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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es Stream in the Judean DesertPhoto by Ester Inbar. Available from http://commons.wikimedia.org/wiki/User:ST. Copyrighted but made available for free use by the author with attribution. |
본문
창세기 9:8-17절
시편 25:1-10절
베드로전서 3:18-22절
마가복음 1:9-15절
설교 도우미 Preaching Helps
주석(Chris Haslam) - 번역 이 기호 목사(평안교회담임)
창세기9:8-17
처음 창조의 이야기에서(1:27-28),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고 물고기와... 새들과 ...그리고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 그러나 모두(사람과 모든 짐승과 생물)는 채식을 하여야한다(1:29-30).
하나님의 길에서의 탈선이 시대를 넘어서 증가하였고 땅이 폭력으로 가득 찼고 ...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하였다(6:11-12).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라는 수단으로 사람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셨다, 그러나 (그의 자비에 따라) 하나님은 남은 자를 구원하셨다. 홍수가 사라졌다. 노아와 그의 가족과 살아남은 동물들이 마른 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
9:1-3에서 하나님은 창세기1장에서 하셨던 약속을 다시 시작하신다. 하나님은 거듭 명령하신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나님은 지금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하신다.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들을 완전하게 지배하는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사람의 생명을 크게 존중하는 권리를 갖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고의적인 살육은 하나님에게 그 이유가 설명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과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들과 계약(9절)을 하신다. 온 땅에(19절) 사람이 살아가게 된 것은 노아의 아들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계약은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다시는 인간을 멸망하려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11, 15, 16절).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과 그리고 땅과 함께 존재하시기 때문에, 이 계약은 생태학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약은 “영원한 계약”(16절)이다. 고대 사람들은 무지개를 하나님의 용사의 무기, 즉 그의 “활”로 여겼다(13절). 그의 화살은 번개였다. 하나님은 활을 눈에 보이는 계약의 표시로서 주신다. 하나님의 활이 구름 속에 있다(땅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은 하나님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화가 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13-17절에서 이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은 이 이야기의 다양한 견해들이 결합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가 내릴 때 비는 무지개와 함께 끝날 것이다. 거기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 홍수이야기는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들에 따라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악을 처벌하시고 의인은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시편25:1-10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그에게 그분의 도(4,8,9절)와 그분의 길(4,10절)을 보여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한다(2절).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개인적인 원수들로부터 구출하여 주실 것을 소망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혹은 배반을 당한다.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구원될 것이다(6절).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그분의 자비...그리고... 사랑을 통해서 그의 죄들을 용서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그의 젊은 날의 일탈보다는 오히려 그의 현재의 충성을 기억하실 것이다(7절). 하나님은 죄인들을 교훈하시고(8절), 겸손한 자들을 인도하시고, 신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는 법을 가지고, 겸손한 자들(9절, 즉 하나님을 진정으로 존경하는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베드로전서3:18-22
15-16절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헐뜯는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방어하는 것, 그 이상을 행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즉 우리는 불신자와 대화할 때, 그 사람을 개심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희망을 설명해 보라는 그들의 어떤 요구에도 반응하여야 한다. 이 일은 고난을 수반할 수도 있다. 이 일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가 실례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의 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다(18절). 그리스도는 의인이시다(사도행전7:52에서 그리스도는 “의인”이라고 불렸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신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으셨다(“육으로” 죽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셨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셨다.
19-20절: 창세기6장1-4절에서 천사와 같은 존재들이 여인들과 성교를 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졌다. 후기 유대교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존재들의 행동이 홍수를 일으켰다고 믿었다. 에녹전서에서(베드로전서가 쓰여졌을 때 인기가 있었던 책) 에녹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러한 존재들에게 그들이 감옥에 감금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간다. 19절에서 에녹의 이야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감옥에 있는 영들은 이런 나쁜 천사들이다. 방주가 만들어지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기다리셨다”(20절).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20절의 “8명”은 노아와 그의 아내, 그들의 세 아들들과 그들의 부인들이다.
21절: 세례는 물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의미가 다르다. 즉 세례의 역할은 의식적인 정화(더러움의 제거)가 아니다. 세례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에 의해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되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구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공유하는 것과 같은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하나님의 우편, 22)에 계신다. 그리고 천사와 같은 존재들(천사들, 권위자들, 권력자들)을 가지고 계신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한다. 하나님은 과거에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세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마가복음1:9-15
세례요한이 왔고, 죄의 용서(4절)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가졌다. 예수님도 역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 마가는 우리에게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방식의 소통이 시작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10절의 “비둘기 같이”라는 말은 창세기1장2절에서 “운행하시는 영”을 암시하는 말이다. 마가에게 있어서, “하늘로부터...소리(11절)”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관계를 확증하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한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을 아주 간단하게 언급한다. 마태, 누가, 마가 모두는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 시험을 이겼다고 말한다. “사탄”(13절)은 마귀들 중에 최고의 마귀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지금 끝이 나고 있다.
“40일”은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40년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40일”은 금송아지사건(출34:28) 이후에 계약을 다시 시작할 때에 모세가 40일 동안 산에서 견디었던 극히 어려웠던 기간을 반향하고 있다. 엘리야 역시 시내산(열왕기상19:8)에서 “40”일을 보냈다.
광야에서(13절), 들짐승들이 예수님을 공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이 예수님을 보호한다. “체포하다”(14절)라고 마가가 사용한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요한의 운명은 예수님의 운명을 예시한다.
15절에서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가신다. 예수님의 선포(메시지)는 “때가 찼다”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시간, 하나님이 행동하시려는 결정적인 시간이 도래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역사의 마지막 시대가 임박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안에 있는 새로운 삶, 즉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을 요청하신다.
설교실마리 Sermon Cues
(김성국 목사- 미 연합감리교회의 사이트 www.gbod.org/site 일부 참조)
설교 함께 구성하기
이번 주 설교에 포함될 다음의 내용들을 숙고하라.
▶ 물 - 세례와 홍수
▶ 물과 언약(계약)
▶ 언약의 상징 - 무지개와 세례
▶ 광야와 시험
묵상에 대한 질문
1. 광야와 직면하는 것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의 전통적인 테마이다. 우리는 “광야”에 대한 증거를 구약성경과 신약의 서신에서 찾을 수 있는가?
2. 사순절기간의 상황에서 베드로전서의 다음 구절을 설명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b, NRSV 참조)
3. 여러 복음서 저자들이 언급(마 3:17, 눅 3:22)하고 있는 바, 마가복음 1장 11절의 하늘에서 들린 음성의 상징성을 묵상하라.
설교구상
창세기 9장 8-17절, 무조건적인 약속.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순절의 시작은 얼마나 이치에 알맞고 분별력 있는 행위들인가! 기이하게도 우리 인간존재가 저지르는 죄악의 문제는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았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게(9절) 축복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선한 행위에 대한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성품에 기인한 축복이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약속에 대해 설교할 때 설교자는 반드시 청중들에게 이 한 가지를 명심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 어떤 것을 간구하던 간에” 무조건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고 응답해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성취하는 자로서 그러하다.
마가복음 1장 9-15절, 웬만해서는 그 길을 갈 수 없다.
당신은 이 목적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가, 또는 상기의 말씀을 사역에 임하는 언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결단했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당신은 어지간해서는 그 길을 갈 수 없다.” 이번주일의 복음서 말씀은 예수의 공생애여정이 세례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는 광야로 인도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어쩔 수 없는 공적인 사역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 생애의 첫 장면에 대한 이 같은 소묘가 우리들 중에 많은 이들이 겪는 불안정하고 당황하여 쩔쩔매는 사역의 실재하는 기초 - 회오리바람처럼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사역에 미처 들어가기도 전에 가혹한 광야시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 라고 다소 과장되게 암시받는 것만 같아 망설이게 된다. 우리 개개인 대부분은 예수의 증인된 사역에 임하여서 저마다 실제적인 신앙적 간증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적은 소수의 무리만이 영광된 소명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일련의 사건에 의해서 철저하게 소명자로 규정되어지는 생애 속으로 직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역 속에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너무 많다고 해서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그 장애물들은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선한 특성과 신앙을 세우기 위하여 필요한 건축재료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에 의해서 40일간 시험을 받으신 마지막까지 예수께서는 분노나 비탄을 쏟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파하는 환경을 일정 시간 갖지 못했다.
다시 새롭게 되는 과정.
예수의 메시지의 요점은 아주 단순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에 있다. 회개하라, 그리고 이 복된 소식을 믿으라(15절). 예수의 죽음 이후에 우리는 그의 제자로서 이 복된 소식(마 28장)을 나누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을 받았다. 초대기독교는 6주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사순절 기간을 하나의 새로운 회심을 위한 교육과정을 완성하는 시간으로 사용했다. 세례와 더불어 맨 처음 갖는 신앙고백은 거의 사순절기간 내내 유지된다. 6주간의 사순절 기간은 기존의 신자들이나 또는 신앙공동체의 새로운 가족들 모두에게 하나의 작은 “새로운 신선한 신앙과정”의 영적인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 과정을 따라 묻게 되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이 기간에 우리는 얼마나 신실하고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 세례와 회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베푸는 복된 소식은 어떤 것인가?”
랍비주석
(영월군 흥월교회 이익상 전도사)
무지개(창세기 9:8-17)
1. 참 아름다운 무지개는 언제 창조되었을까요? 성경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연구하는 유대교의 학생들의 질문들은 참 엉뚱하기도 하고 기발하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랍비 이븐 에즈라는 노아의 홍수 때에 노아에게 징표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무지개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창조 이후 노아의 시대에 다시 세상을 새롭게 하시면서 무지개를 창조하셨다고 생각한 이븐 에즈라는 노아의 시대를 재창조에 버금가는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2.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교 랍비들은 이런 이브 에즈라의 성서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때에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노아의 시대에 또 창조하셨다는 것은 성서에 근거해도 맞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함에도 어울리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창조의 때에 비와 바람이 있었으니, 자연 현상인 무지개도 당연히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무지개를 언약의 징표로 사용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3. 랍비들은 무지개가 예측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무지개가 자연 현상의 일부라고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라고 부를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랍비들이 예를 드는 것은 '월삭' 또는 '초하루' (히. 호데쉬)입니다 참조. 민 10:10; 대상 23:31). 호데쉬는 '새 달' new moon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그 날을 하나님께 제의를 드리는 날로 지정하셨는데요 (민 10:10; 28:14), 그믐에 달이 이지러지고 달이 전혀 보이지않은 완전한 어두움을 헤치고 이제 손톱 끝의 때만큼 작게보이기 시작하는 그 '새 달'! 유대인들은 그 새 달이 '갱신의 힘'을 상징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 역시 천문학의 도움으로 누구나 계산할 수 있는 자연 현상 중의 하나이지요. 달력이라는 것이 생겨난 이래로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 되어버린 호데쉬를 특별히 거룩한 날이라고 지정해 놓고 예배를 드려야할 이유가 무엇있냐고 물을 수 없다는 겁니다.
4. 하나님은 그분이 직접 창조하신 세계의 자연 현상을 이용하셔서 자신의 언약을 다시금 되새기도록 하셨다는 것이 랍비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법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계시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중세의 랍비들의 성서이해의 수준이 참 대단하지요?
설교 예화
1) 어떤 부인 성도의 믿음
‘미어즈 성경핸드북’에 나오는 한 토막의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이리 뛰고 저리 피하고 야단법석이었는데, 나이 많은 한 부인성도는 자기 집에 조용히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지진이 끝난 후, 사람들은 그 노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소동 속에서도 의자에 기쁜 얼굴로 앉아 계실 수가 있습니까?” 부인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그토록 흔드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생각과, 그러는 가운데서도 나를 그의 손안에 안전하게 붙들어 주신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잠겨 무서워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2) 남강 이승훈
요즘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그립다. 그는 젊은 시절에 성실하게 일해서 거부가 되었다. 가난할 때에도 비굴하지 않았던 선생은, 거부가 된 후에도 돈 냄새 풍기며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일본이 한반도에 침략의 먹구름을 드리울 때, 남강 선생은 나라를 지키며 살리기 위해 사재를 털어 1907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인한 비통함 속에서 지내다가, 평양의 한 교회에서 예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는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초월하는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이 자신을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오산교회를 개척하고, 신앙으로 불의와 맞서게 된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지도자들을 모아 3·1운동을 주도했다. 정치권의 대립과 경제적 난국을 해쳐나갈 리더십,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에 감동받은 탁월한 리더십이 그립다.
3) 최근 이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은 몇 명?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고 싶어 합니다.
오래 전에 어떤 방문객들이 이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안내자는, 방문객에게 사원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과, 무덤에 묻혀 있는 찬란한 영웅들의 삶의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고, 현재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 지도 알려주었습니다.
안내자는, 모든 설명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방문객들에게 더 궁금한 것이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아이오아 주에서 온 한 여신도가 안내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관해서 여러 가지 내용을 자세히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이 뜻밖의 질문에, 답을 준비하지 못한 안내자는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 다 어머니의 은혜입니다.
미국의 20대 대통령이었던 가필드의 취임식 날이었습니다. 취임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통령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었으나 대통령은 취임식장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대통령의 행동에 불쾌함을 표하기도 하였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대통령이 한 노인을 부축하며 함께 취임식장으로 들어섰습니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였습니다. 고령인 어머니가 취임식장에 가지 않겠다고 하자, 끝까지 설득해서 모시고 오느라 늦었던 것입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어머니의 은혜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오늘날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5) 모범적인 순종
매우 거칠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남자와 결혼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오늘 이 옷들을 전부 세탁해서 다려 놔”, “매일 내가 퇴근하자마자 저녁을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둬” 등 수많은 요구로 그녀를 힘들게 했다. 아내는 남편의 요구를 들어줬지만, 그런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자신의 삶을 증오했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 동안 그렇게 비참한 결혼 생활을 참아 냈다. 그리고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그러나 2년 뒤, 그녀는 아주 친절한 사람을 만나 재혼했다. 두 번째 남편은 자신의 요구대로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사랑해 주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어느 날, 그녀는 집안 청소를 하다가 전 남편의 요구 사항들이 적힌 쪽지를 발견하고, 그 내용들을 다시 읽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요구들은 모두 그녀가 지금의 남편을 위해 하는 일들이었고, 오히려 그녀는 지금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의무감으로 일했지만, 지금은 즐겁게 일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모범적인 순종은 강요나 협박을 받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속 열망에 반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참된 순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성품을 가지고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토니 에반스
제목 : 그들도 순종하기를 참고 기다리셨다
성경 ; 창9:8-19, 벧전3:18-22, 막1:9-15
(학운교회 정수환목사)
성질이 아주 거칠고 난폭할 뿐만 아니라,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남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도 결혼은 어떻게 했는데, 문제는 그 남자와 결혼한 여자였습니다. 남자가 이것저것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자기 비위만 맞춰달라고 하니, 여자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옷들을 전부 세탁해서 다려 놔라! 퇴근하자마자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두어라!’등, 남자는 그야말로 수많은 요구를 함으로써 아내를 힘들게 했습니다. 아내는 할 수 없이 남편의 요구를 일일이 다 들어줘야 했습니다.
그녀는 그런 남자와 같이 살아야 하는 자신의 삶을 증오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 동안 그렇게 비참한 결혼 생활을 참아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2년 뒤, 그녀는 아주 친절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재혼을 했습니다. 두 번째 남편은 자기 요구대로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번 남자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주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집안 청소를 하다가 전 남편의 요구 사항들이 적힌 쪽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을 다시 읽어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요구들은 모두 지금의 남편을 위해서 하고 있는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녀는 이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에는 싫어도 억지로 해야 했지만, 이제는 즐겁게 일한다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순종은, 마지못해 억지로 해야 하는 복종이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린 예화에 등장하는 그 여자가 전남편에게는 순종이 아닌 복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 남편에게는, 그가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미리 알아서 그를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순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기꺼이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어째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노아를 심히 괴롭혀주기 위해서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장차 큰 홍수가 나게 해서 인류를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고 의롭게 살던 노아만은 살려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6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7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상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을 비롯해서 짐승과 땅에 기어 다니는 생물과 공중의 새까지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만든 것이 정말 후회가 되는구나!’하고 탄식하셨습니다. 하지만, 노아만은 하나님 마음에 들게끔 살았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을 보면, 노아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무척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보다 더 깨끗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하나님과 늘 함께 살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만은 살려두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는데, 그 배를 만드는 기간이 적어도 수십 년이 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기간이 120년이라고도 하지만, 그다지 확실치 않은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노아는 오랜 세월을 거쳐서 배를 만드는 일에만 전념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밤낮없이 배만 만들고 있는 노아를 향해서 아주 심한 말로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런 말에 별로 상관치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을 보면,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순종다.’고 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배를 다 만들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식솔들을 거느리고 배 안으로 들어가거라. 이 세상에서 오직 너만이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내가 분명히 알게 되었다(창7:1)”
이처럼 노아는, 하나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류를 멸하는 대홍수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노아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정확하게 1994년도에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곳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느라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부인만은 자기 집에 조용히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진이 끝난 후에 사람들은 그 부인에게 “아니 어떻게 그런 소동 속에서도 의자에 태연하게 앉아 계실 수 있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나는 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그토록 흔드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도 나를 그의 손안에 안전하게 붙들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이나 걱정이 없었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부인에게는 아무리 심한 환난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그런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평소에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믿음생활을 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그는 믿음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큰 지진 가운데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가게 하시려고, 오늘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큰 환난과 풍파가 있을지라도 크게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미리 믿음의 훈련을 시키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믿음의 훈련에도 기꺼이 동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환난이나 시련을 당했을 때에라도 그 모든 것을 능히 잘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여 특별기도회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큰 문제가 있어서 특별 기도회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각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당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특별기도회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당하신 그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그 구원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는지, 그 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미리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사고를 대비해서 보험에 들거나,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서 미리 저축해두는 것처럼,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고난을 대비해서 미리 기도해두자는 것입니다.
시련이 닥쳤을 때에, 평소에 늘 기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기도하면서 사는 사람은 어려운 일이 생겨도 크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일을 잘 처리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주 작은 시련 앞에서도 쉽게 좌절하거나 시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훈련은 열심히 동참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믿음의 훈련에는 열심히 동참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흥사경회나 성경통독을 비롯해서 특별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은,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비도 오지 않는데 무슨 방주냐고 하면서 조롱하고 비웃었지만, 홍수 때에 살아남은 것은 오직 노아의 가족 여덟 식구뿐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노아가 배를 만드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도 순종하기를 참고 기다리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서운 홍수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의 가족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가족들은 믿음이 좋은 노아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었던 사울의 가족들은, 사울이 그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불순종하는 바람에, 그 모든 사람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1.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가능한 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곧이어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요컨대, 주님께서 고난당하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얻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끝내 고난을 피하셨더라면, 오늘 우리는 여전히 죄와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만, 우리 가족이 구원을 받습니다. 부모 된 우리가 힘들고 지쳐도 열심히 기도해야, 우리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십자가를 열심히 감당할 때, 우리나라가 지금 겪고 있는 경제적인 시련을 잘 이겨내고 계속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느 정도 살게 된 것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졌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믿음을 지켜 사신 분들 중에 남강 이승훈 선생이 있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젊은 시절 성실하게 일해서 아주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난할 때에도 결코 비굴하지 않았던 선생은, 거부가 된 후에도 돈 냄새를 풍기거나 거들먹거리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이고 있을 때, 남강 선생은 나라를 지키며 다시 살리는 길은 교육이라 생각하고, 그의 사재를 털어서 평북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던 것입니다. 그는 1910년 한일병탄으로 말미암아 비통함 속에서 지내다가 평양의 한 교회에서 예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민족주의를 초월하는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만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오산교회를 개척하고 신앙으로 불의의 세력과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민족지도자들을 모아 3·1운동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삼일운동은 남강 이승훈 선생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이어받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했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완용처럼 자기 혼자만 살겠다는 사람들만 있었으면, 과연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었을까요?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모든 사람이 자기 안일과 평안만을 추구했더라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2.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마음에 들도록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그 사람 자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을 시키는 사람도 힘듭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면, 그 사람 자신은 물론이요,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즐겁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들게 살 경우, 우선 우리 자신부터 큰 유익이 되고,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도 유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전 인류가 멸망하는 대 홍수 속에서 그의 나머지 가족 일곱 식구도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를 믿는 자는 그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아주 적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 우리 가족은 물론이요, 우리의 친구와 이웃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기쁘게 감당할 때에,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이름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인생만 추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에게도 불명예와 수치를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사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믿음생활을 대충 아무렇게나 할 경우, 자녀들도 그대로 본받아 살게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대충 아무렇게나 사는 자녀들의 모습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진정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 마음에 들도록 살기를 원한다면, 우선 우리 자신부터 먼저 하나님 마음에 들도록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세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와 죄에서 깨끗해지기를 주님께 간구하고 그렇게 살기를 그분에게 약속드리는 것이다(3:21)’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면, 이제는 과거의 잘못된 인생을 깨끗하게 청산하고, 이후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겠노라 굳게 다짐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물세례는 평생 한 번만 받으면 되지만, 성령세례는 수없이 계속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욕심을 성령의 불로 태워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거니와, 그 결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생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국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방문하게 된다고 합니다. 오래 전에 한 무리의 방문객이 이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방문했습니다. 안내자는 방문객에게 사원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과 무덤에 묻혀 있는 찬란한 영웅들의 삶의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고, 현재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전해주었습니다. 안내자는 설명을 끝내고 방문객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봐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때, 미국인 하나가 “안내자께서 사원에 관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뜻밖의 질문에, 답을 준비하지 못한 안내자는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해야 하지, 이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존재하면 안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을 구원의 방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함으로써 주님 마음에 들도록 살아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게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랑하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아처럼 순종하게 될 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죽음의 길이 아닌 생명을 가도록 합시다. 생명의 길은 말씀순종을 통하여 십자가를 질 때에 갈 수 있는 길이고, 죽음의 길은 육신의 평안을 위하거나 즐겁게 살고자 할 때에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 주님이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