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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스토리
사도세자 그 죽음의 해석
조선 역사상 가장 비운의 세자로 단연 손꼽히는 인물이 사도세자다. 지금도 성균관대학교 입구에는 8세가 된 사도세자의 입학을 기념하여 세운 탕평비가 있다. 하지만 이 탕평비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으로 기념비가 아닌 추모비가 되어버렸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이유는 정신병 때문이라고 알려져 왔다. 지금까지 『한중록』의 기록대로 그렇게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실록』에 보면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차라리 미쳐서 발광해 버리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5월 13일 『영조실록』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경언이 고변한 후부터 임금이 폐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유언비어가 안(세자의 생모 선희궁을 말함)에서부터 일어나서 임금의 마음이 놀랐다. 임금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 역시 신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세자의 법적 모친)의 신령이 정녕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 이어서 궁궐문을 굳게 막도록 하고, 궁의 담 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 들어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세자가 자결하고자 했는데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드디어 세자를 (뒤주에)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세자의 아들 정조)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혜경궁 왕손 모두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 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다"
재해석되어야 할 '뒤주 속의 죽음'
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서 1762년(영조 39), 28세를 일기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영조는 자신의 뒤를 이을 왕세자로서 대리청정 중이던 사도세자에게 자살을 명령했다가, 주위 신하들이 이를 만류하자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 이 사건은 조선왕조 사상 왕위계승권자와 국왕 사이에서 일어난 최악의 사태에 해당된다.
영조와 궁녀 출신 선희궁(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사도세자는 천성이 어질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한데다가 장난감 무기를 가지고 전쟁놀이를 즐겨할 만큼 어려서부터 풍부한 무사기질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배우지 않고도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는 부왕을 닳아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자라면서는 칼 쓰기와 활쏘기를 위시한 기예에 특히 뛰어났고, 유교경전보다는 점복을 비롯한 잡서들을 즐겨 읽곤 하였다. 부왕의 강한 성격에 눌려 지내서인지 소심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우스갯소리를 곧잘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5세 이전에는 부왕이 능행 등의 바깥나들이에 데려가지 않아서 궁궐 안에서만 갇혀 지냈다. 그러다가 1749년(영조 25) 15세부터 대리청정을 했다 15세밖에 안 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것은 영조가 체력이 약해져서 정양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이유였던 것 같지는 않다. 영조의 의도는 탕평정치 규모를 빨리 익히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이는 대리청정중인 사도세자에게 늘 당론을 타파해야 한다는 탕평의 뜻을 가르친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리청정이 화근이 되어, 결국에는 '뒤주 속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선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기간에 일어난 중요한 정치적 사단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기간에 중요한 사건으로는 세금수취제도를 개혁한 균역법의 실시와 소론 강경파를 제거해버린 을해옥사를 들 수 있다. 또한 초기 완론탕평을 주도한 김재로·조현명 같은 대신들이 물러나고, 정우량·김상로 홍봉한 같은 외척당이 주도하는 정권으로 정계개편이 진행되면서, 이천보·유척기 ·이종성을 주축으로 청류당 정파가 새로 형성되어 외척당에 대항한 정치적 변화도 중요하다.
기록을 검토해 보면, 균역법 추진 부분에서는 별다른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을해옥사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는 주장과 없다는 주장으로 나뉘지만, 사도세자의 입장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도세자는 당시 정국을 주도한 외척당 계열과 별로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외척당을 견제한 청류당 계열 대신들에게 많이 의지했다. 곧 정치적으로는 외척당과의 갈등이 비극의 가장 큰 이유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한중록』에서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품이 다른 것도 화근이라고 지적했다. 영조는 세밀하고 민첩한 데 비해, 사도세자는 말이 적고 민첩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조가 물어볼 때 머뭇거리는 일이 많았고, 자기 견해를 명확히 표현하지 못해 영조가 늘 답답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한 공무를 집행하는 스타일도 달랐다. 사도세자는 말솜씨와 얼굴빛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아 과묵하고 위엄이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부왕인 영조보다 사도세자를 더 어려워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이런 성격은 대리청정중에 정사를 처리하면서 영조와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들을 일으키는 소지로 작용하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했다고 하지만 실무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대체로 비변사의 논의를 거쳐 처리했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언제나 영조의 재가를 얻어서 결정했다. 그러므로 이런 데서 사단이 발생할 여지는 적다. 문제는 당론에 관계된 상소문 처리에서부터 벌어진 것 같다.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을 때는 불호령이 떨어졌고, 세자에 대한 영조의 꾸중과 격노가 심했다고 한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 3∼4년간은 그런 대로 무사히 넘어갔다. 그러다 정조가 출생하던 1752년 겨울, 사도세자는 당론을 잘못 처리했다 하여, 홍역이라는 열병을 앓는 상태에서 눈 위에 엎드려 대죄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영조가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선위소동을 잇달아 일으켜 또다시 며칠 동안 얼음 위에서 석고대죄까지 해야 했다. 그 결과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얻었고, 이것이 화병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후 사도세자는 부왕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 맛을 들여 행동이 난폭하게 거칠어졌고, 이윽고 법적 어머니인 정성왕후와 할머니 인원왕후가 사망한 다음해인 1758년에는 세자폐위 전교가 내려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 폐위 전교는 당시 도승지였던 남인 채제공이 끝까지 만류하여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로부터 4년 뒤인 1761년 봄 석 달에 걸친 평안도 여행이 빌미가 되어 사도세자는 다음해에 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비행 10여 조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건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 사건의 전말을 기록해놓았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이 사건은 보통 혜경궁의 기록을 따라서 임오화변이라고 불린다.
사건은 한 달 전 나경언이 역적모의를 고발하는 고변의 형식을 빌려 영조에게·세자의 비행 10여 조를 올린 데서 비롯되었다. 나경언은 당시 액정서의 별감인 나상언의 형이었다. 액정서는 군주의 명령전달과 관련된 잡다한 업무, 이를테면 붓과 벼루를 공급하거나 열쇠를 보관하는 일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곧 왕실 내부의 사안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직책이었다.
『영조실록』에는 나경언이 탕진해버린 가산을 회복하기 위해 세자의 비리를 고해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경언은 당일로 사형 당했고 집안은 풍비박산되었다 그러나 그 일로 어떻게 큰 돈을 벌 수 있었는지, 누구의 사주나 돈을 받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영조실록』에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나경언이 올린 10여 조는 전부 다 알려져 있지 않다. 기록에는 나경언이 단순히 비행만을 고발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가 고변한 대로 "변란이 곧 일어난다"는 내용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영조실록』에 의하면 나경언의 상소는 곧바로 불태워져 영조와 홍봉한, 윤동도 3인만이 원본을 제대로 보았을 뿐이다. 또한 나경언을 국문한 내용이 적힌 공초 및 『승정원일기』의 기록도 이후 모두 불태워졌다. 따라서 지금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은 『영조실록』의 기록뿐이다.
『영조실록』에 나타나 있는 새용은 영조가 세자에게 직접 사실여부를 확인한 5∼6가지 항목정도다. 세자의 아들인 인을 낳은 첩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 여승을 궁으로 불러들였다는 것, 시전 상인의 재물을 빌려 쓰고 갚지 않았다는 것,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다는 것, 평안도로 여행을 갔다는 것 등이다 그밖에 신하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지만, 영조는 그 점에 관해서는 대단치 않은 충고라고 일축해버렸다. 그것이 세자 비리의 한 조목으로 거론되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또 『한중록』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해보면, 화를 내다가 궁궐에 불을 냈는데 하인이 그 죄를 뒤집어쓴 사건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도 소론 준론 정파에 속한 서명응등의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당시 별 내용이 없다 하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들은 사도세자의 비행과 직접 연관되어 거론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문제는 이중에서 어떤 내용이 영조의 격노를 불러일으켜 세자를 죽일 정도의 사안인가 하는 점이다. 우선 세자궁에서 시전 상인의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은 것은 당시 왕실뿐 아니라 국가기관에서도 가끔 있을 수 있는 일종의 관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이 사실과, 여승을 궁으로 불러들인 것, 북성으로 유람하러 나간 것은 비리에 해당되기는 한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이 사안들을 부인하였다. 게다가 이는 왕위계승권 박탈이나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태와 직접 연결시켜 생각하기에는 미미한 사안이다. 궁궐에 불을 낸 것 역시 작은 일은 아니지만 의도적 행동이 아닌 실수에 해당되므로 이와 마찬가지다.
혜경궁 흥씨의 증언과 해석
다만 주변사람을 함부로 죽였다는 문제는 사도세자 자신도 사실로 인정했고, 왕위계승 초에 걸림돌이 될 만한 심각한 사안이다. 『한중록』과『영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인 것은 울화증 때문이었다. 군주의 자질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런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결정적인 하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평상시에 늘 그런 것도 아니고, 일종의 정신병이 발동한 상태에서만 발생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정신병 증세는 가능하다면 치료해서 고쳐야할 사안이지 뒤주에 가두어 죽일 정도의 사안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혜경궁 홍씨는 이 울화증 때문에 사도세자가 죽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증세가 처음부터 화증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무서움증에서 시작하여 놀람증으로, 다시 옷을 입을 때 발병하는 의대증으로 진행되었다고 하였다. 화증이 도지면 하인과 궁첩을 죽여 버리고 나서 후회하곤 했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이러한 화증이 생기게 된 이유를 나름대로 자세히 추정하여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한중록』에는 발병의 동기가 된 여러 가지 요인이 세밀하게 지적되어있다. 그중에서 아버지 영조의 탓이 가장 크다는 것이 혜경궁의 생각이다 영조는 격노하여 자주 꾸중하였다. 혜경궁은 이 때문에 세자가 아버님을 무서워하여 효도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데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너무 일찍 부모 곁을 떠나 살아서, 부모 사랑을 덜 받은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도세자는 15세까지 영조가 데리고 다니지 않아서 바깥구경도 한 번 못했던 것이다.
발병의 직접적인 동기는 1752년(영조 28) 겨울(음력 10월 말)에 일어난 2차례의 사태 때문이었다. 첫 번째 사태는 노론 홍준해가, 영의정에 임명된 소론의 이종성을 공격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린 것에서 시작되었다 대리청정중인 사도세자가 이를 되돌려주어 무마 시키는 정도로 가볍게 처리했는데 이 사실을 안 영조가 "나를 대리하지 않고 자기 당만 모은다"며 화를 낸 것이다 당시 사도세자, 세자빈, 왕세손은 모두 홍진, 즉 홍역을 앓고 있었다. 홍역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다. 실제로 당시 세자의 동생 화협옹주가 홍진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앓는 몸으로 3일간 눈 속에 꿇어 앉아 대죄해야 했다.
이 일이 진정된 지 겨우 10여 일 만에 두 번째 사태가 벌어졌다. 영조가 "어머님 인원왕후의 허락을 받았으니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며 소동을 벌인 것이다. 당시 고령의 인원왕후는 가는귀가 멀어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는 영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평상시대로 그렇게 하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때도 사도세자는 얼음 위에서 머리를 찧으면서 대죄해야 했다.
이후 세자는 정신이 가끔 이상해져서 귀신을 부리는 방법이 쓰여 있다는 잡서 『옥추경』을 읽어 이를 고치려 했고, 이 때문에 결정적으로 무서움증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혜경궁은 평범한 부모와 자식 사이였다면 이런 일이 생길 리가 만무하다고 한탄한 것이다.
세자의 화증이 도질 때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칼을 마구 쓰는 버릇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런 사태는 특히 1757년 전후부터 아주 심각해졌다. 혜경궁은 칼을 마구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사도세자는 일찍이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살게 되었는데 그 세자궁은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 어씨가 살던 집이었다. 어대비는 노론의 명문 어유구의 딸이다 또 세자궁에서 어릴 때부터 사도세자를 돌보아준 최상궁, 한상궁은 모두 경종과 어대비전의 나인들이었다. 혜경궁은 그중에서 특히 한상궁을 문제 삼았다. 한상궁은 성품이 간사한 데다 영조 임금에게 정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자가 어렸을 때, 장난감으로 병장기를 만들어서 무예놀이를 하면서 놀게 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7세 때 이들은 모두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다.
어쨌든 사도세자는 자라면서 활쏘기와 칼 쓰기 같은 기예에 능하였고, 유교경전을 익히는 강학(쳔쁠)에 소홀한 반면 그림 그리기나 잡서 읽기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화증이 도지면 칼을 마구 휘두르게 되었으니 그 놀음이 차차 늘어 나중에는 말하기조차 어려운 지경 에 이르렀다는 해석이다.
혜경궁의 이런 해석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진실의 일면만을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선 혜경궁이 동갑인 사도세자와 혼례를 올린 것은 10세 때였으므로, 어릴 적의 사도세자에 대한 묘사는 혜경궁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어서 얻은 판단이라는 것이다.
또한 칼(특히 청룡도)을 잘 쓰고 활을 칼 쏘는 능력은 군주가 겸비해야할 자질이다. 사대부들 역시 활쏘기 대회인 '향사례'를 통해서 정신을 단련하고 예의범절을 배웠다. 사 아들 정조 역시 활쏘기에 뛰어났다. 정조가 50발 가운데 49발을 맞춘 후 겸양의 뜻에서 더 이상 활을 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영조 이전부터 내려온 선천적인 자질이라고도 생각된다. 게다가 사도세자는 왕세자 때 보병의 창검술과 권법을 중심으로 이전 병서의 6가지 기예를 18가지로 보완한 『무기신식』을 편찬하도록 하였고, 정조는 여기에 기마병의 무예 등6가지를 보충하여 총24가지의 『무예도보통지』라는 한국적 병서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즉 사도세자의 칼 쓰기 솜씨는 울화병만 아니면 단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점에 해당되는 사안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기예는 사도세자가 도가사상에 심취한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왕세자가 혼자 힘으로 도가 사상에 접했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당시 분위기가 도가 사상의 절정기라 거나, 뛰어난 도가 사상가가 배출되어 사도세자가 이를 받아들였다면 또 모른다. 사도세자가 9세 때 불교와 도가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전임 대제학 이덕수로부터 서연에서 교육을 받았으리라고 추정되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가 사도세자에게 얼마만큼의 학문적 영향을 주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결국 사도세자는 납득하기 어려운 영조의 군주권 행사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개인적 권한을 병적으로 마구 휘둘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갈등의 소지는 부자 사이의 자애 문제에서 발생했지만, 그 결과는 임금에 대한 의리 문제로 귀결된 것이다.
실제로 영조가 1761년 평양 여행 이전에 이미 사도세자를 폐위시키려 했다는 사실도 밝혀져 있다 『영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1758년 남인 채제공이 도승지로 있을 때 세자 폐위 비망기를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사건 때문에 후일 영조는 왕세손인 정조에게 채제공을 일컬어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자 너의 충성스러운 신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사도세자가 죽기 5년 전의 일이다.
사실 정신병은 왕위계승권에 심각한 하자가 되는 사안이다. 하지만 병 자체는 고칠 수만 있다면 고쳐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자애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더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라면 조선 초기 유학자 권근이 이미 답을 제시한바 있다. 권근은 "부모가 때리면, 작은 매는 맞고 큰 매는 도망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 후일 권근의 후손은 대체로 채제공과 같은 당파인 남인이 되었다. 권근은 호동왕자가 계모의 사주로 부왕인 대무신왕이 내린 자결명령에 죽음을 택한 것을 비판하였다. 부자간의 친밀함을 보존하고 나서야 군신간의 의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인데 , 호동왕자가 부왕의 명령을 부자 사이에 적용되는 자애의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군신 사이에 적용되는 의리의 차원에서 해석한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이는 아버지 입장에서 보아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 된다.
사도세자의 쿠데타 준비설, 평안도 여행의 수수께끼
화병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은 사도세자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즉 세자를 폐위시킬 만한 사안은 되지만, 뒤주에 가두어 죽일 정도의 사안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바로 세자의 비행 중에 하나 남아 있는 석 달 가량의 평안도 여행이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결정적인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도세자는 1761년(영조 37) 봄에 평양을 여행하였다 영조는 이 사실을 나경언에게 처음 들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거짓이다. 이는 『한중록』의 기록에서도 증명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워낙 감추어진 것이라 아직 까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쩌면 영원히 밝혀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문제에 관해서 필자는 고 홍이섭 선생의 판단을 전해들을 기회가 있었다. 홍이섭 선생의 판단을 대략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리청정 하던 사도세자가 영조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적 달 동안이나 평안도를 여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영조는 신하들로부터 이 사실을 통보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가 평안도 여행을 결행한 것은 이런 사태를 미리 각오할 만큼 중대결심이 섰기 때문이다. 그 중대결심의 내용은, 당시 평안도에 조선의 변방을 지키는 정예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점, 평안도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곡식은 중앙정부로 수송하지 않고 현지에서 사용했다는 점 등을 토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런 조건을 갖춘 평안도야말로 쿠데타 시도에 가장 좋은 거점이 될 수 있다. 즉 사도세자는 영조를 몰아내는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당시 평안감사였던 소론계 정휘량이 이를 저지하고 문제를 희소화 시키는 방향으로 주선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당시 평양의 군대와 사도세자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사료만 찾아낼 수 있다면 이를 입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홍이섭 선생의 이러한 추측이 사실이라면,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비참하게 죽인 이유를 비로소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한발 더 나아가 추측해본다면,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록들은 이후 사도세자의 쿠데타 기도를 숨기고, 개인적 비리로 희석시켜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연하다고 몰아가기 위해 짜 맞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조는 세자의 평양행을 그 즉시 알았다고 생각된다 『한중록』에 의하면 정순왕후의 친형제인 김귀주가 즉각 영조에게 밀봉한 편지를 올려, 노론 홍봉한은 세자의 평양행에 대해서 간쟁하지 못하였고, 소론 정휘량은 영조에게 아뢰지 않았다고 고해바쳤다 한다.
물론 이 편지 사건도 『영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중록』에는 세자의 평양행을 정휘량이 잘 주선하여 당시 별 문제가 없도록 처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휘량은 평안감사 1년 만에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8월에는 홍봉한과 함께 세자 문제를 조용하게 진정시킬 것을 건의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만일 사도세자가 아버지를 타도하겠다고 할 정도로 반발했다면, 그 정치적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의 답은 『실록』과 여러 당론서를 바탕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노론계 영의정 김재로가 세자를 시험해보기 위해 건의한 것이라는 기록, 세자가 영조의 뜻에 맞게 행동하지 못했다는 기록, 이 시기 정권을 장악했던 외척당 중심의 탕평파 관료인 김상로 ·홍계희 정우량 등이 경종의 처분을 뒤집은 영조의 처분을 세자가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기록, 이런 소문을 유포하는 탕평당을 비판한 노론정파가 이천보와 유척기를 중심으로 새롭게 결집되었다는 기록, 이종성과 채제공이 이끈 소론과 남인정파가 사도세자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한중록』에서는 경종을 모시던 나인들에게 사도세자를 돌보게 한 영조의 조치도 커다란 의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신임옥사로 불리는 경종시해 음모, 그리고 소론 명문이 대부분 죽음을 당한 을해년 옥사에서 심상운이 다시 제기한 경종 독살설 등에 대한 사도세자의 판단 문제가 이 기록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도세자의 대응은 정치적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어설픈 수준이었다. 즉 타고난 싸움꾼도 아니면서, 떠밀려서 싸움판에 뛰어든 꼴인 것 같다.
중세 서양에서는 왕위계승권자인 아들이 부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 경우실패하면 아들이라도 반역자로 처단된다. 그러나 동양의 군주는 강력한 통치 군주의 이미지보다는 민심을 잘 다스리는 교화군주의 이미지로 통치했다 곧 집안을 다스리는 문제가 군주의 이미지 메이킹과 직결된 것이다. 따라서 아들의 쿠데타 기도는 군주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이 된다. 그러므로 영조의 입장에서 보면 쿠데타기도 사실은 가능하면 비밀로 하고, 이후 점진적인 방법을 통하여 교화군주라는 이미지에 문제가 안 되도록 사태를 처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사도세자의 평양행이 있던 그해 겨울 10세가 된 왕세손(정조)의 혼인이 추진되었고, 다음해 2월에 가례를 올렸다. 그리고 4개월 뒤인 윤5월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세자를 낳은 선희궁이 영조에게 아들에 관해서 무언가 비밀리에 고해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영조는 그 내용을 가지고 사도세자를 질책하였다고 한다.
또 영조가 신하들에게 사도세자의 법적 어머니인 정성왕후의 신령이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나에게 말하는데 너희들은 듣지 못하느냐"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희궁의 밀고와 정성왕후의 신령이 말했다는 변란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였던 것은 틀림없다.
『한중록』에는 "나는 폐하고 세손은 효장세자의 양자를 삼으면 어찌할까"라고 한 사도세자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후의 사태는 정말 이 말 그대로 진행되었다. 즉 사도세자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미래를 예견하는 사도세자의 능력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이미 예정되어 있는 사태 해결방식에 따라 진행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지.
결국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적인 애통은 애통으로서 하고, 공적인 의리는 의리로서 한다"는 말로써 모든 사실을 설명하였다. 이는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이 당시 영조에게 올린 차자에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참고로, 『영조실록』에서는 사도세자의 평안도 여행을 '행역'이라는 단어로 기록하였는데, 이 단어는 보통 여행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만, 군주가 그곳의 군대상황을 시찰한다는 뜻인 '순수'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이 '행역' 을 군대 시찰로 해석할 수 있는 단서는 정말로 없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정조가 친히 지은 「사도세자 지문」이 바로 그 단서를 제공한다. 평안도 여행은 당시 시급히 처리해야 할 방책, 곧 홍계희 ·김상로 일당의 흉계를 뒤집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바로 군대 시찰 내지 군대 요청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런 평안도 여행을 거꾸로 역모로 몰아간 것이 당시 경기감사 홍계희 일당, 그 사주를 받은 나경언의 고변, 영조의 최종판단을 대변했다고 생각되는 친어머니 선희궁의 밀고였다는 것이다.
「사도세자지문」에는 평안도 여행에서 돌아온 세자가 홍계희 일당의 흉계 때문에 평안도에 다녀왔음을 부왕에게 말하여 이해시켰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후의 사태 진행과정을 보면, 당시 영조는 세자의 말보다는 홍계희나 선희궁의 말을 더 믿었던 것이 분명하다.
큰 뜻을 실현하려 효종을 본받으려 했다는 사도세자 아들인 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바탕으로 정치적 이벤트를 펼쳤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산으로 정했다. 사도세자가 효종을 본받겠다고 화산에 올라가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능행 때마다 길에서 백성을 많이 만나봄으로써 '자애로운 아버지인 군주' 라는 이미지 만들기 작업을 추진했다. 이 역시 아버지 사도세자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곧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와 자신을 왕과 왕비로 추존해주기를 기대했지만, 정조는 사도세자가 못다 한 '큰 뜻' 을 잇는다는 표방으로 도덕성을 회복하고 통치권력의 정통성을 장악해갔던 것이다.