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쓰는 이야기는 우리 역사상 거의 신격화 되어있고 영웅을 넘어선 성웅이신 이순신을 폄훼하자는 이야기가 전혀 아님을 미리 말하고 시작한다. 또한 그 반대로 우리 역사상 최고의 간신모리배 전형으로 되어있는 원균을 없는 사실을 내세워 띄우자는 것도 아니다.
원균에 대해서는 현재도 논쟁중이다.
이순신을 신격화하기위해서 원균이 상대적으로 너무 처참하게 비하 되었다는 설과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이순신 신격화가 아니더라도 원균이 충분히 욕을 먹을만 하다는 설로 나누어진다.
지금까지는 간신모리배 전형의 원균이 압도적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왔었다
'오늘날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원균은 이전의 인식과는 달리 강직하고 용맹스런 장수로 그려지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그가 사회 전반의 이순신에 대한 편애 때문에 상대적으로 격하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그가 평생 질시했던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제외하더라도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에 나타난 그의 실체는 리더로서의 자질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허울 좋은 권력에 기대어 치부와 만용을 일삼던 숱한 탐관오리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윗 글은 원균에 대해 다음 백과사전에 나온 공식적인 글이다. 우리 대부분도 원균에 대해 위 글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광해처럼은 광범위 한 것은 아니지만 원균에 대해서도 재평가하는 연구가 꽤 있다.
이순신은 우리 민족이 성웅으로 생각할만큼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이순신을 성웅으로 만들기 위해 혹이나 한 인물을 심하게 격하시켰다면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써 보려 한다.
물론 원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내가 처음으로 밝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원균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쓴 글을 보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정리 한 글이다.
그리고 진실은 나도 모른다. 역사적 인물의 진실에 대해서는 시대상황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기에 따라. 또는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시각으로 이순신과 원균을 살펴보자는 것 뿐이니 내 글을 넘 심각하게 받아 들일 필요는 없다.^^
먼저 이순신부터 새로운 모습을 살펴 보자!
이순신이 조선역사 내내 지금처럼 신격화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정조대에 이르러 이순신이 높이 평가되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신격화까지는 아니었다. 이순신의 성웅화는 현대에 들어서 박정희에 의해서라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다.
최상천이라는 역사가가 쓴 책 '알몸 박정희'에서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는 박정희가 만든 '성웅기획'의 일환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최상천은 말한다.
"박정희가 젊었을 적 읽고 감동받았다는 책은 이광수의 '이순신'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났던 이광수의 이순신은 진짜 이순신이 아니라 보통 조선사람들이 사랑하는 '호국영웅 이순신'도 아니었다. 박정희는 인간 이순신이 아니라 이광수가 만들어낸 '이순신', 즉 '성웅 이순신'을 만났던 것이다."
최상천은 '박정희가 군인 출신으로서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우리 역사 속에서 군인출신 성웅화작업이 필요했다. 그리고 구국의 영웅 이순신을 끄집어 냈다' 고 주장한다.
지금의 이순신은 솔직히 나 조차도 이순신에 대한 조금의 비판의 글을 쓰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우리에게 신격화 되어 있다.
한 인물을 신격화하는 일은 옳은 일일까?
이순신도 우리처럼 평범한 인물이었지만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최선을 다해 왜적과 싸웠다. 이순신이 신이 아닌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그의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도 슬퍼하고 노하고 질투도 하고 했다. 원균에 대해서 원망과 분노의 글도 많고 요즈음으로 보면 지역색이 크게 느껴지는 한 지역 일부주민들 행태에 대해 아주 크게 혐오하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이제 신격화된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대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순신에 대해서 다른 시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우선 이순신 장군의 해전 23전 23전승은 정말 진실일까??
이순신이 23연승한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다른 역사전문가들은 이순신이 연승한 23전중에 제대로 싸운 해전은 3번 정도라고 한다.
나머지 대부분 해전은 전투한 것이 아니라 포구에 정박해 있는 일본함선을 상대로 함포사격을 한 것이었다. 3번 정도는 승리라기 보다는 무승부로 봐야 한다고도 한다.
이순신이 제대로 싸운 3번의 전투는 한산도 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을 말한다.
한산도 해전은 조선 수군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이길 수 있는 것을 그냥 이긴 전투로 본다. 명량해전만이 실제로 대첩소리를 들을 만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기적같은 전투였다. 영화 '명량'에 나온 것처럼 사실이다.
사실, 당시 우리 조선전함의 척 당 전력은 일본 함선의 5배 이상이었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함포가 장착된 전함이었고 일본 함선은 함포가 없는 그냥 수송선이었다.
일본 수군의 무기라고는 조총뿐이었다. 조선 전함에 장착된 막강한 함포의 유효사거리가 500미터가 넘었으나 일본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겨우 100미터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함선을 바다위에 정박해놓고 원거리 사격으로 일본 함선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이순신의 업적을 흠집내고 깍아 내리자는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시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의 현실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이다.
중요한 것은 이순신은 조선전함과 일본전함의 이런 차이점을 꿰뚫고 전략을 아주 잘썼다는 것이다. 이 점만 봐도 이순신이 뛰어난 장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원균은 그러지 못했다. 원균은 이순신같은 전략가는 못 되었다. 단지 야전사령관처럼 용맹하기만 했다.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이유는 이순신의 이런 전략을 쓰지 못했고 칠천량에 정박 중 일본에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항상 적군 이동과 첩보에도 세세하게 신경을 쓰고 전략을 짰지만 원균은 전혀 그러하지 못 한 것이 큰 승패를 갈랐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민족성과 자주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순신을 성웅화 한 것 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그런 일에는 반드시 비교대상이 필요했고, 그 희생양으로 만든 인물이 바로 원균 장군이다' 라고 주장하는 역사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 원균에 대해서 알아보자.
원균도 나름 괜찮은 장수였다고 한다.
원균이 무과에 합격한 것은 32세 때인 1576년으로, 이후 주로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군대 생활을 했다. 관직 운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다. 원균이 워낙 강직하여 상관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승진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때에 따라서는 관직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탐욕스런 행동으로 쫒겨났다는 설도 있음)
이런 원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된 것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유성룡이 그를 선조 임금에게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의 일이었다. (이 일은 역사적 사실임. 유성룡이 이순신 후임으로 원균을 적극 추천 한 것을 보면 원균이 우리가 알고있는 원균만이 아니였을 것이라는 추측 해 볼 수 있음)
이순신보다 다섯 살 위인 원균은 이순신, 유성룡과 같이 어릴적부터 동네 선후배였다는 설도 있다. 유성룡과 이순신은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였고 또 유성룡이 원균과도 어릴 적 부터 아는 사이라 그런 말이 나온 거 같다.
어쩌든 원균은 이순신 보다 일찍 무과에 합격하여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우며 젊은 시절부터 무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여진족이 그의 이름만 듣고도 공격을 멈추었다는 말도 있고 하니, 원균 또한 매우 용맹한 장수였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사실, 원균이 일본군에 대패한 칠천량해전도 원균 탓만은 아니었다. 원균 또한 여러번 일본군과 작은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원균이 머뭇거리자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 권율이 원균을 불러 원균 부하들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곤장을 때려 원균에게 치욕을 준다.( 이 일도 역사적으로 사실임. 권율이 원균을 직접 때린 것은 아니지만 권율과 많은 부하들 앞에서 권율의 지시로 곤장을 맞음)
지금으로 보면 합참의장이 해군총사령관을 공개적으로 구타를 지시하여 욕을 보인 것이다.
이에 원균이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출정 준비하며 칠천량에 정박 중 일본군 기습을 받고 대패한다.
원균과 그 일부 수하들은 육지로 까지 쫒기다 그들을 쫒아 온 왜병과 끝까지 싸우다 원균은 아들과 함께 전사한다.
칠천량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이 거의 몰살 당하고 배설이 배 12척만 간신히 건져 도망쳤다. 이 배 12척이 명량해전에서 기적같은 승리를 이루어 냈던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비록 원균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 대패했지만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점을 높이 사 원균을 이순신과 똑같이 선무1등공신을 내렸다. (이 또한 선조가 이순신의 공적을 흠집내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음)
그런데도 우리 기억속에 있는 원균은 탐욕스럽고 이순신을 사사건건 시기 지투한 간신모리배 전형으로만 남아 있다.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이 이순신을 시기 질투하고 잘못 한 점도 많았다.
그러나 원균 입장에서 보면 그럴만도 했다.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결이 아주 다른 장수였다.
이순신은 신중하고 아주 치밀한 전략가였다. 원균은 야전형 용맹무쌍한 돌격형 장수였다. 신중하고 치밀하여 앞, 뒤를 다 재보고 승리를 확신해야만 나서는 이순신이 보기에 원균은 너무 무모해 보였다.
그래서 원균이 이순신에게 몇 번 원군요청을 보냈지만 당시 상황을 보고 이순신은 무시해버린다. 원균은 이순신의 이러한 점에 이를 간다. 그리고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다.
이순신과 원균이 서로 장단점을 인정하고 합심하여 전투에 임했더라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훨씬 더 강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장수는 그러하지 못했고 서로 반목하고 서로 질투 시기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원균에 대한 원망이 자주 보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처럼 이순신과 원균이 심한 갈등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원균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간신모리배는 아니었고 나름 훌륭한 무장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이 조금이라도 사실이라면 원균이 지금 간신모리배의 전형이며 대명사가 되어있다는 이런 사실을 원균이 지하에서라도 안다면 얼마나 원통 하것는 가?
한 인물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역사의 이면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르는 것도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이고 오늘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이 글의 결론은 '이순신이 비록 정통성 없는 독재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영웅화된 면도 없지는 않지만 세계사적으로도 이순신만큼 뛰어났던 지도자를 찾기는 어렵다' 는 것이다.
또한 이순신이 더 위대해 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애민적·애국적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 <난중일기>를 전장 중에도 꾸준히 썼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교과서나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난중일기> 를 접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만큼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난중일기> 전문을 읽어볼 만큼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역사 글을 써온 게 내 현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