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33. 안중근 토마스의 신앙생활과 의거
안중근, 참된 천주교인이며 국권 지키기 위해 순국한 청년 신자
숭공학교 학생과 성 베네딕도회 신부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 수록돼 있다.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국채보상운동 주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의 국운이 다할 무렵, 많은 이가 애국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으로 국가의 독립을 지키려고 뜻을 모았다. 1907년 대구의 신자인 서상돈(徐相燉, 아우구스티노, 1850~1913)이 중심이 되어 일본에 대한 국채를 갚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3년간 전국 사회 각계각층의 호응을 얻어 국민 애국 운동으로 확산했으나, 일본인의 방해 공작으로 1910년 봄에 해산되고 종결됐다.
흔히들 ‘천주교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쉽게 비판한다. 심지어는 천주교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는 문맹정책(文盲政策)을 펼쳤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교회에 사범학교·기술학교를 세우기 위해 독일 상트 오틸리엔을 직접 방문, 힘들게 설득해 성 베네딕도회를 한국으로 진출시켰다.
베네딕도회가 세운 기술학교인 숭공학교와 사범학교인 숭신학교가 오래가지 못한 것은 일제 교육정책의 변화로 학교를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안중근(토마스, 1879~1910) 의사의 의거를 ‘죽임’과 ‘사형’에만 초점을 맞춰 바라봄으로써 그의 참된 신앙과 젊은 시절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안중근 토마스’의 신앙생활에 초점을 맞춰 보고자 한다.
빌렘 신부와 안중근의 형제들. 안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치릴로(앞줄 오른쪽)와 안공근 요한(뒷줄 오른쪽).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 수록된 사진.
1897년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그의 집안이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아버지 안태훈(베드로) 때부터인데, 안태훈 진사는 황해도 청계동 일대에 나타난 동학군을 격퇴한 후 군량미를 사용한 혐의로 잠시 종현성당에 피신하게 됐다. 선교사들을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운 그는 교리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천주교를 전했다. 1897년에 온 가족과 친척들 33명이 빌렘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안중근은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한 후, 빌렘 신부의 복사가 되어 선교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여순감옥에서 작성한 그의 자서전 「안응칠력사(安應七 歷史)」에는 그가 선교활동 시 강론했던 교리 내용이 매우 조리있게 잘 정리돼 있다.
「안응칠력사」에서는 천주교의 도리가 ‘장생불사하는 음식’으로 소개되면서 영혼론으로 교리를 풀어가고 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 천지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가장 존귀한 까닭은 사람의 혼(魂)이 신령한 까닭인데 혼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 혼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기에 사람이 가장 존귀한 존재라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영혼이란 천명의 본성으로서 지극히 높으신 천주님께서 사람의 태중에서부터 부어 넣어주시는 것으로서 영원무궁하고 불사불멸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정하상의 「상재상서」 내용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이 고귀하다는 것은 그 혼이 영특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이 주신 것을 성(性)이라는 하는데 이것은 하늘이 우리가 태중에 있을 때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어찌 그러한 영혼이 동물과 식물같이 썩어서 없어지겠습니까?”(「상재상서」 중에서)
이어서 안중근은 믿음의 대상이 되는 천주(天主)에 대해 설명한다. “그렇다면 천주님은 누구이십니까? 한 집안 가운데에는 그 집주인이 있고, 한 나라 가운데에는 임금이 계시듯, 이 천지 만물 위에는 천주님께서 계시니 그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삼위일체이시며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닌 대주재자가 바로 이분 천주님이십니다. 만약 한 집안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든든한 집을 짓고, 풍족한 재산을 만들어,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은 제 스스로 잘난 듯 생각해 어버이를 섬길 줄 모른다면, 불효가 이보다 더함이 없다 할 것이요.”
이 대목 역시 「상재상서」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비유컨대 아버지가 집을 짓고 살림을 마련하여 아들에게 주어 사용하게 하였더니, 그 아들이 그 집에 살고 그 살림을 쓰면서 함부로 제가 잘난 체하고 부모를 섬기는 도리와 근본에 보답하는 뜻은 모른다면 이것이 효도하는 것이겠습니까? 불효하는 것이겠습니까?”(「상재상서」)
여순감옥 수감 당시의 안중근 토마스 의사.
감옥에서 과거 회상하며 전교 교리내용 정리
안중근은 천주의 공정하심에 대해 지상을 넘어 천상에서 온전히 심판이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수천만 명을 죽인 죄가 있다면, 어찌 그 한 육신을 다스리는 것만으로 그 죄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선하다가도 다음 시간에는 악한 일을 하기도 하고 혹 오늘은 악하다가도 내일은 선하게 되는 것이니⋯.”
이 부분은 한글 교리서였던 「주교요지」에도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 “사람이 세상에 있으매 처음은 착하다가 나중에 그른 이도 있고, 처음은 그르다가 나중에 착한 이도 있으니, ⋯한 사람이 죽인 죄는 제 몸 하나를 죽이거니와, 두 사람 죽인 죄와 백 사람 죽인 죄는 어찌 그 한 몸을 둘로 나누고 백으로 나누어 죽이리오?”(「주교요지」)
안중근은 「주교요지」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리와 유사하게 지상에서의 공과(功過)는 결국 죽음 후의 심판으로 결정됨을 강조하고 있다. 여순감옥에서 교리서도 없이 과거를 회상하며 전교 교리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볼 때 그의 천주교 교리 이해는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안응칠력사」에 나오는 천주교 교리 내용은 당시 신자들이 읽었던 교리서 내용과 매우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빌렘 신부.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 수록된 사진
빌렘 신부, 여순감옥 찾아가 미사 함께 봉헌
안중근의 의거가 일어난 후 빌렘 신부는 여순감옥을 찾아가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함께 봉헌하였다. 빌렘은 후에 그날을 회상해 편지를 남겼다.
“저는 냉정한 모습을 보일 작정이었습니다만 ⋯토마스가 방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한국식으로 내게 큰절을 하자 저는 그의 손을 잡고 ‘아, 가엾은 토마스, 자네를 여기서 만나다니!’ ⋯길고 따뜻한 면담이 진행되었고 간수들은 이 긴 대화를 조금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토마스는 5년 동안 미사 참례를 못 했어도 응답문을 한 구절도 잊지 않았습니다. ⋯지상의 모든 생각은 저 멀리 두었습니다. 굉장한 미사였습니다! 벅찬 감격 속에서 얼마나 몰입했던지요! ⋯미사는 수감자의 영성체로 끝을 맺었습니다. 성체성사와 노자성체를 한꺼번에 베풀었습니다.”(1912.3.19. 편지)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의거를 거행하여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하지 않았고, 꼭 5개월이 되는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 해의 성 토요일이었다. 그가 옥에서 남긴 「안응칠력사」와 미완성본인 「동양평화론」을 비롯해 다수의 유묵(遺墨)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이 자료들은 그가 참된 천주교인인 동시에 대한제국 국권을 지키기 위해 순국한 청년 신자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