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승행록(緇門崇行錄)
10. 연잎 옷을 입고 솔잎을 먹다(蓮衣松食) 당(唐)나라 대매 법상(大梅法常) 선사는 마조대사께서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씀하심을 듣고 뜯을 얻고는 심산(深山) 가운데 숨어 살았다. 사람들은 너무 깊은 곳에 살았으므로 그를 아는 이가 없었으나 그의 도를 존경하던 염관(廉官)선사가 편지로 그를 초청하니 사양하고 가지 않으면서 게송을 부쳐 이렇게 말하였다. 「못 가득한 연잎 옷이 다함이 없고 몇 그루의 솔잎 음식이 여유롭도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머무는 곳이 알려졌으니 다시 이 띠집마저 버리고 더욱 깊은 곳에 들어가 살아야겠네」 법상(法常) 스님은 어릴 때에 형주(刑誅) 옥천사(玉果츄)에서 중이 되어 경전(經典)을 두루 섭렵하고 대중들에게 대 ·소승의 경론을 강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뒤에 마음을 깨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고 참선하러 행각에 나서서 마침내 마조대사를 뵙게 되어 도를 묻게 되었읍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라」 이 말끝에 마음을 확실히 깨쳤습니다. 행각에 나서 대매산(大梅山)에 이르러서는 갚은 골짜기로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옵니다. 그 뒤 같은 마조대사의 제자 되는 염관스님 밑에 있던 어떤 중이 대매산에서 주장자 감을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초막을 짓고 사는 법상스님올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이 법상스님께 물었옵니다. 「여기에 얼마동안 사셨옵니까?」 「사방의 산이 푸르렀다 누러렀다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산을 벗어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냇물을 따라가라」 그 중이 염관스님에게 와서 앞의 일을 자세히 여쭈니 염관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마조대사께 있을 적에 어떤 중이 마조대사께 법을 물으니 대사께서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셨는데 그뒤로 30년이 지나도록 그 중의 소식을 알지 못하였는데 혹 그 사람이 아닐른지 모르겠구나」 그리고는 사람들을 보내며 말하기를 「마조대사께서 요사이는 다시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라」 하니, 그 중들이 염관스님이 시킨대로 가서 말하니 법상스님이 말씀하기를 「그 늙은이가 사람 속이기를 그칠 날이 없구나. 자기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나는 여전히 ‘마음이 곧 부처다’고 하노라」 염관선사가 이 말씀을 전해 들고 찬탄하며 말씀하시기를 「대중들이여 매실(梅)이 익었으니 그대들은 마음대로 가서 따 먹어라」 이후로 부터 2·3년이 되기도 전에 법상스님에게 도를 배우는 대중이 늘어나서 대사의 도가 천하에 드날렸습니다. 위의 법문에서처럼 그때 염관스님이 법상스님에게 세상에 출세하기를 청하니 이렇게 말씀하시며 끝내 대매산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연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솔잎으로 평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슴과 새를 벗으로 하다(麗鳥調呂)
후주(後周) 시대 행인(行因)스님은 여산(盧山)의 불수암(佛手嚴)에 은거하여 살았는데 밤이 깊어질 때 마다 한 마리의 사슴과 꿩이 돌집 곁에서 깃들며 쉬었다. 그렇게 오래되매 자연 길들여 친구와 같았으므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덧붙여 말하면 평생에 제자를 데리지 않았는데 이웃 암자의 스님이 그를 위해음식을 드리고 보살펴 드렸다. 하루는 말하기를 "발을 걷어 올려라 내가 떠나련다"고 하였다. 그래서 발을 걷어 갈고리에 걸자 침상을 내려와서 몇 걸음을 걸어가다가 우뚝 선 채로 돌아가셨다. 이에 찬탄하여 말한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죽으려 하면 욕심이 더욱 간절해진다. 심하면 향도 팔고 신을 팔며 애착을 놓아버리지 못한다. 단순히 세상 사람뿐만 아니라 부처님 제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 일생동안 밝은 기상이 사람을 핍박하고 벗어나 죽는 것이 유희함과 같으니 또한 마땅하지 아니한가?」
12.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할 줄 안다(小欲知足) 송(宋)나라 굉각(宏뿔) 선사는 많은 대중들에게 훈계하셨다. "너희들은 이미 출가하였으니 마치 죄수가 감옥을 나온 것과 같다.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할 줄 알아서 세상의 영화를 탐내지 말라. 배고픔을 참고 목마름을 참아서 뜻을 무위(無합)에 두라. 불법 가운데 있어서 열번 나고 아홉번 죽더라도 또한 포기하지 말라」
13. 청정한 규약으로 대중을 가르치다(詢聚淸約) 송(宋)나라 자수 심(慧受深) 선사(자수 회심(應受훌心)(1077~1132) :운문종 스님으로 청원하(靑原下) 13세이다.)는 소참(小慘)에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명리를 잊고 담박함을 달게 여기며 세간의 마음이 가볍고 작아지면 도념(道念)은 자연히 진해진다. 편담산(遍擔山) 화상은 일생을 도토리와 밤을 주워서 먹고 영가대사는 호미로 가꾼 채소를 먹지 않았으며, 고승인 혜휴(惠休)스님은 삼성년 동안을 한 켤레의 신만을 신었으며 그것도 부드러운 땅이면 맨발로 다녔다. 너희들은 지금 갖가지를 받아 사고 있다. 아직 배고프지도 않는데 먹고 아직 춥지도 않는데 입고, 아직 때가 끼지도 않았는데 씻고, 아직 잠이 오지도 않는데 잔다. 도안(道眼)이 아직 밝지 않으며 심루(心編)가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를 소화할 것인가 ?」
14. 누더기 옷에 한 끼만 먹다(居衣-食) 송(宋)나라 혜회(慧熙)스님은 혼자서 살 뿐 시중 드는 사람을 두지 않았다. 날마다 한 끼만 먹고 다른 사람의 시주를 받지 않았으며 방으로 가는 길에는 한 가닥 왕래의 자국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가 이끼로 덮여있었다. 앉는 걸상도 중심부에만 앉아서 양쪽 걸상걸이는 티끌이 쌓여 마치 오래 비워둔 것과 같았다. 의복은 헤지고 더러워서 겨우 바람과 한기를 면하였다. 겨울에는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여름이면 들보 위에 높이 걸어 주었다. 어떤 사람이 그의 명성을 듣고 방에 가서 참배하여 뵈오면 영접하고 접대하기를 며칠이 지내야 뵐 수가 있었다.
15. 홀로 사관을 지키다(抽守死開) 원(元)나라의 고봉 묘(高峰妙) 선사는 용수(龍覆) 9년에 싸리를 엮어 조그마한 암자를 만들고 겨울이나 여름이나 한 벌 누더기로 지냈다. 후에 천목산 (天目山) 서암(西嚴)의 바위 동굴속에 조그마한 방을 꾸미니 배와 같았다. 방(樣)에는 사관(死開)이라고 써 붙였다. 위에서는 빗 물이 세고 상(床) 밑은 축축하며, 바람과 비가 몰아쳤다. 보급과 시자를 끊고 의복과 쓸 것을 물리치고, 몸을 씻지 않고 머리를 자르지도 않았다. 깨진 항아리로 솥으로 하고 하루에 한 끼니만 먹고 지내면서도 편안하게 여겼다. 동굴은 사다리가 없으면 오르지 못하니 사다리를 치워 버리고 인연을 끊었다. 비록 제자일지라도 스님을 우러러 뵌 사람이 드물었다. 이에 찬탄하여 말한다. 동굴은 구소(九 )에 높이 걸렸고 절벽은 만길이나 솟았다. 앞서는 희공(熙公)이 있더니 뒤에서는 이 늙은이가 있구나. 참으로 멀리 티끌세계를 끊었네 지난날 나는 천목산에 올라 장공동(張公洞)에 들어가 천길 바위에 나아가 굽어보며 사관(死開)의 유적을 찾았다. 스님의 위엄스러운 용모를 황홀하여 눈에 어렸다. 늦게 태어나 스님의 가르침을 친히 받지 못함을 스스로 슬퍼하니 눈물이 오랫동안 흘렀다.
주 (註 )
※고봉 원묘(高峰原妙) (1238~l295) 고봉스님은 남악하(南岳下) 21세이며 설암 조흠의 법사(法嗣)이다. 이 글에서 보이는 바와같이 동굴 속에 들어가 집 현판을 사관(死團)이라 써붙이고 15년간을 동구(洞口)에 나오지 아니했다고 한다. 그후 도중이 드날려 승속이 끊이지 않아 큰 대중을 이루었다. 제자에 중봉(中峰)선사가 뛰어나다. ※총론(總論) 범어의 비구此표)는 중국말로 걸사라고 한다. 그럼에도 많은 것을 구하고 많은 것을 저축하고 일이 많다면 또한 실로 그 이름에 배반되지 않겠는가? 민선사 이하의 모든 스님들이 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유풍(流風)이 끊이지 않았다. 그 유풍(流風)을 들고도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일찌기 비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죽비의 소리 방하착(放下着)하라
인류사는 투쟁의 역사이다. 자연과의 투쟁, 인간과의 투쟁, 주의(主義) 사상과의 투쟁, 옳은 것과 그른 것의 투쟁등 그런 쪽에서 조명하여 보면 분명 인류사는 투쟁의 역사이다. 그 예(例)로 농부들이 일년 내내 잡초와의 끊질긴 투쟁으로 인해 곡식을 얻어내는 일이며 옳은 것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열사들의 투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와활력(活力)을 주기도 하거니와 출가 수행자들의 투쟁은 평생을 자기 자신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진치등 팔만사천 번뇌와의 치열한 투쟁이다. 그러나 이렇듯 좋은 의미의 투쟁도 있지만 투쟁이라고 하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가진 말은 아니다. 언제나 투쟁은 욕심과 집착에서 부터 비롯되어 자신도 남도 망치게 되는 불도가니와 같은 경우가 더욱 많다. 그러므로 그런 투쟁을 경계하여 선가(輝家) 에서는 집착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방하착(放下着)하라. 즉 놓아버려라 라는 말을 많이 쓴다. 집착하고 있던 모든 일을 한번 놓아보라는 것이다. 그 집착하고 있던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나 이제까지 놓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던 것을 한번 다시 보라는 것이다. 모든 집착을 놓고 한 발짝 물러나 어떤 사물을 본다면 훨씬 객관적으로 자신의 위치나 자신의 생각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여유와 여백이다. 여유와 여백이 없는 인격과 사회는 그칠 사이 없는 투쟁과 경쟁만이 가치기준이 되는 살벌한 사회가 되어지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아집과 독선으로 이루어진 투쟁의 역사는 별로 달라짐이 없이 오늘까지 계속되었지만 현대는 그대로 투쟁의 불도가니 속이다. 이젠 한시 반시도 쉬지 않고 계속 경쟁과 투쟁 속으로 인간을 내몰아 놓고 조금만 쉬어도 도태될까봐 잠시도 쉬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그 쉬지 않고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결국 보다 나은 의식주(衣食住)을 얻고, 권력을 얻고, 재산을 모아서 다른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 위에서 군림하고 명령하는 것만이 출세의 기준이 되어있는 이 나라 이 사회의 가치관 속에서 좀 더 인간적이고 소박해지라고 했을 때 투쟁을 누그러트리고 경쟁심을 약화시켜서 출세에 지장을 초래하는 그래서 결국 그것이 위악(僞惡)이 되는지는 몰라도 이제 7월, 학교에서 방학을 하듯이 우리들의 치열한 삶의 집착도 좀 놓아 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러끌레꼬르의 「게으름의 찬양」이라는 작은 책 가운데서 몇 구절을 같이 읽어 보는 일이나, 우파나샽의 몇 구절은 참으로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귀를 기울이십시다. 이왕인데, 우리 누구나 오만 가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아니 바로 오늘 저녁도 바쁘다는 것을 잠깐만 잊으십시요」 「네 우리 영혼의 평화를 찾으십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랑이 내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다. 가이없는 사랑이 이 세상에 깃들어있지 않은들 우리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지 못할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행로를 좌우할 예언적 꿈을 꾼 것도 이를테면 무위도식 상태에서였고 뉴턴은 나무 밑에,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 안에 각각 드러누운 상태에서 큰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플라톤이 아카데모스 정원에서 벗들과 더불어 사색을 한 일도 우리 시대가 말하는 소위 맹렬한 생활 따위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의 대화를 보아도 하나같이 한가로운 이야기들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이나 덥고 짜증스러운 이 삼복(三伏)에 이제 옹졸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의 생각이나 적의(敵意)는 버리자. 서로 자신의 옳음만 주장하고 국민의 소리를 외면하고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고 있는 국회의원님들도, 누구보다도 교육의 자율화를 보장해 주어야 할 문교부 당국자가 그 자율을 해치는 일등은 이제 모두 다 방하착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눈을 들어 자연을 보면서 마음을 비우자 7월은 열탕 같은 뜨거운 태양 아래 우리의 더운 다리를 시냇물에 담그듯이, 우리의 마음에 어지럽게 떠오르는 번잡한 생각을 저 푸른 녹수(綠樹) 속에서, 바다에서 모두 삭혀보지 않으련가.
南無 釋迦牟尼佛 南無 釋迦牟尼佛 南無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 | | | | |
첫댓글 생기는 적의를 어쩝니까, 버릴수 밖에요. 쌓이는 낙엽을 어쩝니까, 쓸 수 밖에요.
방하착!
애초에 든 것이 없으면 내려둘 것이 없는데, 뭇사람들은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많이 가지는 것이 잘 사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방하착, 방하착 그러면 오히려 적의를 품기도 하지요.
휴.. 모두 불성을 가진 존재라는 신심을 재차 굳건히 하고, 쉼터에 올릴 재밌는 이야기 찾으러 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