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야는 지질학적으로 화강암층이 발달하여 기암절경을 이루는 곳이 많다. 금강산과 설악산의 경승이 그렇고, 서울의 삼각산과 도봉의 암봉들이 그렇다. 그래선지 산 이름도 암석으로 된 산은 메뿌리 악(岳)자를 넣어 구별하는지도 모른다. 북악, 관악, 운악, 감악 등등....
그런데 그런 돌로된 암벽이나 절벽에서 쏟아지는 폭포 옆과 너른 판상엔 어김없이 이곳을 다녀간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라고 했던가. 금강산 앙지대(仰止臺)엔 단원 김홍도의 아들 긍원 김양기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만폭동엔 봉래 양사언(楊士彦)의 글씨가 그리고 구룡폭엔 해강 김규진의 글씨가 새겨 져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지명인사의 이름과 휘호가 설악산의 비선대엔 33인의 민족 대표중 한 사람의 이름과 그 아드님 이름이 삼척 무릉계곡의 암반엔 조선중기 이곳 고을 수령을 지냈다는 유한준(兪漢雋) 등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처음 대한 금강산 곳곳엔 빨간 글씨로 체제를 선전하는 문구가 많아 눈에 거슬르기도 했다.
이곳 포천 영평강가 금수정이 있는 벼랑엔 그곳의 별칭들이 해서로 새겨져 있고 강 가운데 큰 바위엔 그곳의 경관을 중국의 고사와 연결지어 이름했으니 그 시절 선비들의 새김은 꼭 내 이름만을 남기기 위해서라기보다 경관에 취한 흥을 억제치 못해 새긴것은 아닌지...
(와준窪尊)
금수정에서 조금 오르니 영평강가의 절벽이 마치 아름다운 산수화를 그려 넣은듯한 병풍같은 절벽이 나타나 내 눈을 번쩍 뜨게 한다. 바로 영평8경의 하나인 창옥병(蒼玉屛)이라 한다. 이름처럼 아래엔 맑은 물이 흐르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엔 푸른 솔들을 어우러져 그곳의 정경이 마치 푸른 옥으로 꾸민 병풍으로 비유한 승경이다. 멀리서 그 절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아야 하는데... 버스는 무심히 그냥 지나쳐 37번 국도에서 좌회전 작은길로 들어선다. 바로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을 배향한 옥병서원이 나타나고 앞에 <조선국영의정사암박순선생 신도비>가 서 있다. 그러나 일행은 서원으로 가지 않고 길섶의 창옥병 암각문에 대한 안내판이 서있는 곳을 지나 영편강변으로 내려간다. 안내판을 보니 사암 박순 선생이 영평에 왔다가 산천의 빼어남을 보고 배견와(拜鵑窩)를 지어 은거한 곳이 이 주변 같은데 집에 돌아 와 사진으로 담아온 안내판을 자세히 보니 연대를 잘못 기록해 놓았다. 선조 19년(1568년)이라했는데 아마 1586년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착각으로 숫자를 바꿔 잘못 기록한 것 아닌지 모르겠다.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막걸리 1말이 들어간다는 와준 지금은 물만 가득하다)
길섶의 밭을 지나 강변으로 내려가니 넓은 영평강이 펼쳐진다. 그런데 강바닥이 기암괴석의 암석으로 되어있어 참으로 장관을 이룬다. 400여년 전 사암 박순선생이 이런 경치에 반해 아예 이곳에 터잡고 살았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것 같았다. 그만큼 드넓은 강변에 기암괴석의 반석은 이곳만의 독특한 경관인데 물은 오염되어 흐르니 그 경치가 반감되고 만다. 제일 처음 찾은 암각서는 청령담(淸?潭)이란 각자였다. 세로로 내려쓴 해서체 글씨로 석봉 한호의 글씨란다. 그런대로 한호의 글씨체와 흡사한것 같다. 물이 맑고 서늘한 못이란 이 영평강을 뜻하는 이름이지만 지금 영평강은 시대의 아픔을 앓고 청령담이란 박순 선생의 작명(作名)이 무색할 정도의 오염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 이어 영평강 바닥이 들러난 반석위로 가서 조금 큰 웅덩이의 턱에 쓰인 희미하게 남은 와준(窪尊)이란 글씨를 음미한다. 사암 선생이 이곳 영평강에서 노닐며 이곳 반석의 깊은 웅덩이에 막걸리를 부어놓고 마시며 영평강의 승경을 즐겼다는 고사가 그럴듯하다. 와준(窪尊)뒤의 글자가 높을 존(尊)자 이지만 술통 준(樽)자와 통하므로 와준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지난번 전북 순창의 장구목 유원지의 섬진강 상류 강바닥처럼 반석이 물결처럼 조형된 것이 기이하게 보인다. 경승지의 자연은 이렇게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
(산금대散襟臺)
다시 자리를 옮겨 보니 약간 마멸된 산금대(散襟臺)란 해서체가 보인다. 아마 이곳의 시원한 강바람에 여인의 치마폭이 흩날렸나보다. 그 옆에 선조 임금이 사암 박순 선생을 평한 정신수월(精神水月) 절조송균(節調松筠)이란 휘호가 행서체로 쓰여 선조의 윤음(綸音)이라니 꼭 선조의 글씨같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초기 4대명서가(名書家)의 한사람인 석봉 한호(石峯 韓濩)의 글씨로 전한다. 여기는 또 해설문에 신이라는 분이 바위에 새겼다고 하여 각자한 사람을 밝혀 놓은 흔치 않는 경우가 되겠다.
(박순 선생시를 해설하는 포천시 문화해설사 변 선생님)
그 옆 벽엔 조선중기 제일의 예서작가로 알려진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 1624~1701)이 쓴 사암 선생의 ‘제이양정벽(第二養亭壁)’이란 시가 새겨 있어 포천시 문화해설사이신 변선생께서 글자를 가르키며 읽고 해설을 해 주신다.
(왼쪽엔 수경대란 각자와 題二養亭壁 시가 곡운 김수증의 예서체로 새겨져 있다. 우측에 수경대(水鏡臺)란 글씨도 보인다)
곡조시시문일개(谷鳥時時聞一箇) 골짜기에 새소리 때때로 들리고
광상적적산군서(匡牀寂寂山群書) 적적한 침상위엔 책들만 나뒹구네
매련백학대전수(每憐白鶴臺前水) 안타깝구나! 백학대 앞에 흐르는 물이
재계출문편대어(?繼出門便帶?) 겨우 산문을 나오니 흙탕물 일세
(여래지 답사의 고수 전성샌님)
우 사암선생시 김수증서(右 思庵先生詩 金壽增 書)라고 곡운 김수증 선생 특유의 예서체로 새겨저 있었다. 김수증 선생도은 이곳에서 가까운 화천의 화악산 기슭 곡운계곡에 1670년경 은거하며 자연을 벗삼아 지냈고 그의 동생인 김수항이 일찍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백운산에 별서(別墅)를 마련하여 아들 농암으로 하여금 와 살게 하였다는데 응암(鷹巖)에 은구암隱求菴)지어 생활하다가 농암(農巖)으로 옮겨 호월헌(壺月軒)을 지어 지냈다고 한다. 그러니 김수증 선생도 자주 이곳에 들러 사암선생의 유적을 찾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잘 다듬지지 않은 바위 벽에 이렇게 곡운 선생의 예서로 새겨 지금도 선명하게 볼 수 있으나 오랜 동안의 마멸로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도 있었다. 뒤 늦게 도착한 회원이 또 다른 곳에 각자가 있다고 하여 가보니 희미하게 청학대(靑鶴臺)란 글자의 윤곽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백학(白鶴)과 청학(靑鶴)이 노니는 신선이 사는 곳과도 비길만한 곳이 아닌가.
(선조가 박순 선생에게 내린 윤음이라는 松筠節調 水月精神)
사암 박순 선생은 이렇게 영평의 절승(絶勝)을 사랑하여 시를 짓고 곳곳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각자(刻字)하여 남겼으니 그 흥취는 500여년 뒤 우리 후손에게도 이어져 오늘 그 자취를 더듬으며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完)
(精神水月 節操松筠으로 읽어야할까요? 왼쪽으로 읽으로 오른쪽으로 읽으나 뜻은 매한가지 입니다.)
(선조 19년 1568년이라 했는데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계산해 보니 1586년으로 숫자가 바뀐것 같다)
첫댓글 좋은 자료를 주셨군요, 감사하게 보았습니다.
지난 4월 초순 포천 답사를 다녀와 정리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상세한 글과 함께 감상할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산야에도 이런 각자 문화가 오래전 발전했습니다. 공해적 성격의 각자도 많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