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 대신 '말씀'주는 종교, '고민'만 얹어주는 인문학
가난한 사람들의 곁을 굳건히 지켜주는 건 정부나 일반 기업이 아니예요. 역시 종교단체들이 헌신적으로 그들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거죠. 문제는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워낙 많은 종교들이 경쟁적으로 관심을 갖다보니 때로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다는 거예요.
인문학 강의에 들어오는 김안전 씨(가명, 40대 중반)가 그런 분이었어요. 어려서부터 혼자 살아온 김씨는 소위 '거리의 삶'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었어요. 산전수전 다 겪었던 거죠. 딱히 노숙인이라 부르기도 뭣해요. 잠자리는 그럭저럭 해결하면서 살고 있으니 말이지요.
문제는 생활이 어떠하냐는 거죠.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아요. 김씨의 하루 일과는 한마디로 교회와 노숙인쉼터와 무료배식소를 전전하는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어요. 생기는 것 없고, 벌이가 없어도 늘 바쁘게 지내는 데는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었던 거죠. 김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이래요.
"하나님도 모셔야 하고, 성모님, 예수님도 챙겨야 하거든요. 이따금은 부처님을 찾아뵈어야 할 때도 있고요. 거리의 '도'꾼들에겐 이제 관심 없어요. 제가 그 사람들보다 더 도통한 사람인데요, 뭐."
얼핏 보기엔 자기 몸 하나 챙기기 힘들어보이는 김씨가 왜 그토록 다양한 종교와 신을 챙기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어요. 사실 궁금해 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이유를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김씨가 기회있을 때마다 얼마나 열심히 선교와 포교활동을 하던지, 혹여 옆에 다가가기라도 하는 날엔 여지없이 30분 정도는 그이의 말을 들어주어야만 해요.
안 들으면 그만 아니냐고요? 물론 그렇긴해요. 단, 그 다음주부턴 강의실에서 김씨 얼굴 보기 힘들어질 것을 각오해야 하겠지만 말이에요.
그런 김씨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때가 많아요. '저 분이 교회나 종교단체를 찾은 건 밥이나 잠자리를 얻기 위해서였을 텐데, 너무나 친절한 교회는 저분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구나. 그렇게 받았어도 배도 마음도 넉넉해 보이진 않으니 안쓰러울 밖엔...' 그런 거죠. 밥을 굶어 찾아든 부랑인, 노숙인에게 교회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주려 하는 거예요. 그 귀중한 복음과 영성의 세례를 전하려 하시니 말이에요.
한번은 서울역 광장을 지날때였어요. 마침 무료배식을 하고 있더군요. 길게 늘어선 줄에 행여 아는 얼굴이라도 있을까 싶어 유심히 살피게 되었는데, 마침 줄 맨 앞에서 '밥퍼'봉사에 여념이 없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더군요. 분명 천사의 얼굴이었어요.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김 때문에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모습이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문제는 그 뒤에서 마이크를 잡고 계신 분이었어요. 연신 뭔가를 주문하고 있었어요. 가만 들어보니 성경구절이더군요. 그러려니 했어요.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어요. 식판에 코를 박고 있는 노숙인에게 다가가서는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저 같으면 그렇게는 밥을 못먹을 것 같았어요. 국인지 밥인지 모를 것을 정신없이 입으로 밀어넣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어깨를 짓누르며 기도를 한다?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 밥이 제대로 소화가 될까 염려스러웠어요. 굳이 그럴 것까지 있을까 싶은 게 야속하기도 했고요. 밥 한끼 주는 건 좋지만, 그렇기로 너무 지나치게 생색을 내고 있는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싶었던 거죠.
성프란시스대학 학장인 임영인 신부님 말씀에 따르면 그런 건 별것도 아니라네요. 밥 한끼씩 나눠주곤 한 시간 이상 설교를 하는 목사님도 있다는 거예요. 먹기 전에 주찬양 기도, 성경구절 낭송, 찬송가 제창, 먹고나선 다시 성경구절 강독... 뭐겠어요, 그저 배 고픈 게 죄일 뿐이죠.
영등포역이나 서울역 등에 가면 쉴새없이 '불신지옥, 심판의 날'을 외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경말씀이 든 테이프를 받아가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있고요. 스스로 종교에 심취한 것이라면 누가 뭐라겠어요. 문제는 그런 분 중에도 노숙인 출신이 있다는 거죠. 뭐랄까요. 배고파 찾아간 교회에서 밥 대신 복음만 주는 바람에 배를 채운 대신 머릿속의 생각을 온통 성경말씀으로 채우게 된 것이지요. 올바른 성경이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인 거죠.
그게 어떠냐고요? 한 끼 밥보다 더 소중한 것을 줬으니 더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어요.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종교 얘기로 허송하고 있는 김안전씨의 경우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곤 해요.
혹시 인문학도?
맞아요. 인문학 역시 그와 진배 없기도 해요. 최소한 배를 채워주거나 고민을 해소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오히려 괴롭히는 거죠. 평소엔 그냥 지나치던 것을 왜 그랬냐고 따져 묻는 게 인문학이거든요. 평소 괴로워서 잊고 사는 걸 굳이 기억하게 하는 것도 인문학이고요. '성찰'이라는 거창으로 이름으로 말이에요.
종교든 노숙인인문학이든 누군가의 삶에 개입한다는 측면에선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해요. 긴장해야 하고 겸손해야 하는 이유인 거지요. 누가 감히 우리에게 타인의 삶에 개입할 권리를 주었겠어요. 종교야 신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인문학은 그런 명분조차 없잖아요. 늘 겸손하게 늘 진심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스스로에겐 가혹하게 노숙인에겐 관대하게. 그게 모토여야 하는데 현실에선 간혹 거꾸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 걱정이에요. 자신에겐 관대하고, 상대에겐 가혹하게 대하는 것 말예요. 그러면 안되는 건데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