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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예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三道軒정태수
김삿갓 시
伯菴 劉碩基 展
원주에서 활동하는 백암 유석기선생의 두번째 개인전이 열립니다.
김삿갓 시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전시에서 작가는 50여점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선보입니다.
유석기(劉碩基)선생 약력
호남대학교 대학원미술학과(서예전공) 석사
대한민국미술대전(서예부문) 우수상, 초대작가, 심사위원 역임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위원 역임
강원서예대전 초대, 심사위원, 운영위원장 역임(강원미술대전 대상)
한반도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이사장 역임
경기미술대전, 전남미술대전, 남농미술대전, 소치미술대전, 공무원미술대전 등 심사위원 역임
현재
강원서학회장
한국미술협회 자문위원
한국전각학회 감사
원주문화원동 서예강사
백암서실 주재
작가연락처 : 원주시 단계동 삼익아파트 103동 204호
전화 : 011-375-6600, 서실 : 033-745-6251
<落書>,140x70, 2011.
篆隸로 발현된 서예미학
-백암 유석기선생의 작품을 보면서-
백암(伯菴) 유석기(劉碩基)선생으로부터 작품전을 앞두고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자는 전갈을 받고 선생께서 필자의 연구실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점을 쳐 보았다. 뜻밖에 주역의 64괘 가운데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괘(火水未濟卦)’가 나왔다. 이 괘는 물 위에 불이 있는 모양이다. 이 괘의 괘사는 “미제괘는 형통하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그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未濟亨 小狐汔濟 濡其尾 无攸利]”라고 되어있다. 강을 다 건너고 난 마지막 단계에서 실수로 꼬리를 적신것인데 마지막 갈무리를 신중히 못한 것을 깨우치는 괘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미제괘가 왜 『주역』 64괘의 마지막 괘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이 다되었다고 방심하거나, 빨리 마치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의 마지막 단계가 되면 속도를 늦추고 평소보다 긴장도를 높여서 조심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괘가 시사하듯이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생각해 본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니다.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자본의 논리일 뿐이다. 예컨대 도로는 속도로 보면 고속도로가 최상이다. 이 경우에 있어 도로는 목표점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이다. 그러나 서예가의 길은 도로와 다르다. 100리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은 90리가 절반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속도만 올리고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면서 이 것, 저 것, 살펴보면서 천천히 걸어가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백암선생은 밤길을 고속으로 오면서 서두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번 작품전을 위해 준비한 작품에 대해 반성해 보았다고 한다. 바로 화수미제의 점괘가 일치된 것이라고나 할까. 선생이 붓과 벗한 지 30년. 그에게 있어 서예는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신을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30년 동안 서두르지 않고 이 길을 걸어오면서 서예, 전각, 문인화 등과 마음을 나누어왔고, 뒤늦게 대학원에서 서예전공까지 하면서 주변을 자세히 살피면서 걸어왔다. 필자는 선생이 지금까지 서예가로서 걸어온 길에 대해 밤을 새면서 새벽까지 진솔하게 들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김삿갓을 주제로 병풍 4점을 포함해 50여점을 제작한 선생의 작품과 먹향이야기를 혼자 보고 듣기 아까워 지면을 빌어 전하고자 한다.
주경야독, 30년 붓농사
문학과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백암선생은 남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함경도가 고향인 선생의 아버님께서 부산으로 피난을 오면서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했는데 선생이 초등학교 6학년 때 큰아버지가 거주하던 여수로 이사를 가면서 여수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님의 영향으로 경찰공무원이 되어 강원도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면서 강원도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공직에 있으면서 자기발전을 위해 방송대행정과를 졸업하였고, 뒤를 이어 호남대학교 대학원 미술과에서 서예전공으로 중국 남쪽의 오창석과 북쪽의 제백석을 비교한 <남오북제비교연구>라는 논문을 제출하면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선생이 처음 붓을 잡은 때는 1981(31세)년 이었다. 20대 때 원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중 직장상사가 다니던 치악서예학원에 동행하면서 어릴때부터 잡고 싶었던 붓과 벗하게 되었다. 원당 유병철선생의 문하에서 7년 동안 기초적인 서예공부를 하였다. 그 후 원당선생의 소개로 1991년 초민 박용설 선생을 만나 지금까지 20년 동안 공부를 하고 있다. 전각은 석운 이영수선생에게서 10년, 문인화는 화정 김무호선생에게서 8년 동안 공부하였다. 그에게 있어 원당선생은 서예의 첫길을 열게 해 주었고, 초민선생은 고법(법첩)에 대한 이해 및 문자학에 대한 깊은 학문을 깨우쳐 주었고, 학습지도방법이 탁월해서 예술로서의 서예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준 스승이라고 한다. 한편, 전각을 지도한 석운선생은 방촌의 인장 안에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큰 가르침을 주었고, 화정선생은 문인화로 서예를 되돌아 볼 수 있도록 안목을 길러주었다고 한다.
백암선생의 타고난 재주와 노력으로 쌓은 작가이력은 화려하다. 서예에 입문한 뒤 <석고문>, 안진경의 해서, <예기비> 등 예서를 익히고, <석문명>, <정희하비>등을 공부했다. 강원미술대전에 느긋한 <석문명> 필의를 살려서 출품한 작품이 강원미술대전 17년 역사상 서예작품으로 첫 번째 대상을 수상하였다. 전서 <천발신참비> 필의로 서협의 서예대전에 몇 번 입선하였고, 전각으로 미술대전에 출품해 입, 특선과 우수상을 수상해 초대작가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는 예술적 정서가 짙은 가족의 영향도 있었다. 공직생활을 했던 부친은 독서를 좋아하셨고, 형제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었다. 선생 자신도 중고교시절 미술반에서 활동하였고, 따님도 서양화가로서 미술대전에서 특선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등 예술을 가까이 해 온 가족들의 영향도 있었던 듯하다.
이와 같이 선생은 30년 동안 낮에는 공직생활을 하고 밤에는 붓농사를 지어왔다. 한 세대를 쉼없이 주경야독해 왔기에 오늘이 있는듯하다. 그 동안 선생이 공부해 온 과정을 살펴보면, 해서는 안진경의 서법을 중심으로 북위시대 여러 묘지명과 <장맹룡비> 등을 임서했고, 예서는 <사신비>, <예기비>, <을영비>, <장천비> 등 대표적인 한예들과, <호태왕비>, 목간 등을, 전서는 오창석을 중심으로 소전을 익혔고, <천발신참비>에 관심을 두었으며, <모공정>, <산씨반> 등 금문을 많이 임서하였다. 행서는 왕희지 서법을 기본으로 삼아 미불과 여러 명가들의 법첩들을 섭렵하였다. 초서는 <서보>를 중심으로 연마해 왔다. 그리고 이제 후학들에게 자신이 공부해 온 것들을 그대로 전수하고 있다.
김삿갓을 篆隸로 드러낸 조형어법
중국 청말의 제백석(齊白石, 1857~1963)은 “나의 예술을 배우는 자는 살아남고 나의 예술양식을 닮아가는 자는 죽는다.[學我者生 似我者死]”라고 말하였다. 초민선생은 평소 제백석의 이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무작정 선생을 따라하지 말고 예술정신을 이어받으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백암선생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통해 개성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전서나 예서가 작품구성에 있어서 다른 서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회화성이 풍부하여 표현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장점을 살린 것이다.
청대 유희재(劉熙載)는 “글씨에는 정신이 들어가야 하며 정신에는 나의 정신과 다른 사람의 정신이 구별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정신이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변해서 옛것으로 되는 것이오. 나의 정신이 들어간다는 것은 옛것을 변화시켜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백암선생은 유희재가 말한 나의 정신[我神]과 남의 정신[他神]을 구별하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고전이라도 지금의 나에게 있어 참고와 공부의 자료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나의 작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선생은 오직 자기의 정신이 자신의 작품에 들어가야 된다는 두 가지 생각으로 이번 전시를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김삿갓을 주제로 내 세웠다. 김삿갓은 1807년(순조7년) 경기도 양주군 회암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병연(炳淵),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다. 그 당시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키자 함흥 선천 방어사로 있던 그의 조부였던 김익순은 홍경래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그런데 김삿갓은 지방 백일장에서 공교롭게도 조부인 김익순을 통탄하게 규탄하는 과시(科詩)를 지어 장원이 된다. 그러나 질타한 그 김익순이가 자신의 조부임을 알게된 김삿갓은 폐족의 한과 조상을 욕보인 죄책감에서 처절한 좌절감에 빠졌다. 그 후 김삿갓은 22세의 젊은 나이로 하늘을 쳐다보기 부끄럽고 사람들 대하기 면구스러워 삿갓을 쓰고 지팡이와 술잔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는 방랑의 길로 나서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백암선생은 유독 김삿갓의 시를 작품으로 많이 발표하였다. 김삿갓의 시는 겉으로 보면 단순하게 보이지만, 시의 이면에는 해학과 현실에 대한 풍자가 들어있다. 그런 점이 좋아 즐겨 글감으로 채용해 왔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대부분 김삿갓의 시를 소재로 삼아 다양한 서체로 표현하였다. 예컨대 <멀건 죽 한 그릇>이란 시에는 “개다리 소반 위에 놓인 죽 한 그릇/ 푸른 하늘 빛과 하얀 구름 그림자 함께 어른거리네/ 주인이여 조금도 미안해 하지마오/ 나는 청산이 물속에 거꾸로 비쳐옴을 사랑하노라”고 읇조리는 김삿갓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다. 이 시를 백암선생은 전서와 금문으로 제작했다. <금강산에 가다[入金剛]>는 시에서는 “글을 위해 백발이 되고 허리의 칼도 녹슬어 기우니/ 이 세상 끝없이 한만 오래도록 남는구나/ 장안사에서 좋은 술 실컷 취하도록 퍼마시고/ 가을바람 소슬한데 누역과 삿갓으로 금강산 드누나”라고 자신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서검표령(書劍飄零)>(선비가 나그네 되어 떠돌아 다니는 것)이란 네 글자를 가려서 예서 작품으로 꾸몄다.
김삿갓은 三界(色界, 慾界, 無色界)에 일이 없어 잠만 자면서, 하늘을 지붕삼고 산을 병풍삼아 길가다 등짐이 무거우면 고개들어 사방산천의 변화하는 세상풍경 바라보았고, 먹이의 달고 씀은 입에 달린 듯, 세상의 고와 낙도 맘에 달린 듯이 초연하게 살았다. 그 삶 그대로 그의 시에 담아냈고, 그 시를 백암선생 또한 자신의 조형미감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둘째, 왕허주(王虛舟·청나라 서예가)는 옛사람의 글씨를 임서함에 있어 “처음에는 고법을 취하는데 힘쓰고, 취하여 자기 것이 되면 다음에는 고법을 잘 버려야 한다. 취하기는 쉬우나 버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힘들여 잘 취하지 못하면 잘 버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백암선생은 30년 동안 고전을 익혀왔다. 선생은 이제 그 고전에서 걸어나와 자신의 모습을 붓으로 표현해야겠다는 조형의지를 이번 전시에서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한문 오체 가운데 특히 전서와 예서에서 선생의 조형미감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몇 작품을 예로 들면서 백암선생의 조형어법을 살펴보자. 예컨대 <낙서(落書)>라는 예서작품에서는 왼쪽 변을 오른쪽 방보다 높혀서 처리하고, 강하고 힘있게 서사하여 리듬감이 살아있다. 글자 결구에 있어서도 노을 하(霞)자를 보면, 하단부 왼쪽은 비워두고 오른쪽을 채워서 비균제, 부정형의 맛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전각을 통해 체득한 장법을 서예작품에도 전이시켜 독특한 결구방식으로 감상자로 하여금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금강산(金剛山)>이란 작품은 전서로 서사하였는데 전통적인 좌우대칭의 방식을 탈피함으로써 많은 변화가 감지된다. 이 작품에 나오는 물수(水)변을 전부 다르게 처리했고, 고전적인 결구양식에서 일탈되어 마치 행초서를 보는듯하다. 오창석을 깊이 연찬한 작가는 오창석의 결구방식을 역으로 살려낸 것이다.
예서작품 <잔치상[破格詩]>은 글자 그대로 파격을 보여주고 있다. 막힘없이 거침없이 휘호하였다. 붓의 속도감은 <잡영(雜咏)>이란 시에서 더욱 뚜렷하다. 마치 빗자루로 쓸어내듯이 운필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문인화에서 나무가지를 치듯이 경쾌한 느낌이 든다. 예서획은 삼절을 해 가면서 꾹꾹 눌러서 삽세를 드러내야 한다는 고전적인 규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천지는 만물이 머물다 가는 나그네 길>이란 호태왕비 필의의 병풍에서는 구수하고 질박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행간을 의식하지 않은 배자와 다듬지 않은듯 운필한 붓터치에서 연륜을 느끼게 한다. 그런가하면 조형적인 재미가 간취되는 작품도 보인다. 즉 <즉음(卽吟)>의 상쾌함, <국수한사발>에서의 획의 비수와 비균형의 여운이 그것이다. <간산>이란 작품은 가로쓰기를 시도한 작품으로 한문서예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금년은 백암선생이 회갑을 맞이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축하기 위해 만든 <수연(壽宴)>이란 작품을 보면, 석판에 새긴 국화와 글자의 조합이 잘 어울린다. 칼로 새기듯 붓으로 휘호한 작품은 칼맛과 붓맛이 살아있다. 이 작품은 서예와 전각과 문인화를 공부한 작가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 동안 공부한 모든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서예에 대한 백암선생의 마음가짐은 도록에 실린 “명예도
지위도 없는 이 즐거움”[無名無位之樂]이란 전각작품이 대변한다. 서예란 단순하게 선인들의 글씨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인격과 사상, 그리고 당대 사회의 미학을 오늘의 정서로 표출해내는 작업이어야 하며, 더구나 이 모든 것을 우리시대의 것으로 형상화하는 동시에 나의 것으로 이룩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는 인위적인 곡선보다 전각에서 차용한 직선의 날카롭고 거친 획을 보여주고 있고, 결구와 장법에서도 고정관념을 탈피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앞으로 작가는 전서와 예서를 기반으로 삼아 현대인이 공감하는 조형성 있는 작품을 제작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그림같은 글씨, 글씨같은 그림으로 우리서예의 현대화를 모색하는 길이 될 것이다. 백암선생의 꿈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신묘년 여름날 삼도헌에서 정태수(한국서예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