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을 지난 1월23일 밤에 지지 아이들과 함께 관람했습니다. 의자까지 움직이고 앞좌석에서 바람과 물까지 뿜는 4Dx 자막버전을 재밌게 봤습니다. 감동은 바로 전날 받았었지요. 고등학생 딸이 보고 싶다고 하길래 한국어 더빙버전을 관람했었습니다. 딸아이는 이미 2D 자막버전을 보았으니 3D 더빙버전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지지 아이들과 보려고 예약을 해놓았던 상황이라 볼까말까 망설이다가 가족 서비스 차원에서 본 것인데, 결과적으로 두 번 보기를 잘 했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일러스트레이터는 스토리는 들리지 않고 줄곧 그래픽만 살펴서 또 보러가야겠다고 하더니만, 저는 반대로 스토리 전개에 관심이 갔습니다. 화려한 화면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왔기에 기술발전에 저절로 감탄하면서 말입니다. 딸내미 설명으로 스티브 잡스 회장의 픽사社가 디즈니와 합병한 후 만든 토이스토리가 실사같은 그림을 선보인 애니메이션의 원조이며, 드림웍스의 <슈렉>에 영향을 받은 디즈니가 <주먹왕 랄프> 이후로 철학적 배경을 가진 스토리텔링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슈렉>은 본 적이 있지만 대부분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막연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디즈니의 영화들은 월트 디즈니가 CIA 비밀요원이었다는 사실에서 유추되듯이 권력의 입장을 교묘히 대변한다는 생각-<겨울왕국>은 보는 내내 전두엽을 뒤흔드는 스토리의 신선함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겨울왕국>은 제니퍼 리가 시나리오를 쓰고 공동연출까지 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영화를 관람하면서 시나리오 작가가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분명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터널>을 보고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겨울왕국>이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것도 엔딩크레딧이 오를 때 나오는 자막을 보고 알았는데, 저는 <눈의 여왕>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안데르센 풀네임이 한스 크리스티앙 안데르센이기에 중요인물 이름이 한스, 크리스토프라는 것과 돌멩이 요정 이름 트롤은 <눈의 여왕>에 나오는 악당이었다고 하는군요. 일종의 안데르센에 대한 오마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티브일 뿐이고 제니퍼 리가 진짜로 영향을 받은 사람은 앤서니 브라운이란 심증이 시간이 갈수록 확신으로 변합니다.
앤서니 브라운에게 가장 큰 저작권 수입을 안겨 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하는데, 자녀에게 책깨나 읽어준 젊은 엄마들은 앤서니의 <돼지책>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앤서니 브라운이 1989년에 펴낸 책이 <터널>입니다. 한국에서는 2002년에 번역 출간되었지요. 짧은 내용이니 일단 감상하고 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혹자들은 <겨울왕국>에서 보여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변화를 왕자(남자)가 아닌 여왕과 공주 자매(여자)로 주인공이 이동했다거나,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공주의 디즈니 공식을 깨버린 것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겨울왕국>에서 그보다 파격적인 디즈니의 혁신을 보았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죽기 전에 디즈니의 최대주주였던 것도 이러한 파격적 변화의 동기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날에는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소극적인 여자 주인공의 전근대성을 지적하는 정도로는 적절한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겨울왕국>의 엘사 여왕과 안나 공주 자매는 인간의 두 가지 내면을 그려낸 상징적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문제를 회피하려는 엘사와 적극적으로 부딪혀 해결하는 희생적인 안나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때때로 조건과 환경에 따라 엘사가 전면화될 수도 있고 안나가 나타날 수도 있으며,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갈피를 못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다중인격으로 보거나 어느 한면을 고정된 정체성으로 기술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애니메이션 특성상 관객의 요구와 상업적 성공을 고려해서 단순하게 플롯을 짜고, 리얼리티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판타지 코드를 입히기 위해 상반된 자매 캐릭터를 설정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엘사/안나 자매가 아닌 존과 톰 형제로 설정을 바꿔도 <겨울왕국>의 스토리텔링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헨젤과 그레텔>을 모티브로 한 위 <터널> 작품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애니메이션을 고민하는 작가가 영국의 앤서니 브라운을 모를리는 없을 터. 앤서니 브라운도 안데르센 상을 2000년에 받기도 했습니다.
핵심은 돌로 변한 오빠를 구한 동생이 터널을 나와 집에 무사히 돌아온 후 서로 마주보는 왼쪽의 그림에 있습니다. 앤서니 브라운은 서로 마주보고 살며시 웃는 남매를 왜 이렇게 그렸을까? 두 사람이 눈을 바라보며 마주보는 옆 모습을 그리는 것이 보통의 경우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앤서니 브라운은 오빠의 뒷통수만 보여주고 얼굴은 전혀 나타나지 않게 그렸습니다.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면 오빠가 거울을 보고, 동생은 거울에 비친 오빠의 모습 같은 느낌입니다. '너'를 통해서만 '나'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빠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여동생은 아름다운 꽃무늬 배경에, 오빠는 붉은 벽돌담 배경에 서 있습니다. 동생은 책을 읽고 공상을 하고 오빠는 공놀이와 뒹굴며 뛰어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티격태격 싸우는 사이입니다. 그런 남매가 서로 마주보며 웃는 사이가 된 것은 터널을 함께 통과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먼저 터널에 들어가 돌로 굳은 오빠를 나중에 들어간 동생이 와락 껴안고 울었기 때문에 둘이 함께 터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터널이 성장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사람의 성장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을 전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겨울왕국>도 똑같은 메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겨울왕국>에서 비포/애프터는 겨울에서 여름으로 변하는 것이지만 애프터가 단순 과거복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발전된 변화에 의한 애프터는 필요에 따라 스케이트도 탈 수 있는 겨울이 녹아든 여름을 말합니다. <터널>의 비포/애프터는 티격태격 늘 싸우는 사이에서 웃으며 마주보는 사이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런 남매의 시너지에 그림책의 판타지 세계가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고, 그 결과 벽돌담벼락 밑에 축구공과 그림책이 함께 놓이게 됩니다.
<겨울왕국>의 엘사가 대단한 마법의 힘을 가졌지만 안나의 용기와 희생으로 적절히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엘사의 진정한 사랑이 안나의 심장을 녹여 부활하게 했다는 설정은 구원자와 피구원자가 구분되는 설정을 극복한 스토리입니다. <터널>이나 <겨울왕국> 모두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닌 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바로 구원자는 동시에 구원을 받는 사람이고, 구원을 받는 사람은 동시에 구원을 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 <터널>이나 <겨울왕국>이 하고 싶은 얘기로 들렸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너'를 사랑할 때만 현실태가 된다는 설정은 마틴 부버(1878~1965)의 <나와 너>(1923)를 곧바로 소환합니다. 표재명의 번역본 <나와 너>에서 다음과 같은 서평을 싣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문명의 비약적인 발전과 그에 따르는 대중사회적 상황과 평준화의 진행 속에서 아무런 내적 연관도 없이 살아가며, 스스로 인격의 가치와 존엄을 송두리째 잃어가는 인간 소외와 원자화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인간이 자기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세계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버는 고도의 기술혁신에 의한 기계화가 인간의 비인간화와 자기 상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위기의 핵심은 오히려 이러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그의 이른바 근원어 ‘나-그것’의 지배 아래 스스로를 매몰시켜 버리는 데 있으며, 이미 사람이 근원어 ‘나-너’를 말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말한다.
깨진 세계, 인간의 자기 상실과 원자화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진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부버는 인격으로서 공존하는 ‘나-너’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
핵심개념은 '근원어'라고 보고 제시된 대안을 '대화'로 본다면 이를 위해 본문의 일부를 옮겨옵니다.
경험으로서 세계는 근원어 ‘나-그것’에 속한다. ‘나-너’는 관계의 세계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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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어는 낱개의 말이 아니고 짝말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나-너’라는 짝말이다. 또 하나의 근원어는 ‘나-그것’이라는 짝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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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어는 존재를 기울여(본질을 다하여) 말해진다. ‘너’라고 말할 때는 짝말 ‘나-너’의 ‘나’도 함께 말해진다. ‘그것’이라고 말할 때는 짝말 ‘나-그것’의 ‘나’도 함께 말해진다. 근원어 ‘나-너’는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다. 근원어 ‘나-그것’은 결코 온 존재를 기울여서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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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 자체란 없으며 오직 근원어 ‘나-너’의 ‘나’와 근원어 ‘나-그것’의 ‘나’가 있을 뿐이다.
'나'란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오로지 '너'를 통해서만 확인되는 것인데, 확인의 방법이 '너'와의 대화입니다. '나'는 '너'와 대화할 때만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그 또는 그녀도 마찬가지)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것'과 대화하는 순간 '그것'은 '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너’는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지만 '나-그것'은 그럴 수 없다고 부버가 알려줍니다.
'나-너'는 관계의 세계를 세운다 했으니 '나'와 '너'가 짝말이 아닌 각각의 길을 찾겠다고 했을 때 관계의 세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런 세계는 엘사가 만든 얼음왕국일 뿐입니다. 엘사가 만들었다고 하지만 겨울왕국은 모두의 왕국이며 안나가 독자적으로 겨울을 벗어날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안나는 엘사 언니를 만나 대화를 했고 그제서야 언니의 고통과 입장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언니의 고통과 입장은 자신의 것이 됩니다. 언니인 '너'를 통해서 '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둘은 한 몸입니다. 오직 상대방에게 투영됐을 때만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즉 '너'를 통해서만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천할 때 <겨울왕국>은 따뜻한 세계를 되찾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앤서니 브라운은 <터널> 발표 20년 후에 <나와 너>(2009)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나와 너>도 옛이야기를 모티브로 가져왔습니다. 영국의 옛이야기 <골디락스(금발머리)와 곰 세 마리> 내용을 그대로 옮겨옵니다. 출판사 서평은 '나'와 '너'를 넘어 '우리'를 생각하는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저는 다르게 보았습니다.
곰 세 마리는 아빠곰, 엄마곰, 아기곰을 말합니다. 곰 가족은 대화가 없습니다. 아빠 엄마는 각자의 얘기만 늘어놓을 뿐입니다. 아기곰인 '나'는 딴청만 피웁니다. 그림책 제목은 "나와 너"인데 '나'인 아기곰은 있지만 '너'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기곰 '나' 말고 모두 '그것'일 뿐입니다. 그러다가 곰 가족이 사는 집에 들어와 스프를 먹고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던 골디락스(금발머리) 소녀가 곰 가족과 맞닥뜨려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사건이 생깁니다. 그리고 '너'가 생기는 신비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 아기곰이 '그 소녀'를 궁금해하면서 '그 소녀'는 '너'가 되는 것입니다.
굳이 앤서니 브라운이 제목을 <나와 너>로 정했을 때는 부버의 <나와 너>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20년 전에 <터널>를 통해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에 부버의 '나-너' 짝말을 얹었기 때문입니다.
<겨울왕국>은 이미 애니메이션 영화 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본 작품이 됐다고 합니다. 물론 재미있게 만들었고, 재미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디지털 그래픽 기술의 발전과 뮤지컬 음악의 뛰어남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존재를 기울여 말하게 되는 '나-너'의 근원어를 스토리의 근간에 두고 있기 때문에 관객의 마음 깊이 감동을 준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사를 받을 만한 뛰어난 작품입니다. 끝.
첫댓글 앤서니 브라운의 책은 좋은게 참 많은거 같아요^^ 터널이라는 책도 꼭 읽어보고
지지아이들과 오르프적으로 다가갈수 있게 연구해보고싶어지네요^^
좋은 아이디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