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1일(음 10월15일) 모강공 남재공 묘제에 이어 12일은 태리동 영수재에서 남재공 증손 (대승공22세)부터 25세까지 사당겸 재각에서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다른 소문과 타성씨들 문중에서 자기들 선조 오시는데 참고한다고 견학 요청이 많아 오늘 제사는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묘역 안내판(하정공과 서울시흥 부제학공과 양평 약재공 안내판 참고하여 만듬)
대승공19세 휘 몽삼 남재공 묘비(영암군 신북면 서당동)
남재공 아들 묘비
남재공 큰손자묘비(둘째손자 승지공과 세째손자 청도공 묘는 장성에 모셔져 있음)
신북면 이천리 태리동 영수재
영수재 전경(대승공 19세부터 25세까지 24분할아버지와 29분 할머니를 모십니다(총 53분)
영수재 전면
영수재 현판 편액
위패 덮개 뚜껑 앞면(독함)
위패 독개 뒷면(위패 순서와 한글 표기)
위패와 받침 독좌(조각가에게 글자를 밤나무에 세겨 만듬)
위패 뒷면을 한글로 코팅해서 앞면 한자와 같이 함
남재공 아들 위패(초헌관에 따라 달라지는 대수를 방지하기 위해 대승공세로 함)
한글 아래 이름과 생년월일은 동 학렬에서 순서를 정하려고 표시함(서상법에 의해 위패를 모심)
2015년 위패 개당 밤나무로 글자를 파서 세기는데 8만원 임
남재공 손자 위패
위패를 모두 의자에 오셔야 하는데 경비 문제로 남재공만 의자에 모심
의자는 어린이 식탁용의자에서 다리를 자르고 만듬(15만원에 구입함)
24분 할아버지 중에서 마지막 분임(24분 중에 관직없는 학생부군신위가 19분으로 할아버지 구별이 않되 휘 이름을 추가했으며 24분 모두 땅이 있어 임대료로 제사를 모심 )
남재공과 아들 손자는 일기불순시 실내 제사용으로 모신 위패이기에 오늘은 술잔만 올리고 축문에는 빠졌음
밥과 국(메와갱)은 뷔페식으로 한그릇만 차리나 술잔은 각각 올리고 초헌 아헌 종헌 세번 올립니다
위패를 2층으로 모시면서 집사가 허리 높이에서 술을 따르고 비우게 하려고 처음 공사한 것을 제거하고 다시 시공했음
※ 이지역 묘비는 관직명만 있어 타지역이나 타문에서 처럼 묘비와 위패에 "품계+관직명"을 쓰는 것과 "학생부군신위"를 학생 휘 00부군신위"로 고치는 것과 초헌관에 따라 "현 00대조고"를 "초헌관에 관계 없이 "현 00세조고"로 바꾸자고 설득하는데 6년 결렸고 위와 같이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지 3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① "직산군수"는 맞는 묘비이고 "통훈대부+행+직산군수"는 조작된 묘비(선전관은 맞고 충위교위 선전관은 등급을 올린 관직이다)라하여 조선조 관직 품계와 행수법을 설명해도 듣지 않고
② 대승공과 무슨상관인데 초헌관을 무시하느냐? 왜 할아버지 이름을 축문에 넣느냐? 매번 설명해야 합니다.
③ 할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자기 재산으로 재사상을 받는데 일부종원들은 종중 재산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돈 들러가면서 제사 지내지 말자거나 제물을 약하게(주과포만 하지 등) 하자고 합니다.
※ 제사를 20~50여분 지낼 때 지금까지는 "현 00대조 직산군수부군신위"처럼 댓수를 빈칸으로 축문과 지방을 써 와서 초헌관이 정해지면 총무가 초헌관에 맞추어 할아버지 대수를 쓰는데 30분 이상이 걸리는 총무 노고를 알려고 하지 않아 문제입니다.
※ 대승공 26세(7대조부모)부터 31세(조부모)까지 각자 토지가 있고 임대료로 시제를 모시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위토답은 손자들이 먹고 내놓지 않아 나도 죽으면 제사는 희망사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