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성모 성당] 마리아첼 대성당
마리아첼은 오스트리아 중동부 슈타이어마르크 주에 있는 산악 도시로
오늘날도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성모 성지이다.
전승에 따르면, 현재의 마리아첼과 그 주위 일대는 1103년경 성 람브레흐트 베네딕토회 수도원
관할 하에 있었으며, 수도자들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작은 분원들을 여러 곳에 세웠다.
1157년 막뉴스(Magnus)라는 수사가 현재의 마리아첼 마을이 위치한 첼러탈(Zellertal) 지역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오늘날 마리아첼이라는 마을 이름도 이 지역명과 연관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수사는 라임나무로 만든 작은 성모상을 갖고 있었는데 아기 예수가 사과를 들고
성모 마리아 무릎에 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마뉴스 수사가 이 지역에 거의 도착 했을 때
큰 돌이 길을 막고 있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수사는 자신이 모시고온 성모님의
성상을 그 돌 위에 내려놓고 기도를 드리자 바위는 작게 부수어 떨어져 나갔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한다. 이후 마뉴스 수사는 마을에 도착해서 주민들과 함께
바위가 있었던 길의 근처 언덕에 경당을 갖춘 작은 수도원을 나무로 짓고, 자신이 모시고온
성모상을 그 경당에 모셨다. 마리아첼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마리아의 작은 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 이 수사의 작은 경당에서 그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12세기 당시 이미 순례자들이 찾는 마리아의 성소가 돼
그 후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이 아기 예수를 안은 작은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했는데,
많은 기적들이 일어나면서 마리아첼이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2세기 당시에 이미 순례자들이
찾는 마리아의 성소가 되었고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이 작은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치유의 기적이
수없이 일어나 더 많은 순례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오늘날의 헝가리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체코 등 여러 지역의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 후 이 작은 경당은
몇 차례 증축되다가 1200년경 모라비아의 헨리 마르그라베(Henry Margrave)와 그의 아내가 성모님의
도움으로 심한 통풍에서 치유되자 이들은 이곳 나무로 지어진 첫 성당 자리에 돌로 성당을 건축하여
봉헌했다.
현재의 마리아젤 대성당은 헝가리 국왕 루드비히 1세가 건설한 건물이 중심이 되어 전해오는데,
여러 차례 파괴와 복원을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377년 루드비히 1세는 수적으로 우세한
터키 군대에 대적해 소수의 군대로 승리를 거두고, 그 승리를 마리아젤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생각하여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다시금 성당을 새로 지었는데, 정면 중앙에 90미터 높이의
고딕 양식의 첨탑을 가진 모습으로 지어 봉헌했고, 고귀한 보물들도 기증했다. 그때부터 마리아첼은
가톨릭 신자들, 특히 헝가리 인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마리아첼의 성모는 헝가리의 수호성인이며 어머니로도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420년 터키 사람들이 마리젤(Mariazell)에 들어와 이 성당과 마을을 불 태웠고,
1474년에 또 다른 화재가 마을을 덮쳐, 두 번에 걸쳐 이 대성당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곧 다시금 성당을 재건하기 시작했으며, 1644년부터 1683년까지는
Domenico Sciassia가 이 성당을 바로크 양식으로 확장하고 재설계 하였다.
정면 중앙의 고딕 첨탑의 왼쪽과 오른쪽 좌우에 바로크식 탑이 추가로 세워졌으며,
회중석(nave)의 길이는 더 길어지고 넓혀졌으며 동쪽 측면에는 돔이 추가되었다.
대 제단은 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에 의해 설계되었고, 1704년에 봉헌되었다.
내부는 웅장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회중석 좌우로 12개의 측면 경당들이 만들어졌는데,
각각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제단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오르간 갤러리의 회 반죽 치장 벽토 작업과 1737개의 오르간 콘솔은
비엔나의 조각가 Johann Wagner에 의해 1740년에 만들어졌다. 정문 앞에는 실물 크기의 두 개의
청동상이 서 있는데 왼쪽에는 헝가리의 루드비히 1세가, 오른쪽에는 모라비아의 하인리히가 있다.
이들은 1757년 바로크 시대의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 중 한 명인
Balthasar Ferdinand Moll이 만든 것이다.
라임나무로 조각된 성모상, 수많은 기적 일어나
1907년 이 순례 성당은 가톨릭교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주요 성당에 부여되는 바실리카라는
호칭을 부여받아 작은 바실리카로 승격되었다. 해마다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헝가리 등 인근 지역에서
수많은 순례객들이 대성당 제대 중앙의 라임나무로 조각된 성모상에 대한 공경과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오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반 종교 개혁 시기 이 마리아첼의 중요성은 다시금 증가 되었다.
합스부르그 왕가는 가톨릭 신앙으로 여러 민족을 통합하며, 이 마리아첼을 오스트리아의 국가적인
순례의 허브로 활용했다.
1782년 요셉 하이든은 마리아첼의 대성당을 찾는 순례자들을 위해 마리아첼 미사를 작곡했다.
그러나 1786년 오스트리아의 요세프 2세(Joseph II) 황제는 교회 자체도 국가 행정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교회의 재산들을 국유화하거나 국가 복지시설이나 자선단체에 귀속시켰다. 그로인해 마리아첼을
관리하던 성 람브레흐트(St. Lambrecht) 수도원도 해산되었고, 1787년에는 순례도 완전히 금지시켜
순례자들이 이곳 성당을 방문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그 뒤 이 제한이 해제되었을 때,
순례자들은 이 성역으로 다시금 들어갈 수 있었고, 오늘에까지 이어져 현재 연간 100만여 명의
순례자들이 이 성모 성지를 방문하고 있다.
1827년 마리아첼에 다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 대부분을 태우고, 이 성모 성당에도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시 1828년부터 1832년까지 재건하였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식 뒤에는 소련 공산 군인들이 이 마리아첼에 들어와 5000여명이나
머물며 또다시 많은 손상을 입혔지만 1955년부터 1957년 사이에 대규모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묵주의 길도 건설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에 마리아첼을 방문, 이 성지를 순례한 첫 교황이 됐고,
2007년에는 마리아첼 85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9월7일부터 9일까지 오스트리아를
사목 방문하며 이곳을 찾았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8월호,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http://pds.catholic.or.kr/pds/bbs_view.asp?num=1&id=164736&PSIZE=10&searchkey=N&searchtext=%EC%84%B1%EB%AA%A8%EC%84%B1%EB%8B%B9&menu=4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