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서부 한일시민평화기행과 교류회
한일100년평화시민네트워크가 추진한 5회 한일시민평화기행인, 2010년 7월 22-26일 일본 중부(시마네 히로시마 돗토리)와 강원도를 돌아본 내용을 소개한다.
7월 22일, 아침 일찍 일어나 제기동역에서 정호진 박미향 부부와 함께 승용차로 강릉으로 향했다. 오후 1시경 강릉한살림에 도착하니 목영주이사장과 장석근목사님이 기다리신다. 함께 곰치국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동해로 향했다. 동해시청 4층에 있는 동해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실에서 박남순운영위원장과 장석하사무국장을 만나 시마네 돗토리를 포함한 한일 시민교류를 위한 의논을 했다. 공감하는 분위기에서 10월 초순경이 좋을 것이라는 정도의 의견접근을 보았다.
다시 장석근목사님의 승합차로 동해국제여객터미널로 이동했는데 신재일 안우선부부 정선애 선생이 와 있다. 환전을 위한 현금을 인출할 수가 없어 다시 차를 타고 밖으로 나와 농협을 찾으니 4시가 넘었다고 은행문이 닫혔고 바로 옆 편의점에서 비싼 수수료를 내고 인출을 해야 했다. 다시 터미널내 환정소는 문이 닫힌 상태라 사설 환전상을 찾으니 수수료가 너무 비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7명이 수속을 마치고 배에 오르니 오붓한 시간이다. 갑판 위로 올라가 석양과 바다 풍경에 취해 보는 시간도 가졌다. 4인실 방에서 가져간 빔프로젝트로 그동안의 일본 평화기행 관련 영상자료를 보며 준비모임을 겸한 학습시간을 가졌다. 이어서 소개와 친교시간을 가지다 잠자리에 들었다.
7월 23일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아침 해를 맞으니 상쾌한 기분이다. 수속을 마치고 터미널로 나오니 와타나베 미치 선생과 노카 님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차를 나누어 타고 운난시로 향했다. 이즈모시 공무원이기도 에쓰미 히데토씨는 일제 말기 전쟁수행을 위해 운난시에 댐건설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징용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많은 고통과 희생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발전소인 기타하라(北原)발전소의 특성상 지하 터널 수로를 만들어야 했기에 더욱 힘들고 어려웠다고 했다. 운난시에서는 모두 6개의 댐이 건설되었는데 어떤 것은 농지 지하를 뚫기도 했단다. 1944년 사망한 강숙이씨의 묘지가 있는 만복사라는 사찰 언덕을 방문하여 함께 헌화하고 막걸리 한잔을 붓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거창군 고이면에 있는 강숙이씨의 넷째 아들 김시출씨를 찾아 증언을 채록하였다고 했다. ‘일본 한국의 시민우호와 지역의 국제화를 생각하는 회’(대표 에쓰미 헤데토. 시마네현 공무원)은 2008년 11월에 ‘아시아태평양 전쟁기의 시마네현 운난지방에서의 한국조선인의 생활기록’ 이라는 조사기록집을 발간하였다. 전달받은 이 자료집에는 근대 일본과 조선의 역사 그리고 시마네현 한국조선인의 역사 2차대전전 운난지방의 근대화와 한국조선인의 역사 그리고 8명의 증언과 김시출씨를 방문했던 기록이 실려 있었다. 이 자료집에서 에쓰미 대표는 10년에 걸쳐 조금씩 자료를 수집해 왔으며 한일수교 40주년을 기념하여 2005년 현재의 명칭으로 단체로 전환하면서 집중적으로 지역에서 자료 조사 활동을 했다고 밝혔다. 자료집에 따르면 이미 다이쇼시대에 수백명의 조선인이 와서 살았고 쇼와시대에는 1천명이 넘었고 매년 늘어났다고 했다. 특히 태평양전쟁시기에 전력이 필요해 발전소를 건설해야 했고 일본의 젋은이들은 전쟁에 동원되어 인력이 부족하게 되자 조선으로부터 많은 노동자가 강제동원되었다고 밝혀두고 있다. 이러한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강숙이씨의 유골을 찾아 추모식을 갖게 되었다고 했고 이 추도식에는 거창YMCA 히로시마 영사관등에서 참석했음이 신문기사로 남아 있었다. 이렇듯 역사인식 공유를 통해 교류를 준비해 왔던 것이라 판단되었다. 그런 점에서 특정지역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면서 성실한 준비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에쓰미 히데토 대표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일정을 마무리하고서 전통적인 일본식 집에서 운영되는 유기농 식당(食の社)을 방문하였다. 댐 공사로 수몰되던 상황에서 언덕에 집을 옮겨 지은 것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아버지가 중국침략전쟁에 동원되었다가 전사했는데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운데 총포가 우엉이라면 좋겠다는 등 농사를 짓는 것이 더 좋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 그 내용을 다나까씨 남매가 마당의 커다란 돌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새겼다고 했다. 그 분들의 삶이 오롯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자립적인 지역공동체를 지향하는데 유기농 농사를 짓는 무로야마농원과 두부공장 빵 공장도 운영한다고 한다. 마이니치 신문기자도 취재차 왔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배달까지 해온 푸짐한 회와 함께 맛난 식사를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기념 사진도 찍으면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리고 오쿠이즈모포도원(와이너리)를 방문했는데 아주 잘 꾸며져 있고 레스토랑을 겸하면서 지하에는 저장고와 더불어 그림 전시장이 있는데 압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말심리치료를 하는 곳도 방문했다. 청소년들의 심리 치료를 위해 말과 교감하는 방식을 택한 것인데 생소하기 했지만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운난시청에 도착해 통역을 하느라 수고하신 허경란씨(운난시청 국제교류원으로 근무중)와 아쉬운 작별을 한 후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잠시 신지코 호수에 들렀고 수변공간을 거닐다 만난 시마네현립미술관은 외부에서 둘러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석양이 유명한데 교류회 시간 때문에 아쉬웠다.
오후 6시 반부터 마쓰에 시민활동센터 5층에서 교류회가 진행되었다. 30명 정도 참석한 자리에서 일한시민우호회 평화포럼시마네 평화어필실행위 등 3개 단체가 협력해서 모인 것으로 와타나베상과 에쓰미상이 진행하면서 2시간 반 정도 진행되었고 식당을 운영하는 재일동포 노성호씨가 통역수고를 해 주었다. 3개 단체가 돌아가며 인사를 겸한 활동을 소개 했는데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과거사를 반성하고 미래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한일 시민간의 활동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포럼 대표는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인정과 과거 청산과 배상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등의 대 정부 청원요구 서명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쓰에시의회의 하나오 고우세이시의원도 참석했는데 그는 외국인 참정권을 추진하는데 자민당 의원의 반대로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전직 및 현직 현청 소속 공무원도 함께 했다. 전현직 공무원들은 시마네현이 경북과 교류를 중단하게 된 것은 아쉽다고 하면서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고 했다. 9시경 마치고 와타나베상의 집으로 향했다. 30분 정도 거리의 농촌지역인데 게스트하우스로서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친구들이 함께 와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고 우리는 밤 늦도록 즐거운 교류 시간을 가졌다. 조만간 한국을 방문하게 될 친구 나카오씨도 소개해 주었고 서울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한계점도 제기했고 때문에 토론과 즐거운 대화가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24일 아침 7시를 조금 지나 와타나베상의 딸이 운전해 준 승합차로 가까운 이치바타구치역에 도착해 표를 끊고 기차를 타고 이즈모 신사로 향했다. 1년에 한번 모든 신들이 모인다는 이즈모 신사와 시마네현립 고대역사박물관을 돌아보았다. 고대사를 잘 정리해 두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들의 역사를 정리해 두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다시 기차를 타고 이즈모역으로 가서 택시를 타고 승합 렌트카를 타고 히로시마로 향했다. 정호진 목사께서 운전을 잘 하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었고 중간에 나도 운전을 했다. 오후 3시 경 히로시마 원폭 공원에서 히로시마교조 평화교육연구소의 이승훈연구원을 만났고 이어서 오카다 선생 부부와 히로시마의 사카오상도 만났다. 간단한 인사와 평화자료관을 방문해 설명을 들었고 이어서 원폭평화공원을 함께 다니면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히로시마는 철도교통의 요지이면서 일본 전체 군인과 군수품이 집결했던 군사중심지 였기에 원폭투하 대상이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은 후 우리는 요시오카상이 미리 예약해 준 원폭평화공원 근처의 레이노인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1인당 4천엔 정도인데 한 방에 16개의 침대가 2층으로 놓인 상태여서 조금 불편하게 느끼기도 했지만 샤워장도 있고 해서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다. 차로 이동해 모임 장소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교류시간을 가졌다. 히로시마교조 등 관련 단체가 각 층 사무실을 모두 사용하고 있는 빌딩이어서 부러움이 들었다. 히로시마의료협동조합 부설 히로시마공립병원의 지역연대과의 사이또 마사에과장, 재일조선인히로시마원폭피해자연락협회 이실근회장, 히로시마 고교의 사회과 교사이면서 미쓰비시에 강제동원되었던 조선노동장의 삶의 추적해 책을 펴내는데 참여한 oooo선생, 나중에 참여한 히로시마 조선학교 교장 등 10명 정도가 참석해 주었는데 서로 소개를 하고 한일 역사 특히 히로시만 원폭투하와 조선인피폭자의 삶에 관한 정리 그리고 미쓰비시에 동원되었던 조선인노동자들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한 책도 소개 받았다. 진지함에 감사 그리고 나중에는 요시오카상이 도착해 함께 인사 하고 몇 사람을 뒷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너무 급하게 연락해 시작된 모임이었지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준 분들 특히 수고해준 이승훈연구원께 감사드렸다. 밤 11시 반까지 대화를 나누고 헤어져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25일 아침 8시에 승합차로 숙소를 출발해 돗토리현 구라요시시로 향했다. 중간에 가벼운 접촉사고로 사이드밀러가 파손되는 일도 발생해 약간 당황하기도 했었다. 고속도로를 달려 낮 12시 반에 청수암에서 기다리던 최경화님을 만났다. 함께 식사를 하고서 엔화 현금을 찾기 위해 여러 은행을 돌았지만 허사였다. 있는 돈을 모아 식사비를 지불하고 결국 백화점까지 가서 시도했지만 허사였고 결국 돈을 빌려야 했다.
일한우호공원은 1819년 강원도 울진 어선이 표류하여 12명의 선원이 도착하자 돗토리번에서 환대하여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준 일을 기념하여 설립된 곳이었는데 1999년 울진군수의 감사 인사와 강원도지사의 인사말도 함께 새겨져 있다. 시간에 쫒겨 한일우호공원밖에 방문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대신 바닷가 오토캠프장이 좋으니 강원도 지역과 공동으로 여름 캠프를 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다시 반복했다.
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기름을 가득 채우고 요나고 공항에 차를 반환하면서 2만엔을 추가부담하고 택시로 항구로 이동했다. 수속을 마치고 이스턴드림호에 승선하니 안도감이 든다. 7명이 침대를 정하고 갑판에서 노을을 지켜보다 선실에 돌아와 평가를 겸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고 정선애선생이 평가기록을 정리하기로 했다.
26일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결국 일출은 보지 못했다. 10시 다 되어 터미널을 나와 신재일 안우선 부부는 먼저 떠나고 남은 5명은 마중나온 박남순 동해지속가능발전협의회 운영위원장의 안내로 까막바위 앞 청호식당에서 아주 맛난 물회로 아침을 먹었다. 3일간의 방문 일정과 교류했던 활동을 설명해 주었고 향후 교류를 위한 준비를 요청했다. 정호진목사의 제안으로 대안학교를 위한 폐교예정인 남호초등학교를 돌아보고 출발해 강릉한살림에 도착해 기다리던 몇 분과 함께 대안학교 관련 정호진목사의 참신한 소개가 있었고 나는 평화기행 이야기와 한일100년평화시민네트워크 및 여행자협동조합 동행을 소개했다. 이어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을 먹고 헤어져 나는 김선완선생의 친절로 경포대 해수욕장에 도착해 수영을 즐기면서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생각하는 상상을 해다가 안양행 고속버스로 돌아왔다. 정호진 박미향 부부와 정선애선생은 목영주이사장의 안내로 부인이 일하시는 생명의 숲을 들러보고 주문진 바닷가에 마련된 숙소에서 하루를 더 묶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