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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주 금요일은 대구에서 차량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최근에는 경산에서 전도를 하면서 사도 도마가 AD 41년에 땅끝 한국에 와서 AD 47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경상도(가야국)에서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증거로는 가야시대 기독교적인 지명의 이름들과 그 시대에 제작된 기독교 유물이 근래에 발견되었으며 지금은 공원과 동물원이 있는 달성공원에서 사도 도마가 머물렀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삼국유사에는 인도에서 허왕후가 한국에 오게된 이유가 적혀있습니다.
“금년 5월 제가 본국에 있을 때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제 밤 꿈에 함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왕 수로를 내려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 가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지라 저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곧 이곳을 떠나 그리로 가라 하시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상제(上帝)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허왕옥이 가야에 도착한 A.D. 46년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로 들어가 선교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도마를 비롯하여 시몬, 다대오 등 사도들이 활동하던 선교 중심지였습니다. 외경인 '도마행전'에는 사도 도마가 인도에 들어가 처음 전도하여 침례를 준 사람이 인도의 공주이며, 왕과 왕비도침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허왕옥의 배가 처음 도착한 곳을 가야 사람들은 '주님의 포구'라는 뜻에서 주포(主浦)라 불렀습니다.
사실 가야국을 세운 김수로왕의 아내인 허왕후 왕비가 사도 도마의 도움으로 한국에 왔다는 것까지는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만으로 믿고 있었고 김해에 예전에 다녔던 교회 목사님은 굉장히 유식하였는데 한번은 많은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면서 사도 도마가 실제로 한국에 왔다고 강조를 하였고 김해 모 선교단 목사님은 사람들과 개인적인 만남에서 사도 도마가 김해에 왔다는 주장이 있다고 말을 하였지만 저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경산에서 가야국
시대 때에 한국에 없는 동물인 양을 안고 있는 목자상과 기도하는 성도상이 발견 되었고 김해 수로왕릉 현판에는
오병이어의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결정적으로 경북 영주시에서 사도 도마의 석상이 발견 되었는데 히브리어로 '도마'
라는 글자와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머리가 없는 석상에는 장미꽃을 들고 있고 아래에는 10개의 발가락이 있는데 이것은 사도 도마가 발가락이 들어나는 유대인 샌들을 신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석상 밑에는 한나라(BC202)
예서체로 지전행(地全行)이란 글씨가 적혀있는데 풀이하면 '땅 전부를(땅 끝까지)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 막16:15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행1:6 -
'지전행'은 예서체로 쓰여졌으므로 BC 202~AD 220년 사이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어서 도마가
한국에 왔던 시기와 같고 수로왕이 사도 도마의 도움으로 가야국을 세운 AD 42년과 일치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 도마가 한국에 왔다는 것을 이번에 거의 믿게 되었습니다.
사실 AD 48년에 인도에서 허황옥이 김해로 시집을 온것은 역사적인 사실인데 증거로는 허황후에 후손인 허씨가
그것을 증명하고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의 석탑이 지금도 허왕후 무덤 앞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유리를 만든 사람은 유대인인데 경주 고분에서 예루살렘에서 만든 유리잔이 발견 되었습니다.그렇다면 인도에서 전도를 하였던 사도 도마도 얼마든지 바다 실크로드 길을 따라서 김해에 올 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 박물관장의 말처럼 사도 도마가 낙동강 운화를 따라서 복음을 전하였고 경산과 대구에서도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불교 정신으로 지어졌으므로 허왕후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왜냐면 불교는 고구려에 AD 372년에 들어 왔고 백제는 서기 418년 신라에는 서기 528년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AD 52~72년 본격적인 선교를 하기 전에 땅끝인 한국에서 먼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도마가 머물렀다는 대구 달성공원에도 다시 가보고 도마 박물관이 대구 동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전도하러 가는 길에 박물관에도 가보려고 전화를 걸었는데 감사하게도 도마 박물관장 조국현 목사님께서 전화를 받으셨는데 지금 작업을 하느라 박물관에 있다며 지금 시간이 된다고 하셔서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세월이 흘러 조금 연로하셨는데 그곳에서 말씀교회를 하시며 작은 도마 박물관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상가건물 4층에 박물관이 있고 3층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도마 박물관은 영남외국어 대학교에서 목사님께 건물을 내주어서 학교안에도 박물관이 있는데 지금은 무료로 개방되지만 지원이 없고 운영이 어려워서 나중에는 입장료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박물관에는 목사님을 도와주는 조교수님도 계셨는데 저 때문인지 일찍 가셨고 목사님과 1시간 정도를 얘기하며 박물관과 교회를 둘러 보았는데 담임하는 교회는 사도 도마와 관련된 일들을 하느라 목회에 신경을 쓰지 못해서 성도수가
많이 줄어 들었다고 하셨고 목사님은 1988년도에 사도 도마가 한국에 왔다는 것을 발표하셨는데 목사님의
말처럼 나쁜 소식은 하루 만에 각지에 퍼지고 연예인에 사소한 일도 하루만에 전국으로 퍼지는데 가야국이 기독교
국가 였으며 사도 도마가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복되고 놀라운 소식은 지금까지도 널리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실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조국현 목사님은 특이한 조끼를 입고 계셨는데 고급 일자리를 알려준다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허왕후가 한국에 오면서 가져온 녹차같은 건강 차와 웰빙 음식과 성시순례 가이드 같은 사업이였는데
목사님은 요즘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거의 듣지를 안는다고 하시며 목사님은 이런 사업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시순례를 진행하면서 거기에 4영리를 넣었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이스라엘,이집트,터키,인도처럼 한국도 기독교 성지이기 때문에 전세계 21억 크리스챤들에게 이것을 알려서
사도 도마 성지 순례가 대한민국 국가브랜드 관광분야의 1호가 되고 전 세계 많은 성지 순례자들을 한국으로 불러
드려야 된다는 사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교회나 단체에서 사도 도마 성지순례를 하러 오면 가이드를 직접하고 계셨는데 목사님 가이드
비는 20만원 그리고 부교수가 가이드 보조를 하는데 10만원이 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대화중에 경상도 분지는 퇴적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랜드캐년보다 더 신비롭고 가치가 있으며 경남 하동에
토양은 가치가 커서 수출을 하면 막대한 돈을 벌수 있고 김해 평야는 원래 바다였는데 사도 도마 덕분에 광활한
농작지가 되었고 공룡 발자국 사진을 보여주면서 지금까지 20톤이 나가는 공룡이 최대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발자국을 보면 100톤이나 되는 공룡도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사실 해남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 중 가장
큰 것은 직경이 2미터가 넘는 것도 있어서 일부 학자들이 100톤이 넘는 공룡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헤어지고 마이크로 복음을 전하며 대구 전역을 다니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도마가 복음을 전했던
대구에서 다시 복음을 전하니 감회가 새로웠고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는 말씀을 전하였고 자동차가 신호를 받아서
기다릴 때에도 주위에 운전자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전도를 하다가 달성공원으로 가면서 말씀을 전했는데
가는 길에 대구역 근처에는 칠성시장이 있고 달성공원 옆에는 서문 시장이 있는데 아마도 대구에서 가장 큰 시장은
칠성시장과 서문시장 같습니다. 칠성시장에서는 예전에 육성으로 말씀을 외치며 복음을 전했는데 서문시장에는
가족들과 물건을 사러 간적은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러 간것은 처음인것 같았습니다.
달성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사도 도마가 머물렀던 달성공원에 잠시 갔다가 시간이 되어서
경산으로 돌아 오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퇴근 시간이라서 경산까지 오는데 1시간 20분이나 걸렸습니다.
늦게 왔다고 아내에게 구박도 많이 받았지만 직장의 서무 말처럼 남자들은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쉬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자는 밖에서도 일을 하고 집에서도 아이들을 돌보며 가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여자들이 남자보다 수고를 더 많이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어서 지금까지 집안 일을 도와주지 못해서
아내에게 참으로 미안하였고 앞으로 집안 일도 많이 도와주고 아이들 하고도 좀더 많이 놀아 주어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도마 박물관장의 조국현 목사님의 글을 여기에 올리며 대구전도 전도일기를 마칩니다.
"대구는 사도 도마가 선교한 발자취가 있습니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대구의 화원은 혀불(舌火 설화) 대구는 달구불(達句火 달구화) 경산 자인은 종의 불
(奴斯火 노사화)이라고 불렸습니다.
혀불은 예루살렘에서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불의 혀 같은 모습으로 임하셨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달구불은 제련소에서 철강석을 달구어서 철을 녹여내고 다시 쇠를 달구어 무기나 농기구를 만드는 곳이라는 달군다는
말에서 달구불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달구벌로 바뀌었다가 통일신라시대 신문왕(681~692)때는 통일신라의 수도를
서라벌에서 달구벌로 옮기려고도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경덕왕(742~765)때는 당나라의 문화가 경교(景敎)의
영향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였는데 한화(漢化)정책으로 지명을 한자어로 바꾸어서 대구(大丘)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영조 때(1750)大丘의 丘자가 공자의 丘자와 같으니 피해 달라는 상소가 있어서 이후로 현재 쓰고있는
대구(大邱)로 바꾸어 쓰고 있습니다.
대구지역 지명에 왜 이런 불의 이름이 붙어졌을까요? 낙동강을 따라 철기 문화가 일어났으며 철의 제련소의 이름이
지역 이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건국한 가야국은 철의 왕국이자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도마가 가야국에서 전도하였습니다. 대구와 경산은 도마가 전도한 발자취가
있습니다.
가야 시대의 경산 자인에는 종의불이란 제련소가 있었습니다. 제련소의 이름을 기독교적으로 붙인 것은 누구의
영향이 있었을까요? 서기 41년 부터 47년 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전도한 사도 도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구에서 화원으로 나가면 낙동강을 따라 김해로 가고 바다의 실크로드를 따라 김해로 가고 바다의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와 예루살렘과 로마로 갑니다. 대구에서 압독국(경산)을 지나 금호강 길을 따라가면 실크로드의 종착지
사로국(경주)이 나옵니다.
사도 도마는 왕궁을 지을 수 있는 석공이자 강철을 만드는 기술자였습니다.물론 목수일도 잘 하였습니다.
서기 42년에는 한국의 가야국을 기독교 국가로 세우는 일을 도왔고 6년간 한국에 머물렀습니다.
서기 48년에는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을 가야의 초대왕인 김수로왕에게 중매하였습니다.
사도 도마는 서기 50년 예루살렘의 사도 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후 서기 52~72년까지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저는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자료를 모아서 자료 보관소(도마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고대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허왕후스토리텔링을 만들었습니다. 허왕후 스토리텔링에 사도 도마의 한국에서
활동한 발자취가 있습니다. - 대구는 제2의 예루살렘이다. 중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