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5.19 영불해협 근처 클라우즈힐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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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활짝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행동한다. 그렇다. 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 (T. E.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 머리말에서) | |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신나게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1935년 5월 12일이었다. 친구를 초대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전보를 치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데, 저 앞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년들이 보였다. 그들을 피해 핸들을 꺾는 순간 오토바이는 곤두박질치고 오토바이로부터 분리된 로렌스의 몸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나동그라졌다. 의식을 잃은 그는 이튿날 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머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로렌스의 육체는 쉬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소생할 가능성은 없었다. 5월 19일, 20세기의 괴짜 영웅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 |
용맹한 호걸도 괴력의 장사도 신출귀몰한 무사도 아닌 가장 인간적인 영웅
영화를 본 관객들은 대부분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흠모했을 것이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에 진정한 영웅이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영웅은 신화와 역사 속에 등장한 기존의 영웅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용맹한 호걸도 아니었고, 괴력의 장사도 아니었으며, 신출귀몰한 무사도 아니었고, 신의 은총을 입은 예언자나 신의 화신도 아니었다. | |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한장면. 오마 샤리프가 연기한 알리와 피터 오툴이 연기한 로렌스. 이미지 : 뿔 제공
그는 부드럽고 따뜻하며 의리 있고 가끔 고집을 부릴 줄 아는 친구 같은 존재였고, 더욱이 자신의 나라가 아닌 불우한 처지의 남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휴머니스트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무작정 찬양할 수만은 없다. 어찌됐든 그는 영국 제국주의의 군인이었고, 그가 기여한 아랍 반란의 성공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의 먹이가 되었다. 아랍인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접근은 어떻게 보면 가장 교활한 제국주의의 발톱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우리에게 그 누구와도 다른 감동을 선사한 영웅이다. 제국주의가 로렌스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긴 했지만 아랍인들을 향한 그의 마음은 순수했던 것이다. 로렌스는 이상을 꿈꾼 몽상가였을 뿐이었다. | |
자전거 타고 각지의 중세 고적을 답사하던 외로운 소년 몽상가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어린 시절부터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했다. 그의 특별한 성격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일까? 아버지의 원래 이름은 준남작 칭호를 받은 토마스 로버트 채프먼 경이었다. 그는 본부인과 네 딸을 둔 가장이었는데, 하녀 사라 메이든과 사랑에 빠진다. 사랑과 가정을 동시에 지킬 수도 있었으련만, 그는 가정과 나라, 이름까지도 버리고 사라 메이든과 함께 도피하여 웨일스의 트리머독에 새 가정을 꾸렸다. 새 보금자리에서 그는 성을 로렌스로 바꾸고 5형제를 낳았다. 토마스는 둘째였다. 아버지가 본부인에게 이혼을 요청했으나 본부인이 응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로렌스 형제는 법적으로 사생아였다. 아버지는 사냥이나 낚시, 요트, 승마 등을 즐겼고, 어머니는 캘빈교도로서 의지가 강한 금욕주의자였다. 로렌스의 성격은 몽상가인 아버지와 금욕주의자인 어머니를 반반씩 닮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금욕주의자인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그는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았고, 일생 동안 여자를 멀리했다. 다만 몽상가로서 로렌스는 아버지와는 전혀 달랐다. 로렌스는 승마를 빼고는 아버지의 귀족적인 취미를 거의 물려받지 않았던 것이다. | |
어린 로렌스는 나무오르기나 자전거타기, 헤엄치기, 말타기 등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운동신경이 대단히 발달했음에도 그는 단체경기를 싫어했다. 축구나 크리켓 따위를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구경조차도 하지 않았다. 규칙이나 약속에 얽매이는 것, 많은 사람이 함께 모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아무리 아파도 그 아픔을 호소하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친구와 싸우다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는데, 누구에게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결과 치료가 늦어져 키가 자라지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싸움의 원인에 대해서는 하급생에 대한 선배들의 강압적인 태도에 로렌스가 분노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단체경기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친구의 시비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로렌스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원만한 성격의 소년은 아니었고, 고독을 즐기며 혼자서 사색하는 외로운 몽상가였다.
방학 때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영국 각지는 물론 프랑스에도 다녀왔다. 주로 옛 교회와 성터를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중세의 고적이라는 고적은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옛 교회의 옥상을 마치 원숭이처럼 자유자재로 오르내렸다. 청소년 시절의 이런 경험이 옥스퍼드 대학 사학과에 들어가 크게 빛을 발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의 답사 경험을 바탕으로 중세 유럽의 군대 건축물과 십자군에 대해 연구하여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대학 시절 만난 옥스퍼드의 박물관장 데이비드 조지 호가스는 로렌스를 아라비아(아랍어를 쓰는 나라와 민족의 총칭으로 아랍이라고도 함)로 안내한 스승이었다. 스승은 로렌스에게 아랍어를 배울 것을 권했고, 그로 인해 로렌스의 아라비아에 대한 관심도 배가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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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전통 복장을 입고 단컴을 찬 로렌스의 모습(1927) | |
아랍인의 옷을 입고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라비아의 로렌스'되다
아라비아 아카바의 사막에 선 로렌스(19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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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의 아라비아와의 직접적인 인연은 1909년 대학에서의 마지막 여름방학 때 시작되었다. 그는 졸업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진행중이던 고대 히타이트 문명의 발굴 사업을 견학하기 위해 아라비아 여행을 계획했다. 스승인 호가스 박사는 여름에는 여행하기 좋지 않다며 반대했지만, 로렌스는 휴대품이라고는 카메라와 권총, 칫솔만 챙기고는 이웃 마을에 놀러 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물론 가벼운 여행이 될 수는 없었다. 말라리아에 걸린 적도 있었고, 위장에 탈이 난 적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지방 신문에 피살당했다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한 토인이 로렌스의 구리 시계를 금시계로 착각하고 로렌스를 죽이려 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그 토인이 권총의 안전장치를 몰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호가스 박사의 추천으로 대영박물관 산하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원정대에 참가하였다. 1911년 초부터 1914년 여름까지, 로렌스는 줄곧 중동 지역에서 생활했다. 작업이 끝나면 다른 연구원들은 귀가했지만, 로렌스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을 두루 훑고 다녔다. 어차피 혼자 생활하는 것을 즐겼던 그였기에 여행의 고독이, 특히 사막의 고독이 그에게는 오히려 오래 입은 옷처럼 편안했던 것이다. |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로렌스는 카이로의 육군 정보부에 부임, 시나이 반도의 지도를 제작하다가 1916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아랍은 터키의 식민지였고, 터키는 독일과의 동맹을 선택하였다. 이에 아랍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 메카의 대(大)셰리프(셰리프는 ‘무함마드의 후예’라는 뜻으로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그녀의 아들 하산을 통해 계승되어오고 있다)인 후세인 이븐 알리는 터키 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을 꾀하였다. 영국은 독일과 동맹을 맺은 터키를 무찌르는 한편 아랍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후세인을 돕기로 했다. 로렌스는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 이븐 후세인과 함께 아랍 독립전쟁에 참여한다. | |
엔부에 들어서는 파이살 이븐 후세인의 군대(위)
1917년 열차 폭파 후 현장에 선 로렌스(좌), 1918년 10월 다마스쿠스에 들어서는 로렌스(우). 이미지 : 뿔 제공
로렌스의 아랍 독립에 대한 열정은 단지 전략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아랍을 사랑했다. 그는 기꺼이 영국 군복을 벗어던지고 아랍인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로렌스의 진정한 마음이 아랍인들에게 전달되었기에 그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터키군과 싸울 수 있었다. 2개월간의 행군을 한 뒤 1917년 7월 6일 홍해의 북쪽 끝에 있는 아카바를 장악하였다. 힘겨운 싸움이 계속되었지만, 1918년 10월에는 에드먼드 앨런비 장군의 부대와 협동 작전을 펼친 끝에 마침내 다마스쿠스를 점령할 수 있었다. 임무를 완수한 로렌스는 지친 몸을 이끌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 |
"아랍의 일은 세계 어느 나라도 간섭하지 말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된 후, 각국의 이권을 계산하는 평화회의가 진행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국주의의 욕망을 드러냈다. 로렌스는 아랍의 일은 세계 어느 나라도 간섭하지 말자고 주장했으나, 그 주장이 먹힐 리가 없었다. 결국 몇 달에 걸친 밀담 끝에, 파이살은 프랑스의 원조를 받으면서 다마스쿠스를 거점으로 하는 시리아의 내륙지방을 차지하게 되었고, 프랑스는 베이루트와 시리아 해안 지방을 손에 넣었으며, 유대인들은 영국의 보호하에 팔레스타인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상적인 결말을 꿈꾸었던 로렌스는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는 조지 5세에게 받은 훈장을 반납하면서, 자신은 아랍인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불어넣었다며, 아랍 반란에서의 자기 역할은 자신에게나 영국에게나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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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파리평화회의 기간 베르사이유의 파이살(가운데)과 그의 조력자들. 파이살 뒤에 토머스 로렌스(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서 있다. | |
로렌스의 아랍에 대한 마음이 순수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사실상 서구인의 오만이 있었다. 동양의 문제를 서양인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오만이었다. 실제로 로렌스는 “옥스퍼드 시절에 일생 동안 단 한 번쯤은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하는 일에 뛰어들고 싶다”(<지혜의 일곱 기둥>의 에필로그에서)라고 생각했음을 고백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지적했듯이, 영국이나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아랍은 터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제국주의 군대가 개입했을 때는 이권을 주장할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로렌스는 짐작했어야 했다. 터키의 지배를 벗어나 아랍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이니, 결과적으로 로렌스는 아라비아의 영웅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영웅이 된 셈이었다. | |
허울만 좋은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명성에서 떠나고 싶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렌스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폄하할 수 없다. 그는 분명 고귀한 품성을 소유했고, 잘못된 결과를 놓고 합리화하기보다는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행적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30세에 대령이었던 그는 35세에 계급을 낮추어 사병이 되었다. 1922년 8월 존 흄 로스라는 가명으로 공군에 입대한 것이다. 이듬해 2월 신분이 밝혀져 제대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직 로렌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3월에는 다시 토마스 에드워드 쇼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육군 전차부대에 입대했다. 그는 왜 이렇게 군대로 돌아가려 했을까? 허울 좋은 명성만 무성한 ‘아라비아의 로렌스’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름을 바꾸고 군대에 있으면, 복무기간 중에는 조용한 생활이 보장되리라 생각했다. 이 시기에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나에겐 살기 위해 싸울 기력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예전의 로렌스와는 헤어졌습니다. 세상의 소문이라는 것이 만들어놓은 그 로렌스를 생각만 해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 |
오토바이를 즐기고 있는 토머스 로렌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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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로 피신하고 싶은 소원을 정부도 들어주었다. 1925년 7월 공군 복귀가 허락된 로렌스는 1935년 2월 말까지 10년의 병역 만기를 채우고 제대했다.
이제 그를 귀찮게 하는 요소는 없어졌다. 새로운 이름으로 로렌스는 마음껏 은둔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제대 후 그는 클라우즈힐의 코티지에 정착하였다. 생각해보면 지나온 세월은 꿈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속력을 즐기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고독을 즐겼다. 바람을 만들면서 전속력으로 달리는 오토바이는 그에게 한껏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그가 자동차보다 오토바이를 좋아했던 것은 자동차는 사고 나면 남을 죽게 하기 쉽지만, 오토바이는 사고 나면 자신을 죽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오토바이는 마침내 주인을 죽이고 산화했다. 저 세상으로 간 그는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진짜 그만의 고독을 즐길 수 있었을까? | |
이상을 꿈꿨던 몽상가와 제국주의의 영웅이라는 평가 사이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20세기 가장 특별한 괴짜이자 영웅이었다. 그의 영웅적인 행위는 결국 제국주의에 이바지하고 말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이상을 꿈꾼 몽상의 결과였다. 그의 회고록 <지혜의 일곱 기둥>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지만, 그 회고록은 자신이 결코 영웅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도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것은 아랍 운동의 역사가 아니라, 그 운동에 참여했던 나의 역사이다. 일상생활과 사소한 사건들과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어떤 교훈도 담겨 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만한 놀라운 폭로도 없다.” 그랬다. 이렇듯 그는 자기 자신의 업적에 대해 사실상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제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었으며 그의 내면에 오리엔탈리즘이 존재하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예전의 로렌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지만, 그는 다시 제국주의 군대에 입대하여 식민지 인도에서 근무했다. 그래도 ‘아라비아의 로렌스’ 신화가 날조되었다는 주장은 과하다. 아랍 독립전쟁에서 로렌스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된 면은 있다. 서구 중심의 역사관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로렌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였다. 아랍의 혁명을 이끌어낸 주체는 당연히 아랍인이었다. 조력자였다 해서 영웅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로렌스의 뜻은 고귀했고, 그는 괴짜였지만, 아니 괴짜였기에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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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전3권, 최인자 옮김, 뿔, 2006)은 아랍 독립전쟁에 참여한 자신의 꿈과 의지와 좌절까지를 함께 담은 자전적 에세이이다. 로렌스는 독서광이었던 만큼 글솜씨도 탁월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주는 감동은 그의 솔직성이다. 그 솔직성까지가 그를 신화화하는 데 이바지한 면이 있지만, 글을 읽어보면 그럴 만하다고 수긍하게 된다.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에 필자는 십분 수긍하며, 그리하여 그의 고귀한 품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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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에 읽었던 <바빌론 강을 넘어서>는 나 자신을 민족운동의 중심점으로 느끼고 싶다는 커다란 갈망을 나에게 심어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다마스쿠스를 차지했을 때,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날이 사흘 이상 계속되었다면, 내 마음속에는 순식간에 권위의식이 뿌리를 내리고 말았을 것이다.”
<지혜의 일곱 기둥>의 축약본 <사막의 반란>(전2권, 박광순 옮김, 범우사, 2000)도 있다. 분량을 줄이기 위해 사색을 담은 문장은 생략하고 사건 위주로만 정리하였다. 빨리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로렌스 특유의 명문장을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리처드 엘딩턴의 <아라비아의 로렌스>(김창활 옮김, 정음문화사, 1989)는 <지혜의 일곱 기둥> 시절뿐만 아니라 로렌스의 어린 시절과 말년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아랍의 역사와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은 절판되어 도서관에서 찾아야 한다. | |
<오늘의 세계인물> 관련글 이어보기ㅣ1991년 4월 16일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명감독 데이비드 린, 숨을 거두다
- 글 차창룡 / 시인, 문학 평론가
-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발행일 2009.05.19
이미지 TOPIC / corbis, 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