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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 9496 ♧ 이름: 김영배 ( 남 ) ♧ 2012/9/14(금) 01:53 (MSIE9.0,WindowsNT6.1,Trident/5.0) 111.118.36.222 1366x768 ♧ 조회: 379 | |
둥둥둥 북소리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어제는 노량진에 안치되어있는 死六臣 묘소를 찾아뵈었다.(자정이 넘었으니 그제) 入隊前,고향인 청파동에서 걷기 시작해 삼각지 상명여고앞을 지나면 바로 한강다리 이고,한강다리만 건너면 사육신 墓所가 바로 우측에 있건만 여지껒 한번도 못 가 봤습니다.어제 오후에 동작역에서 9호선을 환승,노량진역에 내려 묘소로 향했습니다.
5년전에 쓴 글 입니다.(사진에 있는 날자 참조) 여기가 묘소 정문 입니다.이제는 공원으로 인근의 주민들이 산책로로 많이 이용한답니다. 묘소 내부가 상당히 넓고 관리 사무실도 있고 정자도 있어서 쉴곳도 많지만,저는 바로 묘소로 향했습니다. 사육신의 신위가 모셔진 사당.사육신이니까 여섯개의 위폐가 있어야 하는데 일곱개가 있어서 의아히 생각 했습니다.말하자면 死六臣이 아니고 死七臣이라고 하는데...
신라의 30대 문무왕께서 생전에 유언을 하시길, "내가 죽으면 나의 시신을 바다에 묻어라! 내가 죽어서도 왜구들의 침입을 막으리라!" 그래서 바닷속에 묻히셨는데...그일을..우리 후손들이 믿지를 않고 "가짜다!"그렇게 우기는 무리들이 많답니다. 그래서 결국은 파헤쳐 확인을 하고서 믿었답니다.
한글도 세종대왕이 단기 3779년(서기 1446년)에 집현전에서 반포 했다고 배웠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건 사실이 아니다"그렇게 우기고 있습니다. 하여튼 우리 시대엔 우리 조상들이 한 것을 믿지않고 자기가 가장 위대한양 우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우리의 조상들이 한 일을...특이나 위대한 한 조상들의 일은 더욱 믿지를 않고 있으니 답답한 일 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先代의 역사를 마구 바꿉니다.
그러니까 이곳에 우리가 배운대로 사육신이 있는게 아니라 1명이 더 있다는 생소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사육신의 관한 것만 배워서 그것만 알므로 사육신에 관해서만 쓰겠습니다. (여기 사당 우측으로 돌아가면 묘소로 가는 쪽문이 있습니다.) 사육신이 모셔진 공원안에는 깨끗이 정돈되어있고 공기도 맑습니다. 祠堂 마당에 있는 고얌나무.오랫만에 보는 고얌나무가 두그루 있습니다. 사당 뒷쪽에서 묘소 가는 쪽문.묘소가는 길목은 여기 뿐 입니다. 맨 좌측에 하위지 之墓가 있습니다.세설실록에 있는 그의 마지막 詩를 적어 보겠습니다
殘躬一死 何須說(잔궁일사 하수설)시든 몸 죽은 들 무슨 말 하겠는가! 痛哭當年 帝在林(통곡당년 제재림)통곡하던 그 때 임금은 영월 숲속에 쫒기어 있네.
하위지의 처자가 일선(선산)에 있었는 데 금부도사가 왔다.두 아들이 있으니 장자는 호, 차자는 박 이다.아직 미장가인 두아들은 금부도사의 호령에도 두려운 빛이 없이, "원컨대 조금만 늦춰 주시오.어머니에게 告할 말이 있소." 금부도사가 허락하니 어머니께 다가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아버지가 죽으니 자식이 어찌 살겠습니까.우리 九族중에 남자는 다 죽어도 여자는 삽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장차 출가할 나이가 되었으니 비록 종이 되더라도 마땅히 한 사람을 섬길 것이며.개나 도야지 같은 행실은 말아야 합니다." 엎드려 절하고 일어서자 번쩍이는 금부도사의 칼날아래 죽었다. 사람들이, "과연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성삼문 之墓로서 우리가 어릴 때 가장 슬프디 슬픈 사연을 많이 남긴 사람이다. 태종 18년(이방원)에 외가에서 태여날제 하늘에서"낳는냐?"라는 소리가 세번 들렸기에 三門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 도총관 성승과 아우 세명. 아들 다섯.돌이 안된 조카 까지 대문 안에서 모두 죽었다. "말머리 두둘기며 그르다고 말 한 것은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같이 빛났건만 초목도 周나라 비 이슬에 자랐는데 부끄럽다 그대 어찌 고사리는 먹었는고(백이 숙제를 빗대어 쓴 말이다.)"
그의 충절은 단가에도 담겨있다. -----------------------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 할제독야청청 하리라
세조(수양대군)가 친국하니,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도적질하여 빼앗으니 본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다. 세조를 보고 계속 나으리라고 칭하자,노한 세조의 命으로 달구어진 쇠가 다리 벼를 뚫을 때, 눈하나 깜짝이지 않고 신숙주를 향해, "영릉(세종)의 말씀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는데 너는 잊었느냐? 너의 간악함이 이럴줄 몰랐다.!"
수레에 실려 노량진으로 가는데,다섯살 된 그의 딸이 울며 따라 오자,눈길을 마주하며, "너는 딸이니 살 것이다." 말하며 三從之義를 말하였다.
하인이 울며 따라주는 술을 구부려 마시곤 마지막 詩를 읊었다.
"북소리 사람목숨 재촉하는데 머리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머나먼 황천길 주막도 없으려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제워줄꼬" 유성원의 之墓이다.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터니 문전에 수성어적(數聲漁笛)이 잠든 나를깨워라"
성균관에 있다가 성삼문 등의 동지들이 붙잡혀 갔다는 말을듣고 칼로 목을 찔렀을 때, 금부도사들이 달려와 묶어서 칼로 목울 쳐 죽였다. 그자리에서 아들 둘도 목을 쳐 죽였다. 이개(李塏)之墓이다. 목은 이색의 증손이다.본시 몸이 약하고 여윈 몸인데 불지짐을 당하면서도,
태연히 詩한수를 읊는데, ------------------ 까마귀 눈비 맞이 희난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연속해서 詩를 지었는데,)
우정중시 생역대(禹鼎重時 生亦大):우정 무거울 젠 삶도 또한 크더니만 홍모경처 사유영(鴻毛輕處 死有榮):홍모 가벼운 데선 죽음도려 빛나더라 명발부침 출문거(明發不寢?出門去):날 밝도록 잠 못 들고 성문을 나서니 현릉송백 몽중청(顯陵松柏 夢中靑):현릉의 솔 잣나무 꿈속에도 푸르더라 현릉:문종의 능 유응부 之墓이다. 키가 크고 용모가 엄장 하였으며 목소리는 큼 종이 울리는듯 하였다. 그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 할 때, 집안에 해어진 거적자리 두개중 하나만 거두어갔다.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고 양식도 떨어졌다. 아들은 없고 딸이 둘 있었다.
형을 당하러 갈제 읊은 시 이다. -----------------------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지단 말가 둥둥둥 북소리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 하리오
(어제 벌초 하느라고 묘소에 일꾼이 많다.) 박팽년의 之墓이다.
아버지인 판서 박중림과 아우 네명, 아들 넷과 어린 식솔 여럿이서 한꺼번에 집 바당에서 죽었다. 김질이 세조의 命으로 술과 안주룰 가지고 가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부르던 노래를 읊으니 박팽년이 단가를 지어 노랠 불렀다.
"금생여수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라 한들 임마다 좇을소냐"
현재 필동의 한국의집이 박팽년의 집이고 여운형이 살았었다. 지금도 커다란 소나무가 있어 "六臣松"이라 부른다.
위에 여섯명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되자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다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간 단종의 복위를 꾀하자.그들의 가족인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위에 소개한데로 그들 여섯의 충신을 死六臣이라고 하고.
숙종조에 이르러 함안 백의산에 서산 서원을 세우고, 이맹전.조여. 원호. 김시습.성담수 남효온을 배향 했으니 그들 여섯명을 生六臣 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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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잘 설명하셨군요...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