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대문 / 김은영
굳게 닫혀 진 나무대문 앞에 선 젊은 여자가 울고 있다. 조지훈 선생의 생가 앞에서 갑자기 그 생각이 난 건 여행의 또 다른 멀미다. 가슴 밑바닥에 숨죽여 깔려있던 기억하나가 묵은 각질처럼 일어난다. 그것은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신 김치 냄새를 남기며 콧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순식간의 일이다.
“출가외인이 죽어도 그 집에서 죽어야 할 말이 있지. 어서 집으로 가거라.” 새벽 찬 공기를 가르는 아버지의 말은 단호했다. 추웠다. 온기가 있는 방에 업힌 아이를 눕히고 싶다. 안으로 잠긴 문은 몇 시간째 열리지 않았다. 분했다. 나는 돌아서다 말고 기저귀 고무줄로 대문 고리를 양쪽으로 걸어 잠갔다. 인연을 끊는다는 표시였다.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을까 만은 나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은 유별났다. 그의 말대로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가지는 자신의 것이란다. 그런 딸을 찬바람 가시지 않은 새벽 대문밖에 세워 뒀으니 그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렇지만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내게 안중에도 없었다. 아버진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판교의 청 보리밭이 봄바람에 흔들리는 바다 같다. 아버지의 담배연기가 긴 꼬리를 만들며 조각배처럼 그 위를 지나간다. 신혼 짐을 실은 화물차를 길가로 세운 건 아버지의 담배 때문이라 생각했다. 담뱃불을 끄고 잠바주머니에서 누런 봉투 하나를 건네주신다. “딸을 낳으면 시집보낼 때 장을 만들어 준다고 오동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나는 목수면서도 번듯한 장하나 못 만들어 주고…. 아버지께 용돈을 받은 기억은 단 한 번도 없다. 깨끗한 나무 도장과 내 이름으로 된 은행 통장이었다. 자신을 위해 돈을 숨기거나 모으지 못하는 사람이다. 바람에 부딪힌 생각들이 현기증을 일으킨다. 네 번째 통장이었다. 잉크로 인쇄된 낮은 숫자들이 벌레처럼 기어 나온다. 오천 원, 만사천원, 구천 원, 무엇을 하고 남은 돈이었을까? 기백만 원이 끝이다. 이 푼돈을 가지고 은행에 갈 때마다 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말없이 돌아서는 어깨를 나는 보지 못했다. 그 대신 늦은 아침 하늘에 한참동안 시선을 고정했다. 고맙습니다. 아주 잘 쓰겠습니다. 일 년이 지나서 아이와 함께 잠잘 방값을 치루면서 그때하지 못했던 말을 속으로 하고 또 했다. 내게 아무것도 없던 시절, 아니 아이만 있던 시절에도 나는 철탑 같은 독기를 쌓느라 절망 할 수 없었다. 힘들 때마다 열리지 않던 친정 집 대문을 떠올렸다. 그건 고마움의 인사가 아니라 두고 보라는 일종의 섣부른 경고였다.
딸과 대문을 함께 잃어버린 아버진 이년을 못 참으셨다. 바뀐 철제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날, 아버진 한없이 웃으셨다. 그건 눈물보다 더 아픈 그리움이란 걸 나는 안다. “그 대문 네가 바깥으로 잠갔더구나.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끊을 수가 있나. 차라리 대문을 부쉈다.” 묻지도 않은 대답이 내 가슴 속으로 돌덩이 되어 가라앉는다. 첫 자식인 나를 얻은 날 아버지는 새 대문을 다셨다. 스물아홉 해 생을 마친 큰 대문은 손수 나무를 사와 자르고 다듬은 아버지의 역작이었다. 길 가던 사람들조차 대문이 아깝다며 한 번씩 쳐다보며 입을 대고 만져봤다. 항상 열려있던 대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반가이 맞던 그였다. 내가 문지방을 넘을 때마다 빙긋이 웃으시며 “웬 나비가 날아드나 했다” 나를 그렇게 보낸 날 아버진 도끼로 문을 찍어버리셨다. 아마 당신의 심장을 도려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 부서진 조각들을 태우면서 눈물샘도 태우고 가슴도 태웠으리라. 근 열흘 뒤 철문을 달면서부터 아버진 대문을 열어 놓지 않는다. “네 년이 문을 걸지 않았다면 부수지도 않았을 텐데. 부녀가 어찌 그리 똑 같노?” 둘의 고집싸움에 죽겠다는 엄마의 푸념이 도돌이표로 돌아온다.
그는 온전한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 나를 탓하지 않는다. 부서진 대문에 대한 미련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가끔 취기가 몰고 오는 복받침을 그는 참지 못해 터트린다. "열지 못했던 대문 때문에 너의 웃는 모습을 잃을까 정말 무서웠다." 영문 모르는 대문이 바람과의 정분으로 낮게 흔들린다.
이장님의 구부정한 어깨너머로 보인 아버지의 대문을 열 일곱 해가 지나도록 찾아 드리지 못했다. 열린 대문 안에 아버지 닮은 속 정 깊은 햇빛이 마당 가득 웅크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