알았고, 그래서 말조심을 하며 살았다. 우리는 참으로 농담처럼 말을 지껄이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을 제대로 인식하고 사상과 상상을 사랑의 원칙에 의해 사용할 수 있다면, 남의 평가를 떠나 그 자체로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이 나를 위한 글쓰기이든 남을 위한 글쓰기이든, 딴 맘 불순한 맘은 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태어나 말을 하고 살는데 왜 그렇게 어리석고 죄되는 말을 많이 하고, 다른 좋은 가능성을 버리겠는가? 나비 생각! 장자의 나비 때문이라도 나비는 익숙하다. 죽은 할머니가 나비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고등학교 친구한테 들은 적이 있다. 나비에 대한 느낌은 내게도 남달라 시로도 몇번 써본 게 있다-아쉬운 수준이지만. 그 연약한 날개로 바람에 날리듯 팔랑팔랑 나는데 이 험한 세상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듯하면서 나비는 날아간다. 영혼이 타기에 가장 훌륭한 비행체같다. 그래서 나비를 보면 묘한 '느낌'을 갖게 된다. 어떤 공감이 생긴다. 누구나 나비가 있다. 고치로 한번도 날아보지 못한 날개를 가진 사람도 있고, 있지 않은 어떤 세상을 혼자 날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벼랑을 위태롭게 부딪치는 사람이 있고, 바다 위 아슬아슬 태풍을 견디며 건너는 사람도 있다. 수천수만가지의 꽃이 만발화 천국의 꽃밭을 비행하는 사람도 있다. 나비는 나는 게 아니다. 두 날개로 한 세상을 여는 것이다. 당신도 날개가 있다. 매순간 기억과 상상의 날개짓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날개짓으로 열리는 세상을 날고 있다. 당신의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도미니크는 제법 재미나게 세상을 여는 법을 알려주는 듯하다. 결심이 필요하다. 결단이 필요하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빛이냐, 어둠이냐! 자 이제 당신의 두 날개짓을 힘차게 하고 나는 것이다. 바람이 불고 있다.
- 제작노트 - 프랑스 패션 전문지 ‘엘르’ 편집장 ‘쟝 도미니크 보비’의 감동 실화!!
-시놉시스- ‘잠수종’ 속에 갇혀 버린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