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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에 한국사학사학회에서 발표할 원고입니다. '나의 역사학 연구'라는 제목으로 하는 내 학문연구를 회고하는 자리입니다.
나의 역사학 연구
낙암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역사학을 전공하기까지
나는 1943년 3월 일본 동경의 동북쪽에 인접한 이바라끼현 水海道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태어난 것은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서 일본에 이주했기 때문이다. 1944년 미국의 동경 공습이 극심하여지자 일본이 패망할 것을 예견하고 우리 가족은 1945년 1월에 고국으로 나와 충남에서 가장 오지인 청양군 적곡면(현재 장평면) 낙지리에 살았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초등학교가 의무교육제도로 되었기 때문에 1949년에 입학을 했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다. 비록 8살이었지만 6. 25의 남침을 실제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여덟 살 때에 병사함으로 아주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자랐다. 당시의 교과서는 유엔의 운크라에서 지원한 종이에 인쇄된 교과서를 이용하였다.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의 진학을 꿈도 꿀 수 없었으나 청양의 독지가이신 서병훈 선생의 장학금을 받는 계기로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대학은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우리어머님” 지식산업사, 2008.참조)
나는 고등학교에서 이과반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나 원서를 쓰는 과정에서 색맹이므로 이과를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의 역사 과목은 가장 재미없는 과목이었다. 당시 역사 선생님은 검정고시를 통해 교사가 된 분으로 암기를 하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첫 국가고사인 제1회 학력고사를 치렀고, 그 성적으로 대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공주사범대학을 입학하려고 했는데 그 대학은 생맹은 문과의 입학도 불가했다. 그래서 아무 인척도 없는 서울에 와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교 사회생활교육과에 입학하였다. 1년 후에 일반사회, 역사, 지리전공으로 구분되게 되었다. 내가 대학을 들어가는 해부터 서울 사대가 박정희사건으로 폐과 조처되어 사회생활교육과, 교육학과, 자연과학교육과, 가정교육과 체육교육과가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택할 수 있는 학과는 사회생활교육과 밖에 없었다. 대학 4년과 대학원 3년의 과정을 가정교사를 하면서 지냈다.
1학년 때에 탐색과목으로 한 과목씩을 수강했는데 김성근 교수가 서양사 개론과목을 들었다. 개론학 강의는 중세 초반에서 끝났으나 강의에 따라 서양사 원서를 함께 읽어갔다. 그 때 김성근교수 댁에 가서 선생님이 펴 놓은 세계문명사라는 원서를 우연히 구입하게 되어 이를 읽고 문명사가 꿈틀거리면서 발전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아(13인 공저 "The History of World Civilization"을 읽고 역사학을 전공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미국 육군사관학교 교재로 사용된 헤이즈(Carlton J, H, Hayes)등 세 사람이 공저로 쓴 “World History” 라는 원서를 우연히 구해서 읽고 대단히 재미 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느꼈다.
서양사 중에서 독일사를 전공하려고 했다. 비록 독일은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였지만 전후 유럽에서 가장 빨리 경제발전을 이룩한 국가여서 그 나라 역사를 배우면 우리나라의 역사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졌다. 사범대학이 중고등학교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이지만 2학년 때부터 학문연구를 하기로 결심을 했다. 나의 고등학교 생활을 염두에 두고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더라도 실력을 갖추어 수업분위기를 잡을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학교 3학년 때인 1964년 6.3항쟁에 참여하였다. 이 항쟁은 김종필이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의 무상 보상금을 받고 맺기로 한 한일협정이 굴욕적인 것이라고 해서 서울 지역의 대학생 3만여 명이 참가한 학생운동이었다. 우리 사대팀은 최선봉에 서서 세종문화회관(당시 시민회관이라 칭했음) 앞에서 경찰의 바리케이트를 치우면서 청와대로 전진하였다. 이 때 나는 데모현장에서 10여분 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독일 역사를 연구한다고 해서 우리나라 발전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설령 독일사가 아니고 프랑스 역사를 연구한다고 해서 그 지식을 한국의 민주주의에 곧바로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려면 우리의 상황을 정확히 아는 한국사를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데모가 끝나고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전국에 위수령이 내려서 교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곧바로 청계천의 고서점에 가서 진단학회에서 펴낸 한국 6권 중 연표를 뺀 5책을 사서 읽었다. 3개월 동안에 진단학회편 한국사 5책을 독파했으나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선근의 최근세편이 비교적 잘 되었다는 생각을 가졌다.
9월에 개강을 하여 이제 한문을 배워야할 필요가 생겨 당시 같은 교우인 박용운교수에게 물어보았더니 방은 성락훈교수에게 배우고 있다고 소개를 해주었다. 다른 사람은 3개월 전에 시작한 팀에 합류하여 “古文觀之”라는 책을 배웠다. 방은선생은 성균관 교수였는데 당대 제1의 한학자였다. 그 분 댁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한문공부를 했다. 고문관지는 청나라 학자가 편찬한 글로서 좌전으로부터 청말까지의 잘된 고문을 뽑아 놓은 책으로 이 책만을 읽으면 고문은 끝내준다는 뜻이다. 이후 10년간 방은 선생님으로부터 한문을 틈틈이 배웠다. (“방은성락훈선생30주기추모문집” 참조)
196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시험에 합격하여 공부를 하였다. 이태진 교수 등 6명이 함께 입학을 했다. 두계 이병도, 동빈 김상기, 한우근, 유홍렬 교수의 강의를 받았다. 한우근 교수의 지도 하에 반계 유형원의 개혁사상의 이념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서 그가 진정으로 개혁하려고 한 기본 정신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요지는 만인이 無不得其所한 사회를 이루려는 것이 그의 개혁정신임을 밝혔다. 이는 세습제 사회를 개혁하여 누구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그의 개혁정신이었음을 밝힌 논문이다. 이는 세습형의 사회에서 성취형의 사회로의 전환을 주목했다. 반계수록 원문을 10번 정도 읽고 난 다음에 얻은 요지였다. 유형원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실천적 지성이며 국가 발전을 위해 전력을 쏟은 분이다.
1969년 9월부터 1972년 9월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군역을 마쳤다. 1973년 3월부터 전북대학교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1979년 12월까지 근무하였다. 이 때 박물관 민속부장을 겸직하면서 고문서를 접하게 되었다. 부안김씨고문서를 발굴하고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고문서를 구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국사시민강좌 29집, 2001.고문서탐방 참조)
2. 사학사 연구로의 전환
석사학위를 받은 후 김용섭 교수를 만났는데 “자네는 한문 실력이 있으니 사학사 분야를 공부하면 좋겠다”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규장각에서 조선 후기의 역사서를 3개월간 열람했다. 당시 이만열 교수도 이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우연히도 내가 열람한 책을 이 교수가, 또 이교수가 열람한 책을 내가 열람하였다. 이 교수는 이 자료를 통해 자기의 전공영역인 고대사 분야로 논문방향을 잡아 ‘조선후기 사서에 나타난 고대사 인식’이라는 논문을 썼고, 나는 사학사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여야 할지 몰라 논문을 못 쓰고, 조선전기의 역사서를 연구하는 데로 중심점을 옮겼다.
이에 16, 17세기 사찬사서에 대한 연구를 첫 작품으로 썼고, 권근 이첨의 동국사략에 대한 논문을 동시에 발표했다. 이 방면에 첫 연구였기에 실증적인 고찰에 집중했다. 그리고 내가 전북대학교에 있을 때에 서강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조선전기 사학사로 학위논문을 준비했는데 같은 제목으로 한영우교수의 학위논문이 제출되어 나는 다시 고려시대로 올라가 삼국사기를 연구하게 되었다.
나는 1979년의 전두환이 꾸데타로 정권을 잡을 때에 약간 수난을 당하였고, 그 결과는 충남대학교로 전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나는 백제연구소 연구실장의 보직을 가지고 백제의 금석문을 찾으려 4년간 각 군의 지표조사를 했다. 이는 정영호 교수의 영향을 받았다. 지표조사는 전북대학교 박물관 보직을 받았을 때부터 실시하여 전북지방에서 9개의 마애석불을 찾아 이것이 신라말 고려초의 호족의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설을 제기했다.
그 후 나는 이성무교수의 추천으로 고문서 수집이라는 직책을 맡으라고 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직장을 옮겼고(1984년 2월), 이후 한국학대학원에서 사학사 강의, 한국인의 역사의식에 대한 강의를 매년 할 수 있었다. 연구원에서 자료조사실장을 10년간 맡아 전국의 사가의 고문서를 수집하여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하게 하고 이를 영인 출간함으로써 학계에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이를 고문서집성체제로 출간하는 계획을 세워 2년 전에 100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후배들에 의하여 100만건의 민간의 고문서가 수집되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고문서센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고문서 자료는 이수건교수가 영남지방고문서집성을 탈초하여 인쇄본으로 출간해 내어 고문서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연구원에서는 경지, 충청, 호남, 영남, 강원지역 고문서를 폭넓게 수집하였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3-4년에 걸쳐 한 책이 출간되었으나 1990년부터 당시 문교부로터 국학진흥사업의 특별지원금을 받아 자료의 영인출간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는데 이를 학계에서는 소화할 수 없었다. 이 때 난초로 된 황윤석의 일기자료 이재난고 탈초본 10책을 내는 임무를 주관하였다. 이 자료의 중요성은 전북대 이강오교수가 발견한 것이고 이성무교수의 주장으로 출간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탈초는 주로 주 한학자들의 주로 하였고, 이를 연구원의 전문위원 장승범, 이동주, 노상복, 노홍두 씨가 교정하여 출간되었다. 그 기획 관리는 내가 했다. 한 책을 출간함에 대략 1억원의 자금이 사용되었다.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거창한 작업이었다.
1991년에는 “호남지방고문서에 대한 기초연구”라는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이를 계기로 1992년 한국고문서학회 창립을 기획하여 박병호교수님과 함께 조직하여 역사학, 법제사, 국어학, 민속학, 사회학, 경제학자들과 함께 분야가 다른 학자들이 자료중심으로 공동의 연구를 가지게 되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고문헌 학과를 창설함에 미력을 다했다.
나는 주 전공이 한국사학사임을 잊지 않았다. 1987년에 삼국사기 역주사업을 기획하여 4년간 공동역주를 수행했다. 이는 연구원에서 이성무교수가 중심이 되어 “경국대전역주”를 수행했고, 그 후속작업이었다. 이 공동역주작업은 계명대 노중국, 홍익대의 김태식, 동덕여대의 신용하. 부산외국어대학의 권덕영교수가 참여하였다. 역주는 분담하여 맡았으나 이 원고를 일일이 함께 읽어가며, 수정하는 실질적인 공동작업을 했다. 1책 원문편은 원전인 중종임신본에 철저한 교감을 주석으로 붙여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정본으로 정립할 목적으로 만들었고, 번역본에서는 기왕의 번역본을 일일이 참고하여 최상의 번역본을 내려고 하였고, 3-4책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용어에 대한 학계의 연구 성과를 폭넓게 수렴하여 다양한 학설을 최대한 반영한 주석본을 출간하였다. 이에 본인은 삼국사기에 대한 상세한 해제를 써 붙여 1996년부터 3년간 5책으로 출간하여 학계에 공급했다. 이후 삼국유사의 역주작업은 강인구 교수가 주관하여 완간했다. 그 후 고려사 역주작업을 허흥식 교수 주관 하에 지에 대한 공동연구를 했고, 나는 예지를 맡았으나 이를 책으로 완간되지 못하고 말았다.
한번 출간된 책을 계속하여 수정증보판을 내지 않으면 그 책은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2006년부터 연구원에 수년간 여러 차례 건의하고 싸워서 2009년부터 1년간 역주삼국사기 개정증보판을 위한 공동연구를 수행하여 2011년 7월에 5책을 개정증보판으로 출간하였다. 현재 2쇄를 찍었고, 몇 년 후에는 제2차 개정증보판을 출간할 계획이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으로 발탁되어 임진왜란사 팀장으로 12명의 공동연구원을 조직하여 임진왜란사 연구를 수행하였고, 이들 연구원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사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 중이며, 지금까지 나는 이에 관한 사학사 논문을 3편을 썼다. 임진왜란사는 전 국민의 역사로 쓰기에 가장 적합한 주제라고 생각해왔다.
1998년 조동걸교수님을 모시고 한국사학사학회를 조직하였고, 이만열 회장대에 동서양 한국사의 사학사연구자 함께 참여하는 학회로서 특징을 살리고 있으며, 한국 역사학자가 독창적으로 쓴 역사학개론서로서 “21세기 역사학의 길잡이”라는 책을 공동으로 출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는 그동안 한국사학사 고대편, 중세편(1, 2), 한국근세사학사 4책을 출간했고, 현재 중세1편의 수정증보판을 인쇄 중에 있다.
3. 나의 역사관
1)실용주의 역사관
나는 J. H. Robinson 이 쓴 “The New History 라는 책을 읽고 역사는 실용적인 역사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게 가졌다. 거기에 나의 학문 환경이 한국학연구자에게 연구의 지원을 하는 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 35년 간 재직한 것도 이에 작용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역주사업에 힘을 쏟았고, 새로운 원자료의 발굴인 사가의 고문서를 수집하여 학계에 제공함에 노력했고, 이재난고의 10책을 간행 보급함에 주력했다.
2) 역사는 연속된 것이다. 역사는 변화를 추구하는 학문이지만 사회는 변화하면서도 지속적인 것이다.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조선왕조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건국을 합리화하려는 고려사의 서술을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고려 말의 전제의 문란상을 엄청나게 과장해서 서술했고, 왜구의 침입, 불교의 피해를 과장해서 서술했다고 본다. 더구나 왕씨손이 끊겼다고 하는 신씨 설을 조작해냈다. 정작 노비로 전락한 백성의 문제는 도외시하였다. 조선왕조는 이씨왕족과 집권세력인 사족이 상호의 권익을 지키는 방향으로 만들어진 합작 정권이었다. 16세기는 노비가 전 국민의 절반에 이를 정도로 재산으로 취급되어 고려조에 없었던 노비의 신공제가 만들어짐으로써 노비는 사족의 재산화되어 사족 양반들의 부의 제1항목이었다. 이런 노비의 증가는 민본이라고 내걸은 국가에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각 시대를 기록을 비판적으로 이용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역사를 설명해야 한다( ‘사학사적 관점에서 본 광복후 60년간의 조선시대사 연구성과 검토’, “ 광복후 60년간의 조선시대사 연구성과 검토”, 역사학회 2007, 일조각 참조) 자기 시대를 미화만 하려 한다면 이런 역사가는 그 시대에 어용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역사가는 변화의 추적과 지속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해야 당시의 실정을 올바로 전할 수 있다. 한국사개설서의 설명이 조선시대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신라와 고려왕조사의 연구도 시대를 뛰어 넘는 연속성을 찾아야 하고 근대사 연구에서도 이전사회와의 연속성, 식민지사회와 해방 후의 사회연구에서도 이점을 다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후기의 사림문화와 지성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찾아보기 어렵다. 사림들이 신봉하는 주작학은 다른 사상과 학문을 용납하지 않는 사상적 옹벽으로서 쇄국의 이념적 이론이었다. 우리는 각 시대를 뛰어넘는 역사의 연속성애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하며 각 시대의 연구를 전시대와 비교하면서 비판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역사에서의 변화의 추적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요소를 배제한다면 이는 당시의 실정과 동떨어진 서술이 될 수 있다.
현재 중세사학회(고려시대) 조선시대 사학회에서 각왕조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자기시대에 매몰되어 자기가 전공하는 시대를 미화하기에 급급한 현상은 큰 병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근대사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조선시대와 연결된 역사의식이 부족하다. 자기가 전공하는 시대에 얽매인 이런 분위기는 우리역사의 중심축을 제대로 옳게 파악하지 못하는 병폐를 낳고 있다. 시대사 전공자는 자기 시대의 역사를 실증적 연구도 중요한 것이지만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과 전후의 시대를 연결해보는 시각이 크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근대사에서 국권을 상실한 것이 일본의 침략이란면만을 강조할 뿐 우리의 역량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민족사관이란 큰 장벽을 허물기 어렵기 때문이다.
3) 역사의식의 연구의 역사관 -
사학사연구에 실용적인 역사관을 반영하기 위해서 역사의식을 찾으려는 데에 나는 주목했다. 그래서 “한국인의 역사의식-고대편”이란 책에서 역사의 개념과 당시대의 역사의식을 찾으려 하였다. 역사의식이라 함은 당시에 어떤 문제를 가장 중시했으며, 이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였는가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용비어천가의 역사의식, 세종의 역사의식, 김시습의 역사의식, 역사지리학파 등의 역사의식을 논문으로 썼으나 이는 단행본으로 정리하지는 못했다. 한국사학사의 사실적인 측면이 연구되지 않아 나의 연구에서도 실증적인 사실을 밝힘에 주력한 감이 있다.
전통시대의 사학사를 연구하다 보니 서양의 History라는 탐구와 해석의 역사학 개념이 종래동양의 기록위주의 역사학을 대체하면서 나는 전통사학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일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 2000년간 동양인이 생각해오고 발전시켜온 역사학 방법과 이론을 모두 버리고 취할 것이 과연 없을 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를 개설서를 통해 반영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4) 역사의 주체에 대한 인식, 전 인민을 주체로 하는 역사관,
역사학이란 과거의 역사서술을 통해 현재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앞으로의 역사창조에 기여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 시대의 연구에서 전 인민을 역사의 주체로 파악하는 방식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자료가 지배층 중심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비판적인 안목에서 해석해야 한다. 전체와 개인을 모두 포용하는 역사관이라야 한다. 전체를 보면서도 그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개인을 중시해야 한다. 공즉색 색즉공이라는 관점이다. 그래서 나는 역사의 주체를 각 시대에 살았던 전 인민으로 보는 역사의식을 보급한다는 기치 아래 Daum의 카페로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을 2008년부터 조직 운영하여 문지기 역할을 열심히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는 역사의 연속성의 역사관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에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이는 앞으로도 지속되도록 할 생각이고 이런 관점에서 한국사 개설서를 쓰고 싶다.
4. 나머지의 말
나는 한국사학사 연구를 50년간 연구해왔다. 스스로 반성해보면 학자로서 부끄럽기도 하다. 그간 나는 삼국사기를 10번 이상, 고려사를 5번 이상 조선왕조실록을 선조까지 1번 통독했다. 그래서 고대사로부터 조선왕조까지의 역사의 맥을 내 나름대로 잡아볼 수 있게 되었다. 전통시대의 사학사 중 나의 업적으로 꼽는다면 고구려가 고려로 국호를 개칭한 사실이다. 이는 김부식이 이 사실을 숨기면서 조선조 700년동안 까맣게 몰랐던 사실이다. 지금의 고대사연구자들은 고구려의 국호개칭을 단순한 약칭으로 오해하고 있으나 이는 장수왕대에 개칭된 것임이 명명백백히 입증했다. 이는 광종 대에 편찬된 구삼국사에서 ‘고려본기’로 서술되었으나 이를 김부식은 고의로 은폐하고 고구려본기로 국호를 고쳤다. 했다. 대각국사, 고려 고종조의 진정국사, 일연에 의하여 고려라는 고구려의 국호는 기록되었으나 승려의 기록이라 하여 조선시대에는 무시되었다. 현재도 중국인 중 많은 사람이 고구려를 고려로 이해하고 서술하고 있다. 오랫동안 깊이 잊혀진 역사사실의 재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조의 사관의 설치와 실록편찬에 대한 고찰, 고려조의 피휘법 등은 나만의 연구라고 할 수 있고, 조선후기의 역사지리학이 학계를 지배한 역사학이라 함도 내가 처음으로 밝혔다. 그리고 한국사학사의 시대구분론에서 15세기 조선시대를 중세사학으로 파악하고 17세기 이후의 역사학을 근세사학으로 설정한다는 설을 제기한 바 있다.(수정증보판 한국중세사학사 I-고려시대편-근간) 앞으로 전통시대의 한국사학사를 한권의 책으로 정리해야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한국사는 앞으로 통일한국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통일 후의 국가체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학, 경제학적인 정치학적, 문화적 이론이 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통일한국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어느 한쪽의 역사적 성취를 완전히 묵살 폐기하는 조처가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두 사회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고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에서 역사가는 종래의 국가론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두 개의 다른 체제의 사회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될 때에 이룰 수 있는 이상형의 국가체제를 연구를 이를 젊은 학자들이 수행하도록 역사가는 문제의식을 촉발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왕조 이후 조선왕조말까지 해외에 유학생을 보내지 않고 책을 통해 선진문화를 수용해왔다. 관료건 아니건 열심히 책을 읽어 왔다. 국민이 인터넷의 발전으로 책을 읽지 않는 시대로 변하고 말았다. 초등학교의 권장도서목록에 역사에 관한 책이 거의 없는 것은 앞으로 독서문화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역사가는 이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국사는 앞으로 시대의 장벽과 전공분야의 장벽을 넘어서는 안목과 학식이 중요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편협한 한국사만의 시각이 아니라 당시의 세계사와 비교해 보는 안목도 중요함을 말하고자 한다. 이제 미래 한국인의 역할은 국내문제만이 아니라 세계사의 문제, 인류의 공동문제를 해결함에도 넓은 길이 열려 있음을 인간과 문화의 교류사를 통해 역사적으로 서술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서양사 전공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방향을 돌렸던 초심으로 돌아가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앞으로 세 가지 일을 해내고 싶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이제부터 앞으로 10년을 계획하여 나의 실용적 역사관이 반영된 책을 세권쯤 내고 싶다. 하나는 한국사학사의 전통을 살려서 전 인민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한국문명사의 집필이고 둘째는 전통시대의 한국사학사와 역사의식의 발전을 담은 사학사의 총정리이고 셋째는 초 중등학교 교육을 위한 부교재로서의 ‘(가제)네가 만약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친다면 ’ 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고 싶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