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여행]
중국의 자강 노력과 그 양상
삼민주의 발판 ‘중화민국’ 수립… 반세기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혁명파 손문, 민족·민권·민생 ‘삼민주의’ 내세워
‘황제정 → 공화정, 만주족 왕조→ 한족 정권’ 변화

태평천국운동 토벌전에 투입된 서양군대. 필자 제공

청국 정부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의 관리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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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를 강령으로 내 걸고 혁명운동을 확산시킨 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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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를 강령으로 내걸고 혁명운동을 확산시킨 손문. 청 왕조 말기에 발발한 태평천국운동은 홍수전(洪秀全)이 결성한 비밀결사체가 1850년 광서성(省)에서 봉기하며 시작됐다. 이들은 ‘멸청흥한(滅淸興漢)’을 외치며 십여 년 동안이나 청조 타도를 시도했으나 보수 계층에 의해 진압됐다. 토벌 과정에서 서양 군사 무기의 우수성을 목도한 청조는 1860년 양무운동(洋務運動)으로 알려진 자강(自强)운동에 착수했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참패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이 아니라 제도도 도입해야 한다는 변법운동(變法運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청조의 자강 노력은 곧 한계에 부딪히고 열강의 침탈은 더욱 거세졌다. 이에 손문(孫文)은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강령으로 내걸고 혁명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마침내 1911년 10월, 신해혁명으로 청조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아편전쟁 패배, 애로우호 사건 이후 영불(英佛) 연합군의 북경 입성, 그리고 그 결과 남경(1842)과 북경(1860)에서 체결된 불평등조약으로 인해 청조는 ‘아시아의 강자’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허약성을 드러냈다. 외환(外患)에 대한 대응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같은 시기에 국내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운동이었다. 아편전쟁의 영향으로 청조의 권위가 추락한 데다 농민의 빈궁이 심화되면서 향촌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유리(遊離)하는 농민의 수가 급증했다. 이는 배외반청(排外反淸)의 성향을 가진 비밀결사들의 출현을 자극했고, 그런 현상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외세 침탈의 시련을 직접 겪은 남부지방에서 거셌다. 게다가 이곳에는 본토인들의 차별로 이전부터 불만이 높았던 화북지방 이주민 집단인 ‘객가(客家)’가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홍수전이라는 인물이 나타났다. 수차례 과거시험에서 낙방한 후 실의에 차있던 그는 기독교에 빠지게 됐고, 곧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유사 기독교적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남부지방에서 점차 세력을 키운 그는 1850년 광서성 금전촌에서 기의(起義), 곧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됐다. 관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해 1853년에는 양자강 이남의 중심도시인 남경마저 점령할 수 있었다.
이때 이곳을 도읍으로 해 ‘태평천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이들은 멸청흥한이라는 기치 아래 변발 금지 및 전족 폐지, 아편 흡연 금지, 토지 균분, 유교적 질서 타파 등을 내세우며 기존 체제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기존 유교적 사회질서에 대한 부정은 지배계층인 신사층의 무력 대응을 초래했다. 여기에 우월한 무기로 무장한 서양 군대까지 가세하면서 위세를 떨치던 태평천국군은 1860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이러한 내우외환으로 청조는 만신창이가 됐다. 이제는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이렇게 착수된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가 바로 양무운동(1860~1895)이었다. 이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는 원칙하에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시도였다. 서양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하다보니 아무래도 ‘강병’ 쪽에 방점이 두어져서 근대적 무기 도입, 군대 개혁, 군수공장 건설 등이 중점적으로 추진됐다. 서양 국가들과의 근대적 외교관계를 이끌어갈 인재양성 기관(동문관)과 정부기구(통리기무아문)도 신설됐다. 태평천국군 진압에 중추적 역할을 한 증국번·이홍장·좌종당 등 한인 관료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 동치황제(1860~1874)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러한 과업을 이끌었다.
한때 중국을 ‘아시아의 맹주’로 부활시킬 것처럼 보였던 양무운동은 1894~1895년 일본과의 전쟁에서 완패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중앙정부 차원의 컨트롤 타워가 결여된 채 개혁적 관리들이 부임한 지방별로 추진됐다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문제는 기존 정치 및 사회 제도는 유지한 채 서양의 유용한 기술만 도입하려 한 편협한 방향성에 있었다.
양무운동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면서 이제 개혁운동은 서양의 제도까지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흔히 변법운동(1895~1910)이라 불리는 개혁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광서황제에게 개혁안을 제안하고 곧 그 실행 책임까지 맡은 강유위(康有爲)였다. 양계초·장지동 등의 도움을 받아 1898년 ‘무술정변’이라 불린 개혁 작업이 약 100일간 추진됐다. 그는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서양의 제도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관제개혁, 근대적 학교 제도 도입, 그리고 무엇보다도 입헌군주정을 제창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그 급진성으로 인해 지지세력 확보가 어려웠고 특히 당시 실권자였던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 세력의 의구심을 초래했다. 급기야 보수파의 실력행사로 개혁 작업은 중단됐고, 강유위 등 급진 개혁파 세력은 뿔뿔이 흩어졌다. 물론 의화단 사건(1900) 이후 청조 주도하에 이른바 ‘변법신정’이 추진돼 입헌정체로의 전환, 과거제도 철폐 및 신식학교 설립, 신식군대 창설 등의 개혁 작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고 무엇보다도 개혁의 본질상 청조 유지의 고육책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기에 실패했다.
이제 역사의 물줄기는 다른 곳, 즉 ‘아래로부터’ 흘러나오게 됐다. 정부의 개혁 작업에 실망한 이들은 이제 청조에 대한 기대를 접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꾸었다. 바로 이들은 혁명파로서 그 중심에 손문이 있었다. 일찍이 흥중회라는 혁명단체를 조직(1898)해 청조 타도의 기치를 내건 손문은 정치적 탄압을 피해 주로 해외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 중국의 젊은 유학생들이 많았던 일본에서 향후 혁명운동의 구심점이 되는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했다. 이때 그가 혁명 이념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유명한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였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에는 항상 커다란 격차가 있는 법! 이후 주로 중국 남부지방에서 청조 타도를 목표로 수차례 무장봉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여전히 전통적 사고에 젖어 있었기에 혁명파는 그 세력을 키우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혁명은 의외의 시점에 의외의 집단에 의해 의외의 사건으로 점화됐다. 1911년 10월 10일, 청조의 철도국유화 정책에 반대하는 민중 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무창 주둔 신식 군대에서 오히려 총구를 청조로 겨누는 항명 사태가 발생했다. 마른 풀밭에 던져진 불씨처럼 이는 삽시간에 전국의 각 성으로 확산됐고, 급기야는 중화민국(1912. 1. 1)이라는 새로운 국가 수립으로 이어졌다.
진시황제 이래 2000년간 이어져온 황제정이 공화정으로, 만주족 왕조가 한족 정권으로 바뀌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후 중국은 손문 등 혁명가들의 소망처럼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로 바뀌었을까? 그렇지 않다. 유구한 전통의 무게는 한 번의 정치적 격변으로 뒤집어지지 않았다. 이후 중국은 또 다시 약 반세기에 걸친 소용돌이 속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Songs From a Secret Gar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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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 Songs From a Secret Garden
Secret Garden 1995–present
No.1 - Noctur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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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Title: Songs From a Secret Garden - Secret Garden
Studio/Live Studio Mono/Stereo Stereo Audio CD (April 16, 1996) Label: Polygram Records / PHILIPS (P) 1995 PolyGram A/S Norway (C) 1996 Philips Classics Marketed in the UK by Philips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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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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