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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7477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용표(호롱불)
장수군수님께 드리는 글
민원인 : 최용표
주 소 : 전북 장수군 장수읍 노하2길 4
전 화 : 010-2641-8575
존경하는 최용득 군수님
우리 장수군은 논개님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68년전인 1846년 장수고을 정주석 현감이 논개가 장수태생 이라는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비문을 남김으로서 장수에 공식적인 논개님 선양이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듯합니다.
논개님 선양에 발자취를 남긴 역대 장수군수님
1. 1846년 정주석 장수현감 - 장수향교 부근 옥거리에 논개는 장수인이다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 세우다
2. 1954년 03월 홍석모 제6대 장수군수 - 의암사(義巖祠)건립 발기위원장
3. 1954년 10월 김윤철 제7대 장수군수 - 의암사건립 추진위 고문
4. 1956년 김윤철 제7대 장수군수 - 의암사 준공
5. 1973년 04월 김준수 제21대 장수군수 - 논개사당 성역화 사업 군민대회
6. 1974년 11월 김준수 제21대 장수군수 - 두산리 산3번지 논개사당 이전
논개사당 준공식
7. 1974년 12월 박판서 제22대 장수군수 - 사당내 담장설치
8. 1979년 육종진 제25대 장수군수 - 외삼문, 광장조성등 다수 신축공사
9. 1980년 고광순 제26대 장수군수 - 배수로공사
10. 1981년 김용신 제27대 장수군수 - 수목이식, 식재등 공사
11. 1986년 김하영 제31대 장수군수 - 기념관 관리소 화장실 휴게소 공사
12. 1988년 하광선 제32대 장수군수 - 잔디공사 담장설치
13. 1992년 김종래 제36대 장수군수 - 광장포장 및 주변공사
14. 1996년~ 김상두 제39.40대 장수군수 - 광장확장, 석교가설, 관리사등 다수공사
(조경,전기,토목,통신등)
15. 1996~2000년 김상두군수 - 논개생가지 복원사업 2000년 9월 준공식
15. 2004년~ 장재영 제42대 장수군수 -기념관정비, 비각, 변와등 다수공사
16. 2010~2012년 장재영 제44대 장수군수 - 의암공원 테마숲 조성
17. 2014년 9월 최용득 제45대 장수군수 - 길따라 찿아가는 의암주논개
발자취 책자 발간.
작고 큼을 헤아릴수 없이 논개님의 흔적을 찿아 피나는 노력으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내적으로 강화하고 정신적으로 논개님의 얼을 받들고 미루어 놓았던 일들이 행여
있다면 이번 기회에 완전 청산 하시길 간곡히 청하여 봅니다.
위 민원인은 논개님의 흔적을 찿아서 현장방문 및 관련서적, 기타자료 를 통하여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다가 장수군지 및 의암논개선양회에서 최근에 발표한
"길 따라 찿아가는 의암주논개 발자취"란 책 그리고 진주에서 발표한 문헌들
그 어디에도 흔적없고 세월의 흐름에 흐지부지 우리에게 잊혀질 사건 이라해도
무방 할듯한 불편한 사실을 발견하고 백방으로 해당 관련 기록들 찿아서 공부하고
증언듣고 나름으로 심각성을 느끼어 봅니다
개인의 힘으로 싸우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이고 한계가 있기에 논개의 고장인
장수군 에서 좀더 연구, 검토하여 논개열사님 선양에 도움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이글을 올립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하고 합당한 논리로 풀어보고자 본인은 주관적인 관점 보다는
객관적으로 표기하고자 합니다 구국충절의 대명사 장수의 3절인물 임진왜란의영웅
한국인이 본받아야 할 여성상,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도 아깝지 않는 논개님의 가묘와
영정 그리고 비문이 임진왜란때 우리땅을 허락없이 침범한 전범들이 잔재해있는 적국
일본 후쿠오카에 있다고 합니다
다행이도 논개님 영정은 반환되어 현재 장수군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해주최씨 종친회의 끈질긴 요구로 1998년 8월 9일 논개영정반환, 논개묘반환
논개영혼반환, 일.한 합동위령제의 철폐를 즉 4가지를 요구하며 협조를 요청
하였지만 훗날 논개영정만 반환 받았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주최씨 종친회의 끈질긴 노력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
자못 궁금하기에 나름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오래전부터 해주최씨 최경업장군
후손들은 이 문제를 연구하고 분석하여 일본국에 항의하고 현지 후쿠오카에
방문해서 논개님 영정반환 및 몇가지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논개님이 이 고장 태생이라고 생가지복원 및 사당을 만들어 예를 갖추고 장수의 3절로
이름나 있는 우리 장수군에서도 알고 있으리라 사료합니다
일본인들의 잣대로만 기준해서 판단 하는것이 바로 역사왜곡입니다
지금도 해결되지 못한 사안에 대하여 추후 장수군 계획은 어떠한지 진정 궁금합니다
최경업장군 후손들인 민간인들도 따지고 항의하는데 우리군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답변이 기다려 집니다.
우리가 역사적인 진실을 책에서만 배운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여 직접 보고 느끼는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사료합니다 역사란 왜곡될수도 있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춰질수도
있기에 이 기회에 현지를 방문 답사하여 확실히 정립하고 옥석을 가리길
진심으로 빌어봅니다 후손들에게 부끄러움을 절대로 남기지 말길 간곡히
청하여 봅니다.
이에 본인 최용표는 장수군수님께 정중히 건의를 드리는 바입니다
현지답사를 위해 장수군공무원대표, 장수군의회대표, 의암주논개선양회대표
언론대표, 민간대표, 통역등 적절한 인원을 선발하여 일명 “논개님구하기”
대책위를 구성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연구하며 현지를 방문하여
진위여부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여 아직 돌아오지 못한 논개님의 흔적이
일본에 잔재해 있다면 하루빨리 청산하여 지하에 계신 주논개님의 원혼을
달래 주는것이 후손된 자들의 도리일듯 합니다 잘못된 인본인들의 왜곡이
바로 잡히는 날 논개님도 편안히 눈감고 천년잠을 택할 것 입니다.
설명 보충을 위하여 자료를 첨부합니다.
논개님의 흔적을 찿아서
첫째로 논개는 춘향이나 심청이처럼 소설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다
둘째로 논개는 장수태생임이 밝혀졌다
셋째로 논개는 나라를 구하고자 왜장을 끌어않고 몸을 바친 열사다.
* 논개님은 실존 인물입니다.
논개님은 진주성 2차대첩에서 패한후 사모하는 최경업장군이 목숨을 거두자
최경회 따라서 자결을 선택 할수도 있었지만 진주성싸움에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민중들과 끝까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자결한 지아비 최경회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 왜놈의 대장을 죽이고 나도 같이 죽고자 하는 확고한 신념과
비장한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적장을 껴안고 꽃다운 스무살 나이에
남강 푸른물에 몸바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논개가 껴안고 죽은 적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 라는 일본군 장수였는데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죽음은
뜻밖에도 큰파장을 몰고 옵니다 왜군은 호남의 곡창지대를 겨냥하여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을 죽을힘 다해서 빼앗은 것입니다.
다 익은밥에 코 빠트린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1차목적을 달성하고 호남의 진격을 위해
다짐하는 승리의 축하연 자리에서 그들의 용맹한 장수를 잃었으니 아마도 천군만마를
잃은 것 입니다 본인 최용표는 결과적으로 논개 순국으로 인하여 피흘리지 않고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키게된 요인중의 하나가 된 것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창기(娼妓)로서 받아야할 수모와 모멸을 마다하지 않고 오로지 반외세
조국 전쟁의 신성한 목적에 복무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이 짐작할 수 없는 숭고한
사랑을 실천한 근대적 혁명적인 그 여인 우리는 그 여인을 “논개”라 부릅니다.
논개의 순국은 왜놈들이 우리나라에서 철수하게된 동기중에 하나입니다
당시 진주민을 위시하여 인근에서는 소문이 널리퍼져 다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시대 사대부가 강해서 특히 여자는 배척한 시대라서 문서나
기타 기록으로 남아 전해진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시대이기에 구전으로 내려왔습니다
먼 훗날 유몽인이쓴 어우야담에 논개의 순국 사실 및 논개 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밝혀
전해집니다 이것으로 보아 논개님은 실존인물 이다 누구도 부인못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 논개님은 장수태생입니다.
논개님의 장수태생이 밝혀진것은 최초로 “호남절의록”에 희미하게 밝혀지고
그뒤 호남삼강록, 호남읍지, 진주목읍지, 청구야담등 수많은 곳에서 논개는
장수가 고향 이라는게 속속들이 밝혀집니다 사실은 문서가 나오기 전에도
진주민들 그리고 목격자들이 논개, 논가, 이애미등으로 불러지면서 논개는
장수인이다 입에서 입으로 꾸준히 이어져 내려 왔습니다
이 모든것을 토대로 훗날 장수현감 정주석이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비석을 세우고 현재까지도 논개사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국가 공인된 사전에도 논개는 장수인이다 확신하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 적장을 유인하여 의거 합니다.
대체적인 견해는 가등청정의 부하로 조선에 건너와 진주성 공격의 선봉대장 이었던 毛谷村六助
(게야무라 로구스케)라 합니다 이는 일본에서 유명했던 검객으로서 적국 미녀의 손에 죽었다는
이유로 무덤이 없었으며 1976년 九州의 유지들이 건축사 上塚博勇을 파견하여 진주의 흙을
가져다가 九州英彦山麓(규주영언산)에 무덤을 만들었다 합니다
이처럼 일본에서도 논개에 의하여 죽은 그들의 장수를 잃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임진록’(壬辰錄)이라는 야사를 보면서 논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본이 40여종이 넘는다는 작자 미상의 ‘임진록’에는 논개를 논가(論哥) 옥선(玉仙)
모란(牧丹)이라고도 적고 의암을 낙화암이라고 하기도 했으나 논개의 의거에 대해서만은
잊지 않고 기록 하였습니다 어떤 ‘임진록’에는 논개가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를 끌어안고
죽었다거나 심지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끌어안고 죽었다고 기록해 독자를
즐겁게 했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러한 과장된 표현은 임진왜란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나타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일본 후쿠오카 논개님 영정과 가묘에 대한 韓.日 양국의 견해
세계환단 학회장 백산 박성수교수는 우연한 기회에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에 있는 게야무라의
고향 후쿠오카(福岡)현 다카와(田川)군 소에다(添田)정을 찾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 곳에
게야무라의 묘와 추모비 그리고 논개의 기념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달려 갔다고 한다
그 곳은 깊은 산 속이어서 와 보는 사람은 적은 것 같았는데 이럴 수가 있는가 당황했다고 한다
왜장인 게야무라의 기념비라기 보다 일종의 커다란 가묘(假墓)였다 바로 그옆 한쪽 구석에
논개의 가묘가 초라하고 불쌍하게 서 있지않는가 도대체 이런 고약한 만행이 또 어디 있을까
누가 보더라도 두 남녀가 정사 라도 한 것 같이 나란히 정답게 누워 있는 것이다
누가 비문을 썼냐고 알아 보았더니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이었다고 한다 한국인도 그냥 한국인
아닌 한국 공무원이었다고 한다 주)후쿠오카총영사 박임수(朴任洙)가 1995년에 이 글을 써 주고
1997년 그 제막식에 후임총영사 임상재(任相宰)가 임석 하였다고 하니 이들 두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한국 공무원이 비문 써
게야무라 라는 자는 부당하게도 지금 임진왜란 때 세운 공로로 일본 기타큐슈에 있는 나고야
(名古屋) 소재의 희전신사(喜田神社)에 제신(祭神) 으로 이미 모셔져 있다
6만명이 넘는 우리 조상을 죽이고 그 공으로 귀신이 된 자인데 그런 자에게 한국의 잔 다르크
논개를 바쳐야 하는가 ?
무엇이 그리 좋다고 비석에 글을 써주고 그자의 장례식에까지 참석했다는 말인가 게야무라는
일제 때까지 일본 무사도의 상징으로 악용돼온 역사적 인물이다 살아서는 한국인을 죽이고
죽어서는 일제 침략의 도구가 된 게야무라인데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인 두 사람이 그 식전에
참가하다니 될 말인가 ?
이 두 사람은 다시는 대한민국 땅을 밟지 말아야 할 것이다 現 후쿠오카시 한복판에 후쿠오카성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거기에 가보면 이 성은 한국의 진주성을 본떠 조성되었다고 적혀있다
왜군이 얼마나 진주성 공격에 애를 먹었던지 임진왜란에 패전한후 진주성을 모방해 성을 쌓기
까지 하였던 것이다.
게야무라는 만일 논개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앞서 이야기 한 희전신사의 제신이 되지도
못하였을 것이고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에 진주성을 본떠 성을 쌓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게야무라는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진주성을 공격해 진주시민을 무차별로 죽인 살인마
장본인이다 우리는 해마다 진주 삼충신과 더불어 장수에서 논개를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명색이 외교관이라는 놈이 그렇게도 역사를 모르고 망신을 떨어야 하겠는가.
지금도 일본에서는 게야무라를 주제로 하는 가부키(歌舞技)를 상연하고 있다
그 내용은 게야무라가 일본 제일의 효자요 동시에 처가의 원수까지 갚아준 일본 사무라이의
모범이라는 것이다 가부키란 일본이 자랑하는 전통 창극 즉 오페라다
이 창극 가운데 충신장(忠臣藏)이라는 극이 있는데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하다
그 다음이 게야무라의 창극이라고 하니 기막힌 역사왜곡이다 이 극에 따르면 게야무라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를 따라 저 멀리 함경북도까지 올라가 호랑이와 싸웠고 남쪽으로
도망해서는 제2차 진주성 공격에서 용명을 떨쳤다 비록 그가 제1착 입성에는 실패했으나
가장 공이 큰 장군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되어 있었다
발 빠르고 힘이세기로 유명했고 가토 기요마사에게 유일무이한 부장이었다
그런 그가 연약한 여인 에게 힘없이 죽으니 만병을 잃은 것보다 더한 슬픔이었다
게야무라는 산골 출신으로 물에 들어가 수영해본 일이 없는 ‘맥주병’이었다
그런데다 술에 취해 있어 논개의 팔을 뿌리칠 수 없었다 ‘임진록’에 의하면
그가 물속에서 열 번이나 떠올랐으나 기어이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경회장군의 후손들이 제공한 자료에 의한 것
1976년 임진왜란 당시 진주 남강에서 논개 열사에 의해 죽은 적장을 기리는 승려를 자칭하는
上塚博勇(우에즈가 히로유우)이라는 자가 진주를 찾아와 진주의 유지들과 진주시장을 설득하고
일본 후쿠오카 한국 총영사의 도움을 얻어 '논개와 적장의 영혼결혼식'을 추진하고 마침내 사당을
세워 우리나라 에서 가져간 논개 열사의 영정을 적장과 적장의 처 그리고 처제와 나란히 합사하여
마치 논개 열사가 적장의 애첩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시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최경회장군의 후손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만인이 공노할 일' 이라며 현지에
모셔진 논개 열사의 '영혼묘비'등을 반환하려는 노력을 백방으로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언뜻 들어서는 자잘못을 분별하기가 쉽지않은 이 이야기는 참으로 교묘하게 논개열사의
충절을 호도하고 우리 한국인을 모욕하고 있기 때문에 몇가지로 논점을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논개 열사와 적장의 영혼결혼식은 가당키나 한 일인가 논개 열사의 의거는 조국을 위한 충절의
발로이다 이것은 논개 열사와 관련된 모든 사실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논개열사와 적장과의 관계는 어느 개인의 관계가 아닌 수천의 조선인의 감정과
왜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며 전쟁을 일으켜 인명을 살상한 살인과 폭력에 대한 과감한 응징이다.
거대한 폭력앞에 나약한 여인의 몸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꺼려하지않고 당당하게 맞선
논개 열사의 의지는 조선의 한 여인으로서가 아니라 전쟁을 경계해야할 인류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누가 어떻게 감히 논개열사와 침략자 적장의 영혼 결혼식을 거론할 수 있단 말인가!
'영혼결혼식'이라는 말의 발의 자체가 명분과 논리가 분명한 오늘 우리나라에서 있을 수 조차
없는 것이지만 천보나 양보하여 논개열사의 후손들이 원한다 해도 우리 국민의 정서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엉터리 같은 '영혼결혼식'이 실제로
이루어 졌다 우리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백주대낮에 도둑처럼 영혼 결혼식이 추진되었다
엉터리 '영혼결혼식'을 통하여 일본으로 가져간 논개 열사의 영정은 일본 후쿠오카에 소재한
왜적장의 사당인 보수원에 모셔져 있었다.
사당에는 논개열사의 영정 옆에 왜적장 처의 묘석과 왜적장 회화등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진주문화원장 李命吉의 지령도 자랑스럽게 놓여져 있다
또 사당 내에는 진주에 사는 신세규(愼世揆)씨의 '君子之交'라 쓴 묵죽 액자가 걸려있다
사당으로 가는 길가에는 한국교포 단체장들의 입간판이 일본인들의 입간판과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엉터리 ‘영혼결혼식’이 이루어지기 까지 그러니까 일본인의 승녀로 신분을
위장한 上塚博勇이란 자가 우리나라 진주를 찾아와 진주시에 소재한 호국사 라는 절의
주지인 현산(玄山)을 만나 이 사실을 협의하였고 이어서 진주시의 유지 및 진주시장의
협조와 재일 후쿠오카 한국총영사(박임수)등과 일본 후쿠오카 당국까지 개입하여 마침내
엉터리 행사가 치러졌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진주시는 上塚博勇에게 감사장을 수여하는 등 도저히 정상인 으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였다 특히 '영혼결혼식'을 시작한 일본의 승려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上塚博勇은 사실은 왜적장의 후손인 것으로 현지를 방문하여 조사한 해주최씨 종회의
조사로 밝혀 졌다.
마침내 이 사실이 국내에 널리 알려져 여론이 비등하게 되자 上塚博勇 등은 현지의 재일한국인
교포단체를 포섭하여 '上塚博勇'이 '한일 친선을 위하여 애쓰고 있다'고 한국인을 상대로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하였다 논개 열사의 '영혼 결혼식'은 교묘한 역사왜곡의 방편이다
일본이 집요하게 우리 역사왜곡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태생적으로 안고있는
우리역사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일이라 더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집요하고도 악착 같은 작태는 차라리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나면 마음도 편하고 미래는 희망으로 더욱 밝아지는 법이다
왜곡하고 감추고 속이고...하는 시간과 정열을 바람직한 미래를 향해 투자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행복하고 살고좋을 곳이 될텐데 속좁은 일본인 들을 탓할 수 밖에
하여튼 일본인 上塚博勇가 주동이 되어 시작한 '논개 모시기'는 기실 주 논개를
왜적장의 애첩으로 만들어 놓고 매년 한일전몰 군관민 합동위령제를 지내는
평화를 위장한 '한국때리기'의 교묘한 술책인 것이며 임진왜란의 역사를 교묘하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아니다 일인들은 '의암 주논개 묘비 영구보존회'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논개 열사의 영정과 영혼 지키기'에 나섰는데 취지가 의심스러운
이 모임의 회장은 마산출신 교포인 양승호로 알려져 있다.
최경회 장군의 후손 해주최씨 종회(대표 崔弘鎭)의 논개 영정 반환요구
최경회 장군의 후손들은 '논개 열사의 영혼결혼식과 영정이 일본으로 팔려가 적장의 사당에
합사된 것, 묘비가 사당에 세워진 것' 등이 모두 논개 열사의 영혼을 모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논개 열사가 왜적장의 '애첩'인 것 처럼 꾸며져 있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는 모욕이며
영혼에 대한 불손 이라고 생각한 해주최씨 종친회 에서는 직접 후쿠오카에 소재한 왜적장의
사당에 모셔진 논개의 묘비와 영정을 확인하고 이어서 교포단체인 재일본 대한민국민단의
판총지부를 찾아가 '논개 영정의 반환, '논개 묘 반환 '논개영혼 반환, 일.한 합동위령제의 철폐'를
요구하며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날 동석한 왜적장 사당인 보수원의 주인 上塚博勇은 '영정은 교포단체의 동의를 얻어서
반환할 수 있다고 하고 '영혼은 절대 반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최경회장군의 후손들이 제공한 사건의 전말.
1976년 논개 열사가 수장한 왜적장 후손(일본인 上塚博勇)이 승려를 가장하고 진주에 와서
진주성 호국사 주지(현산)을 방문, "논개 열사의 충절을 받들어 일본으로 모셔가고 싶으니
안내해 달라고 요청하자 현산 주지가 크게 환영하였다 이들은 당시 진주시장 이었던
이병나씨와 진주 문협과 예총지부장(전 문화원장 리명길)을 만나 이 사실을 협의하였다
왜적장의 후손은 일본 고향(영언산)에 보수원이라는 사당을 설치하고 왜장과 왜장 가족
그리고 논개열사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 논개열사의 영정은 진주에 사는 화가 최태문이 그려주었다 이것은 결국 논개 열사를
왜장의 첩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왜적장의 후손은 진주 남강에 와서 진주 무당과 함께
논개열사와 왜장의 영혼 초혼 진혼제를 거행 한후 일본으로 모셔다가 일본 왜장의 사당앞에
주논개의 묘를 설치하였다
이 묘시의 글씨는 한국 총영사 박임수씨가 써주었으며 박임수는 이 일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 밖에도 임진란 일.한군관민 합동위령비를 세우고 매년 진주성 함락일인 6월 29일에
위령제를 지내는데 이 때에는 진주에 사는 유지들이 참석했다
이것은 은연중에 임진왜란사를 왜곡하는 행위이다 일본 후쿠오카 한국교육원(원장이남교)
에서는 '왜장 후손이 잘한 일'이라고 한국인들에게 적극 교육하고 홍보하며 일본이나 한국 등
각지에 일.한친선회 를 조직하여 홍보하고 있다
이것은 또하나의 정신적인 일본의 한국침략이나 마찬가지다 이 사실이 1982년 8월 29일
국내 한국일보에 대서 특필되자 우리국민들의 여론이 악화되었다 그러자 교묘하게도
왜장 후손이 그 지역 한국교포단체를 이용 '주논개묘비영구보존회(회장 양승호)'를 조직했다.
1998년 3월 31일 화순해주최씨문중에서 진주시장(백승두)에게 탄원하여 논개영정, 영혼반환을
요청하자 '문중에서 알아서 해라'고 회신 했다 1998년 8월9~10일 최씨문중에서 일본 현지를
답사하고 왜장 후손을 만나 4개 사항을 요구하였으나 이중 영정은 반환하고 묘비는 사유재산
이라고 주장하며 반환 불응했다 한국의 외교통상부는 왜장 후손의 사유재산 이므로 반환 요구는
곤란 하다고 소극적이다.
소위 '영혼결혼식'에 부화뇌동하여 작태를 보인 한국인
1) 진주시 소재 호국사의 주지 현암 - 日人 上塚博勇의 발의에 호응
2) 진주시의 몇몇 유지 - 日人 上塚博勇의 발의에 호응
3) 진주시장 - 日人 上塚博勇에게 감사장 수여
4) 주 후쿠오카 대한민국 영사관 총영사 박임수 -영혼결혼식에 협조 주논개묘'라는
묘비의 글씨를 썼다고 함
5) 진주문화원장 이명길-왜적장의 사당에 지령이 세워져 있음
6) 진주인 신세규 - 왜적장의 사당에 묵죽 액자가 걸려 있음
7) 의암 주논개 묘비 영구 보존회 - 회장 양승호를 비롯하여 장호웅, 신민행 김해도, 이춘식
이동진, 박명수, 홍승표, 조영진, 이재호, 양상영, 변판태 배ㅇ부, 최익시, 노재봉, 서정도
이원세 등 일인 上塚博勇의 음모 놀아나 논개묘비를 영구히 일본에 붙잡아 두겠다고
다짐한 자들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돌비석에 새겨져 전하고 있다
8) 진주화가 최태문-일인의 주문으로 논개 열사의 영정을 그려주었다.
논개 열사가 목숨으로 지키고자 했던 조선인의 자존심 장수인의 태도
이제는 우리가 논개 열사의 자존심을 지켜줄 때다 일본 돈1만엔을 들였다고 주장하는
일인 上塚博勇가 획책한 '논개 열사 모독 사건'은 애당초 上塚博勇 신분을 숨기고 활동한
사실 하나만 비추어 보아도 뭔가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한 것임이 분명하며 국내에서
이 음모에 대한 여론이 비등하자 재일동포 들을 꼭두각시로 앞세워
'의암 주논개 묘비 영구 보존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급조하여 대응한 것도 그렇고
해주최씨 종회에서 '논개 열사의 영혼이 팔려 갔다고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도 관심을
가질 부분이다 마침내 해주최씨 종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논개의 영정 1건만을 반환을 받았다.
우리모두 힘을합쳐 묘비를 비롯해 아직 돌아오지 못한 논개님 흔적들이 반환이 이루어지도록
대응해야 할 것이며 이를 계기로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욕을 당한 수많은 조선의
여인들을 생각하면서 남자들이 각오를 새롭게 다질 때다 대한민국이 건재하고 장수가 존재하고
있는 이상 우리가 부당하게 욕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다짐하는 것도 역사로부터
배우는 교훈이다.
'죽은자는 말이없다'고 하여 산자의 논리대로 획책하기에는 '논개 열사'는 이미 우리 겨레의 얼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에 분명한 장수의 태도가 있어야 한다 논개의 태생지라 자랑하던
우리군이 아직도 일본에 그 들의 논리대로 논개님 흔적이 남아있다 생각건대 울분을 토할 일이다.
영구보존회(회장 양승호)란 단체에서 장수군으로 1999년 초창장이 와서 일본 후쿠오카 현지에
장수군에서도 참석 한일이 있다 참석자는 당시 문화 담당자 한규하 이다 한규하는 장수군청에
기획실장으로 근무 하시다가 퇴직한 분이다 당시의 담당자 한규하는 현지를 보고와서 후회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럴듯한 내용으로 초대에 응하여 막상 현지에 가보니 영구보존회란 단체의
설명과는 전혀 달랐다고 한다 중앙에 게야무라 옆에는 처와 처제가 있고 한쪽 귀퉁이에
허름하게 세워진 논개님의 초라한 묘비였다 누가봐도 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왜곡된 초청으로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였다고 한다 이후로 장수군에서는 절대로 참석한
일이 없다고 한다 현지를 다녀온 공무원의 증언에도 분명히 그럴듯한 저들의 속임으로
꾸며진 역사 왜곡이 확실하다.
또한 그 당시 일본 후쿠오카 현지에서 반환된 논개 영정은 당시 장수군수 김상두님이
직접받아 장수군에서 보관중이다 해주최씨 종친회에서 자기들의 노력이라 돌려달라고
했으나 장수에서 보관함이 마땅하다고 판단하여 돌려주지 않고 장수군에서 보관중 이다
장수군은 반환된 영정만 보관하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논개의 잔해는 모로쇠 일관이다
누가 책임을 져야할까? 선택은 의지와 관심이다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장수군 에서 책임있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논개를 추모한다는 일본은 저그들의 입맛에 맟춰 매년 6월29일 전승기념일에
위령제를 열고있다 말이 되질 않는다 논개와 6월29일은 아무 관계가 없다
단편적으로 이것 한가지 만으로도 왜곡이다 자세히 알고보면 모든게 허점 투성이다
또한 현재 일본에서 돌려받은 논개영정은 장수군에서 보관하고 있는데 장수군에는
사)의암주논개선양회란 독립된 단체가 있다 논개영정을 장수군에서 선양회로 이관함이
마땅하다 사료한다 이관후 수순밟아 논개사당내 기념관에 비취함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본인 우에즈가 히로유우(上塚博勇) 답변
이 내용은 한국에 일본 역사왜곡 진실이 밝혀질무렵 이 사건이 알려져 한국 여론이 고조됨을
직시한 승려로 위장한 우에즈가히로유우(上塚博勇)게야무라 후손이 즉 진주에 직접와서
논개 영혼 결혼식을 추진한 당사자가 사전에 여론 무마용으로 해명한 글이다
1981년에 10월에 이글을 썻다 1982년 8월 29일 국내 한국일보에 대서 특필 되어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글의 출처는 한지희씨이다 한지희씨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시집화서 귀화한 분이다
한국명 한지희 現 장수군 장수읍 송천리에 살고 있다 2007년 장계면 소재 논개생가지에서
통역으로 근무할당시 논개생가지 당시 문화해설사로 부터 일본 후쿠오카에 논개님의
영정 및 가묘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다 후쿠오카에 있는 우에즈가 히로유우(上塚博勇) 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2007년 답장을 받아 보관해왔다
上塚博勇 에게 답장을 받을당시 한.일 민감한 사항이라하여 당분간 비공개 로 해달라는
요청에 의하여 공개하지 않다가 약 7년만에 본인(최용표)한테 조심스레 공개한 한글판
해석문 이다 물론 원본도 현재까지 보관 하고있다
이 편지 내용은 토씨하나 수정하지 않고 해석판 그대로 옮겨짐을 밝힌다
上塚博勇이 25년전 1981년10월에 나와 도라지란 제목으로 써 놓았던 것을 보내준 것이다
누구말이 맞는지 비교하시고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제 목 : 나와 도라지
일 시 : 1981년 10월28일
글쓴이 : 우에즈가 히로유우(上塚博勇)
내 용 :
성하(盛夏)의 태양은 사정이 없이 나를 태운다 속옷을 적신 땀이 겉옷까지 스며든다
이른 아침부터 김매기로 움직이는 손가락은 흙투성이가 되어 새까 맣다 손등에 솟은
땀이 태양에 비쳐서 반짝거리다 한 마리의 매미가 울면 다른 매미도 공명하고 대합창이
되고, 더위가 더해진다 이마에서 옥과 같은 이슬땀이 흘려내려 뺨을 지나고 입에 들어가고,
가끔 눈까지 스며든다 힘들지만 김매기 하루 작업을 정하고 있으니 중단할 수 없다
팔로 땀을 닦는다 옷의 양팔은 땀으로 흠뻑 젖다 단지 묵묵히 김매기는 나와의 고독한
싸움이다 그런 숨이 막힌 분위기를 변화시켜 주는 것은 귀엽고 애처롭게 핀 도라지 꽃이다
나의 마음을 위로해준 뭔가가 있다 그것은 도라지꽃의 꽃말 “운명” 에서 생기는 일인가
잠시 동안 기억을 상기시킨다.
여기는 북 규슈 (北九州) 히코산 (彦山)의 산기슭, 해발 500미터 지점이고 산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후쿠오카현 타가와 소에다죠 카미즈노 하라이카와
(福岡県田川添田町上津野祓川에 1976년 4월 임진왜란 양국군.관민인 합동 위령(慰靈)비,
주논개(朱論介)의 묘, 케야무라로쿠수케 (毛谷村六助) 의 묘를 건립한 곳이다.
이 장소는 약400년 전, 부친(父親)의 복수를 하기위해 케야무라 로쿠수케의 도움을 구하러
그를 찾으러 다니던 자매인(언니의 이름은 오소노 (お園) 동생의 이름은 오키쿠(お菊)
이라고 한다)동생 오키쿠가 적(敵)에게 도리어 죽음을 당한 장소이다
마을사람들이 자매의 효성에 감명하여 그녀의 불운 (不運)의 죽음을 불쌍하게 여기고
슬퍼했다 마을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묘를 세우고 사계절에 피는 산야의 꽃을 따서 바치고
자매의 명복을 빌고 왔다 그러나 1945년 일본패전 후,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라 근대사회
생활이 변화하여 마을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서 과소(過疎)가 되고 묘지는 숲으로 변해버렸다
1972년에 이 땅의 소유권이 예측이 없이 나에게 들어와 관리를 하면서 처음으로 묘에 대한
사정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400년이나 대를 이어서 유지 해왔다는 인간미가 넘치는 소박함에 감동해서
미력하지만 나의 힘으로 종래이상의 묘지를 재정비할 것을 결심하고, 모든 취미(趣味)를
버린 손에 낫과 괭이를 잡고 도전한다.
언니인 오소노(お園)의 남편은 케야무라로쿠수케이고, 이김에 부부의 묘를 같은 장소에
건립하려고 했지만, 케야무라로쿠수케에 대한 조사연구결과로는 임진왜란에 출병(出兵)
후에는 일본에서 그의 소식은 명확치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케야무라로쿠수케의
영혼을 초래(招來)하고 싶은 나의 희망은 내가 한국에 가서 임진왜란의 고전장(古戰場)을
순례(巡禮)하고 케야무라 로쿠수케의 영혼을 찾을 일이였다.
조속히 익일부터 며칠 동안 시립(市立) 도서관을 다니고 한국역사의 임진왜란에 관한
페이지를 숙독했다 그러던 후일, 신기한 꿈꾸었다 머리카락을 흩뜨린 흰 속옷모습의
남자가 강(江)의 바위에 기대서있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내가 물어보니 그 남자는
“케야무라 로쿠스케” 라고 말했다 더 며칠 후에는 대문을 지난 나의 눈앞에 큰 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의 마루에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미녀가 3명이 있고 그 중에 1명이 나를보고
단올 올라가라고 미소로 손짓을 한 꿈을봤다 반신반의(半信半疑) 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한국에 갈 결의에 불이 붙었다.
1973년 5월 진주시(晋州市)에 도착, 시청직원의 안내로 온 곳이 신기 하기에도 꿈에서
본 큰 건물이었다 그것이 촉석문(矗石門)이고 촉석루 (矗石樓)이란 것을 알게 된
그 순간, 목덜미의 머리카락이 거꾸로 서고 냉기를 전신에 느끼며 떨렸다
의가사당을 참례하고 처음으로 의암(義巖)의 애화(哀話)를 알게 되어서 마음이 아프지
아닐 수 가 없었다 그 다음에 진양호를 돌아서 언덕위에서 찾아보니 감벽(紺碧)의 호수에
해가 져서 비치는 공기가 시원했다 참시 명상에 잠기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부턴가
도라지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 나는 시선을 도라지의 노래 소리에 쏠렸다
근처의 농민그룹인거 같다 도시락을 열고 농번기전에 풍작을 기원하며 건재 (健在)를
기뻐하고 있는 행락(行樂)인 것 같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의고향이 그리워져서 도라지의
노래가 가슴에 인상 깊이 새겨졌다.
다음날 진주성(晋州城)내 호국사(護國寺) 주지(住持) 석현산(釋玄山)씨가
의기사당(義妓祠堂)에서 진혼(鎭魂) 법요(法要)를 엄수(嚴修)하여 일본에서
가지고온 천 마리의 종이학(鶴)과 꽃을 의암(義巖)에서 남강에 바치고 명복을 빌었다
조용히 강을 흘러간 천 마리의 종이학은 살아있는 것 같이 큰 원을 그리며 날개를 펴서
내려갔다 물 속 깊은 것에 있는 수많은 영혼이 기뻐 받아 준 것 같을 느꼈다.
주지 석현산씨와 함께 창열사(彰烈祠)에 가고 호국사의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한국어를 못해서 의사소통이 어려워서 마치 벙어리가 된 것 같다
그래서 한문을 쓰며 의사소통을 해보았다 석현산씨는 나에게 “케야무라 로쿠스케의
영혼을 공양하고 영혼을 일본에 데리고 가는 것도 좋은 일지만 조국을 위해 죽음을
선택해 원념을 가진 주논개(朱論介)의 영혼을 먼저 위로하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닌가” 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속해서 “귀하의 주논개와 케야무라 로쿠수케의
법요(法要)에 대한 후의(厚意)는 대단히 좋지만 임진왜란에서 죽은 양국의 많은 사람에
대해 당신의 생각을 말하시오”라는 물음을 받았다 상상도 못했던 질문에 답변을 드리지
못해 나는 석현산(釋玄山)씨에게 지도를 부탁했다 석현산씨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이념을
말씀하시며 인과(因果)정토(淨土)를 설명하셨다 “당신에게 원합니다 양국군관민인
합동 위령비(慰靈碑)를 건립하고 함께 진혼제(鎭魂祭)를 합시다
한 글자 한 글자를 힘이 있게 쓴 석현산씨의 손가락의 움직임이 그친 후에는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손을 잡고 약속을 했다 석현산씨와의 만남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이고
부처의 인도로 인한 숙명이라고 감명했다 촉석루에서 남강의 아름다운 정경(情景)을
바라 보면서 생각했다 조선침공은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폭거(暴擧)로 인해
7년간이나 죄(罪)도 한(恨)도 없는 인간을 서로 미워하게 만들고 고통을 주고 죽인
처절(悽絶) 비참(悲慘)한 일은 이 세상에서의 생지옥인 것이다 더해서 조선 국도는
극도로 황폐하고 일본군은 많은 문화제를 불 태워 약탈했다
나는 이런 포학(暴虐)한 행동을 증오(憎惡)하며 너무슬퍼한다 나는 생각한다
원한(怨恨)에 보복(報復)할 때 원한을 영원히 없앨 수 없다.
그 상대를 구하려고 노력할 때 원한은 스스로 사라진다
그것이 원한을 잊어지고 없앨 것이라고 믿는다 임진왜란의 역사를 깊이 마음에 새기고
세계적 인도주의와 불교의 대승(大乘)에 인한 평등과 은혜를 감사한다
임진왜란 양국군관민의 합동위령비(임진왜란(壬辰倭亂軍官民人合同慰靈碑)와
주논개지묘(朱論介之墓)를 히꼬산 (英彦山)에 건립할 것을 결의하고 일에 중대함과
책임에 김장이 되었다 특히 주논개 여사에 대해서는 귀국한 후 박종화(朴鍾和)선생님이
저술한 “임진왜란”을 번역 녹음하여 잘 알고 있고 그 생애에 공명(共鳴)해 칭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으로 속죄(贖罪)를 늦었지만 케야무라 로쿠스케를 대신하여 주논개의
영혼을 공양하고 명복 (冥福)을 빌고 싶다 그렇게 해서 케야무라 로쿠스케의 영혼이
성불할 수 있다면 오소노(お園)오키쿠(お菊) 자매의 영혼이 얼마나 기뻐할까.
그러나 묘비건립의 앞길은 다난(多難)이고 안이(安易)한 일이 아니었다
경제면과 노력(勞力)면 공기(工期) 등 모든 것을 고려해서 총합적으로 계획을 세웠지만
계획은 전혀 이룰 수가 없어서 없었던 일로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 내가 자신을 걸고 갈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나를 이길 것이다”
라는 것을 깨달았다 케야무라로쿠스케의 영혼을 일본으로 초래할 때까지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지 않겠다고 하고 있던 것을 이번에는 묘비건립숙원달성까지 연기했다
여기까지의 일에 대해서 일일이 타인에게 사정설명을 할 필요는 없으니 나의 모습을 보고
비웃은 사람도 있고 사업주로서의 면목을 잃어버렸지만, 오히려 나의 숙원달성의 강한
집념하고 뜨거운 투지(鬪志)가 아수라(阿修羅)의 불꽃같이 타올랐다
스스로 나락의 밑바닥에 떨어져서, 가슴이 가까이 길어진 머리카락을 입에 깨물고,
열심히 기어 올라가보자 또한 가족들의 정신적은 희생도 적지 않았다
귀여운 어린 아이한테도 불편함을 주었고 아내에게도 고생을 시켰지만
가족은 나를 이해하고 협력을 아끼지 아니었다 이 서면을 빌어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묘비건립에 대해 쌓인마음을 하늘 달에게 말하고 달하고 대화하며 고독함을 견디며
세월은 빠르고 2년7개월이 흘러갔다 그 간에 주논개여사의 묘석 으로서 여사의 고향인
전라북도 장수산을 찾고 계명(戒名)"朱論介之墓 (주논개지묘)“ 라는 문자는
주 후쿠오카 대한민국 총영사관( 福岡 大韓民國總領事館) 총영사(總領事) 박인수(朴仁洙)
좌하 (座下)께 휘호를 부탁했는데 쾌히 승낙해주셨기에 도석(棹石)의 장면에 새기기로 했다
그리고 묘지설계 및 그 준비도 완료하고 공사에 착공 공정 대로 진행되고 1976년 2월
진주남강 의암(義巖) 근처에 있는 돌멩이를 줍고 호국사에서 주논개(朱論介)여사의
미타마(御霊)로서 주지(住持)께서 법요를 해주시고 4월에 朱論介之墓( 주논개지묘)석대
아래에 매설(埋設)하였다 여기서 드디어 나의 절원(切願)은 완수하였다
나는 길게 하고 있던 머리카락 을 깎기 위해 이발소의 의자에 앉았다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순간 복잡한 심경(心境)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것이
지금도 잊지 못한다.
대망(待望)의 묘비건립공사를 무사히 마치고 숙원이 달성했으니 1976년 4월16일
주(駐) 후쿠오카 대한민국총영사관영사 임상재(林相宰) 좌하의 임석과 다수의 참석자가
함께하는 가운데 임진왜란 양국군관민인합동위령비 주논개지묘, 게야무라로쿠스케지묘의
제막을 하고 낙경법요(落慶法要)의 독경(讀經)이 산야에 메아리를 일으켰다
벚꽃 복사꽃 매화가 일재로 만개 하는 따뜻한 봄 하늘에 태극기(太極旗)와
일장기(日章旗)가 바람에 나부껴서 이 아름다운 평화에 나는 감개무량이었다.
이 때 우연하게도 나의 발밑에 도라지의 새 싹이 있었다
나는 이것이 나의 도라지(운명)이라고 분기(奮起)했다 나의 운명은 여기서 묘지의
도라지꽃이 돼서 많은 꽃을 피우게 하는 묘비지킴이 될 것이다
운명은 하늘이 주는 것이니까 사람마다 다르다 주어진 운명에 도전할 것인가,
맡길 것인가는 각자의 판단으로 결정하는 일이니 상위(相違)한다 사전에서는 운명이란
“인간의 의사를 초월하고 사람에게 선악(善惡)길흉(吉凶)등을 주는 힘”
라고 기재되어 있다 천학비재(淺學菲才) 한 나의 소감(所感)이지만, 초월(超越)이란
무(無)이고 운명에 무(無)로 도전하고, 그 결과가 가령 무(無) 이 되었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운명을 무(無)로 맡긴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운명에는
무(無)로 도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문에 나는 꽃말이 “운명”인 도라지에 애착을 갖고 있다 도라지는 청자색의
다섯 개로 나누어진 꽃잎으로 범종모양의 꽃이 핀다 다섯 개의 꽃잎은 한국(韓國)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가르친 “세속오계(世俗五戒)”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자비(慈悲)의 향기가 가득 차고, 범종(梵鐘)은 먼 옛날 백제나라에서 불교가 일본으로
전래(傳來)되고 108의 범종을 쳐 울려졌던 정신문화(精神文化)의 위덕(偉德)이 생각이 된다.
도라지꽃에서 한줄기 불빛을 마음에 받은 나는 이 불빛을 독점하지 않고 한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나누고 싶다 또한 그것이 나의책임인 것 같다 1973년부터 해마다 임력 6월29일
무궁화가 향긋하게 핀 히코산(英彦山)에서 진주 촉석루하고 같은 시간에 양국의 국기게양과
국가를 창화(唱和)하고 임진왜란 양국군관민합동위령비, 주논개지묘, 게야무라로쿠스케지묘의 진혼제(鎭魂祭)를 법요엄수하고 있다
내년에는 제 10회의 진혼제(鎭魂祭)를 맞이하는데 특별한 절목으로 성대하게 개최하고 싶다
그것을 위해 평상시에 묘지관리와 정비를 쉬지 않고 하고 각별히 화목에도 신경을 쓴 손질이 필요할 것이다 올해도 도라지꽃은 아름답게 피었다 그리고 나의 도라지 (인생)도 이름이 없고 검소하게 아름답게 피워서 상쾌하고 싶다.
한.일 양국에서 서로 주장한 내용중 공통점은 한국의 열사가 일본에 누워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주장은 논개님 추모를 한다는 그럴듯한 말도 안되는 구실로 영혼결혼식을 시키어
그들의 논리대로 전쟁 승리일에 추모 한다는 것이다 논개님과 저들의 승전일과 무슨관계가
있는지 참으로 한심한 역사왜곡이다 일본이란 나라가 그들의 장수를 죽인 적국의 원수까지
사랑 할 만큼 위대한 민족인가 심히 걱정 됩니다 이것 또한 정신적인 침략이다 라고 했습니다
일본 주장은 순수 논개님 추모라 합니다
생각은 자유입니다 서로 상반된 내용이기에 판단 해보시라 올리는 글입니다
이후 上塚博勇는 논개영정을 대한민국 장수군에 반환했습니다
분명 누군가는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과 거짓을 판단할수 있는
지성인 이기에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심사숙고 객관적인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위 민원인 최용표는 이렇게 표현 하고자 합니다
논개라는 인물은 여러 정황상 사실적인 인물이다 논개님이 행여 장수와 관련이 있든
진주와 관련이 있든 최경회 또는 황진(黃進)과 관련이 있든 중요한것은 아니라고 사료합니다
모두가 우리의 하나된 민족입니다 국가가 위태로울때 국가를 위하여 몸바쳐 국가를 지키려는
진정한 애국자요 열사입니다 우리 후손들은 구국충절 열사 논개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특히나 장수의3절 논개님 이고장 출신이라 생가지복원 논개사당이 만들어져 있는 우리 장수군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객관적인 역사평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글을 정리합니다.
- 장수에서 호롱불 최용표 -
첫댓글 당신의헌신적인노고에 감사를 드리는바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