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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미 유고특집 | 유고시 해설
정화된 스러짐과 환생한 유고 시편
그의 노란 부고 문자가 내 핸드폰에 떴다
「말의-K에게」 중에서
권성훈(시인, 문학평론가)
시인에게 유고시는 삶의 끝에서 창작한 최초의 신작시다. ‘부고 문자’와 함께 죽음으로부터 환생한 유고 시편은 시인의 생존을 기억하면서 이처럼 우리에게 머문다. 신체에서 분리된 비익명적인 그림자로서 죽음의 신작시가 탄생되는 것이 바로 유고시다. 거기서 시인의 정신이 언어에 살아 있는데 그것은 몸으로 완성한 마지막 시적 주체로서의 표상이 된다. 유고시는 필연적으로 “그가 말했었지”라는 죽음을 통한 과거형을 동반해야 하지만 죽음에 가닿지 못한 시는 ‘그가 말했다’라는 현재형이 되는 것. 삶과 죽음은 육신이 살아 있음과 없음의 문제로 성립하면서 과거를 견인하는 현재가 되기도 하며 과거와 현재가 단절된 시공간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살아―있음은 ‘세상의 바탕화면’으로 존재하는 현존재라고 한다면 죽어 ―있음은 ‘한때 세상의 바탕화면’에 있었다는 과거 존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유고시는 시인이 기록한 언어 속에서 그의 삶의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분명 삶의 화면은 현장성을 가지고 생명력을 가진다. 반면 삶 밖의 화면은 막혀 있거나, 폐기된 것 같지만 구멍 난 하늘과 같이 온통 수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것은 유고시가 생전의 그림자와 같이 음영을 통해 시인의 그림자 밖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유고시는 삶을 통과한 배경이며 죽음이 빼앗지 못한 ‘잉여의 이미지’다.
그 속에서 시인의 언어는 영속성을 내포한 상태로 상상의 탄력이 활성화면서 확장되며 즉자적 기의를 구축한다. 그것도 유고의 세계에 시인이 관여하지 못하는 내재성의 영역에서 시인을 표상하면서 그 언어에 귀속되어 세계를 드러낸다. 주체는 없고 기록만 남아 있는 상태로서 자기 보존의 욕구 대신 삶의 한계를 설정하지만 반대로 죽은 자 가운데 우리를 영접하고 환대한다. 이 환대는 우리를 향한 무조건인 환대로서 시적 주체를 세우는데 이러한 시적 의미의 향유는 궁극적으로 다각적으로 받아들이는 타자의 영역에 귀속되는 것.
송유미 시인의 유고시는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환대하듯이 삶을 해체하며 세계에 끼어든다. 이 공간은 “명복明福이란 이런 자세라고 자위하면서” 주술과 같이 혹은 증언과 같이 소거되지 않는 파장을 지니게 된다. 또한 주체 없는 주체로서 독자라는 타자에게 응답을 기다리는데 그것은 비익명적 그림자로 남은 송유미 시인의 유고시 8편에서 살필 수 있다.
송유미 시인이 없는 송유미의 시편은 공유하는 오늘이 없는 자리에서 그녀의 환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사실상 유고시의 환대는 독자라는 불특정 다수의 이방인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누구나 송유미 시인의 초대에 반응하며 그것에 대한 청자로서 응답하게 되는 것. 그녀의 삶의 흔적은 시인이 빠져나간 자리, 즉 구멍으로 현상되며 거기서 우리는 “그의 저서를 한장 한장 염소처럼 뜯어 삼키며/그가 내 곁에 없다는 슬픔보다 웅덩이처럼 고여 드는/말의 못물에 벌컥벌컥 입을 대고” 그의 말을 곱씹는다. 거기에 그녀가 삶의 구멍을 낸 그 검은 웅덩이 안에서 모호하게 나타나는 그녀의 시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사유를 구성한다. 그녀와 분리된 주체의 그림자는 “형식도 없고 차원도 없는 모호한 빛의 다양한 결호로부터 결정화되는 시각적인 지각물로 나타난다. 의미 심장한 흰색, 포획하는 구멍, 얼굴, 차원 없는 검은 구멍, 형식 없는 흰 벽, 그리고 이 체계에서 이미 많은 조합들이 가능할 것이다.” 그녀의 유고 시편에서 포획되는 구멍은 웅덩이처럼 존재를 침몰시키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화된 사유의 세계로 나가게 한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조성되며 무한이 열린 세계로의 구멍으로부터 발생한 정화된 언어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녀의 유고시에서 시적 주체는 자신을 삶과 분리함으로써 고유한 죽음에 대한 타자에 대한 요청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것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시인은 “하얀 안개 뜯어 먹고 사는 짐승 한 마리”(「먼울깍 동백에게」)처럼 생태적 육체가 아니기에 한치 밖도 알 수 없는 실존적 세계 내 안개라는 기억 속에서 출몰하는 한 마리 짐승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고시를 통해 부유하는 시인의 상상력에 다가서며 이방인으로서 그녀를 영접하는 대신 그녀는 우리를 죽음 가운데 환대하게 만든다. 그럴 때 “길을 잃고 숲에 갇히네 두리번두리번/잎맥 속으로 사라진 발자국을 따라”가게 되면서 그녀의 유고에 참여하게 되는 것. 거기서 우리가 ‘어둠 속에서 어둠은 눈을 뜨’고 그녀의 삶이 머물렀던 “물의 투명한 눈망울 속에서/태어나는 환상, 꿈, 희망” 등을 탐미할 수 있다. 그것도 “그대 깊은 심연에서” 비어 있는 것들을 통해서 정화된 시편들.
당신, 예쁜 내 뒷모습에 반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했나요
숱한 별 같은 사람 중에
화살이 꽂힌 등 하나 울고 있네요
나보다 더 나의 깊은 슬픔을 떠올려 주신
그 가난한 등불 하나
세상 어둠 밝히고 있네요
허황된 눈빛도 아닌
그윽한 눈빛으로 말씀하네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알몸이 된 당신
뒤늦게 혼자 우네요
그 눈물방울이
또 하나의 등불이네요
- 「알등 아래서」 전문
알 모양으로 만든 등은 위에서 아래로 빛을 방출한다. 그것도 아무런 외피를 입지 않고 숨김없이 노출된 그 자체로 자신을 보여준다. 요컨대 알등의 크기만큼 빛의 세기가 결정되고 그 빛은 어두운 세계를 비춘다. 마치 별과 같이 사람들을 밝게 하는 알등은 사실상 막힘없이 모든 형태가 등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뒷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야에 머문다. 그러므로 “당신, 예쁜 내 뒷모습에 반해서/여기까지 따라왔다했나요”라고 친절하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의 등을 만나 환해진다는 것이 운명이듯 등 또한 누군가를 만나서 자신의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운명처럼. 이 운명은 어둠 속에서 더한 빛을 발하며 “나보다 더 나의 깊은 슬픔을 떠올려 주신” 절실한 사람들에게는 “그 가난한 등불 하나”로 남는 법. 그렇다면 ‘세상 어둠 밝히고 있’는 알등은 “허황된 눈빛도 아닌” 그야말로 ‘그윽한 눈빛으로 말씀’이 되는 정화된 언표다.
바로 ‘알등’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 했기에 나보다 먼저 ‘알몸’이 되어버린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토록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먼저 자신을 열고 알몸을 내어주는 것. 알등은 이미 “나의 방은 고래 뱃속이야 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야 하니 더 좁은 창자 골목 속으로 사라져야하니” (「방 빼는 날 2」)라는 사물의 이치를 알게 한다. 더 깊은 바다에서 더 큰 어둠을 열기 위해서 더 멀리 가야한다는 것을 알등은 안다. 그것은 오로지 세상을 비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 좁은 방을 빠져나오는 순간 세계가 방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곳 “부유하는 플랑크톤들이 출렁이는 밤하늘에는 고래싸움에 등이 터지는 불쌍한 불빛들도 살아 하늘 위에 하늘이 없다고 땅위에 땅이 없다고 바다가 열리는 옥탑 방”이라고 말한다. 옥탑방은 ‘가난한 등불 하나’로 자신을 세상에 밝혀 왔던 정화된 공간이며, 자신을 지탱해온 시가 들어오는 구멍 뚫린 사유의 세계다.
두 손을 묶은 채 꼼짝 못하는 돌덩이를 노스님은 암자라고 부르셨다
빈 밥그릇 핥는 누런 개를 부처라고 소개하셨다
딸랑 방 한 칸뿐인데 천명의 납자들이 공부하던 곳이라고 쓸고 닦고 하셨다
낮에 나와 놀던 달빛들 탑속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하는 시각이면 찢어진 속옷을 꿰매셨다
사람 사는 일 먹고 마시는 업인데 일주일씩 금식하시는 바람에 노스님 모시겠다는 행자승이 없었다 초 한 자루 향도 없는 국 맛 아는 숟가락들 가지런히 키를 맞추고 사시 공양 매를 맞을수록 멀리멀리 종소리 흩어진다
-「꽃도 꽃피우기 위해 애를 쓴다」 전문
산다화가 피었다고 편지를 씁니다
찔레꽃이 피었다고 편지를 씁니다
벚꽃이 피었다고 엽서를 씁니다
또다시 산다화가 찔레꽃이 벚꽃이 피었다고
그대에게 안부를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푹 태양처럼 풀밭에 떨굽니다
나의 태양은 눈멀고 귀멀어
아침도 잊고 바다에 스스르 잠깁니다
-「산다화 계절」 전문
꽃은 스스로 시든 곳에서 다시 피어난다. 피어나기 위해 꽃은 쓰러진다. 모든 사물이 자라나는 것은 이음으로 이어지고 이 이음의 시간은 재생되기 위해 필요하다. 또한 꽃의 스러짐을 통해 정화된 이음 속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 “두 손을 묶은 채 꼼짝 못하는 돌덩이를 노스님은 암자라고” 한 것도, “빈 밥그릇 핥는 누런 개를 부처라고 소개”라고 한 것도 타자들을 환하게 비추는 정화의 언어이며 정화된 이음을 위해서 있는 것. 외부로의 자라남을 잠시 멈추고 내면을 살피기 위해 “낮에 나와 놀던 달빛들 탑속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하는 시각”이 그런 것을 의미한다. 멈춤이란 정지된 것이 아니라 “꽃도 꽃피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시간이 된다. “딸랑 방 한 칸뿐인” 암자라는 한 공간에서 납자들이 잠이 들지만, 노스님은 “찢어진 속옷을 꿰매”는 것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다시 태어나기 위함이다.
이처럼 정화된 쓰러짐은 그 자체로 빛을 발산한다. 그러므로 ‘고개를 푹 태양처럼 풀밭에 떨굴 때’ 태양은 사라지지 않고 다음 날을 준비하는 데 있다. 그것을 아는 시인은 “산다화가 피었다고 편지를” “찔레꽃이 피었다고 편지를” “벚꽃이 피었다고 엽서를” “또다시 산다화가 찔레꽃이 벚꽃이 피었다고” 글을 쓰는 것처럼. 정화된 쓰러짐은 바로 “그대에게 안부를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 재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은 굵고 어떤 생각은 짧고 또 어떤 생각은 사지에 못을 박는다
질퍽한 땅의 심장을 움켜쥐고 회화나무는 제 검은 그림자 뒹구는 장의자(長椅子)를 지키고 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느끼고 있으면 나무의 굵은 주름살이 내 얼굴에서 주르르 흘러내린다 관 뚜껑에 못을 박아야 할 나이에 와서야 비로소 안다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생각 그루였음을 ….
목수 아비 지그재그로 흩어지는 나사들을 주워 비걱대는 의자에 못을 박는다
(얘야 생각마저 날려버려라 그럼 넌 바람도 되고 새가 될 수도 있다 ….)
어떤 생각은 깊고 어떤 생각은 바닥이 없다
또 어떤 생각은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못!
무엇 하나 계획한 것들을 실천하지 못한
새털 돋는 백수의 나날이
비누처럼 닳고 닳아 작아진
아비의 사지에다 탕탕 못질을 해댄다
- 「생각 나무」 전문
유고시에서 그녀가 남긴 “어떤 생각은 굵고 어떤 생각은 짧고 또 어떤 생각은 사지에 못을 박는” 것으로 현시된다. 생각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행동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체험에 선행한다. 있다는 것은 이 전에 있었던 것의 시뮬레이션으로 생겨난다는 점에서 근원성을 추궁할 때 현시는 원인에 따른 결과라는 사실이다.
물질로 비유하자면 “질퍽한 땅의 심장을 움켜쥐고 회화나무는 제 검은 그림자 뒹구는 장의자(長椅子)”를 말하는 것으로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게 가로로 길게 만든 의자는 나무로부터 왔다. 이 나무를 시인은 ‘회화나무’라고 하며 장의자는 바로 회화나무의 검은 그림자로 구성된다. 이른바 장의자의 원인은 회화나무이며 회화나무의 결과가 장의자라는 것을 나무의 생각에서 소환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만히 눈을 감고 느끼고 있으면 나무의 굵은 주름살이 내 얼굴에서 주르르 흘러내린다 관 뚜껑에 못을 박아야 할 나이에 와서야 비로소 안다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생각 그루였음을” 설득력 있게 환유한다.
이로써 ‘생각 나무’는 ‘어떤 생각은 깊고 어떤 생각은 바닥이 없지만, 또 어떤 생각은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못’으로 우리의 생각을 정화하고 있다. 이것은 기존 의식에 깨어짐으로서의 정화이며 우리는 그것을 스러짐으로 환대하게 된다. 다만 진정한 환대가 무조건적 환대이듯이 “생각마저 날려버려라 그럼 넌 바람도 되고 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생각을 날려 버릴 수 없는 것처럼 무조건적 환대는 있을 수 없다.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절대적인 표상을 지니고 있을 뿐. 어쩌면 송유미 시인은 그런 바람이 되고, 새가 되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구멍을 내고 그 ‘동그라미’ 속으로 파고 들어간 줄 모른다.
그것은 송유미 시인의 유고 시편 「동그라미」에서 “동그라미 동그라미 그리는 너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맑고 투명한 하늘의 얼굴 구름의 얼굴 약삭빠른 내 눈동자가 호수 같다고 매일 매일 놀다가는 바람소리 새소리 달빛소리 닮은 너”를 보면 ‘정화된 스러짐’으로 환대하고 있다. 이 같은 시편은 그녀의 죽음 속에서 주술처럼 ‘비익명적 그림자’로 해체되면서 소거되지 않는 파장으로 머문다. 주체 없는 주체로 무조건적인 응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유고시는 ‘부고 문자’와 함께 아직도 따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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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훈
2002년 《문학과 의식》 시, 2013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이 당선되었다.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2권과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 『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 『정신분석 시인의 얼굴』, 『현대시 미학 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등이 있다. 경기대학교 교수이며 <사이펀> 편집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