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울릉도 역사
★ 청동기시대(기원전 1000~300년) 또는 철기시대 전기 (300년~1년)에 울릉도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함 지석묘, 무문토기, 갈돌, 갈판(현포, 남서, 저동리)
★「삼국지위지동이전 옥저조」의 고구려 동천왕 20년(246년)에 관한 기사에서 언급된 동해안의 섬이 울릉도라는 견해가 있음.
★ 512년 지증왕 13년 신라장군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 정벌(울릉도가 최초로 문헌에 등장)
930년 고려태조 13년 조공한 우릉도(芋陵島)주민에게 작위를 하사함.
★ 1018년 현종 9년 여진족의 침입을 받고 농업을 폐하게 되어 이원구를 보내어 농기구를 하사함.
1032년 덕종 원년 우릉성주가 아들을 보내어 조공함.
★ 1157년 의종 11년 우릉도 주민을 이주시킬 계획으로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을 보내 조사케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함
★ 1379년 우왕 15년 왜구가 무릉도(武陵島) 주민들을 본토로 귀환케 함.
★ 1417년 태종 17년 김인우를 안무사로 파견하여 주민들을 귀환시킴.
★ 1614년 광해군 6년 대마도주에게 울릉도(鬱陵島)에 왜인들의 왕래를 금지하는 금약을 준수하라는 서계를 보냄.
★ 1693년 숙종19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사이 외교분쟁 발생. (안용복 1차 도일)
★ 1694년 숙종 20년 삼척첨사 장한상 울릉도 수토
★ 1696년 숙종 22년 안용복 2차 도일 일본 백기주(伯耆州) 태수와 담판,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인정
(일본인의 출어.벌채금지서계 조선에 전달)
★ 1882년 고종 19년 이규원 검찰사 울릉도 검찰, 울릉도 개척령 반포, 전석규 도장에 임명. (수토정책 철훼)
★ 1883년 울릉도 주민이주 시작(16호 54명)
★ 1895년 고종 32년 삼척영장 겸임 도장제에서 전임도장을 임명하고 도장을 도감으로 개칭.
★ 1900년 광무 4년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면서 강원도에 편입하고 행정구역을 남면과 북면으로 나눔(도감->군수)
★ 1906년 광무 10년 울도군을 경상남도에 편입. (1914년 경상남도에서 경상북도로 이속)
★ 1915년 군(郡)제를 폐지하고 제주도와 더불어 도(島)제로 변경, 울도군청(鬱島郡廳)을 울릉도청(鬱陵島廳)으로, 군수(郡守)를 도사(島司)로 개편.(행정, 치안 총괄)
★ 1949년 정부수립 후 울릉군으로 환원. (경상북도 울릉군)
★ 1979년 남면이 울릉읍으로 승격, 현재의 1읍2면 체제 구축.
★ 2000년 독도리 신설
--<< 독도의 역사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 이사부 우산국 정벌 신라영토에 귀속시킴 (삼국사기)
930년
고려태조 13년 고려에 귀속
1401년
공도정책
1425년
우산도로 호칭
1454년
(단종2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중 권 148권에서 권 155까지의 8권 8책에 지리지로써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하는데 권 153강원도 울진현조에 그 부속도서로써 우산도와 무릉도를 열거하고 이들의 개략적인 위치를 우산, 무릉2도 재현 정동해중 2도 相距不遠 風月淸明卽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기록은 독도와 울릉도의 관계를 뚜렷이 밝힌 세계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되며 세종 14 년(1432년)에 편찬된 신선입도지리지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머리에 밝히고 있다.
1469년
삼봉도로 호칭
1693년
자산도로 호칭 동래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근해에서 왜인발견퇴거 안용복이 은기를 거쳐 도일 덕천관백에게 출어금지서계 징구 울릉도 일본어민 퇴각
1697년
3년마다 정기적인 치안 확보
1881년
(고종18년) 울릉도 개척령 반포 (척민정책) 일본어민의 울릉도 근해 출어에 대한 일본정부에게 엄중항의
1900년
10월 27일 (대한제국 광무4년) 관보 제 716호의 칙령 제41호 울릉도, 즉도석도(독도)를 울릉군수가 관할토록 함.
1905년
2월 22일 독도의 일본령 편입결의 도금현 고시 제40호로 독도의 동현편입발표
1905년
독도망루설치 해군통신기지로 이용 광무 10년 3월 5일 울릉도 군수 심흥택 보고서 「매천야록」에 독도 관련기록
1907년
경삼남도 울도군으로 편제
1910년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
1914년
경상북도 울도군으로 편제
1946년
1월 29일 SCAPIN 제677호 -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
1948년
6월 30일 미공군 폭격연습중 독도출어중인 어민 30명 희생 한국정부의 항의에 따라 1953. 2,27자 미공군 연습기지에서 제외 1951년 6월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건립
1952년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사 독도를 기점으로 평화선을 선포함
1953년
일본이 미국기를 게양, 조난어민 의령비 제거, 일본영유 표지 설치, 한국 어민 독도근해조업에 대한 항의.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에 항의각서 발송 그해 8월 5일 영토비 건립, 해양경비대 파견 협의
1953년
4월 27일 울릉도 주민(33명)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대장 : 홍순칠)
1954년
항로표지(등대)설치. 동년 8월 1일 점화개시 각국에 통보
1956년
4월8일 국립경찰의 경비임무 인수결정
1956년
12월 30일 경비임무 인계인수 1966년 4월 12일 수비대장 홍순칠 공로훈장수여
1980년
최종덕 독도 전입
1981년
헬리콥터 이착륙 시설 설치
1986년
7월8일 동인의 사위 조준기(61. 3. 20 생) 주민등록 전입 (가족 3명) 6개월간 어로작업목적
1991년
11월 17일 김성도(56세) 외 가족 (1명) 전입(서도)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 32명 근무 (동도)
1993년
레이더 기지 설치
1996년
접안시설공사 착공
1997년
울릉읍 도동에 독도박물관 건립
고대사로 살펴본 독도
삼국시대 ~
1)512년 6월 (신라 22대 지증왕 13년)지금의 울릉도를 본도(本島)로 하고 독도로 인정되는 우산도(于山島)를 작은 섬으로 하는 우산국(于山國)이 라는 하나의 독립국(獨立國)이 있었다.
2)신라 22대 지증왕은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君主)로 이찬 벼슬에 있던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케 하였다.
3)이사부는 나무로 만든 목우사자(木偶獅子)라는 무기를 써서 우산국을 정복한 뒤 6월에신라에 귀속시켰다.
4)그 뒤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
고려시대 ~
1)930년 (고려 태조 13년) 고려 태조13년 우릉도(지금의 울릉도)에서 사절로 백길,토두 두사람을 보내어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 백길에게는 정위, 토두에게는 정조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 때가 고려 태조 왕건이 길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을 무찌른 해이다.
2)1018년 (고려8대 현종 9년) (우산국이) 동여진의 침략을 받아 항복하였으나 곧 조정에서 이완구를 시켜 피난민을 우산국으로 돌려보내고 농기구와 이물품을 전달
3)1022년 (고려8대 현종 13년) 동여진의 침입으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을 예주에 살도록 했다.
4)1132년 (고려 17대 인종 10년) 울릉도 독도에서 → 조정에 공물을 바침
5)1132년 (고려 17대 인종 10년) 우산국대신 → 우릉(于陵 또는 羽陵)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우산국주(宇山國國)대 신 우릉성주로(于陵城主)로 바뀜. 이는 우릉도와 우산도(독도)로 구성된 우산국이 완전히 중앙정부의 직할아래 들어갔음을 의미함.
6)1141년(고려 17대 인종 19년) 강원도인 명주도 감창사(溟州道 嵌倉使) 이양실이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 본토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과실과 나뭇잎을 채취하여 조정에 바쳤다.
7)1157년 (고려 의종 11년) 명주도 전중내급사 김유림 파견 → 섬의 중앙 꼭대기 (지금의 성인봉)에서 동으로 1만여보, 서로 1만3천여보, 남으로 1만 5천여보, 북쪽으로 8천여보에 달하고, 마을 7군데 등 보고.
8)1197년 (고려 명종 27년) 동쪽지역으로 이주시켜 농사짓게 했으나 풍파가 심하여 다시 서쪽으로 이주.
9)1242년 (고려 고종 29년) 실력자 최이에 의하여→울릉도 이민 사업 실시 → 풍랑등으로 시민사업 실패거듭
조선시대 ~
1)1416년 (태종 16년)울릉도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비워두는 - 공도 정책 발표
2)1417년 (태종 17년) 삼척사람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임명 → 울릉도 파견 → 15호 86가주민이 있음을 발견 → 3명만 안무사에게 설득되어 육지로 옮김→여기서 우릉도를 공도정책으로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한 이유중에 주목할 점은 "강원도에서 무릉도까지 풍랑 속의 머나먼 뱃길로 수장될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 무릉도에 와서 사람이 살게 된데 는 고려말 나라의 부패와 정권의 불안정으로 가혹한 세금과 부역을 피하여 이 곳으로 왔기 때문이란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425년 (세종 7년) 태종 뒤를 이은 세종도 공도정책계승 → 김인우를 역시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파견. 여기서 "우산무릉등처"란 섬이 우산도와 무릉도등 2개가 있다는 표현이 분명함.
4)1438년 (세종 20년) ① 울진 사람의 남회와 조민을 무릉도순찰경차관으로 파견 ② 남녀 66명을 수색하여 본토 송환 → 본국 모배죄 ③ 주모자 김안 → 교수형, 나머지는 노복으로 삼음.
5)1441 (세종 23년) 만호 남호에게 울릉도 수색지시 → 70여명 송환 , 공도정책 계속 이후 → 울릉도 독도에는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았던지 육지와 몇년동안 소식이 두절됨 → 그 후 새 섬이 있다는 설이 나돔.
6)요도/신도설 그리하여 공도가 된 후 사람들이 항해 중 울릉도(무릉도), 독도(우산도)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 생긴 섬이란 신도설, 요도설이 떠돌았다. 조정에서 신도/요도를 확인하려 했다. 그 확인 기록이 바로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려있다고 보면 된다.
7)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울진 현조에 → 우산과 무릉의 두섬이 울진현 바다 한가운데 있는데 두섬의 거리가 멀지 않아 맑은 날에는 바라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8)삼봉도 세종 뒤를 이은 성종 때도 해안주민들 사이에 강원도 경내에 속하는 동해 한 가운데에 삼봉도가 있다. 부역이나 세금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갔다.
9)삼봉도 수색 조정에서 파견된 강차관 박종원이 삼봉도에 다녀왔다는 김환경과 함께 삼봉도 수색했으나 실패 → 삼봉도는 독도이다.
10)성종실록 김자주의 삼봉도(독도) 묘사 기록 - 25일에 섬서쪽 7∼8리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북쪽에 세바위가 나란히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이 있고 다음은 암석이 나란히 섰으며 다음은 중도이고 중도 서쪽에도 작은 섬이 있는데 그 모두가 바닷물과 통한다. 바다와 섬사이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30여개가 서있는데 의심나고 두려워 그 섬에 접할 수가 없어 도형을 그려 돌아왔다.
11)1531년 (중종 26년)「신증동국여지승람」의 45권 울진현군에 →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울진현 정동에 있다. (우산도) 세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았으며 남쪽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맑으면(울릉도에서) 세봉우리가 위의 나무와 산밑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이고 바람이 잦아지면 이틀에 도착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독도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은「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입증하는 확고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 신라 지증왕 13년이래 → 세종실록 지리지 → 고려사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까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일관되게 나타내고 있음은 독도가 우리영토임을 분명히 한 것이 틀림없음.
12)1693년 (숙종 19년) ① 대마도주가 동래부로 서계 보내옴 → 조선 어민의 죽도 출어금지 요청 ② 조정에서 →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회신 ③ 영의정 남구만 → 형세조사차 삼척첨사를 울릉도에 파견
13)1693년 (숙종 19년) 안용복, 박어둔 등 40여명의 조선어부는 울릉도, 독도에서 조업중인 일본 어선 발견 → 추방을 위한 격투 (독도 사수 - 안용복 장군편 참조)
①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는 대마도주로 하여금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불법월경을 스스로 금지시키겠다는 서계를 보내었다. ② 일본 도쿠카와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두섬은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를 휘하의 관백과 태수에게 쓰게 했을 만큼 독도의 조선 영유권 존중. ③ 조정은 울릉도 수토제도를 채택하고 3년에 한번씩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에 관원을 보내 순검케하여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주권은 변함없이 행사함.
14)1697년 2월 (숙종25년)「신증동국여지승람권 45여지고 일본 막부 → 독도는 조선영토임을 공식인정
15)1699년 (숙종 25년) 안용복 장군은 일본 에도 막부(정부)로부터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증서를 받음
16)1900년 10월 25일 (고종 37년) 칙령 제 4호 울릉도는 울도로 개칭하고, 강원도는 울진현에 속해있던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묶어서 하나의 독립군으로 설치하면서 군청관할 구역을 울릉전도와 죽도 및 석도라고 못박았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섬목앞의 실제 죽도이고, 석도는 → 석 즉 돌 → 독도를 의미한다. <독도의 독은 홀로 (독)이라고 하고 돌 (독)이라고도 한다.>
17)1904년 8월 23일 (고종 41년) 조일 의정서에 의거 → 독도에 → 일본 해군 부대 설치
18)1905년 5월 17일 (고종 49년) 일본 정부 → 독도를 죽도라 변칭하고 시네마현 토지대장에 기재하고 일방적으로 일본 영토에 합병 선언
19)1905년 11월 17일 (고종 49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조선국권 상실
외국에서 본 독도 - 리 앙쿠르
1) 1787년 5월 (정조) - 프랑스 - 라 페레즈 대령(la perouse) - 다 즐레(울릉도) - 독도(부솔:Boussole)
2)1797년 - 영국 - 브로오트(Broughton) - 울릉도(아르고노트:Argonaute) - 그 뒤 유럽서 - 울릉도를 다즐레와 아르고노트 2가지로 기재
3)1840년 - 독일 - 지볼트(Siebold) - 일본지도를 만들면서 - 울릉도를 아르고노트 섬 - 독도를 다즐레 섬에 맞춰서 기재. 그 뒤 - 유럽지도 -아르고노트 섬은 없어지고 다즐레 섬만 남았다.
4)1849년 (현종15년) - 프랑스 - 고래잡이 베인 리 앙쿠르(Li ancourt)호가 독도를 발견 - 리 앙쿠르 록스(Li ancourt Rocks)라 명명 (Rocks는 바위의 복수 단어임) - 섬이라기보다는 2개의 바위 덩어리로 봄.
5)1854년 (철종 5년) - 러시아 - 푸차친(Putiatin) 해군 중장이 이끄는 군함 팔라다호(Pallada)가 독도를 발견하고 - 마블라이 앤드 올리부차록스(Manalai & Olivntsa Rocks)라 명명.
6)1855년 - 영국 - 중국파견함대 소속 - 호넷(Honet)함의 해군 중령 - 라르시스(Charlses c. Farsyth)의 지휘 아래 - 독도 측정 관찰 - 호넷롯스라고 명명(러시아와 영국도 독도를 열암으로 보았음)
7)서양지도에서는 - 독도를 "리 앙쿠를"라고 해양지도에 기재되었음.
8)일본은 - 1900년 이전까지는 - 독도를 "리 앙코르도 로코스" 또는 "리앙 고르도 열암"이라고 불렀다.증거 1 - 1867년 만든 - "대일본국 연해 약도" 와 1870년 만든 "대일본 사신 도전"이라는 지도에 -' 리 앙코르도 로크스" 또는 "리앙 고르도 열암"이라고 불렀다. 증거 2 - 1880년 (고종 17년, 명치 13년) - 독도와 울릉도를 조사한 일본군함 - 야마키는 - 울릉도를 마츠시마 - 독도를 마츠시마에 좀 떨어지게 표시하고 "리앙고르도"라고 보고한 기록이 있음.
9)오늘날 독도를 리 앙쿠르(Li ancourt)라고 표시하는 나라가 있음 - 한일간의 분쟁지역으로 - 인정하는 셈. -- 한일 독도 분쟁에 끼어 들고 싶지 않다는 계산임
독도의 내력은 일찍부터 기록에 오르내린 울릉도와 관련지어 살펴보아야 한다.본토 유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울릉도의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된 것은 6세기 초 (512) 후였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512)년에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한국 문헌에 나오는 울릉과 우산(독도) 의 지명은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울릉도와 그 부근에 있던 독도를 우리가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생히 입증하는 것이다. 기인 1899년(광무 3년)에 당시 중등과정 신식교육기관에서 활용됐던 <대한지지> 제 1권에 삽입 돼 있는 지도 대한전도에는 울릉도 옆에 '于山'이라는 표기와 함께 섬이 그려져 있으며 좌 측 상단에는 '光武 3년 12월 15일 學部 편집국 刊'이라는 표시가 선명히 적혀져 있다.
이후 울릉도라는 명칭이 정착됨에 따라 그 부속 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 1432년 (세종 14)에 편찬된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 하여 동해 상에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531년 (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
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을 담은 <장한상 울릉도사적기>를 펴냈다.
<세종 실록 지리지 >
18세기 에 나온 정상익의 <동국지도>에 이르러서는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지도첩에는 으레 울릉도 옆에 우산도 또는 자산도를 표기하고 있다. 일본 스스로도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인정한 자료가 줄을 잇는다.
독도는 512년 울릉도와 함께 신라에 귀복되었으며, 고려에서는 행정 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겨살게 하는 등 울릉도와 독도 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었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 '삼봉도', '가산도', '가지도'등으로 불렀다.조선은 한때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에 공도정책을 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가 잦아지자,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 받고 일본 어부의 어로 활동을 금지토록 하였다.1667년 일본인이 편찬한 <은주시현합기>, 1869년 일본 외무성 고관들이 편찬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1876년 일본 내무성에서 만든 <태정宮> 결정서, 1876년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 <朝鮮東海 岸圖>, 1905년 동경박물관에서 펴낸 <일본전쟁실기>, 1936년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나온 <지도구역일람도> 등의 자료 등에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밝혔다.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던 독도를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 41조에 의해 독도를 울릉군의 한 부속도서로서 공식적으로 강원도에 편입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1905년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5년 앞선 것으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사실을 뒤엎을 수 있는 귀중한 발견으로 평가된다.'독도'라는 이름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 북도에 편입되었고, 2000년 4월 7일을 기점으로 행정구역상 주소를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산1~산37로 정하였다.
독도의 내력은 일찍부터 기록에 오르내린 울릉도와 관련지어 살펴보아야 한다.본토 유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울릉도의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된 것은 6세기 초 (512) 후였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512)년에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한국 문헌에 나오는 울릉과 우산(독도) 의 지명은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울릉도와 그 부근에 있던 독도를 우리가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생히 입증하는 것이다. 기인 1899년(광무 3년)에 당시 중등과정 신식교육기관에서 활용됐던 <대한지지> 제 1권에 삽입 돼 있는 지도 대한전도에는 울릉도 옆에 '于山'이라는 표기와 함께 섬이 그려져 있으며 좌 측 상단에는 '光武 3년 12월 15일 學部 편집국 刊'이라는 표시가 선명히 적혀져 있다.
이후 울릉도라는 명칭이 정착됨에 따라 그 부속 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 1432년 (세종 14)에 편찬된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 하여 동해 상에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531년 (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
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을 담은 <장한상 울릉도사적기>를 펴냈다.
<세종 실록 지리지 >
18세기 에 나온 정상익의 <동국지도>에 이르러서는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지도첩에는 으레 울릉도 옆에 우산도 또는 자산도를 표기하고 있다. 일본 스스로도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인정한 자료가 줄을 잇는다.
독도는 512년 울릉도와 함께 신라에 귀복되었으며, 고려에서는 행정 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겨살게 하는 등 울릉도와 독도 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었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 '삼봉도', '가산도', '가지도'등으로 불렀다.조선은 한때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에 공도정책을 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가 잦아지자,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 받고 일본 어부의 어로 활동을 금지토록 하였다.1667년 일본인이 편찬한 <은주시현합기>, 1869년 일본 외무성 고관들이 편찬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1876년 일본 내무성에서 만든 <태정宮> 결정서, 1876년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 <朝鮮東海 岸圖>, 1905년 동경박물관에서 펴낸 <일본전쟁실기>, 1936년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나온 <지도구역일람도> 등의 자료 등에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밝혔다.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던 독도를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 41조에 의해 독도를 울릉군의 한 부속도서로서 공식적으로 강원도에 편입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1905년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5년 앞선 것으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사실을 뒤엎을 수 있는 귀중한 발견으로 평가된다.'독도'라는 이름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 북도에 편입되었고, 2000년 4월 7일을 기점으로 행정구역상 주소를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산1~산37로 정하였다.
2009/11/07 14:48
http://blog.naver.com/ksgil39/92769634
□ 국토순례 개요
○ 일 정 : 2009. 10. 28. ~ 10. 30.(2박 3일)
○ 장 소 : 울릉도, 독도 일원
○ 참가인원 : 62명(교육생 59, 안내 공무원 2, 인솔자 1)
○ 순례 일정
- 첫째 날(10. 28.) : 교육원~포항~울릉도 도동항~울릉도 육로관광
- 둘째 날(10. 29.) : 성인봉 등산~독도 탐방~도동항 해안도로 산책
- 셋째 날(10. 30.) : 약수공원~전망대(케이블카)~독도박물관~봉래폭포~포항~교육원
□ 울릉도 현황
○ 위 치 : 동경: 130° 55‘ 북위: 37° 33’(※ 서울 위도와 같음)
(포항발 217㎞, 묵호발 161㎞)
○ 면 적 : 72,897,360㎡(여의도의 8.7배)
○ 인 구 : 10,220명
○ 행정구역 : 1읍 2면(출장소 1), 25리
○ 도 서 : 44개 섬(유인도 4, 무인도 40)
○ 섬의 특성
- 3무(無 : 도둑, 공해, 뱀), 5다(多 : 물, 미인, 돌, 바람, 향나무)
○ 자연의 보고 : 신비의 섬
- 동물(조류) : 흑비둘기 등 62종(텃새 24, 철새 38)
- 식물 : 향나무, 후박, 동백 등 750종
- 용출수, 원시림, 기암괴석 등 자연자원 풍부
□ 독도 현황
우산도(于山島) → 삼봉도(三峰島) →가지도(可支島) → 독도(獨島)
512년 1470년 1794년 1881년
○ 위 치 : 동경 131° 52‘, 북위 37° 14’ 울릉읍 독도리 1~96번지
(육지최단거리 : 경북 울진군 죽변 216.8km, 울릉도 87.4㎞)
○ 면 적 : 187,554㎡(56.7천 평)
○ 지 형 : 신생대 화산 분출로 생성, 처음에는 하나의 섬이었으나
오랜 세월 바람과 파도에 씻기어 현재의 모습이 됨
○ 식 수 : 빗물 및 담수화 시설에 의한 인공수(1일 1,500ℓ)
○ 주요시설
- 동도 : 유인등대 1기, 경비초소, 막사 9동, 등반로 610m, 접안시설 80m(500톤급 선박 접안 가능)
- 서도 : 어민숙소 1동(2층 36평), 등반로 550m, 저수탱크, 접안지
▶ 첫째 날 : 10월 28일(울릉도 일주 : 도동항~사동~통구미~남양~투구봉~태하~현포~천부~나리분지)
○ 05:00 / 광주교육원 출발
|
썬플라워호 |
○ 설렘
예전에 동료 간 울릉도, 독도 관광을 위한 모임 구성이 얘기가 있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진척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거리도 멀 뿐만 아니라 하루 이틀 사이에 다녀올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 중견간부 양성 교육 과정에 국내외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국외여행은 애당초 검토되지 않고 국내 현장학습으로 진행되었다.
지난 8월 중순 문화관광 벤치마킹을 위한 강원도 삼척 방문,
9월 초순 2박3일간의 지리산 종주와
9월 하순 제주도 올레 길 탐사와 한라산 등산,
그리고 이번 교육과정의 마지막 현장 체험인 울릉도, 독도 국토순례는 나에게 큰 의미를 안겨 준다.
지난 늦여름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 방문에 이어 우리 민족의 숨결과 자긍심을 느끼게 해줄 최동단에 있는 독도를 TV 등 언론매체를 통해서만 바라보던 곳을 직접 밟고 만지고 볼 수 있다니 지난번 생애 처음 경험한 지리산 종주를 준비할 때보다 더 가슴이 설렌다.
○ 뱃멀미
교육원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하여 4시간 반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포항에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오전 10시에 울릉도행 여객선 썬플라워호에 몸을 실으니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가 아니라 갑자기 울렁거림으로 식은땀이 흐른다.
파도보다는 너울파도 때문에 배의 흔들림으로 뱃멀미의 고통을 호소하는 많은 사람이 화장실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한 손엔 비닐봉지를 쥐고 한 손은 의자를 부여잡고 얼마나 씨름을 했을까 …….
승무원에게 얼마나 더 가야 도착하느냐고 물었더니 눈이 동그래지며 이제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도 3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고 한다.
아뿔싸~ 천장이 노래진다.
제주도행 여객선이며, 유람선을 몇 번 타봤지만 이런 뱃멀미는 처음이다.
반납만 안 했을 뿐이지 넘어오는 것을 참느라 두 시간 이상 고생한 것 같다.
멀미약을 안 붙여서 그랬을까?
귀향할 때는 반드시 붙여야지.
억지로 잠을 청하지만 흔들림으로 휘청거리며 선실을 다니는 승객 때문에 내 눈도 흔들거린다.
배를 탄지 3시간이 넘어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하니 멀미가 싸악 가신다.
동료 중 많은 이들이 나처럼 얼굴이 하얗다. 나만 심한 게 아니었군ㅋ
○ 울릉도의 첫 느낌
배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은 도동항 오른편에 떡 허니 버티고 있는 기암괴석의 산이다.
낮은 산이지만 해변에서 올려다보니 가을 오색단풍과 함께 어우러진 산이 참 멋지다.
숙소를 향하는 도중에 해풍을 받으며 즐비하게 널려 있는 오징어를 쫘악 펴 말리는 건조대가 눈에 확 들어온다.
킁킁~ 비릿내와 바다내음이 제대로다.
그리고 많은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도동항의 동쪽바다를 향해 널려 있는 횟집이며, 특산물 판매점, 장급 숙소, 미니관광버스가 관광지임을 대변해준다.
육지에서 힘들게 배를 타고 울릉도에 오니 육지에서 흔히 보는 건물이며,
사람들을 보니 이곳까지 우리의 행정력이 펼쳐지다니 우리나라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독도에 가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울릉도의 별미 홍합밥에 갖은 반찬으로 비벼먹으며 늦은 점심이 게 눈 감추듯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울릉도는 바위산으로 도로가 비좁아 대형버스는 몇 대 없고, 관광객 대부분은 25인승 이하의 관광버스로 관광을 즐긴다.
○ 도동항
도동읍은 뭍에서 울릉도의 관광객이 들어오는 관문인 여객선터미널 항구가 있는 곳으로
군청과 은행, 교육청 등 모든 행정과 문화, 교육시설이 집중된 곳이다.
망향봉과 도동(행남)등대 사이의 좁은 골짜기를 따라 시가지가 형성되어,
먹거리가 풍부해 생선회, 약소불고기, 홍합밥 등 각종 별미를 맛볼 수 있으며,
2,000여 년 된 향나무와 도동등대, 약수공원, 독도박물관, 해안 산책로 등 다양한 볼거리가 많다.
처음 개척민이 이곳에 정착한 곳으로 울릉도 개척비가 새겨져 있어 개척비문을 읽으며
우리 선조의 개척정신이 자랑스럽고 나라 사랑 마음을 되새겨 본다.
|
신라 29대 지증왕 13년(512년) 백의민족의 뿌리를 드리운 채 신비 속에 잠들어 있는 이곳 우산국을 이사부는 조용히 흔들어 깨워 영원히 신라에 귀속시켰다.
그 후 끊임없는 외세의 침탈에 맞서 조정에서는 공도 정책을 썼으나 천 년 전 할아버지의 피 속을 자맥질하던 개척의 의지는 이곳에, 풀뿌리 같은 이주민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그러다가 조선 26대 19년(1882년)에는 마침내 개척을 반포하기에 이르러, 이는 단호한 국토 수호 의지의 발현이었다.
이제 우리 조상의 위대한 개척정신을 이어받아 태고의 자연과 쾌락한 환경을 보전하고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울릉의 발전을 위하여 힘찬 발전을 내닫나니,
내일의 태양은 백의민족의 뿌리 드리워진 이곳에 조곡의 영광과 함께 찬란히 떠오르리라.
|
○ 사동
사동은 모래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울릉도에는 모래가 귀한데 처음 개척민들도 섬으로 들어와 섬을 일주해 보아도 모래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옥 모래가 바다에 누워 있다는 뜻에서 와옥사(臥鹿沙)라고도 하였다.
후에 한자식으로 표기할 때 ‘사’자만 써서 사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사동에는 대형 접안시설을 10년째 계속하고 있단다.
이곳 접안 시설은 주로 여객보다는 화물을 실어 나르는 항구로 이용될 계획이라고 한다.
○ 통구미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몇 개의 터널이 있는데 통구미 터널(일방편도 1차로) 입구에
울릉도 최초의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는데
SBS 방송국의 “신호등이 있다, 없다”에 방영되고 나서 울릉도의 명물로 유명하단다.
○ 태하
태하는 울릉도 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관광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연장 304m의 레일에 20인승 카 2대가 운행되고 있으며 36억 원을 들여 2008년 7월에 완공되었다.
태하는 황토가 유명하여 황토 구미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의 황토가 나라에 상납 되었다고 하여
조정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삼척 염장을 이 섬에 순시 보냈는데 순찰 여부를 알기 위해서 이곳의 황토와 향나무를 바치게 했다고 한다.
태하는 이곳에 김(해초)이 많아서 태하라고 부르기도 하고 안개가 많아서 태하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울릉8경의 하나인 태하 낙조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울긋불긋 색동옷으로 바꿔 입은 산등성에 웬 황토성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 순 황토로만 구성된 산이다.
황토 등대 주위로 50년생 해송나무 숲과 해국이 길가에 있어 너무나 아름답다.
○ 나리 분지
성인봉 북쪽 칼데라 하구가 함몰하여 형성된 화구원으로 울릉도 유일의 평지이다.
옛날부터 이곳에 정주한 사람들이 섬말나리 뿌리를 캐어 연명하고 살았다고 하여 나리 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화산 분화구 안에 사람들이 사는 곳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곳으로 화산이 폭발했던 분화구 안으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다.
특히 섬 하면 물이 귀하기 마련인데 물이 많아 수력발전까지 한다고 하니 무척 놀랍다.
더욱이 나리분지가 울릉도를 살리는 수원 저장고 역할을 한다는 게 아주 경이롭다.
나리분지에 내려앉은 가을 정취도 매혹적이다.
육로 관광의 마지막 종점인 나라 분지 주막에서 울릉도 감자전과 토종 막걸리(마가 목주, 일명 씨 껍데기 술)
한 잔에 하루해가 후딱 지나가니 생애 처음 접한 울릉도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 해안도로 기암괴석과 식물들
울릉도는 바위산을 오르는 도로가 많아 평균 25% 정도 경사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해안도로 주변에는 기암괴석이 많이 흩어져 있다.
9개의 거북 바위, 낙타 바위, 얼굴 바위, 곰 바위, 코끼리 바위, 송곳 바위, 촛대 바위 등을 볼 수 있었으며,
또한 울릉도에는 통구미 향나무, 태하동 솔송나무, 섬 잣나무, 너도밤나무, 섬개야광나무와 섬댕강나무,
섬엉컹퀴, 굴거리나무, 마가목(신경통 관절염에 좋음), 후박나무, 부지깽이나물, 왕해국, 털머위,
고사리, 참고비, 더덕, 들국화, 섬시호, 명이나물(산마늘) 등이 유명하다.
▶ 둘째 날 : 10월 29일(성인봉 등산~독도 탐방~도동항 해안도로 산책)
○ 07:50 / 성인봉 등산
○ 14:00 / 독도 유람선 관광
○ 21:00 / 해안도로 산책 |
○ 성인봉 등산
첫날 뱃멀미에 진저리가 나거나 산을 좋아하는 20여 명은 울릉도 해상 유람선 관광을 포기하고 울릉도 성인봉을 등산한다.
숙소에서 짚 형 택시로 구불구불하고 경사가 심한 도로를 달려 KBS방송국 송신탑까지 오른다.
조그마한 섬에 이렇게 큰 산이 있을 줄 미처 몰랐다. 의외였다.
쭉쭉 뻗은 나무들이 숲이 되었고, 그 아래로는 고사리 같은 참고비라는 식물이 산허리를 휘감아 군락을 이룬 게 너무나 멋지다.
일행들과 정감 있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간간이 나오는 쉼터에서 목을 축이며 출발한 지 1시간 30분 만에
해발 986.7m의 성인봉에 올랐다.
광주 무등산의 입석대보다 조금 낮다.
성인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건너편 봉우리들은 올가을의 정취를 물씬 품고 있어 섬 산의 경이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매우 좋다.
해상 유람선 관광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다.
산모양이 성스럽다 하여 성인봉(聖人峰)으로 불린다는 얘기가 전한다.
≪성인봉 전설≫
봄이 오자 이 집의 노모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린 손녀를 데리고 봄나물을 뜯기 위해 산을 올랐다.
할머니는 나물을 뜯는데 정신이 팔려 그만 손녀와 헤어지게 되었다.
손녀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찾았으나 허사였다.
어둠이 짙어 더는 찾을 수 없게 되자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 밤새 횃불을 들고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손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다시 산을 누비다가 어렵게 아이를 절벽의 중간 지점에서 찾았지만, 손녀는 실신하고 말았다.
마을에 내려온 손녀는 응급조치로 깨어나 그간의 과정을 설명했다.
나물을 뜯다가 잠이 와 잠시 누웠는데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나 어린 소녀가 이런 곳에 자면 안 된다고 하여 할아버지를 따라갔더니
커다란 기와집에 푹신한 이불을 덮어주며 자장가까지 불러주어 자고 있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깨어났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꿈속의 노인을 성인이라고 여겼으며 그가 사는 산이라 하여 성인봉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우리 땅 독도
오후 두 시.
일본과 잦은 마찰로 모든 국민의 가슴속에 품은 “독도는 우리 땅”을 가기 위해 씨플라워호에 몸을 싣는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87.4㎞로 왕복 4시간이 걸린다.
첫날 뱃멀미로 내심 걱정했지만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그동안 멀미에 적응이 됐나 보다.
멀미 안~녕~이다.
지리산 천왕봉의 일출을 보려면 3대가 공을 들여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독도도 접안할 수 있는 날이 1년 중 50여 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 산행하여 지리산의 멋진 일출광경도 봤는데 하면서 내심 독도 상륙의 그림을 그려본다.
승무원들도 이 정도 날씨면 접안이 가능하단다.
야~호닷!
가는 동안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망망대해다.
1시간 30분이 지나자 드디어 웅장한 독도가 나타난다.
독도에 도착하니 독도를 지키는 전경대원들이 손을 들어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우리를 태운 유람선은 독도에 접안을 시도하였지만 파도 때문에 접안 할 수 없다는 안내방송이 흘려 나왔다.
하늘은 금방 푸른 물감을 흩뿌릴 것 같고 바다는 쪽빛으로 물들어 그저 잔잔하게만 보이건만
이런 미약한 파도에 접안을 못하다니 조금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그만큼 접안이 어렵다는 반증일게다.
한편으로 서운하지만, 유람선으로 동도와 서도로 나뉜 독도를 가까이서 조망할 수 있다는 게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모든 관광객이 갑판으로 나와 선장의 안내방송을 들으며 우리 땅 독도의 모습을 저마다 손과 머리에 각인하기에 여념이 없다.
무엇보다 독도에 한반도 모양의 초지가 조성된 바위가 있어 퍽 인상적이다.
일본과의 영토 분쟁이 있는 이곳에 한반도 지도 모형의 바위가 있어 새삼 이 바위가 인상이 깊었던 이유이다.
독도 주변은 풍성한 황금 어장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한류와 남쪽에서 북상하는 난류가 만나는 지점으로
연어, 송어, 대구, 명태, 꽁치, 오징어, 상어가 많이 잡히고 있다고 한다.
독도 주변 해저에는 많은 해양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고, 어업전진기지로서의 역할도 크지만,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역사 이래로 역사 속의 많은 고대의 지도들도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나타내는 지도들이 발견되고
역사책에서도 독도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기록상으로 521년(신라 지증왕 13년)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부터이다.
○ 해안도로 산책
독도에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도동항의 해안도로인 건강걷기 코스를 산책하였다.
기암괴석과 바닷물이 만나 만든 자연의 향연에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고개를 숙여 굴을 통과하면서 주홍빛 가로등에 비치는 수려한 풍광의 자태는 울릉도의 또 다른 흑진주였다.
이 산책로를 안 보고 갔더라면 너무나도 후회할 뻔했다.
우리 일행은 내친김에 가로등이 없는 야간산행을 강행한다.
달빛에 의지하여 행남등대(도동항로표지관리소)까지 왕복 2.8㎞를 다녀온 덕분에 울릉도에서 두번 째 단잠에 빠질 수 있었다.
▶ 셋째 날 : 10월 30일 (약수공원~전망대(케이블카)~독도박물관~봉래폭포~포항~교육원)
○ 09:00 / 약수공원, 독도전망대, 독도박물관
○ 12:30 / 봉래폭포
○ 14:00 / 귀향 |
|
○ 약수공원, 독도전망대, 독도박물관
울릉도의 마지막 여정이다.
오전 9시.
도동 약수공원까지 약 20분 걸어서 이동이다.
이곳 약수 맛이 특이하여 유명하단다.
유황성분과 철분이 많단다.
경사진 곳을 걸어서 왔더니 목이 탄다.
그래서 쪽박에 물을 받아 목에 넘어가는 순간 뭔가 똑 쏘며 녹 냄새가 난다.
뭔 물맛이 이런데 ㅜ.ㅜ
억지로 두어 모금 먹고 버린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수라도 먹기가 고역이다.
≪약수터 전설≫
그 갑옷은 쇠로 되어 있어서 이 갑옷이 삭아서 흘러내리는 쇳물이 약수가 되었다고 전한다.
우리는 약수 공원을 지나 독도 전망대를 가기 위에 산 아래에 설치된 20인승의 케이블카를 타고 독도 전망대로 올랐다.
전망대에 올라서 울릉도 성인봉을 바라보니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저 멀리 동쪽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어제 본 우리의 영원한 섬 독도가 있을 것이다.
도동항을 한눈에 내려다보니 손바닥보다 저 작게 보인다.
이런 좁은 데서 어떻게 살아가나,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내려와 독도박물관을 관람했다.
독도박물관은 1997년 삼성문화재단에서 건축하여 울릉군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독도의 역사와 일본의 독도 영주권 및 일본해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와
독도의용수비대 활동상 등 귀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 봉래폭포
울릉도의 마지막 코스로 울릉도 비경 중의 하나인 저동항에서 2㎞ 위에 있는 봉래폭포를 택시를 타고 찾아갔다.
주차장에서 폭포까지는 720m인데, 중간지점에는 여름에도 4℃의 찬바람을 뿜어내는 풍혈(風穴)과
지름이 한 아름도 넘는 삼나무 숲으로 우거진 삼림욕장이 우리를 반겨준다.
바위산인 울릉도에 폭포가 있다니 믿겨지지 않았지만, 우리 앞에 나타난 봉래폭포는 웅장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봉래폭포는 낙차가 30m에 이르고 3단 폭포로써 울릉도의 중요한 상수원이라고 한다.
이곳 물은 북서쪽의 나리분지에 모인 우수가 지하로 스며들어 지하에서 다시 지표로 용출되는데, 1일 수량이 3,000톤 이상 된다고 한다.
웅장한 폭포의 자태에 매료되어 잠시 머물다 하산하는데 갑자기 땅속에서 그 뭔가가 용솟음치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을 보니 공사장은 없는데 지표면은 쿵쿵 콸콸하는 진동소리가 들린다.
참 신기하기 그지없다.
▶ 국토순례를 마치며
천혜의 울릉도 비경과 대한민국의 자존심 우리 땅 독도의 국토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다음에 가족과 함께 꼭 다시 찾으리라는 굳은 약속을 하며 처음 타고 온 썬플라워호에 몸을 싣는다.
우리 국토이면서도 멀게만 느껴졌던 울릉도와 독도.
일본과 영유권 문제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런 곳.
그래서 더욱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지만 항상 외롭게만 느껴지는 섬.
대한민국이 좁다 하여 일본, 중국, 동남아, 유럽 등을 누볐던 게 울릉도와 독도에 미안하다.
집에 도착해 싣고 나니 자정이 다된다.
생에 처음 경험한 울릉도와 독도 국토순례!!!
이번 교육과정을 통해 정말 새로운 산 경험과
접해보지 못한 갖가지 강의와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 내 인생의 안목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앞으로 남은 인생에 크나큰 좌표 역할이 될 것 같아 2박 3일의 모든 피로가 쫘~악 풀린다.
홀로 아리랑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도 동해가는데
우리네 마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 타고 떠나라
한라산 제주에서 배 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 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맞이해보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