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3일 오후에 짤스부르그를 보고 다음날 할슈타트호수가의 그림같은 도시 할슈타트에서 이쁜 집들과 그림같은 마을을 감탄하며 지나가고 있는 데, 60대는 족히 되어보이는 한국 아줌마들이 반대편에서 몇명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익숙한 얼굴들이다. 자기들 끼리 하는 얘기가 들렸다. 제주도 사투리다.
제주사람이면 한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이지 하는 마음에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에게 물어봤다. 비슷한 나이또래인 내 누이동생을 아느냐고? 내 누이동생이 자기 사촌시누이란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나의 고모님 며누리, 판포리에 사시다가 몇년전에 돌아가신 우리 작은 고모님의 며누리인것, 우연히 지구의 건너편 남의 나라 하늘아래에서 이종사촌제수를 만난것, 친구들하고 동유럽으로 단체 여행을 왔단다,
오래 얘기할 시간은 없고 잠시 몇마디 하고는 반대편으로 서로 각자 갈길을 갔다. 우리 고모님의 아들, 즉 이 여인의 남편인 나의 외사촌은 제주도청에 다닌다. 이종간이라 제사, 명절때 만나는 사이도 아니라서 금방 알아보지를 못했다. 어떠튼 제주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외사촌을 이렇게 먼데서 만나다니 묘한기분이다,
할슈타트에서의 극적인 만남 이전에 들린 짤스부르그는 모짜르트의 도시 그는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이었는데, 볼프강의 누나인 난네를을 어려서부터 가르쳤고, 이를 볼프강은 지켜보았다. 세 살 때부터 볼프강은 누나를 보고, 스스로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어린 아들의 재주를 보았고 아들의 음악적 재능이 뚜렷이 빛을 발하게 되면서 작곡을 그만두었고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매우 뛰어났다. 난네를의 뮤직북에 쓰여진 레오폴트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볼프강은 네 살 때 여러 곡을 배웠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능력은 빠르게 발달하여, 다섯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믿지 못하여 일부러 모차르트의 집에 찾아와서 모차르트를 시험해 보았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가 모차르트의 곡을 써주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그 사람들에게 뛰어난 작곡 실력과 재능을 보였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모차르트를 믿기 시작하였다. 그후 아버지 레오폴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아들을 보내 작곡하는 법에 대한 기예를 더 배우게 했다.
1777년에는 어머니와 함께 뮌헨, 만하임, 파리를 여행하였는데,
여행을 다니면서 모차르트는 많은 음악가들과 만났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바흐로부터 처음으로 교향곡을 작곡하는법을 배웠으며 이러한 토대로 모차르트는 사후까지 수많은 걸작의 교향곡을 남기는 중요한 계기가된다.
또한 모차르트는 빈에서 생활하던 1784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만났다. 그는 어려운 집안사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온 베토벤을 반갑게 맞이하였는데, 이때 베토벤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모짜르트가 7살이던 1763년에는 당시 유럽최강의 군주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에 앞에서 연주를 한다.
여제 마리아 테레지에는 1717년생으로 16명의 자녀를 낳고 그중 11명이 살아 성인이 되고 5을 잃었다.
그중 막내딸이 1755년 11월생으로 1756년 1월생인 모짜르트와 두달차인 마리 앙트와넷,
마리 앙트와넷과 아이들,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와 적대관계였던 프랑스의 루이 16세에게 앙트와넷을 시집보낸다. 어머니의 명으로 정략결혼을 한것.
그러나 모짜르트가 35살로 죽은 2년후 앙트와넷도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의 칼날아래 처형당한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합은 강대국으로 떠오르던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정략 결혼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불안한 결합이었다. 두 나라는 오래 전쟁을 치러온 앙숙관계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오스트리아 계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양국 간 원한은 뿌리 깊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악의적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여러 연인을 두고 혼외정사를 벌이는 음탕한 여자,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 등 갖가지 추문에 시달렸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두 나라 간 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첩자 혐의를 받기도 했다.
1793년 10월 15일 혁명재판에선 이외에도 온갖 혐의가 거론됐다.
정부의 부패와 재정낭비는 물론 반역죄, 그리고 아들 루이 17세와의 근친상간까지 덧씌워졌다.
루이 17세가 겨우 7살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요된 거짓 증언일 가능성이 크다. 재판은 형식적이었고 물증은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향락의 주범으로 몰렸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악의적 평판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1785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칭해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로챈 사건이다. 재판을 통해 진범이 가려졌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 상관 없음이 밝혀졌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전 상궁이었던 캉팡 부인 회고록을 보면 “루이 16세는 이 목걸이를 왕비에게 선물하고자 했으나, 왕비는 필요하지 않다며 확실하게 거절했다”고 나온다.
할슈타트(Hallstatt)는 오스트리아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의 마을이다. 할슈타트 호에 가까이 있으며 알프스 기슭의 호수 지역 잘츠카머구트 지방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는 경승지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마을의 꼭대기에 위치한 공동묘지에서 출토된 철기시대 유물들로 유럽의 초기 철기문화를 일컫는 "할슈타트 문화"가 이에서 유래되었다.
동화 속의 호수마을과 같은 모습으로 알려져 있는 할슈타트는 오스트리아의 9개의 주 중에서
오버외스트라이히 주에 속하는 마을이다.
지리적으로는 할슈타트 호의 남서쪽, 다흐슈타인 산맥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할슈타트는 자연 경관 뿐 아니라 역사적 가치로 유명하다. BC 2000년부터 형성되었던 전 세계 최초의 소금광산으로 유명하며,
이를 통해 얻은 경제적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BC 1000년부터 BC 500년의 철기 문화가 나타났고, 할슈타트의 분묘 유적에는 이러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러한 철기문화는 유럽 초기의 철기문화인 ‘할슈타트 문화’를 이루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과 이 지역의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 받아서, 할슈타트는 1997년도부터 ‘할슈타트-다흐슈타인 잘츠카머구트 문화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재의 소금산업이 에벤호 지역으로 옮겨감에 따라서 관광산업이 주된 할슈타트의 산업이 되었으며, 아름다운 호수와 산을 깎아서 집을 지어서 만들어진 마을로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다
소금이 귀중한 자원이었던 할슈타트는 과거에 이로인한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후 중세시대 역사에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 할슈타트는 1311년 시장이 들어선 마을이라는 점에서 경제적인 가치를 상실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오늘날은 소금 상품 생산을 제외하고도 관광업으로 마을의 경제생활이 가능해졌다.
할슈타트는 묘지의 면적이 매우 작아 매장 공간 부족으로 인해 10년마다 유골을 발굴해 납골당으로 이장했던 역사가 있다.
19세기 후반까지 할슈타트는 배를 타고서만 접근이 가능했고 1890년 서쪽 강가의 바위를 부분적으로 폭파함으로써 최초로 길이 생기게 되었다.
2011년 6월 중국이 할슈타트를 복제한다는 첫 언론 보도가 나간 뒤 2012년 6월 중국의 한 광산회사가 광동성의 혜주시에 할슈타트 실제 크기 규모의 마을을 복제했다.
초기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할슈타트 주민들은 오히려 논란으로 인해 관광객이 폭등하자 작은 마을에 대한 관심이라며 좋아했고 할슈타트 시장과 대표단들은 광동의 할슈타트 마을을 방문하기도 했다
할슈타트(Hallstatt)의 Hall은 켈트어로 소금을 Statt는 독일어로 장소를 의미한다.
봄의 왈츠라는 한국드라마를 여기서 촬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