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련> 2019년 상반기호
다시 삼강주막(三江酒幕)에서/ 지성찬
수많은 민초들이 밟고 간 삼강(三江)나루*
그때 그 풀빛은 오늘도 푸르른데
역사는 흙에 묻힌 채 흰 모래만 곱구나
님을 기다리며 낡아가는 세월 속에
빈 나루에 작은 배가 밧줄로 묶여 있네
가끔씩 먼지바람에 풍문(風聞)만 쌓여가고
비늘 고운 은어(銀魚) 떼가 물길 따라 올라오고
회룡포 돌아온 바람, 이 나루를 건널 즈음
끌리는 치맛자락에 연둣빛 물이 드네
회화나무 가지 사이 하늘은 한없이 높고
긴 세월에 남은 것은 썩은 가지뿐이네
육중한 몸짓으로 하는 말, 눈빛으로 알겠네
봄은 꽃을 들고 문밖에서 기다려도
회화나무 검은 가지는 내다보지 않는구나
한 줄금 비라도 와야 문을 열고 나오려나
칠흑같이 어두운 밤, 등잔불도 약해지면
주모(酒母)는 열사흘 달을 가슴으로 퍼 담으며
그 밤에 홀로 떠난 님을 물 위에 그려보네
그을린 부엌에는 무쇠솥이 걸터앉아
주인을 땅에 묻고 홀로 남아 무엇 하나
언제쯤 새 주모를 만나 한세상을 끓여보나
거덜 난 팔자 같은 타다 남은 숯검뎅이
인생은 타고 또 타는 기름 같은 장작 같은
모두가 타버리고도 아쉬움은 재가 되고
감히 인생을 안다고 말하지 마라
그대 가는 길을 안다고도 말하지 마라
술에나 취하지 않고는 이 강을 건널 수 없네
여기 삼강나루 쉬어가는 나그네여
사랑은 풀꽃 같은 것, 풀꽃처럼 떠나셔도
천여 필 옥색(玉色) 비단을 끊고 갈 순 없겠네
*삼강나루: 경북 예천 삼강리에 있는 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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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비 읽기/ 박명숙
아침부터 주룩주룩 봄비를 읽어간다
세로글 내리닫이로 속도를 높여간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세상에 끼워 넣어 가둘 수 없는 산문처럼
띄어읽기도 띄어쓰기도 할 수 없는 봄비를
숨 가삐 소리를 높여 주룩주룩 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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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弄談)/ 박지현
무게로 치자면 벌새보다 가벼운 것
질량으로 따지면 아프리카 코끼리만 한
환선굴 윤회재생(輪廻再生) 그 울림통 같은 것
한겨울 아랫목의 잘 익은 구들장 같은
그 구들장 굴뚝 타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문 열고 돌아서면 금세, 사라지고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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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 김교한
높푸른 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니
지나간 한 시절이 백운처럼 떠올라
오늘은 할 일이 무엇인지
은근히 고해 주는가.
아침인가 여겼더니 어느새 저녁이었고
침잠하지 못한 후회 바위같이 무거워도
머나먼 여명을 맞이할
언덕은 거기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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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 친구/ 노창수
산행에 주운 이 허접
절뚝일 다릴 의지하는
지팡이 삼아 써먹고
하산 길에 버리지만
이튿날
이른 오르막
기다리다 쥐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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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오는 모습/ 박방희
생쥐 같은 초승달이
어슴푸레 눈을 뜨자
눈 어둔 밤 더듬더듬
마을을 찾아오고
다저녁 사람의 집들도
하나 둘 불을 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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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나무/ 원용우
무심히 굴러와서 이 자리 멈춰 섰다
별것도 아니지만 제 몫은 해야 한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자식 많이 낳는 기쁨
뿌리는 튼실하고 지엽(枝葉)은 짙푸르다
하늘이 내리신 복 듬뿍 받고 웃는다
매달린 복덩이들이
새빨갛게 익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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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이석구
펑펑 내린 함박눈이
날리듯이 스치듯이
법당에 홀로 앉아
두 눈을 내리깐
부처님
엉덩이에 붙자
동백꽃이
구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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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 정광영
오늘도 절 앞에는
탑 하나 올라간다
그 무슨 영험을 믿고
돌덩일 얹었으랴만
무수한 소원이 모여
하늘 향해 쌓여간다
하 세월 흐르고 흘러
이끼라도 입혀지면
절로 경전을 외는
부처라도 안 되겠나
만 사람 두 손 모으는
아미타불 안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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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는 길/ 홍사성
넓은 길 쉬운 길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굽은 길 언덕길도
지나가야 했습니다
힘든 길
다 피하고는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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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련> 2019년 하반기호
여백/ 김삼환
붓이 닿지 않는 곳도 그 의미를 살려내듯
진한 눈물 없이도 한 슬픔이 젖어서
말 없는 소멸의 길에 빗방울이 스몄다
흔적을 찾고 보면 그 안의 모든 것이
한 생을 말하다가 문득 멈춰 서 있는데
배경은 보이지 않고 바람 또한 스쳐갔다
때로는 주인으로 어떤 때는 손님으로
홍제천변 빈자리를 살펴보던 백로처럼
씻은 듯 맑은 하늘에 빗금 하나 그어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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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위한 노래· 1/ 강호인
내가 별에게로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나무는 미풍에다 어린잎을 새로 널고
강은 또 족쇄를 풀어
산자락을 돌아갔다.
별 하나가 나에게로 하얀 눈을 주었을 때
한 마리 산짐승의 욕망같이 슬픔같이
그렇게 가열(苛烈)한 것들로
저 일월이 놓였던 것.
폭풍 같은 혁명과 전쟁을 그 별이 본다
속으로 우는 삶과 쓰러진 역사도 본다
마침표 찍지 못한 사랑
반짝이는 문법대로.
한 줄의 잠언처럼 나는 지금 푸르게 산다
영마루 높았지만 가끔은 새를 날렸고
하늘의 말씀에 귀 열어
그 행간을 메우면서.
숨결 푸른 난바다에 징 소리로 뛰고 싶은
바람은 맑은 혼을 꽃대 끝에 세우나니
별이여, 먼 그대를 위해
이 지상의 노래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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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5/ 석성우
마음 놓고 살자니
마음 놓을 곳 없고
마음 들고 살자니
마음 들 곳 없네
놓을 곳 들 곳도 없어
동동걸음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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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강물에 몸 부시듯이/ 염창권
어느 옛절, 아주 어린 땡중이 살던 절에 늘그막 다 된 중이 백
년 넘은 독 부시는 일 힘들다, 생각하고는 그 아랫것 시켰는데
엄마야,
이른 새벽 멱 감으러 나갔는지 느티나무가 흘린 말 엿들으러
갔는지 빛으로, 몸 갈아입는 나무들에 넋 놓다가
그 귀신 물린 독을 박살 낸 땡중이 무엔가 홀린 듯이 텅 빈 적
막 들여다볼 때 햇빛에, 반짝여 오는 슬픈 것들 우련하여,
마음속의 진동음이 터엉 텅 두들겨지며 우주의 씨 날줄이 빈
독처럼 휘어져선 몸 가는, 문 앞에 써 붙인 염불처럼 글썽이매,
아, 그 그 마실 돌아오는 길섶에서 우주의 실 끝 같은 진동을
붙잡고선 늙도록, 몸 부신 것이 깨진 독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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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마을/ 유자효
시는 말의 절
절은 말의 시
“시 한 편 쓰는 것이 절 한 채 짓는 것보다 낫다”*
스님은 떠나 말 없고
남아 있는 절과 시
*설악 무산 스님이 생전에 시인들에게 하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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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울음/ 유해자
배우지 않았지만 태어날 때 이미 아는
너는 최초의 언어 또한 최후의 언어
올 때는 내가 울었고 갈 때는 남이 운다
말과 글 익힌 후에 애써 울음 감추지만
감당 못 할 아픔이나 먹먹함이 덮쳐오면
말보다 먼저 알았던 울음보가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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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목/ 임영석
저 비장함이 행운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제 몸을 툭 자르고서 사는 게 뭐가 좋아
접시에 물 한 모금을 행운이라 말할까
남 보기엔 볼품없는 한 토막 나무이지만
손과 발이 다 잘려도 놓지 않는 목숨 하나
그것이 행운이라고 푸른 싹을 내민다
행운이란 조각조각 부서진 아픔까지
앞날을 밝혀주는 혼(魂) 불이라 생각하는지
수맥이 잘린 허리에 삶의 얼굴을 묶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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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허영자
생선 장수 우리 어머니 몸에 밴 생선 냄새
남들에겐 비린내지만 나에겐 어머니 냄새
어머니 그리운 날은 기웃이는 어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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