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단체 협화회 간부하면서 항일발언으로 옥살이
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은 시민들이 직접 볼 책을 찾는 게 아니라 책 이름을 종이에 적어내면 공무원이 찾아주고, 도서관 밖으로 대출한 책을 가지고 나가지도 못했다. 도서관 들어갈 땐 당시 시내버스 요금에 맞먹는 돈을 내야만 했다. 평생 이런 폐쇄적인 도서관을 자유롭게 개방하는 운동을 펼친 사람이 울산 출신의 도서관 운동가 엄대섭(1921~2009)이다.
엄대섭을 모시고 20여 년을 도서관 운동을 함께 해온 이용남 한성대 총장이 지난달 울산 사람 엄대섭의 평전 <이런 사람 있었네>를 출간했다.
엄대섭은 1921년 울산 울주군 시골의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5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온 가족이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갔지만 제철소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쓰러지자 학교를 그만두고 10살 때부터 소년가장이 돼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어머니도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두부 장사로 시작한 엄대섭은 세탁소 점원, 방직공장 견습공으로 옮겨 다녔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 헌옷 장사로 돈을 모았다. 1941년 20살 때 모은 돈으로 경북 월성군에 땅도 사고 울산 강동 바닷가 멸치어장도 한틀 장만했다. 경주 시내에 기와집도 마련했다.
엄대섭은 2차 대전 때 일본서 협화회라는 친일 조선인 단체의 간부를 맡았다. 엄대섭은 협화회 회식 자리에서 조선인 차별에 항의하다가 잡혀가 고문과 옥살이를 한다.
해방 뒤 고향 울산에 돌아와 농지개혁 움직임을 감지하고, 소작인들에게 헐값에 땅을 팔아 버린다. 엄대섭은 1951년 여름 그 돈으로 고향 울산읍내 가게를 세내 3천 권의 책을 갖춘 ‘울산사립 무료도서관’을 열어 도서관 운동에 뛰어들었다. 엄대섭이 도서관운동가로 인생을 바꾼 건 일본인 오토베 센자브로가 1939년에 쓴 <도서관의 실제적 경영>이란 책 때문이다. 울산읍내에서 먼 시골에 책을 보급하려고 전쟁 통에 많이 나뒹굴던 총알 상자로 순회문고를 만들었다. 경찰이 들이닥쳐 무료 도서관 운영하는 저의가 뭔지 캐물었다.
엄대섭은 울산읍을 찾아가 도서관 일체를 기증할 터이니 읍에서 운영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엄대섭은 다시 경주읍에 찾아가 허락을 받았다. 고향 울산의 공직사회는 그 당시에도 천박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래서 엄대섭은 1953년 경주읍에 책과 시설을 기증했다. 오늘날 경주시립도서관이 여기서 출발했다.
60년대 초 엄대섭의 간청을 단칼에 거절했던 고향 울주군은 반세기가 다 된 지난해 11월 울주문화예술회관에서 <엄대섭, 도서관에 바친 혼>이란 제목의 거창한 기획전을 열었다.
엄대섭은 전쟁 통에 무너진 도서관협회를 다시 정비해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1960년엔 연세대 부설 한국도서관학당에서 1년 과정 사서교육을 마치고 정식 사서자격도 받았다. 그러나 엄대섭은 천상 야인이었다. 협회 사무국장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1961년 6년 만에 사무국장을 그만두고 소외지역 주민을 위한 농촌 풀뿌리 도서관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마을문고 운동이 시작됐다.
1960년 늦가을 경주 변두리에 마을문고 1호점을 냈다. 이를 위해 엄대섭은 경주에 가진 문전옥답 4두락을 팔았다. 마을문고는 도서관 역할을 할 문고함, 관리운영 주체인 독서회, 책 등 세 가지로 구성된다. 쉽진 않았다. 1961년 1년 동안 온갖 고생 끝에 고작 26개 문고를 세우는데 그쳤다.
궁리 끝에 명망가를 운동의 대표로 세우려 했다. 함석헌 선생 등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1963년부턴 문교부 사업비를 보조 받았다. 1965년 이 책의 저자 이용남도 엄대섭에게 설득당해 문고운동에 투신한다. 마을문고는 1967년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궁리 끝에 1967년 10월부터 이후락 비서실장을 마을문고본부 회장으로 하고 방일영 조선일보 사장과 서정귀 호남정유(현 GS칼텍스) 사장 등으로 이사회를 구성했다.
권력자와 재벌과 손을 잡자 마을문고는 급성장한다. 1968년 1만개를 넘고 1974년 3만 5천여 개에 달했다. 1969년부터는 도시 저소득 노동자를 대상으로 ‘직장문고’ 설치 운동도 시작했다.
1970년 이후락이 3선 개헌 직후 주일대사로 나가자 엄 회장은 새 후원자를 물색해야 했다. 지금의 GM대우차가 된 신진자동차 김제원 사장이 70년대 초기 5년 동안 회장을 맡았다. 1975년 다시 고태진 조흥은행장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선경, 신동아, 동국제강, 풍산금속 등 대기업 총수들을 이사로 선임해 3년을 이끌었다.
비대해진 마을문고본부는 1976년 말부터 다시 재정위기에 봉착한다. 77년 1월부터 전 직원이 사직하고 사무국장과 총무부장만 무보수 봉사로 명백만 유지한다.
70년대 말 정주영 사장을 회장으로 영입하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힘든 시기에 엄대섭은 1980년 막사이사이상을 받는다. 막사이사이상은 1957년 미국 록펠러 재단이 미군정을 당한 필리핀에 50만 달러를 제공해 만든 상이다.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2차 대전 중 게릴라를 이끌고 활약해 미군정이 끝난 뒤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이 상은 장준하(1962년), 김활란(1963년), 장기려(1979년) 등이 받았다.
부산진 시장 입구에서 단팥죽을 팔고 조산원으로 일하면서 어렵게 가정을 꾸려온 부인 정숙례 씨는 남편의 수상 소식을 듣지 못하고 투병 끝에 숨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마을문고를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산하단체로 통합하는 안을 제안했고, 문고운동은 1981년 10월 흡수통합된다. 엄대섭은 통합 뒤 바로 마을문고 조직에서 물러난다. 선경의 최종현 회장은 새마을운동본부로 통합되고서도 수년 더 마을문고를 지원했다.
집에서 쉬던 엄대섭은 1983년 1월 자기 집에 ‘대한도서관연구회’를 만들어 공공도서관 개혁운동에 나선다. 시민들의 접근이 차단된 폐가식 운영과 관외 대출 금지의 족쇄를 풀기 위한 운동이었다.
지금은 거의 모든 도서관이 폐가식의 반대인 개가식에다, 대출한 책을 집에 가져가서 볼 수 있지만 당시엔 어림도 없었다. 심지어 한국 최고의 도서관이라는 국회도서관은 노무현 정부 때까지 토요일엔 오전 9시에 문을 열어 낮 12시에 문을 닫았고, 물론 일요일엔 문을 아예 열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공공도서관이 오전 7시에 문을 여는 데 반해 지금도 국회도서관은 매일 오전 9시에 문을 연다. 권력 있는 도서관이 개혁에 가장 퇴행적이다.
엄대섭은 폐가식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전국의 160여 개 공공도서관에 찾아다니며 운영 실태를 조사해 언론에 알려 나갔다. 엄대섭의 노력은 결국 1985년 8월 11일 KBS <추적 60분>에 ‘공공도서관의 현주소’란 이름으로 방영됐다.
엄대섭은 1951년 ‘총알 상자’에서 시장한 이동문고를 발전시켜 자동차를 이용한 이동도서관 운동에 나선다. 다음으론 도서관 입관료 폐지 운동에 나섰다. 나이 70을 앞두고 엄대섭은 힘에 부쳐 은퇴하고 아들이 있는 1989년 미국으로 이주해 살다가 2009년 숨졌다.
저자는 에필로그에 업대섭이 미국으로 이주할 즈음 보안기관이 ‘엄대섭 사찰을 종료한다’며 저자를 찾아온 섬뜩한 일화를 공개한다. 저자는 정부가 해야 할 도서관 운동을 대신한 그에게 보안 당국이 수십 년 동안 의심의 눈초리로 사찰해왔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