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출신의 프랑스에서 활동한 20세기 대표적 입체파(큐비즘 화가)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 ~ 1973, Pablo Picasso)"가 1907년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The girls of Avignon)". 이 그림은 아비뇽 매춘업소에서 5명의 여인을 그린 그림으로 신체를 아주 왜곡해서 그린 그림이다. 입체파 답게 원근법과 명암법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두 여인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피카소가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소묘를 가르치던 교사였던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일찍이 뛰어난 소묘 실력을 발휘했다. 이후 마드리드에서 미술을 배우며 염증을 느끼다가 카페와 사창가를 배회하고 프라도 미술관을 찾아가 그림을 감상했는데, 이 시기가 평생 작품의 원동력이 됐다. 파리를 여행하며 색채에 관해 눈을 떴고, 파리로의 영구 이주를 결심하며 급진적인 화풍의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1937년 그린 "게르니카"는 독재자 프랑코의 요청으로 독일의 전투기들이 인구 7,000명의 스페인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하여 1,654명이 죽고 889명이 부상을 당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가 프랑코의 잔인한 만행을 그림으로 남겨 고발하고자 하였다. 큐비즘은 조선시대 민화에서 볼 수 있는데 민화는 복을 기원하거나 악귀를 물리치는 목적으로 구입했으며 "민화는 여러 시점에서 본 모습을 한꺼번에 그렸는데, 예를 들어 호랑이 얼굴을 그리는데 눈은 앞에서 본 모습으로 그리고, 이빨은 옆에서 본 모습을 그리는 식이다". 어쩌면 입체파 서양 화가들이 조선시대 우리 민화를 참고해서 만든 화법일 수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스페인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혼란의 시기를 맞이한다. "붉은 스페인"이라 불리는 혁명세력과 "검은 스페인"이라 불리는 왕정 지지세력이 대립하자 알폰소 3세는 로마로 도피하고 스페인 공화국이 탄생한다. 하지만 공화국을 지키려는 인민 전선과 공화국을 반대하는 국민당 간 내전이 발발한다. 결국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당이 승리하지만 무려 50만명이 사망하였다. 스페인 내전과 관련한 작품으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파블로 피카소의 판화 "프랑코의 꿈과 거짓", 벽화 "게르니카"가 있다. 프랑코는 독재자로 이름을 날렸는데 권좌에 있는 동안 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피카소와 마티스를 들 수 있는데 마티스가 그린 "춤"을 보고 르누아르는 "너는 색채의 언어로 말하는구나"라고 평가했다.
"파블로 피카소"가 1903년 그린 "늙은 기타리스트(The old blind guitarist)".
"파블로 피카소"가 1905년 그린 "서커스단의 어릿광대(Acrobat and young harlequin)".
"파블로 피카소"가 1913년 그린 "안락의자에 앉은 여자(Woman with a shirt sitting in a chair)".
"파블로 피카소"가 1937년 그린 "울고 있는 여인". 이 그림은 피카소가 사랑했던 여인으로 사진작가 "도라 마르"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피카소와 함께 살기도 했던 그녀는 어느 날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매우 슬프게 울었다. 피카소는 도라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이렇게 그림으로 남겼다. 왼손에는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성모마리아의 울고 있는 모습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파블로 피카소"가 1938년 그린 "인형을 든 마야(Portrait of Maya with her doll)". 이 그림은 피카소의 세살 난 딸 마야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여러 각도에서 본 사람의 모습을 한꺼번에 표현한 화가를 입체파라고 하듯이, 이 그림 역시 입체파 화풍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파블로 피카소"가 1901년 그린 "스무살의 자화상(Self-Portrait)".
"파블로 피카소"의 1937년 작품 "게르니카". 1936년 7월, 스페인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약 3년에 걸친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 주변 다른 나라들도 각기 다른 편을 들면서 내전에 참가했다. 미국, 멕시코, 소련 등은 공화파를 지지했고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 등은 왕당파를 지지했다. 결국 1939년에 군부가 이끄는 왕당파가 승리하면서 군대의 수장인 프랑코(Francisco Franco)가 집권을 하게 된다. 내전이 발발한 이듬해인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30분경, 바스코 지방의 한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에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독일 히틀러가 프랑코를 돕기 위해 최신 기종의 전투기를 보내서 엄청난 양의 폭탄을 무차별 투하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게르니카는 이틀 내내 불탔고 1,5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당시 56세였던 파블로 피카소는 게르니카가 독일 전투기에 폭격 당했다는 뉴스를 들은 뒤 분노에 차서 이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블로 피카소"의 1952년 작품 "한국에서의 대학살". 이 그림은 1950년 발발한 6.25전쟁(한국전쟁)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된 것을 비판한 그림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1955년 작품 "알제의 여인들". 이 그림은 1834년 들라크루아가 그린 "알제의 여인들"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경매시장에서 1억 7천만 달러에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