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공터 순회한 '官製 시네마 천국'…
철 지난 극영화·정부 홍보 영화 상영
1967년 4월 4일 밤 9시 30분쯤 부산의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시민 1000여 명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다가 뒤엉키며 아수라장이 됐다. 주부 1명이 인파에 깔려 숨지고 25명이 다쳤다. 부산시가 주최한 '시민 위안 영화 상영회'에서 시정(市政) 홍보 영화와 극영화를 무료로 관람하고 나오던 사람들이었다. '시민 위안'의 밤은 '시민 참사'의 밤이 됐다. 1950~1970년대에 정부 기관과 지자체 등이 수시로 동네 공터를 순회하며 군중을 모아놓고 영화 상영을 하던 시대의 안타까운 단면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관(官) 주도의 야외 영화 상영은 안전사고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영화에 굶주리던 시절, 산간벽지까지 찾아간 순회 상영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상영 팀이 찾아온 날은 마을 축제일이 됐다. 촌로들까지 10리 길도 마다치 않고 찾아와 공터에 설치된 스크린에 눈을 모았다. 공짜라서도 좋았지만 야외라서 더 설?다. 모두들 밤공기를 얼굴에 쏘이며 영화에 빠져 신산한 세상살이 따위는 잠시 잊었다.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한밤중 흰 담벼락에 영화를 틀어 마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던 명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정부의 영화 상영 팀은 '시네마천국'의 순수한 영사기사 알프레도는 아니었다. 관청의 주된 상영 목적은 시민 계몽과 선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상영회에선 철 지난 극영화도 틀었지만 알맹이는 기생충 예방에서 반공방첩까지, 정책을 알리는 홍보 영화였다. 특히 중요한 필름은 '중단 없는 전진' '자립의 터전' 등 정부를 PR하는 영화들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마다 '시민 위안 상영'의 횟수가 급증한 것만 봐도 행사의 주안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압사 참사가 난 1967년 부산의 영화 상영회가 열린 날도 제6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둔 때였다. 제5대 대선 5개월 전인 1963년 5월엔 정부가 기업들을 찾아가 영화를 틀어주는 출장 상영을 시작했다. 1971년 '4·27 대선' 직전인 3월 29일부터 4월 3일까지 지방 어느 군청에서는 '번영의 메아리'등 홍보 영화를 1305회나 상영해 18만805명에게 관람시켰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971년 4월 16일 자). 일방적 정부 선전에 대한 관객들 거부감이 표출되기도 했다. 1967년 5월 23일 밤 강원도 삼척군의 홍보 영화 상영 직후 남자 5명이 군청 차량에 몰려와 "여당 선전을 하느냐"며 차량 유리를 모두 부순 일도 있었다.
노천극장의 스크린은 바람 불면 흔들리거나 날아갔다. 비슷한 시기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1975년 12월 31일 노스캐롤라이나주(州) 야외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상영하다가 강풍이 불어 스크린이 정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진' 일이 있었다(경향신문 1976년 1월 7일 자). 하지만 '시민 위안 영화 상영회' 아니면 별로 위안받을 일 없던 한국의 많은 서민 대중에겐 계몽 영화 화면도 따분하지만은 않았다. 관 주도의 순회 상영은 1970년대 후반 TV의 급속한 보급에 따라 시들해질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야외 영화 관람이 요즘 다시 화제다. 주말 밤 한강변 등지엔 미니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텐트 안에서 영화를 즐기는 '텐트 시어터족(族)' 천지라고 한다. 영화에 굶주려 정부 PR 영화라도 재미있게 봤던 시절은 까마득히 잊히고, 내가 고른 영화 내 맘대로 야외에서 즐긴다. 진짜 '노천 시네마 천국'의 시대가 오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