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초 무렵이었을 것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이광수가 쓴 소설 《원효대사元曉大師》를 읽다가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란 구절이 마음속에 박혀 들어온 것이 말이다.
‘일체에 걸림 없는 사람, 큰 도로 생사에서 벗어난다’는 그 깊은 뜻을, 아홉 살까지 서당에 다니며 유가의 글을 익혀서 초등학교에 들어가 일기를 한문으로 쓸 만큼 한문에 익숙했다고 하나, 열다섯이던 내가 선명히 알았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열 글자는 내 마음에 화두로 박혀 출가의 씨앗이 되었고 내 한 생애를 지배했으니, 어느 생에선가 붙들고 있었을 화두임에 틀림없다.
아침마다 동네 가까운 산에 올라 비석처럼 생긴 돌 위에 그 열글자를 새기던 초파일 무렵 어느 날, 학교 앞마당에서 밤중에상영했던 부처님 일대기를 보고 감동을 이기지 못해 산으로 올라가 소나무 밑에서 밤을 지샜다.
열 글자를 입으로 외우면서 밤새 이슬을 맞은 몸을 털고 일어나 집으로 가니, 온 동네
가 ‘아이 하나 없어졌다’고 난리였다.
눈을 부릅 뜬 아버지에게 ‘어제 영화를 보고 감동되어서 소나무 밑에서 밤을 새웠어요. 그러면 도를 이룰까 해서요’ 하니, ‘우리 집에 미친 놈 하나 나왔다’고 했다.
나의 아버지는 그후 내가 스물아홉에 출가의 뜻을 말했을 때도 ‘병이 또 도졌구나’ 하시며 탄
식했는데, 아마도 ‘살아보니 다 쓸데없더라. 제 갈 길 가게 나둬라’ 하시면서 내 출가의 길을 이해했던 할아버지의 협력이 아니었다면, 팔남매의 장남에 장손인 내가 출가하기가 그리수월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발심을 했던 그해 가을 김장 무렵,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고향인 여수의 흥국사興國寺와 석천사石泉寺로 출가하러 갔으나 인연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학교를 다 끝마치고 오는 게 좋겠다.
그런데 장남이어서 힘들겠다’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자퇴서를 물리고 학교로 다시 돌아갔다.
그 후로 학교엘 다녔으나 재미를 못 느꼈고 늘 고독했다.
그런 나를 친구들은 ‘독고獨孤선생’이라고 불렀다.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도 갔다오고 나서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문득, 엿장사로 나서서 몇 개월 전국을 떠돌다가 떠난 무전여행길에서 출가를 결정했다.
초봄이었다.
토함산 자락에서 담요 하나 덮고 노숙을 한 채 새벽에 추위에 눈을 뜨고 버릇처럼,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를 중얼거리고 있는데, 새벽예불 도량석 소리와 함께 범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새벽을 가르며 내 가슴속으로 사무쳐 들어왔던 그 범종소리는 바로 곁에서 사자가 포효하는 듯 했고, 내 온 몸을 전율케 했다.
나는 그 강렬한 전율 속에서 범종소리가 들려오는 불국사를 향해 절을 하고 ‘출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분명히 했다.
짐을 정리하고 불국사로 달려갔으나,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몇 달 동안 떠돌던 행색이 말이 아닌 나를 보고 ‘당신같이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그때 그 관리인이 나를 순순히 들여보내주었으면 나는 송광사로 출가하는 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 정리하고 다시 오자’ 하고 완행열차를 탔는데, 열차 안에서 보조국사 종재를 지내러 송광사에 가던 해인사 비구니 노스님 한 분을 만난 것이 송광사로 출가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우연히 만난 그 비구니 스님에게, ‘제가 출가를 하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했더니,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松廣寺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출가를 하실 모양인데 꼭 성불하세요. 출가의 길에서는 참고 또 참고 인욕忍辱해야 합니다.” 그 스님이 말씀한 ‘인욕’ 법문은 내게 어느 큰스님의 말씀, 어느 조사의 어록보다 내 가슴에 깊이, 그리고 오래 남았다.
그리고 송광사에서 시작한 행자시절 몇 번이나 쫓겨나는 우여곡절 속에서 나를 지키는 강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후에 내 은사스님이 되었고 당시 송광사 주지스님이었던 법흥法興 스님을 뵙고 출가의 허락을 받고 나오는 길에 미리 준비해간 창호지에 ‘불은귀의佛恩歸依 원면악도願免惡道’라고 혈서를 쓰려 했으나, 피를 내기 위해 깨물었던 왼쪽 무명지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와 부처 ‘불佛자’ 한 자밖에 쓰지 못하고 옆에서 말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만큼 초발심으로 순수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보조국사 종재를 막 지내고 나서 들어갔다가 효봉曉峰스님 열반일인 음력 9월 2일에 사미계를 받았으니, 꼭 여섯달 동안을 행자생활을 한 셈인데, 그 동안 세 번을 쫓겨났다가 다시 들어갔으니, 나는 송광사로 세 번 입산한 셈이다.
세 번 다 일주문 밖을 벗어나지 않고 그날로 다시 들어갔지만, 하여튼 나는 밤낮 새로 들어온 행자처럼 설거지하고 국만 끓이는 갱두만 하다가 행자시절을 마쳤다.
그래도 행자시절 공양주는 해봐야 한다고 해서 계 받기 전 하루이틀 밥을 해본 게 공양주 노릇의 전부다.
덕분에 나의 국 끓이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라 할 만하다.
다시물을 잘 우려내 수제비를 끓이는 솜씨 또한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다.
그 시절 공양간에서 밤낮 국을 끓이면서 자세히 메모해놓았던, 계절마다 다른 열 종류의 국 끓이는 법을 타자로 깨끗이 정리해 공양간에 붙여놓기도 했는데, 몇 년 뒤 가보니 없어지고 말았다. 아마도 그때 익힌 송광사 특유의 음식 솜씨는 아마 책으로 엮어도 한 권은 족히 될 것이다.
훗날 일본에 있을 때, 지금 해인사 강주로 있는 종묵 스님을 만나 하룻밤을 같이 자면서, 송광사와 해인사 수제비 끓이는 법을 서로 실감나게 겨루면서 웃은 적이 있다.
그날 밤 수제비 고수인 종묵 스님도 내가 끓인 수제비가 더 맛있겠다고 인정해주었다.
어쨌거나 나는 행자시절 세 번이나 쫓겨났다가 다시 들어왔는데, 그 사연을 말하면 이렇다.
처음은 당시 원주스님을 수각에서 첫 대면하였을 때에, 새로 행자로 들어온 나에게 반말로 건
네기에, ‘스님이 반말로 한다’고 영진 스님에게 말하였다가 미운 털이 박혀, 산내 암자인 천자암天子庵으로 쫓겨났고,
또 한 번은 천자암에서 한 이틀 지나자 쌍향수雙香樹 아래서 혼자삭발을 해버렸더니 허락도 받지 않고 감히 삭발을 했다 하여 쫓겨났다.
문제는 세 번 째 쫓겨났을 때였다. 그때는 강원도에서 갓 들어온 행자 하나가 마음에 안 들어 말다툼을 해서 둘 다 쫓겨났는데, 그 강원도 행자는 가버렸으나 나는 다시 저녁에 행자실로 갔더니, 이번엔 절대 안 된다면서 행자반장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원주스님이 일주문 밖으로 끌어내랬다고 하면서 가부좌를 하고 요지부동 앉아 있는 나를 양쪽에서 번쩍 들어 대웅전 앞까지 끌고 갔으나, ‘송광사에서 다비식을해도 할 것이니 알아서 하시오’ 하는 나를 끝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그런데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때 함께 수계를 한 예닐곱 명의 큰절 행자 도반 가운데, ‘저렇게 말을 듣지 않는 사람치고 절에 남은 사람 없다’는 소릴 듣던 나만 지금까지 절에 남아 있고, 한 번도 쫓겨나지 않았던 착실한 그들은 더러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 나머지는 다 마을로 되돌아갔으니 말이다.
행자시절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배우며, 바쁜 중에도 저녁일과 후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큰스님들 법문 테이프를 듣던 행자시절을 보내고, 어느덧 삼십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출가의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47킬로그램에 불과했던 몸무게가 보기 좋게 늘어나고 굳게 닫혔던 입이 열리면서, 물고기가 물에 든 듯 호랑이가 산에 든 듯 생기가 솟아났던 것이다.
‘내가 올 데를 왔구나’ 하는 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동안 살아왔고, 또 많은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세간에 살았더라면 이리, 구름을 헤치고 밤하늘에 유유히 흘러가는 달처럼 걸림없이 살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감사하고, 또 송광사로 출가한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출가의 길에서 내 중노릇의 밑천이 되게 한 가르침을 주신 지유知有·법정法頂·송담松潭 세 분 어른과의 만남에 감사한다.□
첫댓글 91년도 지묵스님과 연이 닿아 저 역시 송광사에서 수계를 받을 수 있었답니다. 지금은 송광사 말사인 법련사에 계시며 BBS 신행상담을 진행하시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