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국보 제30호
명 칭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원효대사의 전설이 간직된 분황사는 신라 석탑중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전 석탑이라 불리고 있다.
네마리의 사자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서있는모습과 감실과 인왕상이 사방에 새겨져 있어 한층더 품위가 있어 보인다.
사자는 9 마리 였스나 탑에는 4마리가 있고 경주 박물관에 1마리가 있다. 나머지는 행방이 묘연하다.
지금의 형태는 일제 강점기때 수리된 이후의 그대로의 모습이다.
탑의 현 높이는 3층이지만 크기의 비례로 보아 7층이나 9층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 석탑(石塔)은 돌을 흙으로 구워 만든 전돌(塼石)처럼 깎아 만들어 쌓은 석탑으로, 전돌로 쌓은 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부른다.
기단은 야석(野石)을 쌓아올린 단층으로 되어 있어 전탑 기단의 통식(通式)을 보여 주며, 그 중앙에 1층 탑신을 받치기 위하여 화강암으로 한 층을 마련하였다. 탑신부는 길이 약 30~45㎝, 두께 약 4.5~9㎝의 진회색 안산암을 잘라 각층 옥신과 옥개부를 쌓아 올렸기 때문에 외형상 전탑과 같다.
탑이 세워진 것은 분황사(芬皇寺) 창건(創建)과 같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으로 보고 있으며, 3층으로 되어있는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것으로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수리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舍利函) 속에서 각종의 옥류(玉類), 가위, 은바늘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 등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중국(中國) 주화(鑄貨)가 발견됨으로써 창건 당시의 사리장치(舍利裝置)에 추가하여 고려시대에서도 탑을 해체하고 수리하면서 동전을 넣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넓은 방형(方形)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1층탑신(一層塔身)의 4면에 화강암(花崗岩)으로 만든 출입구가 있으며, 양편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도 하는 인왕상(仁王像)을 조각(彫刻)하였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은 신라조각의 걸작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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