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은 갈애(渴愛)의 영원한 소멸을 의미하고, 느낌을 추구하지 않으면 갈애는 저절로 없어짐
불교에서 해탈, 열반은 갈애(渴愛)의 영원한 소멸을 의미한다. 즐거운 느낌에 대한 갈증(渴症)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이고, 느낌은 감각기관과 대상과의 접촉에 의해 발생한다. 만약 감각기관이 활동을 멈춰, 외부 대상과의 접촉이 없다면 느낌도 있을 수 없다. 문제의 근원은 우리의 감각기관이다. 감각기관의 문을 닫고, 선정삼매에 머물러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접촉을 통하여 일어나는 느낌에 깨어있어서, 그것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순간 느낌을 알아차리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중생들은 즐거운 느낌에 깊이 중독되고, 즐거운 느낌을 취하려는 욕구에 눈이 먼 나머지 끝없이 느낌에 빠져든다. 느낌에 집착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만 하고, 느낌을 추구하지 않으면 갈애는 저절로 없어진다. 이처럼 경전에서는 갈애를 없애는 방법을 그것의 원인인 느낌에서 찾는다. 느낌에 대해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느낌에 물들지 않음으로써 갈애의 발생을 막는 것이 초기불교 수행의 요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석가부처님은 선(禪)수행 방법으로 사념처관(四念處觀)을 강조하셨다. 선(禪)을 닦을 때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해야할 네 가지 대상인 몸[身], 느낌[受], 마음의 상태[心],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현상[法]을 말하고, 그 네 가지 대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하며, 관찰해가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 225. 단경(斷經) ③>에서 느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잡아함경 225. 단경(斷經) ③>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 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한 법을 알지 못하고, 끊지 못하고도 괴로움을 완전히 다 끝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 법을 알지 못하고, 끊지 못하고도 괴로움을 완전히 다 끝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눈을 알지 못하고, 끊지 못하고도 결국 괴로움을 완전히 다 끝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눈의 대상인 모습과 눈의 의식과 눈의 접촉과 눈의 접촉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등 그 모든 느낌을 알지 못하고, 끊지 못하고도 결국 괴로움을 완전히 다 끝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귀, 코, 혀, 몸, 마음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우리는 위의 경에서 부처님께서 “느낌을 알지 못하고, 끊지 못하면, 괴로움을 완전히 다 끝낼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