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강 無我란 무엇인가
http://www.youtube.com/watch?v=w0tI2cvqKK0
제15강 無我란 무엇인가
베다문학(Vedic Literature)
: 이란을 거쳐 인도에 들어온 아리안족들이 만든 신에 대한 제식의 찬가.
산스크리트어로 씀인. BC 1500~1200년경에 성립
1) 고의 반대말은? 낙인가? 평화이다.
一切皆苦(sarvan-duhkham) : 모든 것이 苦(duhkha)다.
낙樂은 고苦의 일종(부)이다. : 인생은 즐거울 수 없다.
苦(duhkha)의 반대는 평화(santi),고요함(寂靜)다.
nirvanam santam : 열반은 평화로운 것이다. (涅槃寂靜)
열반은 평화로운 것이다. 고요하다.
고도 아니고 낙도 아닌 고락을 초월한 상태 그것이 해탈이다.
고(苦)는 단순히 고통(pain)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한계상황(Grenzsituation)을 총칭하는 근원적이고 우주적인 명제이다.
출가- 선정(禪定)으로 시작=>싯달타에게 영원한 벗어남(解脫)을 제공하지 못함
그 다음에 고행.
초월주의와 금욕주의는 상통하는데, 이는 다 이원론적분열(dualistic split)을
전제로 하고 있어 苦를 가중 시킨다 靈魂<->肉體
영.육 이원론의 영혼초월주의는 항구적인 아트만(atma)을 전제로 한다.
바로 그러한 아트만이 고(苦)의 근원이다.
=>기나긴 사색 : 보리수 밑의 싯달타는 선정에만 몰입한 것도 아니고 악마와 투쟁한 것도 아니다. => 연기 (의존하여 같이 일어난다) 산다는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 長短相較 : 길고 짧음은 상대적相對的 관계에서 비교(比較)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 孤紀 : 고립되어 단독적으로 일어난다.
역사적 붓다는 정확하게 12연기을 설하지 않았다.
12연기는 다양한 연기관계를 설한 파편들이 후대에 종합되어 성립된 것이다.
그것은 아쇼카 3차결집 이후의 사건이 분명하다. -도올-
“싯달타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고, 사악하기 헤아릴 길 없는 중생들 속에서
처참할 정도로 고생하면서 진리를 위해 싸우는 지혜와 사랑의 인간으로 나타나있다.
[아함]을 읽는 이는 누구나 부처님이라기보다는
인간 싯달타의 너무나도 청순한 인간미에 우선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이런 느낌은 다른 경전에서는 맛볼 수 없은 것이다.“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 고익진 지음. 1990
12처 6내입처 : 眼 耳 鼻 舌 身 意
6외입처 : 色 聲 香 味 觸 法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이것 : 6根 : 眼 耳 鼻 舌 身 意 : 감각 주관 <= 우주의 모든 것이 수렴된다.
저것 : 6境 : 色 聲 香 味 觸 法 : 감각 대상 이 세계는 모두 감각주관에 담겨진다.
十二處 -> 六六法 ->五蘊 -> 十二緣起
연기의 모든 항목을 제법(諸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연기 속의 제법은 불변하는 자기(아트만)를 가질 수 없다.(無我)
諸法無我 (sarva-dharmah niratmanah)는
연기론 (paticcasamuppada)에서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2) 언어는 모든 것을 반영 할 수 없다.
내가 간다 = 내가 있어서 그 “내”가 간다 => 이것은 과연 정당한 명제인가?
비가 온다 = 비가 있어서 “비”가 온다. =>
“비“ 와 ”내림“은 과연 분리될 수 있는 두 개의 다른 사태일 수 있는가?
구름이 내려온다= 구름과 내림은 분리 될 수 있는 다른 두 개의 사태인가?
꽃이 핀다 = 피어 있지 않는 꽃이 있는가?
꽃과 핌이 과연 분리될 수 있는 두 개의 사태일 수 있는가?
[中論] 2세기경 인도의 대사상가 용수(龍樹,Nagarjuna)에 의하여 지어진 중관학의 대표적 저작.
중론: 거사적불거 (去者則不去 : 가는 놈인 즉 가지 않는다)
: 가는 작용(술부)을 떠난, 가는 놈(주어)이 따로 있어서
그 가는 놈이 가는 것은 아니다.
불거자불거 (不去者不去 : 가지 않는 놈은 가지 않는다)
리거불거자 (離去不去者 : 가는 놈과 가지 않는 놈을 떠나서)
무제삼거자 (無劑三去者 : 제3의 가는 놈은 없다.)
이거무유자 (已去無有去 : 이미 가버린 것에는 감이 없다.)
미거역무거 (未去亦無去 :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역시 감이 없다.)
이미거미거 (離已去未去 ;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
거시여무거 (去時亦無去 :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도 역시 감은 없다.)
가는 놈이 간다
감 감 => 則有二種法 ;동어반복(同語反復) 토톨로지(tautology)
“가는 놈이 간다”는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가는 놈(주부)과 감(술부)을 분리하는 동시에 이런 오류에 빠진다.
“가지 않은 놈이 간다”는 모순(Contradiction)의 오류이다.
언어라는 거울(=사유체계)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서양언어에 있어서 주부(subject)와 술부(predicate)의 관계는,
실체(substance)와 속성(attribute)의 관계와 일치한다.
“불!”이라는 이 명제는 분리 될 수 없는 그 총체적 사태에 대한 언급이다.
언어의 본질적 형태는 주어/동사가 따로 없다.
언어는 현상을 그대로 다 반영할 수 없다.
변형문법 (transformational grammar)
홈스키(Noan Chomsky)에 의하여 시도된 새로운 언어학의 물결,
생성문법(generative grammar)라고도 한다.
표층구조을 변형시켜 심층구조를 찾아내는데 그 궁극적 목표는
문법 그 자체의 발견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선험적 사유구조를 밝히려는 것이다.. 노암 촘스키가 밝힌 것도 한계가 있다.
언어라는 것이 반드시 주어 중심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주어중심의 문법에서 동사중심의 문법으로 가고 있다.
How are you?
우리 말에는 주어가 없다 (ex, 안녕하세요.)
우리 말의 특징 ; 불교적 사유를 반영하는 것이다.
주어가 숨은 주어로 감추어져있다 할지라도,
명제에 있어서 주어가 꼭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술부를 주어의 종속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실체적 사유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내가 간다는 것은 내가 있어서 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간다는 속에만 있다
나라는 주어는 감이라는 술부 속에만 존(存)한다.
.
3) 무아 : 내가 살고 있는 집에 큰 정원이 있고, 잔디밭 있고
(잔디밭이 잔디밭으로 있기위한 고생
잔디밭이라는 주어적 실체는 있을 수 없다.
잔디밭이라는 주어는 그것을 끊임없이 잔디밭으로
만들고 있는 술어적 상태 속에서만 존하는 것이다.
자기동일성의 체계(identity) = 아트만 (atman) .
‘나’라는 존재는 오온(五蘊,panca-skandja)의 가합이다. 그것은 나(atman)가 아니다.- 싯달타
假合 : 임시적으로 합쳐진 상태
4) 연기
내가 산다. 내가 먼저 존재하고 그 내가 살아가는 것일까? 나와 삶이 분리될 수 없다면
“내가 산다”라는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나의 인생 밖에 “나”란 존재자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관조하고 있고 등등 언어의 오류, 사고의 오류.
싯달타는 우리 사고의 오류를 연기론으로 지적한 것이다.
일체가 연기 되어 있으면 내가 있으면 네가 있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어.
동체대비(同體大悲)
너와 나, 주관과 객관의 언어적 분별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한 몸이 될 때
비로소 대자대비의 마음이 생겨난다.
불교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베풀어라가 아니라
연기를 깨닫고 근원적으로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불교의 윤리(ethics)는 신앙(belief)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Enlihtenment)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5) 무아론 : 언어로 싸여 있는 나를 해체시켜야 한다.
무아론은 모든 실체를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모든 형이상학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무너진다.
불교는 철저히 반형이상학적이다.
불교는 현상론이다. 불교의 본체론이란 연기론일 뿐이다.
연기론이 곧 실상론이요, 실상론이 곧 본체론이요,
본체론은 곧 현상론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실상과
본체가 연기일 뿐이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2천여년 동안 서양철학이 불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불교는 헤겔의 형이상학의 붕괴가 일어난 19세기 후반부터 겨우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나긴 불교의 동면(冬眠)이었다.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1권 219쪽
안티노미(Antinomie,이율배반) 서로 모순되는 두 명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사태.
싯달타는
형이상학적 명제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이것이 원시불교의 소박함이다.
무기(無記,avyakata) : “기술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는 뜻.
형이상학적 명제는 무기(無記)의 대상이다.
형이상학적 명제는 절대적 해결이 있을 수 없다.
설사 해결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해탈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달라이라만와 도올의 만남 ] 1권 222~3쪽
인간의 언어로 구성된 것이기에 형이상학적 실체에 있어서
언어에 속아서 힘들어 하고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원시불교의 사상에 이미 선불교(Zen Buddhism)적 요소가 다 들어있다.
춘성 스님의 일화는 [벽암록]을 뛰어넘는 우리시대의 공안이다.
그것은 논쟁의 꺼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깨우침”을 줄 때만이 의미 있는 것이다.
무아(anatman)는 언어로 구성된
나의 해체 (deconstruction of linguistic Ego)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