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국정 말썽꾼인 최순실이 갇힌 독방의 구조와 바닥열선이 최근 미디어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30년 전 영어의 몸으로 여러 개의 독방을 목격했던 저로서는 옛날 생각이 사뭇 나기 시작하네요. 80년대 중반 의정부 교도소의 사소와 영치를 했던 경험상, 과거 교도소 독방에는 바닥 열선이 없었습니다. 긴 복도에 달랑 한 두 개의 연탄 난로가 있을 뿐 일반 사동(감방이 연결된 건물)에도 난방시설이라고 할 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교도소도 마찬가지였다고 들었습니다. 천안 개방교도소와 육군교도소가 시설이 비교적 좋았다고 하지만, 바닥 열선이나 난방시설 등 대체적으로 좋아진 것은 최근 10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곳에서 본 독방은 직사각형의 1.5평 남짓한 공간이었고 세면대도 없고 훤히 보이는 변기와 마루 바닥 뿐이었습니다. 침구를 깔고 누워도 한기가 뼈속까지 올라와 새벽이면 온 몸이 굳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겁니다. 지금의 독방에는 TV도 있고 세면대, 바닥 열선까지 있는 것을 보니 일부러 사고를 쳐서 독방에 가려는 수감자들도 많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네요.
교도소의 독방에는 흔히, 살인범, 정치범등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건의 수감자, 그리고 수감 중 사고를 친 사람들이 징벌의 형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수감 생활 중 폭력이나 극한 행동을 한 사람들은 포승줄로 이리 저리 온몸이 묶여 갇히게 됩니다. 거의 얼굴만 움직일 수 있어서 들여 보내는 식사도 바닥에 다 쏟으면서 개처럼 밥을 먹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오줌이나 용변도 줄줄 흘리면서 보게 되구요. 참 못 볼 지경이었지요. 지금이야 이런 가혹행위가 많이 사라졌겠지만, 당시에는 이런 장면을 간혹 볼 수 있었습니다.
교도소의 겨울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추웠습니다. 다들 친한 형제가 옆에 있으면 끌어안고 자곤 했지요. 그나마 철문쪽이 복도의 난로기운이 들어와 따뜻한 곳이었지만 그곳은 늘 좌상(감방고참)들의 자리였고 그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속옷을 몇 겹으로 뭉쳐 입고 먼지 꼬질꼬질한 관용담요를 둘둘 말고 자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1년간은 교도소의 영치업무를 한 덕분에 각종 내복과 두툼한 장갑이며 손난로까지 방한장비들을 종류별로 사용하는 호사를 누리기는 했지만, 영하 10도로 내려가는 곳에 아무런 열기없이 겨울을 지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나마 아침에 일을 나가게 되면 공장에 큰 난로나 장작불이 있어서 다행이었지요. 형제들은 보안과의 난로옆에나 의무실의 라디에이터로 추운 몸을 녹일 수 있었으니 낮에는 견딜만 했지만, 폐방 후 방안에 들어와서 그리고 휴일에는 참 고역이었습니다.
하루는 취장(급식조리시설)에서 일하던 김동암 형제가 저를 몰래 불렀습니다. 담당 교도관의 묵인아래 취장 옆에 있던 목욕탕 안에 둘이만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단체로 몰려가는 차디찬 목욕탕이 아닌 교도소 직원들이 막 목욕을 끝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탕 안에서 잠시나마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의리 있던 김 형제는 거짓 신권조직에의 허망한 충성을 계속 지켜왔고 완장을 차고 몇 년전 순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정겨웠던 부산 사투리하며, 그곳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푸짐한 닭볶음탕을 차려주던 그 어린 아이 같은 미소를 잊을 수가 없는데 , 우리는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집니다.
겨우 내내 형제들은 동상이 걸리기도 하고 제대로 씻지 못해 치질과 피부병이 걸리고 감기와 기침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특히 취장쪽에 일하는 형제들은 발가락과 손에 동상이 다반사였고 초췌한 얼굴로 새벽부터 출력(출근)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었지요.
다들 신세계의 신기루를 진실 되게 믿었고 아마겟돈과 세상의 종말을 확신했기에 넉넉히 이길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허무하게도 말입니다.
그때 취장에서 참 고생이 많았던 이학*형제는 제가 사는 지방 가까운 회중에 조정자로 있었습니다. 오래 전 길에서 마주쳤지만 애써 피해가던 그 초조한 눈빛이 생각납니다. 그때 취장에서 일하던 형제들에게 영치창고에서 빼낸 내복이며 겨울양말이라도 좀 더 가져다 주었어야 했는데, 저도 그땐 어린 아이에 불과했으니 배려심이 있어야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한 두 번은 가져다 준 거 같긴 한데, 여전히 미안합니다.
또 겨울이 오니 ....사랑하던 그 형제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이별이 겨울보다 더 차게 느껴집니다.
첫댓글 맘아픈 역사네요....T-T
잘봤어요 ㅋㅋ 블루님은 어느쪽이세요?
ㅎㅎ 그건 서로 안 물어보는게 좋겠죠. 오프모임 있으면 한번 만나게 될겁니다
@블루스카이 ㅋㅋㅋ 언제일까요 ..? 새해에 한번 추진해주시면.. 가고싶은데요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저는 감빵을 가지 않기 위해 노력끝에 면제 받아 편안한 생활을 하였지만 말입니다...김동암 수안보에서 특파 했던 친구 말인가요.? 중국어 한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외국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적이 있는데...순회를 한다고요..
고생이였다기보다는... 인생 공부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취장에 사람들이 형제들을 괴롭힌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난리쳤던 기억이 나네요.
따로 기거했던 9,10방에 형제들을 한방으로 모이게도 했구요.
추억이 돋네요. ㅎㅎ
오 왈발이 이셨나본데요^^
음...의정부에는 그 당시 은달이라는 전설의 사소반장이 있었지요....열쇠도 가지고 다니면서 방도 막 따고 다니고..
@프리맨 왈왈이 아니었나요?? ㅎ
그땐 좀 잘 나갔었죠~
잘 나가봤자 재소자이지만요 ㅎㅎ
정말 가슴 뭉클한 글입니다 블루님 생활에 비하면 요새 징역은 징역도 아니죠 법무부 캠프수준
1년정도 요양 갔다 오는 정도라
그래도 징역은 힘들겁니다. 자유가 없는데다가 자존감의 박탈을 느끼는것이죠. 그러나 배울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천안 소년교도소에서 하루하루 버텨 나가던 일들이 새록새록 기억 나네요 ^^
어이쿠 생지옥이 따로없던곳이죠~ ㅠ
곡갱이로 단체 빠따를 허구한날 맞아서 엉덩이가 너덜너덜거리며 의정부로 이감가던날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ㅎ
@은달 헉 천안 소년 동문이시네요 반갑습니다~^^
@프리맨 87년 아마도10월부터12월까지 원예(꽃과 연탄배달)부에 있었습니다.
@은달 와 대선배님이시네요
고생이 정말 많으셨겠습니다
앞으로 꽃길만 걸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사진이 뭔가 찡하네요..
정말 새롭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제가 사는 곳은 인천은 아닙니다만, ...사진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요?
제가 아는분이 있는것 같군요 . . 제대로 본게 맞다면 . .
다시 본문을 읽으니 가명으로 추정되는 김동암씨가 사진에 있는것같군요.
@묘지기 김동암씨는 이 사진에 없습니다.^^다른 이와 착각하신것 같습니다. 그리고 김동암은 가명이 아닙니다.
청년시절 본 얼굴도 있네요.벧엘 식구들이었나봐요..시간이 훅 흘러버렸네요
잘지내시죠 형님? 간만에 들어와 형님 글을 보니 공주교도소에서의 빵생활이 떠오르네요. 참 벼라별 인간군상을 만나봤네요. 증인들안에서요 ㅎ
김동암 씨를 압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회중에 계셨거든요. 결혼해서 왔었죠. 부인도 기억나구요. 90년대 초반이었군요. 그때 봉종 아니면 장로였던가 싶네요. 저는 그때 청소년이었던지라.. 방황을 하고 있을 때였고, 그 분 입장에선 절 잡아주시려 연구를 다시 하자시며 그랬던 적이 기억나네요.
80년대말 안양에서 중립생활하던 기억이나네요 슬프고도 아름다운 추억이었죠 중립이라는 중요한 일을 겪고있는 나름 자부심을 지닌 또래의 형제들 앞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가진 종교의 필연적 결과를 말하고 당시 고등교육에 관한 증인들의 헛점에 대해 또 통치체의 정통성을 어떻게 누가 증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친한 친구들과 사심없이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나네요..대부분 저를 속으로 미친놈 취급했을겁니다..
김동암 씨는 90년대 수안보에 특파로 있었으며
무슨 이유때문인지 특파에서 해임되어 여러해동안 경남 양산 물금 회중과 정파로 연합하다가
약6개월전 인도로 자원하여 나갔습니다.자비로 나갔으며 몇년 잘 버티면 다시 특파로,선교인으로
임명받는다고 합니다.
그분이 맞다면 김동암과 저는 90년대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충주와 수안보에서 함께 여증 생활했었습니다. 열정 하나만큼은 대단했었죠. 그 열정 때문에 주변에 민폐를 많이 끼치기도 했어요.
사진속 맨 오는쪽분이 김동암과 비슷하게는
보입니다 김동암은 아닙니다.
사진속에는 김동암은 없습니다(약간 비슷한 친구^^). 열정이 투머치해서 문제지 마음은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여전히 조직의 행동대장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