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미륵대원지 또는 중원 미륵사지 입구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거북이 모양의 귀부입니다.
중앙에 비석을 세운 것 같은 홈이 있으나 비석의 받침돌 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앞 날개쪽에 귀여운 아기 거북이를 업고 있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산의 경사면에 석재를 쌓아 석굴 형태로 만들고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그 앞에는 석등과 석탑도 보이고.......
이러한 석굴 형태의 사원은 신라나 백제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경주의 석굴암, 경북 군위 삼존불, 중원 미륵사지 등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경주 남산의 마애불들이나 일전에 우리가 답사한 태안 마애불,
이번에 찾아가는 서산 마애불들도 석굴형식을 띄는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경주 석굴암도 정확히 말하면 석굴 속에 사원을 만든 것이 아니고 석굴형식의 사원입니다.
이 사찰에는 마의태자의 전설이 깃들여 있습니다.
중원 미륵사지
그러나 이 절터에 ‘중원(中原)’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누가 시작했는지 매우 작의적입니다.
정식 사적 명칭은 충주 미륵대원지(忠州 彌勒大院址)로 되어있습니다. 기록에는 1977년 이후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의해 1 2차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이화여대에 의해 1980년에 다시 3차 발굴조사가 되었습니다.
특히 1990년에 있었던 4차 발굴에는 절터의 동쪽에 있는 집자리를 중점적으로 발굴하여 이것이 마방과 숙소를 갖춘 ‘역원(驛院)’터임을 밝혔습니다. 이것으로 지금의 ‘하늘재’가 ‘계립령(鷄立嶺)’이 확실해 졌으며 삼국유사의 기록 ‘미륵대원계립령동령야(彌勒大院鷄立嶺東嶺也)’와 맞아 떨어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원 미륵사지’ 또는 ‘괴산 미륵사지’로 불리다가 사적 317호 충주 미륵대원지(忠州 彌勒大院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알맞은 이름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곳을 ‘원(院)’이라고 한다면 희고 아름다운 얼굴로 이름 높은 보물 96호 석불입상의 위치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역원(驛院)’을 같이 경영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천안시 성환읍에 있는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가 바로 그것입니다. 봉선홍경사사적갈(奉先弘慶寺事跡碣)에 의하면 따로 원의 이름을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륵사지의 이름이 지금과 같이 결정된 것에는 목수(木壽) 신영훈(申榮勳)선생의 주장이 무게있게 받아들여진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미륵사지를 들먹일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우리나라 하나 밖에 없는 북향사찰이다.’라는 말입니다.
절의 배치는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 하나 밖에 없는 것은 아니고, 흔히 꺼리는 방향인 북쪽을 향한 - 북향사찰입니다.
이것은 사찰을 세운 사람의 고민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남향의 아늑한 절집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필요한 장소에 지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 창건자는 ‘위치’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즉 이 사찰은 이 위치가 아니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위치의 중요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군사적 요충지였을 것입니다. 미륵사지의 위치는 문경에서 하늘재를 넘은 자리고, 지금의 수안보 쪽으로 ‘지릅재’를 넘기 위한 자리입니다. 북쪽에서 오는 적이나 남쪽에서 오는 적이나 모두를 견제하는 요충지입니다. - 지릅재를 넘지 않고 송계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덕주산성이 있습니다.
또한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때 개척한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습니다.
이곳은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되찾기 위해 출사표를 낸 곳이기도 합니다.
그는 군사적 요충지 하늘재(계립령)을 장악할 목적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하늘재를 넘은 자리에 미륵사를 만든다면 ‘남향 사찰’에 군사적으로도 유리한 위치일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 까요?
아마도 하늘재 너머에는 벌써 적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역사에 대입해 본다면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은 고려의 ‘왕건’이었을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상주는 견훤의 출생지로 그 땅은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장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건은 하늘재를 넘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 전설이 있습니다. 그 전설의 일부는 앞서 ‘덕주사 마애불’에서 밝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제천시에서 발간한 ‘제천시사’에는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를 합병하고 볼모로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를 덕주사에 감금하고 마의태자를 미륵사에 감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지키는 군사로 이만명을 주둔시켰습니다.
이 병사가 있던 곳이 지금의 ‘마방골’과 덕주산성입니다.
이렇게 떨어져 살게 된 남매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만날 수 없는 안타까운 혈육의 정으로 덕주공주는 남쪽에 있는 동생의 모습을 그리며 남향으로 마애불을 조각했고 마의태자는 북쪽에 있는 누이의 모습을 그리며 북향으로 미륵불을 조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륵사에 커다란 석탑이 있는데 마의태자는 이 탑 꼭대기에 옥(玉)으로 만든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이 석탑에 있는 보주가 빛을 발하여 해가 뜰 무렵에는 북쪽에 있는 덕주사 마애불상의 머리를 비춰주고, 해가 질 무렵에는 마애불로부터 빛이 나와서 미륵사 석탑의 보주를 향해서 비쳤다고 합니다.
이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마주 보면서 조석으로 빛을 발하며 서로 이야기한 것이라 합니다.
마의태자는 이곳에서 팔년을 있다가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오대산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직 조령을 넘어가지 못한 상황에서 계립령 북쪽에 위치한 미륵사의 배치는 계립령을 등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북향을 한 절 배치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한 . 이런 배치로 인해 덕주사 마애불를 바라보는 상황이 되었고 이런 특별한 상황이 당시 망해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의 한과 맞물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슬픈 전설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단아한 미륵 부처님 입니다.
통일신라에는 미륵반가사유상들이 있는데 고려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석조 미륵 대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이나 부여 대조사 미륵불입니다.
그리고 신라 부처님이나 백제 부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특유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데 미륵부처님은 가부좌를 하고 계시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이는 미륵부처님께서 이 땅에 내려와 세 번 설법하실 때 야외에서 설법을 하셨답니다.
그래서 미륵부처님은 의자에 앉아 계시거나 서 계신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미륵 부처님 앞의 삼층 석탑입니다.
그렇다면 거돈사지처럼 일탑 일 금당식이겠지요.
엄마 거북에 앞쪽 등에 붙어있는 귀여운 아기 거북이
여기서 미륵리 원터는 이 사찰 옆에 옛날 여관이나 역의 역할을 하던 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늘재를 넘어가기 위한 중간 쉼터이지요.
배례석이나 어떤 석조물의 받침대로 쓰이던 것들을 한 곳에 모아두었습니다.
연화문이 참 단아합니다.
미륵 부처님 앞 하단부에 뭔가를 알 수 없는 석조 조각품.
세월의 흐름을 잔뜩 머금은 배례석의 연화문
정말 가고 싶었던 남한강 유역의 폐사지 여행 5월 연휴에 다녀왔습니다.
법당이 없는 폐사지는 좀 쓸쓸하지만 인생무상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장소 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주옥 같은 많은 문화재들......
아마 우리의 삶도 별 것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산다고 살았다면 이러한 소중한 것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깨진 배례석 위의 연화문이나 목 잘린 탑비 귀부의 정교한 조각들 처럼..........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잼나게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