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연천봉에서 갑사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만난 한 그루의 고로쇠나무는 식물의 존재가치에 대한 화두가 됐다. 어느 곳 하나 상처 없이 깨끗하다. 언제부터인가 산에서 만나는 고로쇠나무의 줄기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에는 가느다란 파이프가 꽂혀 있거나 못에 걸어둔 하얀 봉투가 매달려 있다. 아프지는 않을까? 자라는 데 지장은 없는 것일까? 식물이란 감각이 없는 단순한 자동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많은 연구들은 식물이 살아 숨 쉴 뿐만 아니라 상호 교감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속속 밝혀내고 있다. 떡갈나무는 나무꾼이 다가가면 부들부들 떨고, 홍당무는 토끼가 나타나면 사색이 된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고로쇠나무에서 수액을 뽑아내는 것은 분명 생장에 지장을 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공원과 같은 보호지역에서는 나무에 뚫는 구멍의 갯수나 크기에 제한을 둔다. 하지만 과거 도끼질로 나무에 상처를 내던 것을 금지하고, 구멍의 갯수나 크기를 제한한다고 해서 그 식물이 받는 고통까지 해소해주는 것은 아니다. 고통의 크기와 횟수가 줄어들었을 뿐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다. 예전에는 철책을 설치하면서 말뚝 대신 살아 있는 나무를 사용하거나, 플래카드를 달기 위해 나무에 못질하는 것이 일상적으로 이뤄졌지만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근래에는 살아 있는 가로수를 조각작품으로 활용했다가 시민들의 항의에 곧바로 베어버린 사례도 있다. 이제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이 고통받는 것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행위가 보편화된 것이다. 이 같은 잣대는 식물에게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면서 수액을 채취하는 행위에도 적용돼야 한다. 고로쇠수액이 불요불급한 상황에서 사용해야 하는 만병통치약도 아니지 않은가.
▲음나무
고로쇠나무 수액채취가 주민들의 주요한 소득이라는 점에서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기는 실질적으로 어려운 면이 있다. 하지만 우선 국립공원과 같은 보호구역에서만큼은 그러한 행위를 제한하기 위한 장기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소득원을 만들어냄으로써 고로쇠나무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줄이는 것도 한 방법이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 모기도 죽이기를 꺼려 모기를 방 밖으로 내보낼 정도였고, 심지어는 질병을 옮기는 모기도 죽이기를 꺼렸다는 슈바이처 박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깊이 음미해볼 만하다.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모든 살려고 하는 의지에서 자신에게 부여했던 생명에의 경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 또한 살려고 애쓴다는 것을 자기 안에서 경험한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유지하고 생명을 증진하며 생명을 고양시키는 것을 선으로, 반대로 생명을 파괴하고 생명에 해를 끼치며 생명을 억압하는 것을 악으로 본다. 이것이야말로 도덕의 절대적이고 기본적인 원리이다.”
▲십자고사리 삿갓나물 졸방제비꽃 산초나무 큰구슬붕이 용둥글레
물리적 거리감은 정신적 거리감으로도 이어진다. 내 가족과 친척, 이웃에 대해 느끼는 살가운 느낌은 다른 마을, 먼 나라로 범위가 확대될수록 희박해지고, 나아가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내가 키우는 강아지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느끼지만 사육장에 갇혀 고통받는 또 다른 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내 자식이 소중한 만큼 남의 자식도 소중하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조차도 지켜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사고의 외연을 넓히면 식물에게서도 다른 사람, 동물에서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전해져 온다. 행동은 애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식물에 이름표를 달아주자. 이름표를 단 식물은 뭔가 특별해 보인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선배님
좋은 자료 잘 보고가요 선배님 , 날씨도 화창하고 바람도 선선하니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